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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발췌

[[독서발췌]]산상수훈 언덕에서 말씀 찾기_삶의 자리를 바꾸는 예수의 말씀 13, 권종렬, 샘솟는기쁨, 2026

작성자booknbook|작성시간26.06.05|조회수36 목록 댓글 0

산상수훈 언덕에서 말씀 찾기_삶의 자리를 바꾸는 예수의 말씀 13

권종렬, 샘솟는기쁨, 2026

 

산상수훈 9 믿음

염려와 신뢰 사이에서 눈을 뜨다

마태복음 6:19~34

 

문학평론가이자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은 <눈물 없이 먹을 수 없는 빵>이라는 시를 통해 인생의 고단함을 노래했습니다.

내 눈물이 진주라면 내 손에 든 빵은 바다

거칠게 파도치고 때로는 해일처럼

효모균을 뿌린 것처럼 부풀어 오르지만

그 바다는 작은 진주알을 키운다

눈물 없이는 먹을 수 없는 빵

무슨 열매가 이리도 매워 고추 먹은 듯 뜨거운 입김

한 조각 빵을 먹기 위해

나는 유다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판다.

너를 찌르지 않고서는 내가 먹을 빵을 얻을 수 없다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으면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야윈 정강이에 피가 흐르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빵

내 눈물이 진주라면 내 손에 든 빵은 바다.

그렇습니다. 땀과 눈물과 피가 흐르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빵, 그것이 인생의 고단함입니다. 가난을 대물림하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건설 노동자의 아들로 나고 자란 예수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를 도와 공사장 막노동꾼으로 집안 살림살이를 건사해야 했던 예수님께서는 빵 한 조각, 밥 한 그릇의 무거움을 누구보다 잘 아셨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하며 사는 삶의 괴로움을 몸으로 겪어온 예수님께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염려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말씀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겨워 보이는 말씀입니다. 익숙하지만 참으로 버겁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친숙하지만, 순종의 불가능성 앞에 스치는 경구처럼 외면받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염려하는 사람을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라고 부르시는 예수님 앞에 한없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자아를 어떻게 붙들어 세울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작은 믿음을 극복하고 충족한 오늘을 살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버지 이름이 달린 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 6:25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마 6:28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1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마 6:3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말라는 의미일까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2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모든 것"이란 먹고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하늘 아버지께서 먹고사는 문제는 다 알아서 책임지신다는 약속일까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라는 말씀은 최고의 복지 혜택을 믿고 투자하라는 명령일까요? 우리는 정말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다 되는 걸까요?

소설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야 되는 일이 아니다.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밥벌이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거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먹이시느니라'라고 하셨지만 나는 이 말을 믿지 못한다. 하느님이 새는 맨입에 먹여 주실지 몰라도 인간을 맨입에 먹여 주시지는 않는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사실 이것이 우리 삶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가 주님께 헌신하면 주님이 다 책임져 주신다. 먹고사는 걱정 다 맡기고 살아라"라는 어쭙잖은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준엄한 삶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먹고사는 무게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먹고사는 생존의 가치를 잘 알기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는 것을 하늘 아버지의 명예가 걸린 일로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실까요? 단순히 "제자는 먹고사는 걱정을 해서는 안 된다. 먹고살 걱정하는 사람은 믿음이 작은 사람이다"라고 경계하시는 것일까요?

