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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열가지 무하열심 - 이세간품

작성자普賢.|작성시간23.10.14|조회수63 목록 댓글 5

(普賢註)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려 하다 보면 마음에 열등감, 하열심이 생기기 쉽습니다.
아무리 내가 뭘 하려해도, 세상은 까딱도 안 하거든요?

전법 조금이라도 하려고 흉내라도 내신 분들은 아마 제 말씀 금방 이해하실 겁니다
(전법 의지 없는 분들은 전혀 이해 못하실 거임)

내가 어디가 못나서 그러나?
저 분은 부처님인데 내가 잘 못 모셔서, 내가 아는 게 없어서 저렇게 거친 모습을 보이시는 건가?
아! 나는 왜 이럴까?
다른 스승님들은 아는 것도 많고 수행도 깊으셔서 한 마디만 해도 중생이 조복하고,
탐진치도 없고 인욕도 깊으셔서 늘 환한 웃음으로 거친 이들을 대하는데,
나는 왜 이다지도 못 참고 똑같이 대하는가
이런 한탄, 부끄러움이 수없이 일어나지요.

 

그래서 화엄경은 이세간품에서 열가지 열등감 없는 마음을 설하십니다.
결국, 세상이 험할수록 거칠수록 내가 못날수록 더 큰 서원을 내는 것이지요.
서원으로 하열심, 열등감을 극복하는 겁니다.

 

특히 마지막 열번쩨 무하열심 잘 기억하세요.
이런 것이 화엄의 정수요 묘미입니다.

이런 내용은 화엄에는 곳곳에 수도 없이 설해지지만 다른 경전에서는 보기 어렵습니다.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서 일어나는 일이거든요?
다른 경전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가르침이라면,
화엄경은 이미 깨달아 있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표현한 경전입니다.

깨달은 이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것을 알고 싶으면 화엄경을 읽으시면 됩니다.

열번째 무하열심 역시 이미 깨친 분이 보살행을 할 때 가지는 마음입니다.
또 중생공양 이익중생의 일을 해나갈 때 볼수있는 보살의 마음입니다.

 

 

 

菩薩의 十種無下劣心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發十種無下劣心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作如是念호대 我當降伏一切天魔 及其眷屬이 是爲第一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我當悉破一切外道와 及其邪法이 是爲第二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我當於一切衆生에 善言開喩하야 皆令歡喜가 是爲第三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我當成滿徧法界一切波羅蜜行이 是爲第四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我當積集一切福德藏이 是爲第五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無上菩提의 廣大難成을 我當修行하야 悉令圓滿이 是爲第六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我當以無上敎化와 無上調伏으로 敎化調伏一切衆生이 是爲第七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一切世界의 種種不同에 我當以無量身으로 成等正覺이 是爲第八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我修菩薩行時에 若有衆生이 來從我乞手足耳鼻와 血肉骨髓와 妻子象馬와 乃至王位라도

 

如是一切를 悉皆能捨하야 不生一念憂悔之心하고 但爲利益一切衆生호대

 

不求果報하야 以大悲爲首하며 大慈究竟이 是爲第九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三世所有一切諸佛과 一切佛法과 一切衆生과 一切國土와 一切世界와 一切三世와 一切虛空界와 一切法界와 一切語言施設界와 一切寂滅涅槃界의 如是一切種種諸法을

 

 

我當以一念相應慧로 悉知悉覺하며 悉見悉證하며 悉修悉斷호대

 

然於其中에 無分別하며 離分別하며 無種種하며 無差別하며 無功德하며 無境界하야

 

非有非無며 非一非二니

 

以不二智로 知一切二하며 以無相智로 知一切相하며

 

以無分別智로 知一切分別하며 以無異智로 知一切異하며

 

以無差別智로 知一切差別하며 以無世間智로 知一切世間하며 以無世智로 知一切世하며

 

以無衆生智로 知一切衆生하며 以無執着智로 知一切執着하며

 

以無住處智로 知一切住處하며 以無雜染智로 知一切雜染하며

 

 

