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는 말
보현행원은 모든 것이 저절로 되는 가르침-깨달음도 행복도, 보현행원만 하면 저절로(?) 온다!
21세기는 굳이 닦지 않더라도 일상 삶이 그대로 수행이 되고 수행이 그대로 일상 삶이 되는 가르침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또 종교와 민족을 뛰어넘어 서로 차별하지 않고 대립하지 않고 똑같이 자비와 지혜를 고양할 인류 공동의 가르침이 나올 때가 되었습니다. 시절인연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실지로 전 세계가 그런 가르침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 역시 그런 사실을 기회만 되면 외치고 있고, 또 그런 가르침을 온 힘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현행원이 그런 시대 요구에 딱 맞는 가르침입니다. 닦지 않아도 수행이 되고 닦지 않아도 밝아지고 닦지 않아도 자비로워지고 종교가 다른 것은 물론 심지어 종교를 몰라도 함께 지을 수 있는 수행, 피부색이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르침이 바로 보현행원입니다.
또 많이 알고 적게 아는 것과 상관없이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누구에게나 공감되고 누구나 행하기 쉬운 가르침이 보현행원으로, 이제 대한민국만 아니라 온 세계가 보현행원을 알고 온 세계가 보현행원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보현행원의 뛰어난 점은 여러 가지로 많지만, 그 중의 하나는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보현행원만 하면 모든 공덕(功德)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많은 가르침 중에 유독 보현행원만이 가지는 뛰어난 장점입니다.
행마다 간절한 서원(誓願)을 가지고, 서로 공경하고 찬탄하고 섬기는 보현행원은 우리가 찾는 모든 것이 행원 속에 저절로 이루어지게 합니다. 복 짓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을 많이 지으려 합니다. 그래서 복을 많이 받으려 합니다. 불교에서도 복은 매우 중요해서, 복덕 자량(資糧)이 없으면 공부를 하려 해도 어이없는 난관을 많이 만난다고 합니다. 생사를 벗어나고 열반, 해탈을 증득하려 해도 복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많이 쌓아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애써 복을 쌓으려면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깁니다. 복을 많이 지으려 하는 그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인데, 복을 많이 지으려 하는 마음은 흔히 욕심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욕심으로 복을 지으려 하니 복 자체가 지어지지 않고 지은 복도 만사무휴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보현행원을 하면 저절로 복이 지어집니다. 이웃을 공경하고 찬탄, 섬기는 행위 자체가 복을 짓는 행인 것입니다. 그러니 보현행원은 복을 못 지을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보현행원만 하면 복은 저절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화쟁, 평화, 소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들이 원효의 화쟁사상을 연구하고 원효의 화쟁을 우리 사회에 가져오려 하지만 그 방법을 잘 모릅니다. 서로 싸우는 것을 멈추고 대립과 갈등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좋은데, 그래서 화쟁을 칭송하는데 막상 화쟁을 가져오는 구체적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현행원을 하면 화쟁도 저절로 옵니다. 대립하던 분들이 대립을 멈추며 갈등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가 오는 것(安樂心)입니다. 이웃을 공경하고 칭찬하는 행위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이 있는 곳은 분노, 대립, 불안, 걱정이 없습니다. 행복이 늘 넘칩니다. 가정이면 가정, 직장이면 직장이 지겹고 마지못해 사는 곳이 아니라 그야말로 아름답고 장엄한 부처님 화엄정토로 변하는 것입니다.
불자들이 그렇게 가지고 싶어 하는 하심(下心)도 마찬가지입니다. 겸허는 사회생활의 가장 큰 덕목인데, 보현행원을 하면 하심도 겸허도 그냥 찾아옵니다. 그것은 보현행원이 공경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공경하는데 어찌 겸허하게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온 이웃을 섬기고 모시는데 거기 어디 교만한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보현행원을 하는 분들은 하심이 되지 않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보현행원만 하면 됩니다.
