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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 화엄법문]인생이여 화엄이여 2014.2.9

작성자普賢.| 작성시간23.12.22| 조회수0|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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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2.22 스님의 3가지 종류 화엄을 들어보면, 매우 현학적이지요?
    그러니 '화엄학'은 되지만 화엄학을 가지고는 화엄이 전하고자 하는 이 세계를 알수가 없어요.
    화엄경을 직접 봐야 합니다.
    그리고 보현행을 직접 해봐야 해요.

    화엄경을 보고 보현행을 동시에 실천해야 비로소 화엄이 전하고자 하는 세계가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만 하면 안 됩니다.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2.22 의상스님도 제가 아쉬운 게 많아요.
    의상의 화엄이 원효의 화엄을 못 따라간다... 는 게 제 개인 생각입니다.

    발심에 대한 정의만 해도 그래요.
    진여실상에 대한 마음을 낸다, 는 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우리 마음, 우리 몸 그대로 구래로부터 움직이지 않는 구래불, 부동지불이라는데, 당장 답답하지 않으세요?
    그 말이 다 맞겠지만, 그걸 우리 범부들은 어케 알수 있느냐, 말입니다.
    알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 우리 온몸을 휘감은데, 거기에 무슨 신심이 생깁니까?

    이걸 의상 제자들도 똑같았는지, 종범스님 법문 뒷부분에 그런게 나와요.
    제자들이 그걸 우리가 어케 알수있습니까, 하고 말이지요.
    아마 그 대답이 믿음(信)일 겁니다.
    네가 부처다! 네가 바로 구래부동의 그 부동지불이다!
    그걸 믿으면 알게 된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건 보조스님도 예외가 아니라, 우리가 부동지불임을 알면 되는데 사람들이 안 믿는다! 하고 한탄하셨지요.
    이게 말이 됩니까?
    창조주를 무조건 믿어라 그러면 구원이 온다, 하는 기독교와 뭐가 다른가요
  • 답댓글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2.22 우리가 부동지불임은 어케 아느냐?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보현행을 해라! 그러면 알게 된다!

    이 간단한 걸, 왜 의상도 보조 지눌도 몰랐을(?)까요?

    *원효는 보현행인 걸 알았을 겁니다.
    그 증거가 원효 말년 교판에서 화엄을 보법 원만으로 놓고 보현교를 가장 수승한 것으로 분류한 것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또 십회향에서 해설서를 중단하고 중생 속으로 들어간 것도 그래요.
    반면 의상은 중생 속으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실체없는 관음신앙에서 구원을 구합니다.
    그러다 동해 홍련암에서 관음을 보고 몸을 던졌다 하지요.

    중생 속에 들어가서 중생과 살다가 생을 마감한 원효와,
    오지 않는 구원을 찾아 기도하다 바다에 몸을 던진 의상.
    누가 더 보현행을 알았을 것 같습니까?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2.22 그럼 보현행원은 어떻냐 공덕을 짓고 또 짓는데 내가 갖는건 아무것도 없다 지어서 모두 회향. 이게 불교의 삶이다. 계속 소유하고 소비하는게 아니라. 또 고행만 하는게 아니라. 고행도 향락도 아님


    소유는 왜 하냐 소비하려고 하는것 .
    어떤 사람은 앞으로 좋은일 하려고 돈 번다는데 그건 거짓말. 앞으로 좋은일 하려면 지금 좋은일 하지. 자식 주려고 하는데 자식이 나거든?

    보현행원은 뭐냐? 많이 모아서 그냥 회향하는것

    -종범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보현행 하는 사람들은 불쌍해요!
    다들 가지는데 보현행자들만 가지는 게 없어요!
    또 그걸 다른 이들은 당연한 걸로 알아요!