以無盡智로 知一切盡하며 以究竟法界智로 於一切世界에 示現身하며

 

以離言音智로 示不可說言音하며 以一自性智로 入於無自性하며

 

以一境界智로 現種種境界하며 知一切法不可說하야 而現大自在言說하며

 

證一切智地하야 爲敎化調伏一切衆生故로 於一切世間에 示現大神通變化가 是爲第十無下劣心이니라

 

 

佛子야 是爲菩薩摩訶薩의 發十種無下劣心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心하면 則得一切最上無下劣佛法이니라

 

(해설, 무비스님)

‘보살은 열 가지 하열하지 않는 마음(無下劣心)이 있다.’

하열하지 않다, 無下劣.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당당한 마음. 아주 하열하다고 하는 말은 뭡니까. 나는 못났다, 쪼그라들고, 뭐 아이고 이걸 어떻게 해, 이런 큰 일을 내가 어떻게 생각한단 말이냐 하는 그런 것이 하열심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그런 것이 없는 마음이다 했으니까 당당한 마음, 떳떳한 마음, 아주 하늘을 찌르는 마음, 그렇게 표현해도 상관없는 그런 마음이 무하열심을 발한다, 당당한 마음을 낸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하열하지 않는 마음을 발하나니, 무엇이 열인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모든 하늘의 마군과 그 권속들을 항복 받으리라’ 라고 하나니, 이것이 첫째 하열하지 않은(당당한) 마음이니라.

내가 마땅히 천마, 천마라고 했습니다, 경문에는. 일체천마, 하늘의 마구니 그리고 그들의 권속, 이런 이들이 내가 당연히 항복 받아야지. 내가 그 사람들을 항복받지 않고 누가 항복받을 소냐. 항복받는다는 말은 무력으로 주먹다짐으로 억지로 해서 항복받는 것이 아니라 감동시키는 거죠. 그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더라도 그들을 감동시키겠다. 이것이 첫째 당당한 마음이니라. 당당한 불자, 제대로 된 보살이 된다면은, 제대로 된 불자가 된다면은 이런 마음 한 번쯤 내야죠. 그게 보살로서, 또는 뭐라고 할까요, 군자로서, 또는 선비로서 아주 당당한 마음이다, 그렇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모든 외도와 그 삿된 법을 깨뜨리리라’ 라고 하나니, 이것이 둘째 하열하지 않은(당당한) 마음이니라.

외도와 삿된 법을. 불교는 인도에서부터 워낙 종교가 많은 나라니까 거기는 십 억 인구가 있으면은 종교는 이십 억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로 참 신도 많고 믿는 이도 많고 그렇습니다. 그 나라는 더운 나라라서 가만히 그늘에 앉아서 그저 생각한다는 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몸을 많이 움직이면 힘들고 땀나고 지치니까 생각을 많이 하는 나라라.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까 신도 많이 만들어 내고 종교도 많이 만들어 내고 철학도 많이 만들어 내고 그런 곳입니다. 그러다보니 삿된 법, 외도법. 불법하고 불법 밖에 있는 것이다 라고 할 때 외도, 그리고 불법은 정법이다 하면 그 외의 가르침은 삿된 법, 이런 표현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불법, 상식에 맞지 않는 법, 인과와 다른 이치를 이야기한다든지 그리고 이치에 안 맞는 이야기를 하는 그런 단체들, 그런 종교들이 적지가 않아요. 그거 다 외도고 사법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그거 참 조심해야 돼요. 종교단체 안에 그런 것이 많이 있을 수가 있거든요. 아주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불법을 이게 이치에 맞는 건가, 상식에 맞는 건가 안 맞는 건가, 이걸 스스로 판단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물어라도 보든지. 어지간히 불법 공부를 좀 한 분들, 경전을 좀 본 사람들은 그 정도 판단할 만한 상식이 충분히 갖춰져 있습니다. 우리 여기 화엄법회에 나오시는 모든 화엄행자들은 충분히 그런 상식을 갖췄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내가 마땅히 모든 외도와 그 삿된 법을 깨뜨리리라 라고 생각을 하고 생활한다면은 그건 아주 당당한 마음입니다, 하열하지 않는 당당한 마음. 쭈그러 들거나 위축되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아주 당당하게 불법을 가지고 광고할 수도 있고 남에게 권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좋은 말로 일러 주어 환희케 하리라’ 라고 하나니, 이것이 셋째 하열하지 않은(당당한) 마음이니라.

