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르치시는 예수님
-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6,1-6)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지만 나자렛에서 성장하셨다. 그래서 그분의 고향은 나자렛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분은 나자렛 출신의 목수로 불리었다. 그곳에 살던 친척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바람결에 들려오는 악소문을 좇아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3,21ㄴ). 몰려드는 군중, 찾아오는 병자들에게 기적으로 도와주시며 분주하게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한숨 돌리시려는 듯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에 가셨다(6,1). 평소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성경을 읽으시고 그 뜻을 풀이해 주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가르치셨다(6,2ㄱ). 갈릴래아 호수의 주변 여러 고을에서 행하신 기적 사건들을 바탕으로 가르치셨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분의 친척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도 작용했을 것이나, 여기 저기서 일어났던 기적 사건들에 대해 놀라워하기는 했지만 어려서부터 잘 보아왔던 그분이 설마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라고는 여겨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코가 전하는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다 :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6,2ㄷ-3ㄱㄴ)
회당장 야이로에게 믿기만 하라고 당부하시고,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인의 큰 믿음을 칭찬하셨던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는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6,5). 그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ㄴ)고 한탄하시는 게 고작이었다. 기적 이야기를 들어도, 기적을 눈 앞에서 보고도 고향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6,6ㄱ). 하는 수 없이, 예수님께서는 고향을 떠나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다(6,6ㄴ).
선포와 가르침은 예수님 공생활의 두 가지 특징이었다.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자비를 베푸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 선포였고, 이를 근거로 바야흐로 하느님의 개입이 현재화하고 있으니 하느님께로 돌아서도록 설교하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이었다.
예수님의 고향생활과 고향 사람들의 불신어린 반응에 대해서 교부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노동하심으로써 소박한 목수의 소명을 축복하셨다(시리아인 에프렘). 청년 예수는 회당 전통을 벗어나지 않으셨다(오리게네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평범한 삶을 사셨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평범한 노동자로서 경제 질서에 순응하셨다(유스니투스). 영원한 아드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당신의 것인 듯이 우리 인간에게 내려오셨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자석이 쇠에 끌리듯, 믿음도 하느님의 치유하시는 힘에 이끌린다. 그 힘은 불신을 이겨내며, 믿는 이들 가운데서는 더 큰 힘을 발휘한다(오리게네스). 인간의 의지는 믿지 못하겠다는 반항심으로 하느님의 선물을 한시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선물조차 마다하는 요상하기 짝이 없는 엉터리 불신의 힘이다(요한 카시아누스). 개인의 저항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끝내 가로막히는 법은 없다. 그럼에도 자유를 속박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설득에 저항하는 자유조차 존중하신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6,7-13)
애초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신 이유는 두 가지였다. 평소에 적대적으로 앙숙같이 지내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야합하여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미게 되자, 이제 막 시작하신 복음 선포 활동이지만 머지 않아 중단하게 될 줄을 미리 내다보시고 첫째는 당신을 도와 서둘러 이스라엘 곳곳에 복음을 선포할 협조자들이 필요해졌고, 둘째는 당신이 죽음을 당하시게 되면 그 뒤를 이어 복음을 선포할 계승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향에서의 배척을 뒤로 하고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시던 예수님께서는 더 많은 곳으로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이르렀다. 파견된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복음을 선포해야 했으므로 그분의 생활양식과 행동규칙을 따라야 했다.
그것이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6,8-9)”는 명령이었다. 말하자면 철저한 가난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었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만 의탁하여 살고 행동하라는 규칙이었다. 이는 평소에 예수님께서 몸소 사시던 생활양식 그대로 따라하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면 파견된 제자들은 의식주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것도 이미 예수님께는 방법이 마련되어 있었다. 바로, 갈릴래아 땅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던 하느님 백성에게 의지하는 것이었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가정과 직업을 모두 버리고 그분을 따라 나섰지만, 가정과 직업을 유지하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하느님 백성들은 도처에 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로부터 치유와 가르침을 받은 이들도 상당수 차지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른바 ‘토박이 제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들이야말로 파견된 제자들이 의식주를 의지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당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6,10).
물론 예수님께로부터 도움만 받고 그분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경우도 얼마든지 상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려라.”(6,11)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할 제자들이 당당한 자세를 유지할 것을 주문하셨다.