    우리 광자 덕자 큰스님만 해도 보세요!
    다른 큰스님들은 산 속에서 온갖 수행 온갖 경계 다 이뤄 그 이름 깊어만 갔지만,
    우리 큰스님은 뭘 이루셨나요?
    다들 산 속에서 당신 하고픈 공부만 하고 있을 때,
    큰스님은 시멘트 냄새 속에서 중생들과 함께 하다 가셨어요.
    열반도 멋지게 열반종 울리며 산사에서 하시지 못하고,
    시멘트 속에서 초라하게 열반.

    당신의 공부도, 도를 이루고 싶은 출가의 발심도 모두 큰스님의 보현원 앞에는 조금도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오직 중생들의 행복만이 큰스님 비원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2.22 보현행 하는 건 무척 외롭습니다.
    다른 이들이 보현의 경계를 알지를 못해요.
    자기들 하고 똑같은 줄 압니다.
    거기 더해, 보현행을 가식적으로 하는 걸로 봐요.
    왜냐? 자기들이 진실로 하지를 못하거든요?

    보현행, 사실 일반인들은 잘 못합니다.
    남 보고 보현행이 제일이야, 부처행이야, 하고 떠들고 멋내기는 좋아도,
    실지 일상에서 막상 해보려면 대부분 못합니다.
    이 사바세계가 보현행을 할수있게 내버려두지를 않아요.
    공경 못할 사람, 찬탄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데요?
    거기에 미안하다 하고 한 마디 할 것 같으면 그때부터 자기 잘못은 모르고 그냥 사과했다고 잡아 먹으려 듭니다.
    그런데 보현행을 어케 합니까?
    바보들이나 하지요.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2.22 그렇지만 그럼에도 내가 보현행을 하면, 이 세상이 아름다와집니다.
    내가 공경하고 내가 찬탄하고 내가 섬기면 세상도 점점 공경 찬탄 섬기게 돼요.
    공경을 모르던 이가 공경을 알게 되고 찬탄 못하던 이가 찬탄을 하며 섬기지 못하던 이가 섬기는 일들이 기적처럼 일어납니다.
    무엇을 통해? 울며 인내하며 보현행을 하는 나!를 통해서!
    나를 통해서 보현을 보게 되고 나를 통해 부처를 보게 되고 나를 통해 부처님 모습 부처님 행을 보게 되어 나도 모르게 중생들이 거친 말과 마음을 접고 점점 부처로 변해 갑니다.
    나만 부처되는 게 아니라 나를 보는 이웃도 부처가 되어가는 거에요!

    그러니 보현행을 안할 수 없습니다.
    내가 보현행을 몰랐으면 모르되 알고나면 아니 할수가 없어요.
    내가 부서지고 온갖 오해 속에서 지쳐 쓰러져간다해도 안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 뛰어난 가르침을 전해주신 부처님 은혜가 사무쳐서, 이 뛰어난 가르침을 모르고 서로 대립하고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이웃이 안타깝고 가여워서 내가 힘들다고 보현행을 그만 둘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보현은 다시 보현을 부릅니다!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해도 나는 보현행을 끝까지 하겠다!
  • 작성자 법혜 작성시간23.12.22 경전에 장엄이란 말씀이 많이 나오지요.
    오늘 법문은 장엄이란 표현이 딱 그대로인듯 합니다.
    음성으로, 글로, 지식으로 보현을 법계에 장엄하시네요!!

    번뇌도, 교만도, 아상도, 깨달음도, 선정도, 삼매도 보현 앞에 아무 의미 없을 듯 합니다. 말 그대로 이 모든 것이 찰나에 공으로 돌아가는 듯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법계는 보현으로 충만하겠지요? 우리가 알든 모르든.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2.22 행을 통해 드러납니다.


    경찰이 경찰이고 검사 판사가 검사 판사인 건, 그들이 경찰행 검사행 판사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게 그렇습니다.
    의사가 의사인 것도 의사행을 하기 때문이고, 상인이 상인인 것도 물건을 파는 상행위를 하기 때문입니다.
    행을 통해 그 정체가 드러나요.