좋은 말로 일러 줘서 기쁘게 해준다. 어떤 보살이 염불을 계속 하고 가니까 이웃에 사는 젊은 보살이 지나가면서 ‘아이 저 노보살님, 또 쓸데없는 염불하고 지나가네’ 이렇게 들릴 듯 말 듯한 그런 소리로 하고 지나가니까 이 노보살님이 그 말을 딱 듣고는 ‘그래, 내가 염불을 평생 이렇게 했는데 이게 쓸데없는 염불이 아닐까’ 거기에 깨달은 바가 있어가지고 가만히 있다가 그 젊은 보살이 간 곳으로 뒤따라 가서 인사를 합니다. 인사를 하니까 이 젊은 보살은 ‘내가 뭐 말 잘못 했는가, 평소에 늘 하듯이 그렇게 했는데 뭘 그걸 가지고 고깝게 여겨서 이렇게 쫒아오고 하느냐’고 그러니까 ‘ 아, 아니라고 내가 정말 그 말 듣고 깨달은 바가 있다. 내가 나만 잘 살자고 하고, 나만 이롭자고 하고, 우리 가족만 이롭자고 하고 내가 염불한 게 아닌가. 이게 진짜 부처님한테 맞는 염불을 했는가. 내가 뉘우친 바가 있어서 인사하러 왔다고. 너무 고맙게 깨우쳐줘서 인사하러 왔다’ 고 그렇게 인사를 했다고 하는 일도 있습니다. 실지로 있는 일이에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엉뚱한 데서 그렇게 올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일체 중생을 좋은 말로 일러 주어 환희케 하리라. 그 노보살을 환희하게, 기쁘게 해줬다. 정말 당당한 일이죠.

또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법계에 가득하게 모든 바라밀다 행을 이루리라’

법계에 가득하게 육바라밀을 내가 행할 것이다, 육바라밀다행을 이루게 될 것이다. 어느 한 집안에서, 어느 한 동네에서만이 아니고 법계에 가득하게 육바라밀행을 이루리라 라고 이렇게 한다 말야.

라고 하나니, 이것이 넷째 하열하지 않은(당당한)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일체 복덕의 창고를 쌓아 모으리라’ 하나니,

복덕의 창고를 내가 다 쌓아서 모은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내가 복을 있는대로 다 짓고, 있는대로 다 쌓아서 모아가지고 그저 사람들에게 無遮大會(무차대회), 누구도 거기에 오는 사람들을 막지 않고, 거역하지 않고, 오는 사람마다 그냥 한 짐씩 퍼주는 그런 큰 施會, 대시회, 보시의 법회를 연다면은 그거 얼마나 떳떳하고 당당한 마음입니까. 옛날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제도 내가 말씀을 드렸나요. 티벳 사람들이 그렇게 가난하게 사는데도 몇 년을 그렇게 절약하고 모아가지고 돈을, 새돈을 바꿔서 한 짐을 지고 가서 포탈라 궁전 앞에 그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데 가서 몇 날 몇 일을 거기서 돈을 쌓아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하는 것을 취재진들이 가서 취재를 해서 방송까지 하는 거, 그걸 제가 듣고는, 야 참 저 사람들 뭐 가난하게 사는 거야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이나 거기 거기인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남에게 보시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몇 년을 모아가지고 새 돈으로 바꿔 가지고 몇 날 몇 일을 거기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척 이렇게 나눠줄 때 얼마나 기쁜 마음이고 당당한 마음이 됐겠습니까. 당신이 뭐 많이 쌓아놓고 있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다섯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위 없는 보리는 넓고 커서 이루기 어렵지마는, 내가 마땅히 수행하여 모두 원만케 하리라’ 하나니,

가장 높은 깨달음은 넓고 커서 이루기 어렵지마는, 그런데 내가 마땅히 수행해서 모두 원만케 하리라 이렇게 원력을 세우고는 그렇게 나아간다. 얼마나 당당한 마음입니까. 결코 거기에 하열한 마음이, 쪼그라든다든지 위축된다든지 하는 그런 것은 추호도 찾을 수 없는 정말 당당한 마음이죠.