그래서 파견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동하셨던 대로, “회개하라.”고 선포하면서,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6,13). 이렇듯 구마와 치유로 이루어지는 복음 선포는 하느님 나라로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가르침의 기반으로서 전 이스라엘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구마 행위는 마귀를 쫓아내는 것으로서 악을 극복하거나 제거하려는 노력에 해당한다. 치유 행위는 병든 이들을 고쳐주는 것으로서 훼손된 선을 회복시키거나 강화하려는 노력에 해당한다. 개별적이거나 구조적인 악에 대항하고, 역시 개별적이거나 공동적인 선을 증진시키는 일은 ‘예비 선교’이거나 ‘간접 선교’가 아니라 오히려 본격적인 복음 선포인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로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가르침 즉 전례에서의 강론이나 교리 교육에서의 강의는, 구마와 치유 등의 사회적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이 본격적인 복음 선포에 기반할 때 본 궤도에 진입하는 셈이 된다. 이것이 파견된 제자가 지켜야 할 윤리이다. 이 파견 윤리가 새삼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는 작금의 교회 실천이 전례와 교리 교육을 포함한 종교적 실천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본문이 마르코의 질문에 답하려는 바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분이요,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생활양식과 행동규칙을 따르도록 요구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신 말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파견윤리의 중요성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심각한 불균형 현상이 우리 교회 안에 뿌리내리고 있어서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해설을 필요로 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마귀는 구조악이요 질병은 그 구조악에 의한 희생 현상이다. 이 마르코 복음서를 읽는 필자나 독자는 21세기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 사회는 벌써 반 세기 이상 분단체제를 지속하고 있다. 그래서 한민족으로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외치면서도 남한과 북한, 대한민국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적국이다. 지구상 어디에서도 이렇게 기형적인 정전체제는 없다. 분단체제의 모순은 민족모순이요 이념모순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한반도 주민들은 분단되기 전에 천 년 이상을 한민족으로 살아온 역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단순한 외국 이상으로 적대시하며 살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의 남과 북을 ‘통치’하는 권력자들이 서로 전쟁을 벌여 양쪽의 주민을 대량으로 살육하기도 하고 휴전 중에는 비판자나 반대자들을 이념적 희생양으로 삼아 권력을 지탱해 왔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종북논쟁은 그 대표적이다. 이로 인한 희생자는 남북 이산가족들을 비롯해서 비단 공안당국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몹쓸 고문을 당하고 사회적 낙인이 찍혀 버린 조작 간첩과 그 가족들만이 아니다. 건전한 비판과 민주주의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온갖 필요한 노력조차도 거세되는 데서 기인하는 바, 민주주의가 지체되거나 역행하는 바람에 온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모두 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사는 모든 한반도 주민들은 의식을 하거나 못하거나 간에, 모두 이 분단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구조악의 폐해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이룩되는 모든 사회적 실천은 이 모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커다란 지향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미사 때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바친다.
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지어내신 주님,
저희가 모두 주님을 닮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나 되신 주님처럼
저희가 서로 사랑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
평화를 바라시는 주님,
이 나라 이땅에
잃어버린 평화를 되찾게 하소서
한 핏줄 한 겨레이면서도 서로 헐뜯고 싸웠던
저희 잘못을 깨우쳐주소서.
분단의 깊은 상처를 낫게 하시고
서로 용서하는 화해의 은총을 내려주소서.
인류의 일치를 바라시는 주님,
갈라져 사는 저희 겨레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소서.
저희의 무관심을 깨닫게 하시어
겨레의 일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게 하시고
가진 바를 나누게 하소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평화 통일을 이룩하게 하소서.
온 겨레가 주님을 믿어
이땅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평화의 모후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 지향을 살려서 한민족을 갈라놓고 괴롭히는 군대 마귀를 몰아내야 한다.
