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참여하는 공식 행사에는 왕의 존재와 권위를 한껏 드높이기 위하여 대규모의 호위 병사와 의장용 깃발, 무기 등을 동원하였다. 특히 왕이 대궐 밖으로 행차할 때는 수 많은 백성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더욱세심한 배려가 필요했다. 왕은 도성 안 행차뿐 아니라 경기도 밖으로 나가 몇 달씩 머무르는 일도 있었는데, 이때에도 왕의 신변을 보호하고 행차를 장엄하게 꾸미기 위해 수 많은 군사들과 깃발, 각종 의장물이 동원되었다. 화려한 깃발과 무기, 장신구로 둘러싸인 채 늠름한 병사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면 행차하는 왕의 모습은 백성들에게 신비감과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왕의 행차는 백성들에게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인 동시에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행차 길에 왕은 꽹과리를 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을 직접 만나 민초들의 여론을 들었고, 행차한 지역에서 과거 시험을 시행하거나 쌀을 나누어 주는 등 각종 민원을 해결해 주기도 하였다. 간혹 공식적인 행차가 너무 번거롭다 하여 미복을 하고 몰래 궐 밖으로 나오는 왕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공식적으로 궐 밖 행차를 하였다.
왕은 군사훈련, 온천행, 선왕의 무덤 참배, 칙사 영접 등등을 위해 수시로 궐 밖으로 행차하였다. 왕의 행차에 딸리는 호위 병사들과 수행원, 그리고 의장물의 규모는 행차 목적에 따라 대가, 법가, 소가 세가지로 구별되었다.
대가는 왕이 중국 칙사를 맞이하거나 종묘 사직에 친히 제사드릴 때의 행차로, 가장 성대하였다. 대가 행차 때 왕은 면류관과 구장복을 착용하였다. 중국에서는 대략 2만 명 정도의 인원이 대가에 동원되었지만, 조선에서는 그 절반에 이르는 1만 명 정도가 대가에 동원되었다. 대가에 비해 약간 규모가 작은 법가는 왕이 선농단, 성균관, 무과 전시 등에 임할 때의 행차였다. 이때 왕의 복장은 원유관과 강사포였다. 소가는 작은 수레라는 말 그대로 가장 작은 행차였다. 주로능에 참배하거나 평상시의 대궐 밖 행차, 또는 활쏘기를 관람할 때에 이용되었다. 이때 왕의 복장은 군사 훈련과 관련된 전투복 차림이 많았다.
왕의 행차에 동원되는 의장물은 노부라 하는데, 행차의 종류에 따라 각각 대가노부, 법가노부, 소가노부라 하였다. 왕이 행차할 때는 반차도를 그려 수많은 사람들과 의장물의 자리와 순서를 미리 정하였다.
행차에 동원되는 인원과 의장물의 규모는 상황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기본 형태는 거의 동일하였다. 행렬의 맨 앞에는 완전 무장한 수백명의 군사들이 행진하였다.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는 군사들은 왕의 행차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국왕의 힘을 과시하는 효과를 냈다. 행렬의 두번째는 화련한 깃발과 의장용 창검을 든 의장행렬이었다. 햇빛에 눈부시게 빛나는 창검과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은 보는 이들의 경탄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왕권을 상징하는 옥새와 중국 천자에게서 받은 고명을 의장 행렬에 포함시킴으로써 행차의 권위를 더욱 높였다. 행렬의 세번째에는 수십 명이 메는 수레를 탄 왕이 있었다. 왕의 수레 앞뒤에는 커다란 해 가리개와 부채, 군악대를 배치하였다. 그 뒤로 종친과 문무백관이 왕을 수행하였고, 행렬의 맨 뒤에는 선두와 마찬가지로 군사들이 따랐다.
행렬의 앞뒤에서 행진하는 군사 외에 보이지 않게 숨어서 왕의 행차를 호위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궁궐부터 행차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곳마다 배치된 매복병들은 높은 산 또는 으슥한 길목에 숨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연락병들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궁궐과 왕 사이에 수시로 오가는 연락을 담당하였다. 왕은 궐 밖에서도 중요한 국정 사안은 직접 지시하고 결과를 보고받았다. 감찰관들은 매복병과 연락병들이 근무에 충실한지를 수시로 점검하였다.
왕은 목적지에 도착하여 공식 행사를 마친 후 환궁하였다. 대궐로 돌아온 왕은 행차를 준비하느라 고생한 관련자들에게 상을 내리는 한편, 행차 도중에 직접 들은 민원들을 해결했다. 조선 시대 왕의 행차는 나라의 절대 권력자와 현장의 백성들이 직접 만나는 축제의 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