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법(1)
한국 불법(佛法)의 현주소로 살펴보자, 우리는 스스로 한국불법을 통불법(通佛法)이라 한다. 이는
중국 선종에 연결시키고자 하는 여러 문파의 법맥설(法脈說)을 다 포섭한다는 뜻과 함께 중국에서
분화한 교종, 율종, 선종과 더불어 정토종과 밀교, 더는 전래 토속신앙의 요소까지를 두루 보전하고
있다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이것 특히 후자를 가지고 정체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불필요한 일로 보인다. 빠알리 경전에 이미
담마:‘dhamma-다라:dhara, 비나야:vinaya-바하라:dhara, 마타까:mātikā-바하라:dhara’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서 ‘경전, 율장, 아비담마 전문가’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 ‘참선 전문가’는 없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뿐이다.
또한 여러 경전에 불(붓다:buddha-사루사띠:anussati), 법(담마:dhamma-), 승(상가:saṅgha-),
계(戒,실라:sīla-), 시(施,짜가:cāga-), 천(天,데바타:devata-)의 6수념(隨念,수나사타;anussati,
수나사라나;anussaraṇa)이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수념 이 선(자나:jhāna) 수행의 한 부분으로
인정되고 공존했다는 것을 말한다. 또 참선 전문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수념을 포함한
선 수행은 경전, 율장, 아비담마 전문가 모두가 일상에서 당연히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전과 아비담마는 삶과 수행의 지침이고, 계율은 승가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간직하지 않으면 안
될 도덕성의 원칙과 구체적인 규범이다. 위에서 언급한 전문가(다라:dhara)는 교설의 부단한 전승을
위해 암송하고 분석하는 가외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불법의 교학 및 실천 체계는
전통적으로 계·정·혜 삼학의 완성으로 설명된다. 이들 세 가지는 서로 바탕이 되고 떠받들면서
향상하고 확장, 심화되는 관계에 있다. 그중에 하나가 빠지거나 온전치 못하면 나머지 둘은 무의미한
것이 되며, 하나하나는 다른 둘의 조건이자 결과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삼학의 유기적 이해와
실천을 일러 통 불법이라고 해야 한다면, 한 마디로 한국불법은 통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첫째, 계율을 소홀히 여기는 일반적 풍조다. 여기에는 여러 문제가 뒤섞여 있지만, 우선 계율
가운데는 지키려야 지킬 수 없는 조항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소승불법의 편협한 계율 이해와
형식적 지계(持戒)를 지적하고 비판하면서도 환경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필요 없게 되었거나
불합리한 조항들을 삭제, 수정하거나 새롭게 제정하지도 못한다.
다른 요소는 만연해 있는 결과 중심주의다. 율(律)은 초심자 길들이기에나 필요한 장치이고,
계(戒)는 편할 대로 늘였다 줄였다 말 그대로 자심계(自心戒)다. 생활 전반에 걸쳐 세속화하고
있음에도 정작 나서야 할 사회적 책무에는 무관심한 것이다. 자비, 평등, 평화의 원칙과 실천을
등한시하고 불법 수행공동체, 승가의 일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둘째, 일반적으로 교학과 특정 교리의 역사적 이해가 부족하다. 한글로 번역되어 유통되고 있는
대부분의 경전들을 보면 한눈에 우리의 실력이 보이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오래전에
동국역경원에서 펴낸 한글대장경을 보면 우리 스승님들의 한문 실력, 우리말 솜씨, 거기다 가장
기본적인 교리의 이해 정도가 드러난다. 각‘覺’ 자만 나오면 무조건 ‘깨달음’이고 법‘法’ 자는 그냥
‘불법(佛法)’이며, 공‘空’ 자는 모두 ‘텅 빈’것이다.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소의경전이라는 《금강경》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이 불법 법회에 나오는 코흘리개들도 달달
외우는 《반야심경》을 앞뒤 맞춰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한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시치미
떼고,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심심 미묘한 도리라고 한다. 계율, 아비달마, 위빠사나
(vipassanā) 말만 나오면 소승 딱지를 붙이려 든다.
그러나 소위 대승경전에서 지계(持戒)나 혜(慧), 관(觀) 자를 다 빼면 무엇이 남고, 아비달마를
모르는데 어떻게 유식, 화엄을 읽을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을 할 수
있게 하려면 먼저 제대로 담아 줘야 되지 않겠는가!
셋째, 수행과 일상생활의 괴리이다. 중국불법 역사에서 인도식 출가 수행자의 기본 정신인
무소유의 원칙을 버리면서까지 ‘선농일치(禪農一致)’ 즉 ‘생산 활동과 수행을 분리하지 않음’을
내세운 것은 가히 혁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선종을 그 기원으로 삼는 우리
승가에 이 전통은 다만 전설로 남아 있을 뿐이다. 불법(佛法) 수행의 근본 바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업설(業說)이다.
경전에서는 업(業, karma)을 ‘의도된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수행자가 성성하게 깨어
있으라는 것은 신(身)·구(口)·의(意) 삼업 모두를 의도된 행위로 만들라는 말이다. 업설은
따라서, 모든 행위가 ‘주체적 결단’을 통한 의도된 행위이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전적으로 내가 지겠다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정신에 입각한 자기 개발 노력은
모두 수행이 되는 것이다.
거기다 이미 고타마 붓다에 의해 정리된 (사마타:samatha)(지止, 정定, 적寂)와
비파;vipa-샹나;ssanā(관觀, 혜慧, 조照)의 문제를 지금까지 따지고 있다. 삼매(사마다;
samādhi)를 ‘등지(等持)’라고 옮긴 옛사람들이 이미 답을 준 것이다. 이것은 곧 지(止)와
관(觀)의 균형을 말한다. 지가 빠진 관이나 조(照)가 작동하지 않는 적(寂)은 바른 선정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대 적적성성(寂寂惺惺)의 논란은 둥근 공을 놓고
어디가 앞이냐를 따지는 불필요한 싸움이다. 양쪽은 똑같이 삼매를 구성하는 요소일 뿐이고,
삼매 또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