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지와 수증, 행원이 모두 동시에 원만하게 갖춰지는 가르침은 보현행원 밖에 없습니다.
보현의 세계는 평등의 세계입니다.
남회근 선생은 불교 공부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하는데, 견지, 수증, 행원이 그것입니다. 선생은 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로 결국 하나로 모두 함께 굴러 가야하지만, 그 중에서도 행원을 최후처로 칩니다. 견지와 수증이 모두 행원으로 가기 위한 것이란 말씀이지요.
가르침에 따라 이 세 가지 중 치중하는 바가 조금씩 다른데, 선종의 경우는 견지에, 밀종은 수증에 초점을 맞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공부하는 이들이 견지와 수증에는 많은 노력을 쏟는데, 가장 중요한 행원은 신경 쓰는 분들이 거의 없다고 한탄하십니다. 행원의 경지까지 가는 공부인이 아니 계시다는 것이지요. 거의 대부분이 견지와 수증만으로 공부가 다 된 줄 안다고 탄식하십니다.
제가 볼 때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이유는, 많은 공부인들이 행원을 견지와 수증을 거쳐 가는 것인 줄 알기 때문에 그런 듯합니다. 실지로 견지가 바로 서지 않으면 올바른 행원을 하기 힘들다고 선생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보현행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현행원은 견지와 수증 끝에 오는 행원과 달리, 처음부터 견지, 수증과 함께 갑니다. 즉, 보현행원을 하면 견지가 열리고 수증이 오는 것입니다.
Q 보현행원은 너무 단순하지 않나?
A 물리학이 발견한 놀라운 사실 중 하나가, 저차원에서 복잡한 문제가 고차원에서는 아주 간단히 해결된다는 것이지요.가령 4차원에서는 복잡한 빛의 방정식이 5차원에서는 간단한 하나의 방정식으로 해결됩니다. 이처럼 단순하다는 것의 의미는 그 자체가 저차원이라서 단순할 수도 있지만, 아주 고차원이기에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생명’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단순합니다. 복잡한 세상 사도,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게 먹고 사는 문제 아닙니까?”
“보현행원은 가장 쉽고 단순한 방법으로 부처님 공덕 속으로 바로 들어가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이 그냥 단순이 아니에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깊은 복잡한 세계를 체험하고 다시 단순으로 귀결되게 하는 단순입니다. 산이 처음엔 산이다가 도중에 물이 되고 다시 산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일부 불자들이 보현행원은 너무 쉽고 간단하다고 비판하는 것에 대한 반론
“일심(一心)의 내용을 보현행원적으로 보면 공경, 찬탄, 공양의 열가지 행원입니다. 그 공경, 찬탄하는 마음이 우주에 꽉 찼어요. 그리고 그 마음이 빅뱅을 일으키고 이 우주를 탄생시킨 겁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공경 찬탄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화엄의 법계연기에요.공경, 찬탄, 공양하는 그 마음을 이론적으로 풀이하면 화엄의 사법계가 됩니다. 보현행원 열 가지는 요즘 일부 천문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심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다’, 또는 ‘사람이 부처다’라고 말씀을 흔히 합니다. 참 듣기는 좋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래서 어떡하란 말이냐?입니다. 부처니까 어떻게 살아라 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부처로 사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요. 부처 선언으로 끝난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부처 선언을 해도, 아무리 우리가 본래 부처인 줄 알아도 맨날 우왕좌왕하며 중생의 삶을 떠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보현행원은 부처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공경하고 찬탄, 섬기고 공양할 때, 우리는 현재 모습과 상관없이 바로 부처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부처가 되고 나를 만나는 이 모두가 부처가 되게 하십니다. 화엄경의 여래출현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성불이 먼 훗날의 공부 잘 하신 분들의 소식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들의 소식인 겁니다.”
깨닫고 나면 할 일이 뭐가 있을 것 같습니까? 공경, 찬탄, 공양밖에 없어요. 그러면 깨닫기 전에는 또 뭘 할까요? 그것도 역시 섬기고 공양하는 것밖에 없지요. 그러니 섬기고 공양하는 보현행원은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나 우리 모두의 소식이지요. 부처님도 공경 찬탄, 중생도 공경 찬탄, 우리 본 마음도 공경 찬탄으로 가득 차 있지요. 그러니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인 거지요."
2.우주는 생명의 자리=지혜, 생명을 살리는 마음=자비
따라서 보현행원은 지혜와 자비의 행.
1)생명이 자라는 자리=밝은 곳!=긍정+열린 자리
2)보현행원을 하면 마음은 끝없이 긍정을 향하고 열려감. 고로 생명성 증가.
만물을 긍정으로 보는 가르침이 보현행원.=부정을 포함한 긍정
3)이 마음으로 삶이든 수행이든 지어가는 것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막연해짐. 일체 만물을 살리고 발현시키는 게 도대체 어떤 거냐?
->that is 긍정!
->then,, what is 긍정?=감사, 공경, 찬탄, 섬김...=보현 십종행원
3.우리는 모두 부처다!->말은 듣기 좋은데...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부처의 삶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음. 부처 선언으로 끝남.
->이것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보현행원 ex. 거지 왕자-왕자로 사는 법?
4.보현행원의 수행-삶과 수행이 구별이 없다!
1)삶에서는?-늘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섬기고 모시겠다는 마음으로 고잘미!
2)수행에서는?->깨달음을 얻거나 깨달아 부처 이루겠다, 업장 참회 극락왕생...이런 게 아니라 오로지 부처님 기쁘게 하고 부처님 공경, 찬탄, 공양하는 마음으로 수행...
보현행원은 공부의 차이가 없습니다. 오래 하신 분이나 처음 하시는 분이나 공부 분상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원의 세계란, 하는 만큼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래 하신 분도 잠시 방심하여 행원을 하지 않으면 초면이지만 열심히 하시는 분을 따라 가지 못합니다. 마치 광활한 바닷가의 보물들이 줍는 사람이 임자이듯, 그래서 줍는 만큼 제 것이 되듯, 보현행원의 세계 역시 그러합니다. 열심히 원을 세우고 열심히 일체를 공경, 공양하는 만큼 그에 해당하는 보현의 세계가 열려옵니다. 그러니 공부를 오래 했다고 방심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보현행원에서는 금물입니다. 그러는 순간 보현의 세계는 닫혀 버립니다. 영원한 보현의 원과 행만이 보현의 세계엔 존재합니다.
보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에게나 닫혀 있는 것도 보현입니다. 한 마음 밝을 때 그대로 열리지만, 한 마음 어두우면 그대로 닫혀 버리는 것이 보현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보현은 끝이 없습니다. 끝없는 공경, 끝없는 찬탄, 끝없는 공양, 끝없는 참회가 보현입니다. 내 생명이 끝없기에 나의 보현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16년 전(2008) 현대불교신문 보현행원 인터뷰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