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기술>중에서
열정에 이유가 없을 때는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열정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열정에 이유가 있을 때는 집착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집착은 슬픔의 시작이 된다.
우리 대부분은 무언가에 얽매여 있다. 사람, 국가, 믿음, 생각에 집착한다. 그리고 이
런 집착의 대상이 사라지거나 그 의미를 잃어버리면, 공허감과 결핍된 느낌을 갖게 된
다. 우리는 이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다른 무언가에 매달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다시
열정의 대상이 된다.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잘 들여다보라. 나는 여러분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
울에 지나지 않는다. 비춰보고 싶지 않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비춰보고 싶다면, 분명하고 철저하게 열심히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자신의 불행, 불
안, 죄의식 등을 녹여버리고 싶다는 소망이 아니라, 언제나 슬픔으로 인도되는 이 놀라
운 열정을 이해하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열정에 이유가 생기면 그것은 욕망이 된다. 사람이든 생각이든 모종의 성취든 이것에 대
한 열정이 있을 때는 이 열정으로 인해 모순, 갈등, 노력이 생겨난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상태에 이르거나 이것을 지속시키기 위해, 혹은 이미 가버린 무언가를 다시 붙잡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열정은 이런 모순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목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열정이므로, 어떤 결과도 일으키지 않는다.
열정이란 무엇인가?
자신을 벌하는 것이 종교적인 삶인가? 고행을 통해 몸이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 깨달
음의 징표인가? 자학이 실재에 이르는 길인가? 욕망의 부정이 순결한 것인가? 금욕을 통
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목적보다 수단이 헤아리기 힘들 만큼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물론 결과가 중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단도 분명히 중요하다.
실제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결의, 이상, 영악한 합리화로 실제를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
슬픔은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열정이라 부르는 것도 이해의 대상이지 억압이나 승화
의 대상이 아니다. 열정의 대체물을 찾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무엇을 하든, 어떤 장치를
만들어내든, 결국은 사랑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한 그 대상을 더욱 강화시킬 뿐이기 때문
이다.
우리가 열정이라 부르는 것을 사랑하려면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사랑은 곧 직접적인 소통
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부하거나 어떤 이상을 갖고 있거나 미리 결론 내린 상태
에서 어떻게 열정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서약은 저항의 한 형태이며, 우리가 거
부한 것은 결국 우리를 정복해 버린다.
진리는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향해 돌진해서는 안된다. 붙잡으려 애
쓰면 진리는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버릴 것이다. 진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다
가온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관념, 상징일 뿐이다. 그림자는
실제가 아니다.
욕망을 파괴하면 삶도 파괴된다.
욕망은 자기 모순적이고, 왜곡되는 경향이 있으며, 우리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욕망이 야기하는 고통, 소용돌이, 불안, 그 절제와 통제를 한번 생각해 보라.
욕망과의 이 영원한 투쟁 속에서 우리는 욕망을 온갖 모양으로 왜곡시켜서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욕망은 끊임없이 우리를 지켜보고 기다리고 밀어붙이면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든, 욕망을 승화시키든, 욕망에서 도망치든, 욕망
을 부정하든, 욕망을 인정해 자유롭게 내버려두든, 욕망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종교적인 스승이나 다른 사람들은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초연한 태도를 길러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말이다. 욕망이란 파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파괴하면 삶도 파괴된다. 욕망을 왜곡
하거나 구체화하거나 통제하거나 지배하거나 억압하면,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무언가를 파
괴시켜 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