군대 마귀가 괴롭힌 결과로 대한민국 사회는 아주 깊은 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시키는, 아주 공공성이 결여된 사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노먼 베순(Henry Norman Bethune. 1890-1939)과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는 각각 카나다와 아르헨티나의 의사로서, 체제의 억압과 가진 자들의 착취로 생겨나는 가난이 만병의 근원임을 목격하고 각각 중국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에 맞서 싸운 의인이자 증인들이다. 억압과 착취로 말미암은 빈곤 현상 자체가 사회병리현상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각종 질병을 야기시키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역시 의사이면서 혁명가였던 중국의 쑨원(孫文.1866-1925)은 “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 의사는 사람을 고치며,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는 말이다.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건강할 수 없으므로, 사회의 병을 고치지 않고서는 개인의 병을 온전히 고치지 못한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건강이란 단지 아프거나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천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나라의 병을 고치려고 혁명가가 된 이 세 사람의 의사가 진단하는 한국 사회는 과연 어떤 질병을 앓고 있을까? 선진국 개발 그룹(OECD) 가운데 최장의 노동시간, 최고의 자살률, 최저의 출산률이 보여주듯이, 한국의 노동자들과 노인들과 여성들은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바로 사회가 강요하는 가난 때문이다. 뼈빠지게 일해도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가 힘들고, 백세시대가 가져다 준 노년이 풍요롭기는커녕 생활고에 시달리며, 한 두 명의 자녀조차도 낳아 키우기가 겁나는 사회환경 탓이다. 오죽하면 미혼의 청년들은 결혼, 출산, 취업을 포기하고 ‘헬(Hell) 조선’을 외치겠는가! 상위 소득 1%를 제외하고는 부지런히 일해도 먹고 살기 어렵고, 열심히 산 사람들일수록 병에 쉽게 걸린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로 면역체계가 무너지면 신체연령 80세가 초래하는 면역력 저하 현상이 일찍 찾아오고, 이렇게 되면 백약이 무효이고 오히려 약물 중독에 빠져 돈은 돈대로 들어가면서도 몸은 몸대로 나빠지기 일쑤이다.
이러한 진단이 틀리지 않다면 처방은 불문가지이다. 억압과 착취의 사회구조를 너 나은 민주주의 체제로 개혁해야 하고 경제민주화를 이룩해야 하며 의료의 공영화를 지켜야 하는 동시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한 ‘위로의 사도직’을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를 위한, 그리고 병든 한국 사회를 치유하는 복음 선포로서 예수님의 제자된 길을 가는 엄정한 윤리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신자들을 일깨우고, 지식인들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들으면 알고, 똑똑한 사람은 보면 알지만; 미련한 사람은 당해야 알고, 답답한 사람은 망해야 안다. 답답한 교회가 되지 말고, 미련한 신자가 되지 말 일이다. 우리가 좀 더 현명하고 좀 더 똑똑해지면 좋겠다.
- 세례자 요한의 죽음(6,14-29)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이 사방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이 벌어지자,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6,14ㄱ). 헤로데가 사람들로부터 들은 소문은 예수님의 도덕적 권위와 영적인 능력이 예언자의 권위와 능력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세례자 요한을 목 베어 죽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되살아난 요한으로 간주하였다(6,16).
마르코는 이 대목에서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과 목 베어 죽인 일을 삽입하여 기록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언자와 권력자, 종교와 정치의 비정한 관계를 보게 된다. 또한 동지같았던 벗의 암살로 충격받으면서도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더욱 비장하게 갈 길을 가는 예수님의 모습도 마주 대하게 된다. 2015년에 시성(諡聖)된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1917-1980) 역시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시켜주는 순교자요 증인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종교적 순교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지부진하던 그의 시성작업을 앞당겨 성인 반열에 오르게 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도 이런 의미에서 마음에 와 닿는다. 정치군사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라는 구조악에 대항하여 순교한 로메로야말로 현대 신앙인들의 사표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한 그것이 삶의 목표라는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체 게바라).
마르코가 기록한 증언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려는 백성에게는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외치면서 불의하게 처신하는 헤로데 임금에게는 매서운 비판을 가하였다. 그 바람에 형부인 헤로데와 결혼한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실소(失笑)를 자아내게 하는 헤로데의 허풍과 헤로디아 딸의 교태(嬌態)가 예언자의 장엄한 죽음과 대조적인 에피소드로 전해진다(6,17-28).
그후 요한의 제자들은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신 다음에(6,29) 요한의 뜻을 잇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계속 활동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예언자로서의 길을 멈추지 않으시고 죽음이 예견되는 길을 가셨다.
