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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키엄] 근대 한국종교의 공공성 재구축

작성자혼돈나라|작성시간17.03.17|조회수99 목록 댓글 0

  《개벽신문》62호 (2017년 3월)


     근대문명 수용과정에 나타난 한국종교의 ‘공공성’ 재구축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제3회 대학중점연구 3회 콜로키움을 마치며 -

                                                                    

                                                                 리산은숙 | 온갖문제연구실


최근 한국종교는 ‘닫힌 종교’라는 비판 속에서 시민사회 영역에서 제기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열린 종교’로의 전환을 요청받고 있다. 지금까지 근대문명 수용시기에 성립된 한국종교에 대한 연구는 호교론적 연구, 운동사 중심, 공통사상을 비교·추출하는 것 등이었다. 한국종교는 유·불·도로 대표되는 전통종교나 외래종교(천주교, 기독교)에 비해 소외되어 왔으나, 전통종교의 혁신과 근대문명 수용과정에 수입된 외래종교의 도전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전통의 기반 위에 창조적으로 대응해 왔다.


지난해 연말부터 근대 한국종교에 내재된 문제의식을 잠정적으로 ‘공공성’으로 설정하고 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원광대 원불교학과 박맹수교수를 중심으로 역사학, 종교학, 철학, 경제학, 정치학 등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팀을 꾸렸다. 이들은 문명의 대전환기에 근대문명과 맞선 한국종교가 사회적 영성과 공공성을 어떻게 추구했는지 교리와 사상 및 실천(운동)을 분석해 규명하고, 그 공공성의 현대적 적용 가능성과 한국종교의 미래지향적 가치를 드러내고자 한다. 또 19세기말(한말 개화기)부터 1945년 해방직전(일제강점기)까지 한국에서 자생한 동학·천도교,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를 중심으로 서구적 공공성의 관점만으로는 밝힐 수 없는 ‘비서구적 공공성’ 한국적 공공성을 찾아내려고 한다. 한국종교 창시자들은 근대문명과 적극적으로 대면하였고 시대적 요구와 과제에 대해 사회적 영성과 공공성의 측면을 분명하게 제시했으며, 서구의 시민적 공공성과는 다르게 개인과 사회, 자연이 갈등관계가 아닌 조화와 공생에 바탕을 두고 사회적 영성과 우주적 공공성을 함께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매주 수요일 4개 한국종교에 대해 연구하고,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는 콜로키움을 진행한다. 3회 콜로키움에서 서강대 철학과 강사 조성환이 <한국적 공공의 모색 - 동학의 개벽사상을 중심으로>를 발표했고,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의 연구교수 야규 마코토가 <일본에서의 종교와 공공성 연구>를 교토포럼의 활동을 중심으로 발표했다.


조성환은 전통시대에 모든 사물이나 존재에 도(道)나 리(理)가 상정되고 있듯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모든 사물과 존재의 바람직한 상태로 공공성이 제시되고 있다고 본다. 공공(公共)이라는 말은 지금부터 약 2천 년 전에 쓰여진 사마천의 <<사기>>에 “법이라는 것은 천자라 할지라도 천하와 함께 ‘공공’하는 바입니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여기서 공공은 모두가 공유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로 쓰이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모두가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공공이라는 말에는 사실적 명제와 함께 가치실현을 위한 당위적 명제가 모두 틀어 있다고 한다.


이런 공(公)과 공공(公共)의 의미와 용례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그 변화의 원인은 서양사상의 수용과 제국일본의 탄생이다. 일본에서는 ‘공’을 국가로 치환시켜 국가를 위해 개인은 희생해야 한다는 멸사봉공이 주창되고 이는 국가중심주의, 국가제일주의의 초석이 된다. 근대 일본에서 국(國)이 공(公)이 되고 공공(公共)이 국가(國家)라는 공간에 갇히게 되면서 국가적 공공성이 출현하게 되면서 공공이 지니고 있던 우주적 차원의 보편성과 실천성이 탈색된다.


