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에서 공공철학하기(6) 《개벽신문》 제64호 (2017년 5-6월호)
창조와 공공성
- 우리의 창조를 가로막는 것들 -
조성환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아마도 이 시대에 ‘창조’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낯설면서도 절실한 과제 또한 없을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창조경제’를 표방하면서 ‘미래창조과학부’를 신설한 것도 이러한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것은 한편으로는 시대적 요청에 대한 정부 차원의 응답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대로 시행되기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던 장기적 과제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점은 지난 정부 출범과 더불어 “창조경제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끊임없는 논란으로 드러났다(김형준, 〈창조경제란 무엇인가〉, 《여성신문》 2013.04.04.). 그리고 이 논란은 정권이 바뀐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해결의 숙제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창조경제는 구체적인 방법론과 프로그램이 결여된 채, 단지 ‘융복합’이라는 이상적인 슬로건만 제창된 느낌이다. 그리고 이 슬로건조차도 시민들의 공감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위로부터 하달되는 형태였다. 창조경제가 지난 4년 내내 공공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개념의 모호성과 구체적인 방법론의 결여, 그리고 국민과의 소통부족이 非창조적인 정책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공자의 “술이부작”
내가 생각하기에 창조경제가 미완의 과제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창조’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 개념이 낯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동아시아문화가 기본적으로 ‘창조’보다는 ‘해석’을 강조하는 전통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유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공자는 그것을 ‘述’(술)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였다.
《논어》를 대표하는 어구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學而時習(학이시습), 克己復禮(극기복례), 仁者人也(인자인야), 里仁爲美(리인위미), 好學者(호학자) 등등. 그러나 나는 “述而不作(술이부작)”이야말로 공자를 특징짓는 가장 핵심적인 어구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동아시아사상사라는 맥락에서 보았을 때에는 - .
“述而不作”은 공자가 자신의 사상적 작업을 스스로 규정한 말로 “(나는) ‘述’을 했지 ‘作’을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作’과 대비되고 있는 ‘述’은, ‘서술하다’고 할 때의 ‘述’로, 영어로는 보통 ‘interpret’(해석하다)로 번역된다. 그런데 ‘述’에는 단순한 ‘해석’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전달’이라는 뜻도 담겨 있어서, ‘transmit’(전달하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따라서 ‘述’은 ‘해석을 통한 전달’ 또는 ‘전달을 위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述而不作”의 ‘述’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화가《논어》「양화」편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공자가 어느 날 “나는 말이 없고자 한다”(予欲無言)고 선언하자, 제자인 자공은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은 무엇을 ‘술’합니까?”(子如不言則小子何述焉)라고 반문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사시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성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述’은 일차적으로 “스승의 말씀을 받아 적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노트 필기’ 같은 것이다. 그런데 “子曰”(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로 시작되는《논어》에 갑자기 ‘無言’(무언)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뜻밖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공의 당황스러움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에서 ‘天’(천)은, 그리스도교의 신(God)과 같이 말씀(言)에 의해서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가 아니라, 아무런 의도나 목적 없이(不言) 만물을 생성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공자는 이 말이 없는 ‘天’을 닮으려 하고 있다(Brook Ziporyn의 해석 참조).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述하지 말고 天을 述하라고 암묵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 의하면 ‘述’이란 “스승의 말씀을 서술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공자에게 있어 스승은 문왕이나 무왕과 같은 주나라 초기의 성왕(聖王)들이었다. 이 성왕들은 예악(禮樂)으로 대표되는 문물제도를 만든 이른바 ‘문화 영웅’들로, 공자는 이들의 문화 창조 작업을 ‘作’으로 평가하고, 자신은 이들의 ‘作’을 나름대로 ‘述’해서 후대에 전파하는 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자기 규정은 후대에 “성인의 ‘作’과 현인의 ‘述’”이라는 형태로 정리되었는데, 가령《예기》에서는 “作한 자를 성인이라고 하고 述한 자를 명인(=현인)이라고 한다.”(作者之謂聖, 述者之謂明.)고 하였다. 즉 ‘作’은 고대의 성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술어로, 후대의 사상가들은 그것을 ‘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학문형태가 ‘성인의 가르침’(聖敎)과 그것에 대한 ‘현인의 주석’(賢傳)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해석의 사상사
공자의 “述而不作”은 동아시아문화가 창조(作)보다는 해석(述)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공자는 이 ‘述’의 작업을 통해서 후대에 성인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만약에 공자가 자신을 “述而不作”이 아니라 “作而不述”(作하였지 述하지 않았다)이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름없는 평범한 선생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동아시아문화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述’을 통한 문화의 해석과 계승이야말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핵심인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도통(道統)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사승(師承) 관계라는 학맥을 통해서 행해져 왔다.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에서는 스승의 ‘말씀’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스승을 비롯하여 그에 버금가는 윗사람, 가령 부모나 연장자의 뜻에 따르는(述) 것이 이상적인 행위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점은 ‘孝’(효)의 원래 의미가 ‘繼志’(계지), 즉 “부모의 뜻을 잇는 것”이라는 사실로부터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지나치면 스승이나 부모 또는 윗사람의 생각이나 권위에 제자나 자식 또는 아랫사람의 생각이나 정신이 예속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영혼의 식민지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주체성이 발현될 길이 없다. 주체성이 발현되지 못하면 창조성은 당연히 기대하기 어렵다.