- 오천 명을 먹이시다(6,30-44)
파견된 제자들이 사도로서의 복음 선포 활동을 마치고 예수님께로 돌아온 후에 예기치 않은 두 사건이 일어났다. 활동에 지친 제자들을 쉬게 하시려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6,31) 하고 말씀하셨지만, 가르침에 목말랐던 군중은 막무가내로 뒤쫓아왔기 때문이다. “목자 없는 양들 같았던”(6,34ㄴ) 그들에게 “가엾은 마음”(6,34ㄱ)이 드신 예수님께서 하는 수 없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6,34ㄷ) 주다보니 끼니 때를 넘기고 만 것이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었던(6,44)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일이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난감했던 그 상황에서 예수님 공생활 초유의 기적 사건이 일어났다.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포시(布施) 기적이었다.
그렇게 큰 일을 겨우 치르고 예수님께서는 당신도 쉬며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시고,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시고 그들에게서 떼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6,45) 하셨는데, 갈릴래아 호수에 밤마다 불어오는 예의 그 “맞바람이 불어”(6,48) 배가 위험에 처하게 되렸다. 밤새워 기도하시다가 새벽녘에야 제자들이 처한 위험을 감지하신 예수님께서는 급한 나머지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6,48ㄱ). 빵과 물고기가 엄청나게 늘어난 일도 처음 보는 신기한 기적이었거니와 물 위를 걸어서라도 제자들을 구하러 오시는 일도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빵의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은 이렇게 뜻하지 않은 난감한 위기 상황에서 일어났는데, 이 두 기적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바는 예수님께서는 물질세계와 자연현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그분은 교회가 고백하는 대로,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런 두 기적을 연달아 겪으면서도,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 졌다”(6,52). 마르코는 이 ‘완고한 마음’이라는 표현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사용한 바 있는데(4,13 참조), 제자들에게도 같은 표현을 썼다. 예수님을 통해서 명백히 나타나는 하느님의 업적과 그분의 뜻에 대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구분하자면, 바리사이들의 완고한 마음은 ‘악의’였고,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은 ‘우둔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6,41)
미처 대비할 수 없었던 난감한 상황이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마치 준비한 것처럼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 마음을 도무지 알 길 없던 제자들은,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6,35) 하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만일 이 제안대로 했다가는 난감한 처지는 모면할 수 있었겠지만 모처럼 시선과 마음이 집중된 군중을 가르치던 분위기는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는 제자들이 한심하셨던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6,37)는 말씀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넌즈시 떠보셨다. 그 말뜻도 모르고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 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6,37)하며 당황해 하였다. 이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이백 명의 하루 품삯이거나 노동자 한 사람의 이백 일치 임금 그러니까 여덟 달 분 봉급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요즘 임금 수준으로 치면 이천 만원이 훨씬 넘는 거액이다. 놀라는 제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빵의 기적을 일으킬 준비를 명하셨다. “너희에게 빵이 모두 몇 개나 있느냐?(6,38ㄱ)”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6,38ㄴ).
우리가 오늘날 묵주의 기도를 바치면서 빛의 신비 제5단에서 묵상하고 있는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으로써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다. 그러나 성체성사의 뿌리는 이 빵의 기적에 있다.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일으키신 순서가 오늘날 미사의 순서와 똑같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봉헌)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감사송)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빵 쪼갬 즉 빵 나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영성체).
이 이야기는 마태오, 루카 복음서는 물론 요한 복음서에까지 실려있다. 이 이야기가 4복음서에 공통적으로 실려있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의미가 된다. 특히 요한 복음사가는 빵의 기적 이야기를 가장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고 그 안에 담긴 깊은 의미까지도 밝혀놓았다. 그래서 이 빵의 기적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요한이 덧붙인 대목까지 포함해서 읽어야 한다.
요한 복음 6장에 따르면, 이 기적을 체험하고 목격한 군중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려고 쫓아오자,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성체성사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결정적인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27.35.54-57).