    부처가 부처인 건 부처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예전 도인 이야기들처럼 일반인들 속에 숨어서 일반인 행을 하면 아무도 부처임을 모릅니다.
    부처행을 하기에 부처를 사람들이 알아보는 겁니다.

    또한 행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도 드러납니다.
    대통령이 대통령인 걸 알수있는 건, 자기 말 한디에 온 나라가 들썩하기 때문입니다.
    검찰총장 오라 하면 오고, 합창의장 오라고 하면 다 옵니다.
    내가 검찰총장 불렀는데 안 오면, 검찰총장이 이유가 있거나 내가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면 당연히 옵니다.

    부처가 본래 부처인 건 부처행을 통했을 때만 알수있어요.
    중생들도 알고 본인도 부처님을 압니다.
    왜냐? 부처행은 부처만 할수있거든요?

    그런데 보현행이 부처행입니다.
    따라서 보현행을 하면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너무다 처절하게 알게 됩니다.
    또한 이웃들도 저 분이 부처임도!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2.22 그렇게 부처행은 안하고 머리로 믿음만 갖고 본래불 부동지불임을 안다...
    이러니까 불교가 행동 불교가 되지 못하고 말은 자비의 종교임에도 현실은 행이 없게 됩니다.

    기독교는 행이 있어요.
    가르침은 불교보다 깊지 못할지 몰라도 그 분들은 행이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이 있고 그 명령을 몸으로 행합니다.
    그러니 힘이 있지요.

    행은 생명의 본질입니다.
    행이 있어야 생명이 생명력을 갖게 돼요.

    행은 없고 가만히 앉아 좌선만 하고 삼매만 해서 부처님을 알려고 하는 불교 그리고 그렇게 했던 불교.
    우리 광자 덕자 큰스님은 이런 엉터리 불교의 문제점을 반야안으로 바로 보시고 이 시대에 새로운 불교, 행동 불교를 가지고 오셨지요.

    추가:묘한 것은, 부처만이 할수있는 게 佛行인데 보현행을 보니 불행이라 하면서도 바로 우리도 할수있는, 중생들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렇게 다시 보니, 부처는 저 높이 있고 중생은 바짝 땅에 엎드린 줄 알았는데, 부처와 중생이 조금도 다른게 없어요! 적어도 보현행으로 볼때는 부처도 중생이고 중생도 부처입니다. 똑같아요 공경 찬탄 섬김을 모두 할수있다는 점에서! 그래서 화엄은 心佛及중생, 시삼무차별!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하나도 차이가 없다!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2.22 부처행은 저 먼 어느 높은 곳에 중생은 할수없는 특별한 행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공경 찬탄 섬김, 가장 중생다운 이들 행이 바로 부처행이라! 그래서 보편의 普, 보현.인 겁니다.

    가장 중생다운 행이 바로 가장 부처다운 행.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중생이 부처와 하나도 다를게 없구나 하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마음도 보현의 원이 있고 부처도 보현의 마음 중생도 보현의 마음이 있으니 어찌 마음과 부처 중생이 다르겠습니까

    빅뱅 이전부터 빅뱅 이후까지 온 우주를 보현의 마음이 꽉 차 있고 부처도 중생도 그 마음 속에서 탄생한것. 내 생명이 진리실상 그 자체구나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생명이구나 나는 그걸 모르고 살았구나!

    여기서 광덕스님의 유명한 반야 활구, 내생명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가 나오게 됩니다 그것도 그냥 나오는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지요 내생명 부동지불 대 사자후의 선언 인겁니다
  • 작성자 보문 작성시간23.12.23 긴 댓글로 한글자 한글자 마다 보현행원이 나옵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룸을 몸으로 묻어나는 보현행자~~~

    정말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 작성자 법혜 작성시간24.01.02 이 글도 조만간 정리해서 올려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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