19세기 말 조선의 사정은 공(公)의 사상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서양근대라는 외재적인 공의 도전으로 기존의 성리학적 리(理)가 더 이상 공(公)의 역할을 못했고, 기존의 공(公)을 담당했던 사대부관료들이 새로운 공을 창조하지 못하는 공적 가치의 붕괴와 요동의 시기였다. 수운 최제우는 공공해야 할 가치의 부재와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유불도의 쇠운’과 ‘각자위심(各自爲心)’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 중국이나 서양사상이 아닌 한국의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제도개혁보다는 심신수양에 초점을 맞추고, 철학계몽이 아닌 종교운동의 형태로, 부국강병이 아닌 보국안민을 슬로건으로 새로운 공적 가치를 창출하려고 한 이들이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 대종교를 중광(重光)한 나철,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 원불교를 개교한 박중빈이다. 대부분 유교적 지식인으로 출발했지만 유교를 고집하거나 서양에 기대지 않으면서 독자적 깨달음과 시대적 통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론을 제시하고 그것을 ‘개벽’이라는 말로 담아낸 사람들이다. 학계에서는 이들을 민족종교 내지는 민중종교의 창시자로 분류하지만, 조성환은 개화파와 대비되는 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개벽파’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한다.


최시형의 천인상여(天人相與), 대종교의 개천(開天), 강증산의 천지공사(天地公事), 원불교의 천지은(天地恩) 등은 모두 우주의 공공을 지향하고 있다. 이들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천인관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공공성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자생적 공공성’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최제우의 ‘다시개벽’이란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개벽이란 결코 일회적인 우주적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이루어 나가야 하는 지속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은 수양(修養)을 필요로 한다. 최제우에게 있어 개벽은 심신수양에 의해 도달해야 할 정신적 경지와 이상적 사회를 의미했다. 최제우가 동학의 다른 말로 제시한 ‘천도’(天道)란 천리나 본성 또는 자연이나 마음이 아닌 ‘천’(天)을 수양의 준거로 삼는 실천체계(道)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도는 ‘천학’(=하늘을 최고의 범주로 삼는 학문)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동학이 한국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하늘사상을 처음으로 학문화했음을 의미한다. 즉, 처음으로 하늘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최제우는 하늘을 공공하는 전통을 바탕으로 기존의 인간관·자연관·세계관·천인관을 탈구축하는 새로운 문명을 제시했다.


유교가 동학을 배척한 이유는, 동학이 유교의 도리(차등적 질서) 이전에 하늘(평등적 존엄)을 상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의 도리(질서)를 뒤흔든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학에서 자기 안의 하늘을 발견(侍天主)하는 것은 곧 자기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것이다. 타자를 공경하는 것은 곧 자기를 공경하는 것이 된다. 나와 타인, 인간과 사물은 모두 하늘을 매개로 하나로 묶여진다. 그래서 동학에서 공공한다는 것은 하늘과 함께하는 것을 말하고(天人公共), 그것은 곧 타인을 공경하는 것이다. 공경함이 곧 공공함인 것이다. 이것이 동학이 지향한 새로운 공공세계이다.


“모두가 하늘이다”는 동학의 메시지는 기존의 도(道)와 리(理)의 질서에서 소외되었던 농민을 새로운 공공세계를 만들어가는 공공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했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은 민(民)이 통치의 대상에서 정치적 주체로 전환되었음을 상징하는 슬로건이다. 동학에서 하늘의 발견은 민(民)이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공공세계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한국적 근대의 발견이자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조성환은 주장한다.


야규 마코토는 일본의 국가신도(國家神道)의 역사를 1890년을 경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일본 학계와 언론계 일부에서는 국가신도를 일본의 공공종교(公共宗 敎) 또는 시민종교(市民宗敎)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야규 마코토는 공공(公共)을 공(公)과 사(私)사이에서 공과 사를 잇고 살리는 것으로 보는 공공철학의 입장에서는 국가신교가 공종교(公宗敎)였지 공공종교라고 말할 수 없고, 시민종교라기보다 신민종교(臣民宗敎)라고 해야 옳다고 일갈했다. 또 메이지유신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GHQ(연합군총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해체되기까지 지속된 국가신도프로젝트는 적어도 근대에서는 따로 유래가 없는 종교적 실험으로, 오늘날 종교의 공공성을 연구함에 있어 거울로 삼을 만하다고 했다.