이 말씀은 제자들을 만만치 않은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이 말씀은 듣기가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신 예수님께서 정면승부를 걸기라도 하듯이, 전혀 친절하지 않고 오히려 단호하게 제자들에게 재촉하다시피 말씀을 던지셨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이미 제자들 가운데서 – 사실은 그분을 따르던 군중 가운데 열심했던 이들 가운데서 – 많은 사람이 떠나가 버린 직후였다. 마치 이 말씀은 “너희도 갈테면 가라!”는 투로서, 서릿발 같이 냉정한 선언이었다. 그만큼 빵의 기적 사건 속에 담긴 성체성사의 깊은 뜻은 예수님께 대단히 중요했던 진리였다. 그분을 믿든지 떠나든지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예수님의 이 질문은 오랜 세월을 통해 우리에게도 울려 퍼지고 있다.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성체성사는 ‘성찬례’, ‘주님의 만찬’, ‘빵 나눔’, ‘거룩한 희생 제사’라는 여러 별칭과 더불어 ‘미사’라고 흔히 불리운다.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이게 하는 표지를 성사(聖事. sacramentum)라고 하듯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더 큰 것을 상징한다. 오천 명도 훨씬 더 넘는 군중을 육체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그 엄청난 기적조차도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세상을 영원한 생명으로 배불리시는 은총에 비하면 작디 작은 성사에 불과하다. 부활하시어 성부 오른편에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그분은 그 옛날보다 훨씬 더 가까이, 훨씬 더 수월하게 우리 곁에 오실 수 있고, 우리를 먹이실 수 있다. 이를 단 한 번이라도 체험한 사람은 성체성사의 진리를 드디어 믿기 시작할 수 있고, 열 번 스무 번이라도 체험한 사람은 마침내 확신할 수 있으며, 수백 번도 더 넘게 체험한 사람은 아예 이 진리를 알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관심사는 예수님께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겠는가? 그리하여 이 본문이 마르코의 질문에 답하려는 바는, 예수님께서는 비단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시며 또한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받아 먹고 그분의 힘으로 살아가게 하는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전례헌장, 11항)이라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선언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배가 무척 고팠을텐데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참아 견디면서 마침내 그분으로 하여금 빵의 기적을 이끌어 낸 그 당시의 군중에게 무척 고맙다.
교부들은 말한다.
“생명의 빵은 외딴곳에서 봉헌되었다(암브로시우스). 한때 굶주리셨던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분께서 지금은 많은 사람을 먹이신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 우리는 복음의 빵을 사도들로부터 받고 사도들은 그 빵을 주님에게서 받았다(베다, 프루덴티우스). 예수님께서는 빵을 축복하심으로써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축복하도록 가르치신다(베다). 낮은 풀밭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하느님의 빵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은 참회(쉰 명)와 신앙(백 명)을 상징한다(오리게네스)”.
- 물 위를 걸으시다(6,45-52)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6,48)
따지고 보면 고마운 대상은 그 당시의 군중만이 아니다. 밤에는 갈릴래아 호수에 맞바람이 치는 줄을 뻔히 알고 있었던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구태여 그 밤에 벳사이다로 가느라고 겪지 않아도 되었을 위험을 자초하는 바람에,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시다 말고 물 위를 걸어 오시게 만든 일도 우리에게는 제자들의 행동이 고맙다. 왜냐하면 이로써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하는 동안 그 기도를 멈추어야 할 일이 예기치 않게 생기면 기도를 방해받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밤새워 홀로 기도를 하시다가 제자들이 위급해졌음을 감지하시고는 그 기도의 응답이라도 받은 것처럼 급히 움직이셨다. 그래서 “물 위를 걸어서까지” 오신 것이다. 기도는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어떤 지향으로라도 기도를 하다가 사랑의 행동을 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이는 기도의 지향과 다를지라도 필요한 응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럴 것을 미처 생각도 못한 상대방이 마치 유령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을 지를 지경으로 놀랄지라도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하는 데에도 기도하듯이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지향으로 기도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물 위를 걷는 것”(6,48)과도 같이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런나 본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며, 주는 것은 언제나 희생을 수반하는 이상 어리석어 보이고 손해도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기도는 “물 위를 걷기”를 각오하는 사랑의 행동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고자 하는 우리는 “용기를 내어라”(6,50ㄷ) 하는 그분의 말씀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6,50ㄷ). 이것이야말로 “나다”(6,50ㄷ)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본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위급한 상황에 놓인 제자들을 돕기 위해 기도하다 말고 움직이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으신 사명을 수행하는 결정적인 순간들을 앞두고 먼저 기도하셨다.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루카 3,21 참조),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실 때에도(루카 9,28 참조), 수난을 당하실 때에도(루가 22,41-44 참조) 먼저 기도하셨다. 그뿐만이 아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선택하시기 전에도(루카 6,12 참조),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루카 9,18-20)라고 고백하기 전에도, 또한 제자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신앙이 유혹으로 약해지지 않도록(루카 22,32 참조)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다. 