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능력주의>> 박권일 지음. 이데아
한국인이 기꺼이 참거나 죽어도 못 참는 것에 대하여
예를 한 번 들어 보자. 사회라도 좋고, 어떤 조직이나 직업이라도 좋다. 100 명의 사람들 중 10명이 특권을 누리고 나머지 90 명의 사람들이 차별과 배제와 불평등을 당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10명의 특권을 줄여서 좀 더 평등한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 아니면 10명의 특권을 그대로 두고 10명에 들기 위해 죽도록 ‘노오력’을 해야할까? 박권일은 한국인들은 후자를 선택해 왔고, 앞으로도 후자를 선택하리라 한다. 한국인들은 소수의 특권을 없애자고 하면 벌떼처럼 일어나서 ‘불공정’을 외치고, ‘공산주의’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즉 자신의 ‘능력’으로 10%에 입성하여 특권을 누리고 싶은데, 그 특권을 누릴 구조를 파괴하느냐고 강하게 반발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듯하다.. 부동산 폭등에 대한 대책은 왜 부동산을 통해 때돈을 벌 기회를 망치느냐고, ‘평등한 교육’에 대해서는 왜 교육을 통해 ‘특권’을 얻고자 하는 기회를 박탈하느냐고 할 것 같다. 나는 한국의 ‘진보주의’ 정당이 늘 패배하는 이유 중 한 가지가 아닐까 싶다. 한국인들은 불평등을 선호하는데, 진보세력들은 늘 한국인들이 ‘평등’을 선호한다고 착각을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선거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대중’은 늘 옳다. 그 ‘대중’이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속았든, 아니든 대중이라는 스펙트럼을 통과하여 ‘정치’가 구성된다‘ 선거가 끝나고 각 세력들이 승패에 대한 평가 항목에 ’대중이 미쳤다‘ ’대중이 천박해졌다‘라는 문구를 넣는 대신 ’우리가 대중을 읽지 못했다‘가 대신한다. 이 바다에 살 수 밖에 없는 정치가 바다를 욕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1930년 대에 독일 시민들이 히틀러에 투표하였다고 놀랍다고 하지만, 우리도 그러지 않는다고 보장 할 수 있을까? 현실의 정치가나 사업가나 평범한 시민이라면 거기에 적응해서 살면 되지만, 박권일은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대중은 혁명도 하고 사회 개혁도 하지만 때로는 전쟁도 하고 사회를 지옥으로도 만들기도 한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출산율 압도적 꼴등, 자살율 압도적 1위라고 한다. 어떤 선생은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노인들 곁을 지나며 ’잘보거라 저것이 이 나라의 노인의 수준‘이라고 하였다면, 박권일은 잘 보아라 이것이 이 나라 국민들의 수준이라고 할 것 같다.
어느 한 국가나 사회가 어느 정도이면 그 나라의 시민들이 바로 그 정도를 선택했다는 의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등‘을 좋아하고, ’불평등‘을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평등이 옳고 불평등을 싫어한다는 가설은 폐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단지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다수가 ’불평등‘을 선호하면 사회가 ’불평등‘해지고, ’평등‘을 선호하면 좀 더 평등해진다. 한국의 불평등 지수는 상당히 높다고 한다. 즉 한국인들은 불평등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선택의 이면에는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한 사회의 불평등의 원인이 한 가지로 환원되지 않지만,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불평등의 ‘재생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인이 기꺼이 참는 것은 ‘불평등’이고 죽어도 못 참는 것은 ‘불공정“이다. 능력주의가 공정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의하면 능력주의는 1960년대 생산된 제품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능력주의‘라는 제품이 없었거나, 상품화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떤 학자가 사회를 설명하는 원리로서 ’능력주의‘를 고안한 셈이다. 인류 사회가 능력에 따른 경쟁을 선호하였는지, 협력을 선택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소유권을 참 좋아하는 나라가 아닐까 싶다. 흔히 소유권 앞에 배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인권선언에 나오는 천부 인권처럼 배타적 소유권은 마치 하늘이 내려 준 권리인 양 생각하고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연구에 의하면 ’소유권‘이란 그렇게 명확한 실체가 없다고 한다. 쭉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폭력‘과 관련성이 더 많다고 한다. 즉 배타적 폭력이 배타적 소유권을 낳았다고 한다. 박권일에 의하면 한국인이 선호하는 ’능력주의‘의 능력도 사실은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박권일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렇게 작고 세세한 부분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나 싶었다. 가부장제도가 있기 위해서는 가부장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있어야하고, 그 가부장주의는 사회 구석구석에 켜켜이 쌓여 있다. 거의 ’자연화‘되어 있기까지 한다. ’가부장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거나 그 논리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불평등을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박권일은 한국인들은 ’능력주의‘이데올로기에 깊숙이 침윤되어 있고, 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본질적‘ 질문이나 의문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따른 불평등을 계속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한국 사회는 ’불평등‘을 선택하고 확대재생산 해야하나? 아니면 평등을 선택하고 재생산해야 할까? 교차로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적어도 박권일은 시험의 형식이 공정하냐 아니냐, 누가 컨닝을 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제 불평등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논의해 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특권‘을 해체하여 불평등과 극심한 경쟁을 해소할지, 아니면 특권을 그대로 둔 체 소수에게 그 특권을 누릴 기회를 제공할지? 행복을 위해 절이나 교회 혹은 술집이나 명상의 집을 찾는 개인적 해법도 중요하지만, 이렇게도 질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평등이 혹은 불평등이 우리의 행복과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내 이웃들이 호시탐탐 나의 재산을 노리는 강도나 경쟁자라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가라는 질문은 어떨까?
여러 번 읽느라 힘이든다. 왜 호모사피엔스는 생물로서 백 년도 못살면서 누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또 다른 천년을 알고 싶어하고 자신의 시대에서는 어떤 소식도 받을 수 없으면서도 우주를 탐사하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