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포럼 - 조명희전집을 읽고(2)] 동양일보 2017년 3월 5일
생명과 생활의 부조화에서 개벽을 꿈꾸다
- 한국 사상으로 읽는 조명희 -
조성환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포석 조명희(1894~1938)의 시를 관통하는 주제는 ‘생명’이고, 그의 소설을 지배하는 테마는 ‘생활’이며, 그가 지향한 세계는 ‘살림’이다. 생명은 만물을 생성하는 우주의 근원적 힘이고(“우주생명”), 생활은 그 힘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며, 살림은 생활 속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인문적 행위이다. 그는 생명과 생활의 불일치 사이에서 번뇌하고, 살림 없는 생활을 보며 아파한다. “생명이 뛰노는 생활”을 그리워하고, 모두가 하늘인 세상을 동경한다. 그래서 민중들의 혁명을 꿈꾸고 우주적인 생활을 회복하고자 한다.
조명희에게는 대자연의 생명력이야말로 철학과 종교의 궁극적 원천이다. 그것은 ‘믿음’의 최종 근거이자 신비한 ‘경이’ 그 자체이다. 인간은 대자연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고,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한 부모로부터 나온 한 형제에 다름없다. 그래서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대자연은 ‘하느님’이나 ‘신’으로 인격화되고, 새로 태어나는 생명체는 ‘우주의 걸작’과 ‘신의 모델’로 축복받고 신성시된다. 아이의 탄생은 ‘우주생명의 현상’이자 신성한 ‘님과의 만남’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두 개의 부모가 있는 셈이다. 하나는 선천적인 부모로서의 자연이고(‘땅의 어머니’, ‘자연의 아들’)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부모로서의 양육자이다. ‘천지부모’‘(『해월신사법설』)는 인간의 탄생과 성장·소멸을 관통하는 ‘저절로 그러한’(自然) 우주적 생명력이고, 사회부모는 그 생명력을 길러주는 도우미로서의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이 선천과 후천의 에너지가 결합되어야 비로소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의 자식인 아이일지라도 ‘밥’이 없으면 생명은 고갈되고 사랑이 메말라진다. ‘밥’은 생명과 생활을 이어주는 매개물이다. 인간은 밥을 통해서 우주의 생명력을 공급받고(‘人依食’『해월신사법설』), 그 밥은 노동을 통해서 주어진다. 밥은 자연과 인간의 협업의 산물이다(‘天人相與’ 『해월신사법설』). 바로 여기에 가장의 역할이 있다. 어미새가 모이를 구해다가 아기새에게 먹이듯이, 가장은 일을 해서 밥을 먹인다. 이것이 생활의 영역이다. 생활은 자연의 ‘생명의 바퀴’를 굴리는 사회적 활동이다.
그 활동이 능동적이고 자유로우면 ‘살림’이 되고, 수동적이고 위축되면 ‘살이’가 된다. 살림은 생명이 뛰놀고 사랑이 넘치며 자기가 살아 있는 생활이다. 예술과 철학 그리고 종교는 모두 살아 있는 자기의 표현이다.
조명희가 산 시대는 생활이 파괴되고 ‘살림’이 ‘살이’가 된 세상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생활권외로 추방된” 타자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고생살이”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살이’를 살지만 ‘살림’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글을 쓰고 문학을 버리지 못한다. 그에게는 살이에 고갈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살이’의 세상을 ‘살림’의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해 그가 선택한 길은 ‘사상’에 의한 ‘혁명’이다. 그 사상의 핵심은 자유와 평등이고 그 주체는 민중과 타자이다.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뜬 민중들이 혁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 새 세상은 불평등한 신분과 윤리적인 차별을 넘어서, 모두가 ‘밥’과 ‘생명’을 공유하는 공공세계이다.
그런데 그는 사회변혁의 사상적 동력을 바깥에서 찾지 않고 내부에서 찾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의 전통적인 ‘하늘사상’이다(그가 사회주의에 공감한 것은 이 사상의 현대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고대 한국의 ‘공공적인’ 제천행사나 단군신화의 ‘홍익인간’ 이념에서 엿볼 수 있듯이, 하늘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고 존엄하며 자유롭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 하늘이 차별적인 신분제와 정신적인 식민지에 의해서 상실된 것이다. 조명희의 혁명은 이 빼앗긴 하늘의 회복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개벽사상’을 잇고 있다. 개벽의 키워드는 ‘자생’이다. 즉 ‘스스로’ 살 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다. 조명희는 “우리는 우리의 살 집을 장만하지 못해” 왔다고 개탄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남의 땅에다 남의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즉 줄곧 ‘기숙사’에서 ‘집 없는 나그네’로 살아온 것이다. 더부살이를 청산하고 자기 집을 짓는 것, 이것이 그가 생각한 ‘살림’이다.
그래서 그의 혁명은, 단순한 정치적 혁명이나 제도적 개혁이 아닌 생활의 개벽이고, 그것의 사상적 동력을 ‘하늘’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사상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