염려의 본질, 탐욕

염려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마태복음 6장 25절 말씀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즉 이 말씀은 마태복음 6장 19~24절 말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실 때의 염려는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가난한 이들의 '생활의 염려'가 아닌 쌓을 재물을 가진 자들의 배부른 '탐욕적 염려'인 것을 알 수 있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가진 사람, 재물을 어디에 쌓아 둘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재물을 땅이 아닌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땅에 쌓아 두면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 쓰게 되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쌓아 두면 좀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마음이 땅에 있는 사람은 재물을 땅에 쌓아 두려 하지만, 마음이 하늘에 있는 사람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려 할 것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그 사람의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마 6:19~21).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인생,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사람이라면 재물을 어디에 쌓아 두는 게 무슨 고민이겠습니까? 많든 적든 쌓을 재물을 가진 사람이나 하는 고민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쌓아 둘 재물이 있는 이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을 어디에 쌓아 두는지를 통해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 몸의 등잔불입니다. 눈이 건강하면 온몸도 밝을 것입니다. 눈이 병들거나 약하면 그 몸도 어두울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품은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마 6:22~23)? 밝은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 어디에 쌓는 게 지혜로운 생명의 선택인지 밝은 빛으로 보아야 합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땅이 아닌 하늘에 쌓을 것입니다. 밝은 눈으로 밝게 보는 사람은 어둠을 뚫고 땅이 아닌 하늘의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마음이 온통 땅의 것으로 가득한 사람이 어떻게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가장 부러워할 사람이 호의호식하던 로마인이나 친로마 유대 귀족 아니겠습니까? 그들처럼 술과 여자와 지혜가 어우러지는 먹고 마시는 향연을 누리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 밤낮으로 애쓰는 이유가 땅에서 잘 먹고 잘살고 싶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어둠에 빠진 사망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살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가진 재물을 땅에 쌓아 두려는 사람, 땅에서 더 많은 재물로 더 많이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일갈하십니다. 한 주인은 미워하고

다른 주인은 사랑할 것입니다. 한 주인에게 마음을 쏟고 다른 주인은 얕잡아 볼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 하늘 아버지와 재물의 신 맘몬(Mammon)을 아울러 주인으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땅에다 재물을 쌓아 두려는 사람은 하늘 아버지를 주인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마음이 땅에 있는 사람의 주인은 재물의 신 맘몬입니다(마6:24).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염려의 본질은 재물을 향한 갈망입니다. 이 땅에 더 쌓아 두고, 더 잘 먹고 잘살고 싶은 탐욕적 욕망을 말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이들은 이방인입니다(마 6:31~32, 눅 12:30). 예수님께서 이방인으로 칭한 이들은 로마인이나 친로마 유대 귀족들로 소비를 즐기며 사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배고프지 않기 위해 먹고, 벌거벗지 않기 위해 입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먹고 입는 것에서 인생의 기쁨을 찾았습니다.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기며 세상을 즐기려는 이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지 말라고 하신 염려는 생활에 대한 염려가 아닌 재물을 땅에 쌓아 두고 살고 싶은 배부른 이방인의 탐욕적 염려입니다. 소비하는 데서 존재 가치를 찾으려는 염려입니다. 그러나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소비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염려는 결국 자기를 찌를 뿐입니다. 더 많은 것을 땅에 쌓으려는 염려는 자기를 찔러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딤전 6:8-10). 예수의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면 더 쌓으려는 탐욕적 염려를 과감하게 걷어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왜 염려하는가? 작은 믿음을 극복하고 충족한 삶을 살려면 먼저 자기 마음속 염려의 근원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마음속 염려의 본질을 정확하게 들여다보는 데서부터 충족한 삶의 문은 열릴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자녀 된 우리가 염려하는 그 염려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끼의 버거움으로 인한 생존의 몸부림입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더 소유하고 더 쌓아 두려는 탐욕입니까?

밝은 눈으로 마음속 염려를 들여다보십시오. 이 땅에서 자신을 위해 재물을 더 쌓고자 하더라도 결국 좀먹고 녹슬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가는 현실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밝은 눈으로 좀먹지 않고 녹슬지 않고 도둑도 없는 하늘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그 염려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밝은 눈 회복하기

봄철 갈릴리 호수 서편 언덕에 서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공중을 나는 새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나뭇가지 사이에 깃들인 참새도 보이고, 하늘을 나는 조금 덩치 큰 까마귀도 보입니다. 들판에는 노란 겨자꽃과 하얀 아몬드꽃 그리고 붉은 백합화가 만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고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땅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할 것 없이 그곳에서 까마귀는 한국인의 까마귀 인식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입니다. 그들에게 까마귀는 흉조(凶鳥)가 아닙니다. 그냥 일상적으로 자주 접하는 조금 덩치가 큰 새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는 참새 다음으로 까마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의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새는 까마귀입니다. 민가에서 멀고 지형이 험한 곳에 서식하던 매나 독수리는 갈릴리 호수 인근에서 거의 볼 수 없습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욥 38:41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시 147:9