아상(我相)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상 없기를 바라시지만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한데, 설상가상으로 아상 없으려는 그 마음 때문에 오히려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아상을 버리고 싶은데 아상이 도무지 버려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현행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현행원은 이미 아상이 없는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공경하고 찬탄, 섬기고 참회할 때 나라는 놈은 이미 거기에 없습니다. 아상이 있는 자가 참으로 공경하기는 정말 힘들며 아상이 있는 이는 결코 올바른 참회는 하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사과하기가 참으로 힘든 이유도 사과는 내가 무너지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남에게 참회하고 남을 공경하면 그 자체가 이미 아상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아상이 없는 자리에서 그런 행원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자들이 보현행원을 머뭇거리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혹시라도 보현행원을 하다가 깨달음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것인데, 그래서 많은 수행을 하고 그 후에 보현행원을 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정말 기우(杞憂)에 불과합니다.
보현행원은 그 자체가 깨달음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따라서 보현행원을 하면 그 순간순간 깨달음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화엄의 여래출현(如來出現)으로 부처님은 다른 곳이 아니라 이웃을 섬기고 공양할 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명상도 자비도 보현행원은 저절로 이룹니다. 행원을 하면 명상을 배우러 일부러 애써 어디 다닐 필요가 없으니 사띠가 저절로 오고 사마타 위빠사나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배워서 닦아서가 아니라 저절로 오는 것입니다.
자비심도 저절로 솟습니다. 따라서 자비심 기르려 따로 무엇을 배우고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행원 자체가 자비입니다. 명상이라는 이름없이 명상이 오고, 자비라는 이름없이 자비가 넘치며, 지혜라는 이름없이 지혜가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 보현행원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로 그렇게 빛납니다.
보현행원을 하면 닫혔던 나의 마음이 활짝 열립니다. 그리고 그 열린 마음으로 진리의 빛이 무진장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렇게 마음에 진리의 빛이 들어오게 되면 그동안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은혜로우며 이 세상이 본래 얼마나 아름다우며 또 얼마나 밝은 곳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반야(般若)를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반야가 나타나게 되며 온 세상이 진공묘유로 가득 찬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야말로 세상은 모두가 진리 덩어리, 온 존재가 진리 생명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세계가 평등하며 온 세상이 본래로 완전한 것을, ‘불완전한 이 자리’에서 ‘확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보현행원을 하면 건강해집니다. 온 마음이 밝음으로 가득 차기에 병이 오려고 해도 올 수가 없습니다. 있던 병도 사라지니 그것은 우리 몸과 마음이 생명력으로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현보살의 다른 이름이 연명(延命)보살입니다.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보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을 하는 한 우리는 질병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늙으면 건강이 아주 중요한데, 그래서 요즘은 노후의 질병 치료를 위해 개인 보험에 많이 들고 늙어 병들까봐 걱정이 대단한데, 보현행원을 하는 한 우리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늘 마음에 공경, 찬탄의 마음 가득하고 늘 일체중생을 섬기고 모시는 한, 우리는 언제나 밝고 건강하게 늙어갑니다.
보현행원은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세계의 가르침입니다. 단지 보현행원을 할 뿐인데, 아무 공덕도 지은 적 없고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고 어떤 것도 이룬 것이 없는 우리에게, 보현보살께서 그냥 공경하라 해서 공경하고 단지 찬탄하라 해서 찬탄한 것뿐인데 세상은 평화롭고 모든 존재가 행복하며 우리도 모르게 모든 공덕이 저절로 출현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되는 가르침! 굳이 애쓰고 구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우리 본래의 소식! 이것이 보현의 행이요 보현의 서원입니다.
눈부신 생명의 세기, 그리고 대립이 소멸되고 모두가 평화,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이 축복받은 21세기에, 부디 많은 분들이 보현의 노래 들으시고 일체 중생이 모두 행복하기 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