메이지정부는 초대천황인 진무천황(神武天皇)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원점으로 되돌아 갈 것을 표방하며 제정일치를 내세워 신도와 국가와 천황을 연결시켜 천황의 신권통치를 선언했다. 1)천황의 체통을 확립시키고 2)유신 주도세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3)분열된 민심을 천황의 권위아래 수습해 하나로 통합하고 4)서구 기독교의 침투와 확산을 막기 위해 신도 국교화(國敎化)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정부의 국교 확립 시도가 실패하는 과정을 바라본 이토 히로부미는 1890년 전후 유럽 헌법의 바탕에 종교가 기축으로 깔려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유럽 헌법을 베껴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법을 지탱하는 정신적 또는 형이상학적 지주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유럽에는 있는 그 기축이 일본에는 없고 재래종교인 불교와 신도는 모두 기축이 될 만한 힘이 없다고 판단했다. 한 국가의 헌법에는 기축=공적 종교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 그가 찾아낸 것은 천황과 황실이었다. 이토는 제국헌법에서 천황을 기축으로 삼으면서 군권을 속박하거나 훼손하지 않는데 신경을 썼다. 제국헌법 제1조에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 一系)의 천황이 통치할 것, ”제3조는 “천황은 신성하니 침해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이로써 천황은 헌법상으로도 신성한 권위와 막강한 권력을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이토는 만세일계의 개념과 구성원(신민)의 일체감을 원리로 삼는 가부장적 공동체 국가를 구상했다.


1890년 무렵부터 국체(國體)관념은 친부인권설보다 천황종가론(宗家論), 가족국가론, 국가유기체론과 같은 전체주의적인 국가관, 정치이론과 결부되었다. 일본주의를 주창한 문학가는 건국 이래 황실은 일본 민족의 종가이며 입헌적 족부통치국으로 규정했고, 헌법학자는 가족국가론의 밑바탕에 천황· 왕실과 일반신민을 의제적(擬制的)가족으로 유기체적 통일을 이 루는 것이 국가 민족 인종간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유리하다는 전략이 숨어있다고 했다. 국체개념은 유교 도덕과 서구 법학의 사회유기체론의 영향을 받으며 점차 구체적 의미를 띠 게 되었고, 그것에 반대하는 모든 학설·사상·주의·이념을 탄압하는 무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GHQ(점령군총사령부)가 신도지령(神道指令:국가신도, 신사 신도에 대한 정부의 보장, 지원 보전, 감독 및 홍보 금지)을 내리고 국가신도(State Shinto)의 해체를 지시했다. 이로써 대동아전쟁, 팔굉일우(八紘一宇) 등 국가신도, 군국주의 및 과격한 국가주의를 연상케 하는 용어의 사용이 금지되고, 완전한 정교분리(政敎 分離) 정책이 추진되면서 신사에 대한 국가의 보호· 관여도 정지되었다.

야규 마코토는 신사·신궁(神宮)은 추상적인 국체사상과 신국(神國)관념을 가시화·구체화시키는 도구였고 신사참배는 국체사상을 신체화·규율화시키는 장치로서 국제사상과 신도,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국가신도는 국체, 종교가 아닌 종교, 국교가 아닌 국교로써 대일본제국 국민들의 생각과 행동을 강하게 지배해 왔다며, 국가신도의 부(負)의 측면에서 볼 때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공공성은 어떤 식이어야 되는가? 어떻게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 유지하면서 이론이나 타자, 마이너리티를 허용하고 억압적·독선적·호전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를 묻는다.

아젠다명 <근대문명 수용과정에 나타난 한국종교의 ‘공공성’ 재구축> 프로젝트에서 새로운 한국의 희망을 찾을 수 있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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