까마귀 새끼의 어떤 면이 마음에 다가옵니까? 까마귀 새끼의 절절한 울음소리와 먹을 것을 달라고 둥지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까마귀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지 않습니까? 하늘 아버지께서는 까마귀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고 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마 6:26)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까마귀를 기르시는 하늘 아버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늘 아버지께서는 까마귀조차 기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자녀인 우리는 까마귀보다 귀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인 우리도 먹이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또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28)라고 말씀하십니다. 흔히 '백합화'라고 하면 예수님을 상징하는 순백의 백합화(나리꽃)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 백합화는 봄철 이스라엘 땅에 흐드러지게 피는 붉은 아네모네꽃을 말합니다. 백합화(百合化)는 여러 들꽃을 통칭하는 동시에 특정하게는 양귀비꽃을 닮은 붉은 아네모네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한자로도 흰 백(白)이 아닌 일백 백(百)을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 언덕에서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며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시대에 붉은빛 옷은 누구나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붉은빛 자색 옷은 조선 시대 용포(袍)와 같이 황제의 옷이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갈릴리 들판에 만발한 붉은빛 백합화의 아름다움은 권력과 부를 다 가진 솔로몬이나 로마 황제가 입었던 화려한 옷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이렇게 아름다운 꽃으로 입히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늘 아버지께서 하물며 자녀 된 우리를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입히시지 않겠습니까?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 12:6~7

로마 제국의 화폐인 앗사리온은 로마 군인의 하루치 품삯으로 알려진 데나리온의 1/16에 해당하는 낮은 단위의 동전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데 (마10:29) 오늘은 두 앗사리온에 다섯 마리가 팔립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시지 않는 한 마리는 '덤'으로 끼워서 파는 참새였을 것입니다.

덤으로 끼워 주는 참새가 멀쩡한 참새였을 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그 한 마리,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는 말씀은 우리를 보살피는 어머니의 정겨운 손길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이 귀했던 시절 목욕이나 머리 감기가 연중행사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반백년 전쯤 한국에서도 머리털에 서캐나 '이'가 끓는게 일상이었습니다. 2천 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지 땅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때에도 아이들의 머리를 정성스레 매만지던 손이 있었습니다. 그 꼬이고 헝클어진 머리털을 한 올 한 올 세워 주던 손길이 있었습니다. 바로 어머니의 손길입니다. 씻겨 주고 빗겨주고 만져 주는 어머니와 자녀의 모습은 정겹기만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머리털까지 살피시는 정겹기가 그지없는 아버지 하나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아무런 볼품이 없는 것,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 아무 상품가치가 없는 그 참새 한 마리에게도 눈길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머리털 한 올 한 올 다 세는 듯 자녀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사람 목숨을 참새 한 마리 값 취급도 안 하던 그 시절, 상품성이 없어 덤으로 끼워 팔아야 하는 참새 신세보다도 형편없는 처지를 살아내던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시고 따스한 손길로 품어 주십니다. 그러니 공중의 까마귀와 참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십시오. 하늘 아버지께서 까마귀 새끼의 애절한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먹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덤으로 팔리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돌보십니다. 아버지께서 오늘 있다가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오늘도 기르시고 입히시는 하늘 아버지의 손길을 밝은 눈으로 내다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공중의 까마귀와 참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까마귀나 참새보다 귀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들풀보다 귀하지 않습니까? 밝은 눈으로 하늘 아버지의 귀한 자녀 된 자신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내어 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그의 사랑하는 자녀된 우리를 생각하십시오(롬 8:31~32).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반문하시며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호소하시는 아버지의 애잔한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큰 사람은 하늘 아버지의 손길과 자녀 된 우리의 귀함을 말씀대로 믿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돌보시는 손길과 자녀의 귀함을 믿는 믿음이 작으면 이방인처럼 끊임없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고자 염려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돌보시는 귀한 자녀입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창밖을내다보며 생각하십시오.

오늘을 위한 충분한 은혜

염려하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눈을 들어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그분의 귀한 자녀 됨을 내다보았다면 이제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믿고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만으로 족한 삶을 살고자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함'을 아실 줄 믿고 아버지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아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것입니다(마 6:32~33). 오늘을 위한 충분한 은혜로 더하실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자녀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야합니다. 재물을 땅에 쌓아 두려는 욕망에서 시작된 탐욕적 염려를 멈추어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입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은 분량만으로 충분합니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가 있습니다. 어제의 무게와 내일의 불안이 아무리 크더라도 오늘을 살아 내는 자리에 하늘 아버지께서 여전한 은혜로 더하십니다. 우리가 어제를 바꿀 수 없고 내일의 불안을 덜어 낼 수 없지만, 오늘을 주님께 맡길 수는 있습니다. 더하시는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맡기고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마 6:34).