하느님께서 부여하시는 사명을 수행하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부 물 위를 걷는 일 이상으로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서 지닌 뜻을 겸손과 신뢰로써 하느님께 맡겨 드리려고 다른 모든 일에 앞서 기도를 바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활동에 앞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려야 한다. 기도는 하느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리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드리셨던 두 편의 기도를 아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인상 깊게 보여주는 이 두 기도는 모두 감사로 시작되었다(마태 11,25; 요한 11,41-42). 청원의 기도를 바치고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일부 신자들의 관행은 그 청원에 대한 응답이 주어지면 그 조건으로 감사하겠다는 마음이 느껴져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처럼 감사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께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기도에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자기증여(自己贈與)의 사랑을 담는, 심오함을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붙잡하시기 전에 바치신 기도(루카 22,42)에서뿐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들(架上七言)을 통해서도, 기도하는 것과 당신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같은 행동임을 보여 주셨다(루카 23,34; 23,43.46; 요한 19,26-27.28.30; 마르 15,34). 이렇듯 우리의 기도도 그 속에 자신을 내어 놓는 사랑을 담아야 한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산상설교에서 가르친 다음의 말씀에서 사랑은 전적으로 하느님께로 향하는 사랑이어야 하고, 또한 이웃과의 관계에서 증거되는 사랑이어야 함을 강조하셨다(마태 5,24; 5,44; 6,6.7-8.14.33).
요컨대, 예수님께서는 활동에 앞서 먼저 바치는 기도, 먼저 바치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 감사뿐만 아니라 사랑을 담아 바치는 기도, 사랑을 담아 하느님께 향하는 기도를 통하여 그 기도를 현실로 변화시키는 힘을 보여주셨다. 위험에 빠진 제자들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물 위에서라도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기도의 정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11,24). 그러므로 이 본문이 마르코의 질문에 답하려는 바는,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다 말고 물 위를 걸어서라도 제자들을 도우시는 분이시며 또한 물 위를 걸을 각오로 기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교부들은 말한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상처를 입으신 것은 나약하셨기 때문이 아니다(암브로시우스). 배의 나무는 십자가 나무를 예시한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건너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고, 이 십자가 나무는 믿는 이들을 구원으로 데려다 준다(아우구스티누스). 위험에서 줄곧 보호받기만 하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튼튼하게 자라나지 못한다(오리게네스). 예수님은 절망할 위기에 내몰린 제자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려 하신다. 이는 제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외치는 일에 더 익숙하게 만드시려는 것이었다(아우구스티누스). 이는 자기 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구원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몸부림치는 모습이었다(프루덴티우스)”.
- 겐네사렛에서 병자를 고치시다(6,53-56)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신 일도, 열두 제자를 여러 고을로 파견하신 일도, 물 위를 걸으신 일도 모르는 군중은 오로지 빵의 기적으로 자신들을 배불리 먹여주신 데 열광하여 예수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댄” 그분 일행을 “곧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6,53-55).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간 벳사이다는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어귀의 동쪽 호숫가에 있었고, 다시 호수를 건너 온 겐네사렛 땅은 카파르나움 남서쪽에 있는 비옥한 땅이었다.
마르코는 1,32-34에서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를 전해줄 때처럼, 6,55-56에서도 복음 선포로서 행하신 그분의 치유 활동을 집성문 형태로 전해주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시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6,56). 아마도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손을 잡아보지도 않고 그저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했는데도 넉근히 치유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적어도 예수님께서 치유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라는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것을 뜻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난은 질병과 가깝다. 가난하면 강도 높은 노동에 종사하게 되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 수 밖에 없으니 질병에 쉽게 걸리고 일단 병에 걸리면 병치레에 돈이 들어가고 또 일을 못 하게 되어 소득이 없어질테니 더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 변면한 의료시설도 없던 그 옛날이니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통한 치유력을 지니셨다는 예수님께서 돈도 받지 않고 깨끗하게 병을 고쳐주니 얼마나 고맙고 좋았겠는가? 발도 없는 소문이 발빠르게 퍼질 만도 하다. 그야말로 살판날 지경인 것이다. 그 절차도 간단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만 대면 나았으니 그 얼마나 좋은가? 예수님의 명성이 자자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