이것이 여섯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가장 높은 교화와 가장 높은 조복으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하리라’ 하나니, 이것이 일곱째 하열하지 않은(당당한) 마음이니라.

가장 높은 교화. 사람들에게 뭘 베푼다. 베푸는 데도 의식주에서부터 교육으로, 의료로, 병으로, 약으로, 음식으로, 과일로 등등. 나누고 보시하고 할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교화 그리고 가장 높은 조복으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하리라 라고 하나니 얼마나 참 당당한 마음입니까.

예를 들어서 어제 서울 정각사에서 신도님들이 여러분 오셨어요. 한 7,8명이 오셔서 이런 저런 이야기하고 그 때 거기에 계셨던 소문스님이 열반하신지가 3년이 됐는데 그동안 비석 세우고 부도탑 세우고 한 거 그런 것도 나한테 와서 알려준다고 그런 이야기하고 일행이 한 7,8명이 되는데 그 중에 어떤 신도님이 ‘스님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하면서 물어본 게 제가 아주 감동이었어요. 제가 그런 질문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무슨 질문인고 하니. ‘어떤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물어요. ‘무슨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래요. 제가 평소에 늘 생각하는 문제죠. 뭡니까. 부처님 법에 근거하면은 법을 잘 아는 것이 첫째 나에게 중요한 일이고 내가 아는 법을 여러 사람에게 공양 올리고 나누고 베풀고 하는 일이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다, 가장 높은 교화 방법이다, 가장 좋은 일이다. 가장 좋은 일이다 보니까 가장 복이 많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기다 조금 사심을 개입시키면은 또 다른 소리가 나올 수도 있는데 아주 조심스럽게 제가 충분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얼마나 이해가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아 그런 질문을 하는 분이 있더라구요. ‘무슨 일을 하는 것이 가장 보람있고 좋은 일이 되겠습니까.’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하리라. 가장 높은 교화, 가장 높은 조복, 가장 높은 가르침으로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하리라.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아주 불자로서 당당한 마음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일체 세계가 갖가지로 같지 않지마는,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몸으로 정득각을 이루리라’ 하나니,

얼마나 떳떳하고 용기있고 당당한 마음입니까.

이것이 여덟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보살의 행을 닦을 적에 만일 어떤 중생이 나에게 와서 손과 발과 귀와 코와 피와 살과 뼈와 골수와 처자와 코끼리와 말과 내지 임금의 자리를 달라고 하거든, 이와 같은 것들을 모두 능히 베풀어서 한 생각도 근심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이 없느니라. 다만 일체 중생을 이익하게 할 뿐, 과보를 구하지 않으며, 크게 어여삐 여김이 우선이 되며, 크게 인자함으로서 끝까지 이르리라’ 하나니, 이것이 아홉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당당한 마음, 떳떳한 마음, 아주 자랑스러운 마음이라. 보살행을 닦을 적에 손, 발, 귀, 코, 뼈, 골수, 처자, 코끼리, 말, 심지어 임금 자리까지도 다 줄 수가 있다 말야. 그것을 우선으로 한다. 남에게 주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불법은 利他행이라니까. 自利는 없습니다. 그것을 이 시대에 살면서도 직접, 불법은 불법이고 나는 나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바로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주 여시적으로 있고 이 시대에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하는 거, 절대 포기할 일이 아닙니다, 절대 불보살에게만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에요. 여기 뭐 경전에 있는 거, 저는 그런 것을 알고는 그런 책도 많이 소개도 하고 또 증엄스님 이야기도 여러 수백 번 수천 번 하고 그래서 저는 그분들에게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하지마는 그 나름대로 애써 하려고 마음 먹고 또 형편 나는 데까지 그렇게 해와서 너무 감동적이고 환희심이 나서 늘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삼세에 있는 일체 부처님과 일체 불법과 일체 중생과 일체 국토와 일체 세간과 일체 세 세상과 일체 허공계와 일체 법계와 일체 말로 시설하는 경계와 일체 적멸한 열반계의 이와 같은 모든 갖가지 법을, 내가 마땅히 한 생각과 서로 응하는 지혜로 다 알고