최근 불과 열흘 사이에 교우 가족 세 분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60대 후반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병도 없었는데 길에서 쓰러진 지 20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50을 막 넘긴 동생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정받는 공직자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발병한 지 두 달 만에 짧은 영접 기도와 함께 소천했습니다. 50대 중반의 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자기 쓰러져 사흘간 세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깨어나지 못한 채 잠들었습니다. 누가 내일을 말할 수 있습니까? 내일은 오직 하늘 아버지의 손에 있을 뿐입니다.

염려가 치명적인 이유는 오늘을 죽여서 내일을 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갉아먹으며 내일을 사려는 것이 탐욕적 염려입니다. 그러나 내일은 늘 내일일 뿐입니다. 내일은 내 일이 아닙니다. 내일은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오늘 한 날을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의 우리를 돌보시고 내일의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믿고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은 오늘을 살아갈 뿐입니다. 내일은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염려하실 것입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합니다. 더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그의 돌보시는 은혜로 오늘을 살아가는 삶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충족한 삶입니다.

『그럼에도 육아』를 쓴 정지우 작가는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위한 국가와 사회 공동체의 책임에 대한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어려움을 겪어 내며 그 속에서 기쁨과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자녀가 자라는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고, 힘든 시간을 생략한 채 어느 날 아이가 잘 자란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오늘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비록 오늘이 힘겨워도 그 시간을 함께하며 참고 견디고 사랑하는 삶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얼마 전 후배 목사가 담임으로 위임하는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은퇴하는 목사님은 지난 세월 섬겨 온 목회 여정을 두고 "황홀한 감옥이었습니다.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그렇게 34년을 섬겨 온 걸음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도들에게 고맙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후배는 위임이 확정되기까지 7년을 견뎌 내야 했습니다. 지난 시간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참고 견뎌야 하는 시간이 왜 그렇게 더디고 힘겨운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고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함께 기도하고 씨름하며 이겨 내고 또 이겨 내야 했습니다.

위임 예배를 마친 후 다과 자리에서 우연히 후배의 세 자녀와 함께했습니다. 나고 자라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아이들이 고마웠습니다. 부모는 부르심이 있어서 낯선 지방에서 긴 시간을 참고 견딜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무슨 죄겠습니까? 사춘기가 한창이던 세 아이가 낯선 곳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어려움이 주마등처럼 스쳤습니다.

문득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너희들이 잘 참아 주고 견뎌줘서 너무나 고맙다."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잠시 목이 메고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정말 그 시간을 잘 살아 준 아이들과 후배 목사 부부가 대견하고 고마웠습니다.

나중에 후배의 아내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는 둘째 아이가 위임하는 아빠를 보며 참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세 아이 중에 가장 아파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그 아이가 가장 많이 감사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자녀의 기억 속에 아빠도 잘 참고 잘 이겨냈던 것입니다.

한 날의 괴로움으로 족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더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믿고 오늘을 살아가면 됩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한 날의 무게로 충족합니다. 오늘 하루치의 은혜면 족합니다.

족한 은혜를 더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향한 간절함을 이어령은 <하늘의 새들의 백합꽃>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시지만

나는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시지만

백합처럼 비단을 짜 제 몸을 치장할 줄 모릅니다.

당신이 아니 계시면 추워서 떨고

배고파 울었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하늘을 나는 새

들판에 피는 백합도 부럽지 않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부터

날개가 없어도 하늘을 날고

베틀이 없어도 베를짭니다.

그래도 근심 걱정이 남아 있어요.

당신이 너무 먼 곳에 있어

보이지 않을까 봐서

오늘이 버거운 한 날이라면, "아빠! 아버지!" 하며 자녀를 돌보시고 모든 것으로 더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불러야 합니다.

그런 날은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으신 하늘 아버지의 신실하

심을 노래하며 들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출처

산상수훈 언덕에서 말씀 찾기_삶의 자리를 바꾸는 예수의 말씀 13

권종렬, 샘솟는기쁨,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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