한 생각, 내 한 마음으로 서로 딱 맞아 떨어지는 지혜로 다 알고

다 깨닫고 다 보고 다 증득하고 다 닦고 다 끊으리라’ 라고 하느니라. 그러나 그 가운데는 분별이 없고 분별을 여의어서 가지가지가 없으며, 차별이 없고 공덕이 없고 경계도 없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니라.

둘이 아닌 지혜로 모든 둘을 알며, 모양이 없는 지혜로 모든 모양을 알며, 분별이 없는 지혜로 모든 분별을 알며, 다름이 없는 지혜로 모든 다름을 알며, 차별이 없는 지혜로 모든 차별을 아느니라.

세간이 없는 지혜로 모든 세간을 알며, 세상이 없는 지혜로 모든 세상을 알며, 중생이 없는 지혜로 모든 중생을 알며, 집착이 없는 지혜로 모든 집착을 알며,

이게 이제 중도 이치 아닙니까. 늘 말씀드렸듯이 불법은 중도의 이론에, 중도의 공식에 근거하고, 중도 공식을 바탕으로 깔고 이렇게 이야기해야 허물이 없습니다. 어디에 치우치면 안되니까요. 세간이 없는 지혜로 모든 세간을 알고, 세상이 없는 지혜로 모든 세상을 알며, 중생이 없는 지혜로 모든 중생을 알며, 하, 멋지잖아요. 따지고보면 중생이 있다고 할 수가 없죠. 중생이 본래 부처인데요. 또는 중생이 본래 공한데요. 그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없는 지혜로 그렇게 이해하는 지혜로써 모든 중생을 알며. 그러나 그 가운데는 중생은 엄연히 중생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중도 이론인데 그걸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고. 집착이 없는 지혜로 모든 집착을 알며

머무르는 곳이 없는 지혜로 모든 머무르는 곳을 아느니라.

물듦이 없는 지혜로 모든 물듦을 알며, 다함이 없는 지혜로 모든 다함을 알며, 구경의 법계 지혜로 일체 세계에서 몸을 나타내며, 말을 여읜 지혜로 말할 수 없는 말을 보이며, 하나의 자기 성품 지혜로 자기 성품 없는데 들어가느니라.

한 경계의 지혜로 갖가지 경계를 나타내며, 모든 법이 말할 수 없음을 알지마는 크게 자유자재한 말을 나타내며

이 대목도, 모든 법이 말할 수 없음을 알지마는. 그 말, 틀리거든요. 말하면, 할 수 없어서 말하긴 하지마는 말에는 모순이 있기 때문에 다 틀립니다. 그래서 모든 법이 말할 수 없음을 알지마는, 그런 이치를 잘 알지마는 크게 자유자재한 말을 나타내며. 그러나 모순을 안고서라도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또 이제 말로 하는 것입니다. 화엄경이 다 그렇죠. 화엄경이 모든 데 딱딱 들어맞기만 하는 것은 아니에요. 모순을 많이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순을 안고서라도 이렇게 우리에게 일러줌으로해서 듣는 사람에게 훨씬 덕이 되고 복이 되고 또 세상을 깨우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체 지혜의 자리를 증득하고도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하기 위하여 모든 세간에서 큰 신통 변화를 나타내나니 이것이 열째 하열하지 않은(당당한) 마음이니라.

불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하열하지 않은(당당한) 마음을 내는 것이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마음에 편안히 머물면 하열하지 않은 최상의 불법을 얻느니라.

무하열. 당당한. 가장 최상가는 당당한 불법을 얻는다. 가만히 마음을 집중해서 그 이치를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음미하고 따져보기도 하고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보고 하면은 참 수준 높은, 아주 깊은 불법이 화엄경, 특히 이세간품에 이렇게 무르녹아 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아주 감동적입니다. 오늘 화엄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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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0.14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려 하다 보면 마음에 열등감, 하열심이 생기기 쉽습니다.
    아무리 내가 뭘 하려해도, 세상은 까딱도 안 하거든요?

    전법 조금이라도 하려고 흉내라도 내신 분들은 아마 제 말씀 금방 이해하실 겁니다
    (전법 의지 없는 분들은 전혀 이해 못하실 거임)

    내가 어디가 못나서 그러나?
    저 분은 부처님인데 내가 잘 못 모셔서, 내가 아는 게 없어서 저렇게 거친 모습을 보이시는 건가?
    아! 나는 왜 이럴까?
    다른 스승님들은 아는 것도 많고 수행도 깊으셔서 한 마디만 해도 중생이 조복하고,
    탐진치도 없고 인욕도 깊으셔서 늘 환한 웃음으로 거친 이들을 대하는데,
    나는 왜 이다지도 못 참고 똑같이 대하는가
    이런 한탄, 부끄러움이 수없이 일어나지요.


    그래서 화엄경은 이세간품에서 열가지 열등감 없는 마음을 설하십니다.
    결국, 세상이 험할수록 거칠수록 내가 못날수록 더 큰 서원을 내는 것이지요.
    서원으로 하열심, 열등감을 극복하는 겁니다.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0.14 특히 마지막 열번쩨 무하열심 잘 기억하세요.
    이런 것이 화엄의 정수요 묘미입니다.

    이런 내용은 화엄에는 곳곳에 수도 없이 설해지지만 다른 경전에서는 보기 어렵습니다.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서 일어나는 일이거든요?
    다른 경전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가르침이라면,
    화엄경은 이미 깨달아 있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표현한 경전입니다.

    깨달은 이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것을 알고 싶으면 화엄경을 읽으시면 됩니다.

    열번째 무하열심 역시 이미 깨친 분이 보살행을 할 때 가지는 마음입니다.
    또 중생공양 이익중생의 일을 해나갈 때 볼수있는 보살의 마음입니다.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0.14 세상 살아가며 부처님처럼 살려고 해도(제 경우는 보현행원) 이 세상엔 너무도 거친 분들이 많습니다.
    상대를 공경하고 찬탄하면 비위 맞추려 굽실, 아첨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조그마한 상처도 가슴 아파 사과하면 아주 자신은 잘못 하나도 없고 사과하는 사람만 잘못 투성이로 매도하려 합니다.
    그래서 미안하다 소리도 함부로 할 수가 없어요 요즘 시류에는.

    오죽하면 자동차 접촉사고일 때 절대로 먼저 미안하다 소리 하지 말라고 하겠어요.
    의사들 사이에는 의료 분쟁 시 환자에게 미안하다 소리 절대로 하면 안된다고 아주 족보가 되어 있습니다.
    선의를 못 받아들이는 거죠.

    그래서 마음 여린 이, 그리고 마음 고운 이들의 마음은 점점 더 상처가 깊어갑니다.
    건방지고 남 무시하고 짓밟고 비판하고 사과하지 않는 그런 거만한 자들이 오히려 성공하고 난 사람으로 현대 사회는 가고 있어요.

    我當降伏一切天魔와 及其眷屬!
    화엄경은 그런 무리들이 일체천마와 그 권속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무하열심에서 첫째로 그런 마의 무리들을 내가 당연히 항복받겠다!고 맹세하게 합니다.
    얼마나 그런 무리들이 많고, 얼마나 상처 받기 쉬우면 제일 첫째 자리에 천마 권속 항복을 맹세하게 말씀하실까요!
  • 작성자보문 | 작성시간 23.10.15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 작성자법혜 | 작성시간 23.10.15 어려운 한자에 숨어있는 깊은 뜻을 무비스님과 보현 선생님 덕분에 생생하게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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