한편 공자가 성인을 述했다고 한다면 한국은 전통적으로 중국을 述해 왔다. 특히 조선은 ‘공자’와 그를 述한 ‘주자’를 述한 나라이다. 퇴계는 성리학 문헌들을 편집하거나 해석했을(述) 뿐, 결코 자신의 저작(作)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유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학자가 되었다. 퇴계야말로 “述而不作”의 전통을 계승한 전형적인 유학자인 셈이다.
한국이 역사적으로 중국을 ‘述’해 왔다고 한다면, 어느 새인가 ‘述’의 체질이 자신들의 DNA에 새겨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에는 일본을 ‘述’하고, 오늘날에는 서양을 ‘述’하는 형태로 강화되었다. ‘述’을 잘하는 이가 권위있는 학자로 여겨지고, 모든 문물제도는 외국의 것을 ‘述’하는 형태로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이런 문화적 전통 속에서 갑작스레 창조를 추구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일 것이다.
한국의 ‘작’(作)
그렇다면 한국역사에서 ‘作’의 사례는 찾아볼 수 없을까?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내가 아는 한 한국사상사에서 ‘作’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세종이 유일한 예일 것이다. 정인지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서 ‘正音之作’(훈민정음의 창조)이라고 평가하면서 ‘無所祖述’(스승삼아 서술한 것이 없다)이라고 부연하고 있다(《훈민정음 해례본》). 즉 이전에 선례나 스승이 없는 전적으로 새로운 창작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한글(諺文) 사용에 대한 최만리 등의 반대는 전통적인 ‘述’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한자를 통해서 중국문화를 ‘述’하는 것이야말로 문명적 행위로, 새로운 글자로 한문을 습득하는 것은 중국의 비웃음을 살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중국에 ‘동화’되려고 하는 발상으로 전형적인 유학자의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세종은 한국과 중국의 현실적인 ‘차이’를 인식하고서(“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유학자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의 입장 차이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作’의 주체를 누구로 보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최만리에게 있어서 ‘작’은, 마치 공자가 그랬듯이, 고대 중국의 성인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반면에, 세종은 자기도 ‘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作’을 한 번도 꿈꿔보지 못한 자는 그것이 영원히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세종은 자신이 ‘作’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문제는 자기 자신밖에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랏말이 중국과 다르다”는 현실은 조선인의 문제이다. 그런데 이 조선인의 문제를 외국에서 해결해 줄 리가 만무하다. 세종이 보기에 최만리와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은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맡기고 있는 방관자이거나, 아니면 자기 다리가 가려운데 남의 다리를 긁고 있는 전도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종과 장자, 최만리와 공자
이렇게 보면 현실문제에 대한 세종의 주체적인 대응이 창조적 작업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인식만으로 창조의 작업은 완성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기존의 사고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종래와는 다른 전적인 새로움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세종은 유학적 세계관을 어느 정도 상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즉 유교를 맹목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문자와는 다른 조선만의 문자를 만들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 유교를 상대화할 수 있었을까? 유학자이면서도 다른 유학자들과 어떻게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을까?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만한 점은 세종이 재위 초기에 《장자》를 신하들에게 인쇄해서 반포했다는 사실이다(《세종실록》7년 1월 17일자). 주지하다시피《장자》는 유교사회에서는 이단시되는 도가계열의 문헌이다. 특히 성리학을 유일한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도교와 불교 문헌은 공식적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장자》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은 - 물론 조선초기라는 상황적 유리함은 있었겠지만 - 그가 이른바 정통 유학자와는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나는 바로 이 점이야말로 세종의 한글창제를 가능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의 원초적 동기는 “어여삐 여겨”라는 유교적 애민사상이었을지 몰라도, 그것의 착수를 가능하게 한 것은 장자와 같은 사상적 자유로움이 아니었을까? 만약에 이러한 추측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장자에게서 창조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한글을 거부한 최만리에게서 창조를 가로막는 요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의도 하에 최만리 등의 한글반대상소(《세종실록》26년 2월 20일)를 장자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우리의 창조를 가로막는 것들
최만리의 첫 번째 반대이유는 한글의 합자(合字)방식 등이 “옛 것에 반한다”(反於古)는 것이었다. 즉 고래로부터의 전통을 계승해야 하는 ‘술’(述)의 문화에 위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만이 옳은 것이라는 일종의 전통주의자적 발상이자, 새로움은 모두 전통에 근거해야 한다는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적 논리이다.
그러나 장자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오히려 전통에 얽매어 있는(束於古) 상태로, 이러한 부자유스런 상태에서는 새로운 현실이 요구하는 새로운 해법을(應物變化) 생각해내기 어렵게 된다. 최만리가 한글창제를 두고 “옛 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厭舊喜新) 불안함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면, 반대로 최만리야말로 “옛 것을 좋아하고 새것을 싫어하는” 답답함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반대 이유는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非문명적 행위라는 것이다(“오직 오랑캐들만 자신의 글자가 있다”). 여기에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와 자신은 문명이 아니라는 열등의식이 깔려 있다. 이것은 문명의 중심은 언제나 중국이고 주변국은 그것을 배워야 하는 야만이라는 이른바 ‘중화주의’적 사고의 산물이다.
이것은 브룩 지포린의 표현을 빌리면, 중국만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일종의 ‘단중심주의’(unicentrism)적 세계관으로, 성리학에서는 이러한 중심주의가 ‘하나의 리’(一理)와 ‘맑은 기’(淸氣)를 중심으로 동심원적으로 차등을 매기는 리기론이라는 철학체계로 정당화된다. 이에 반해 장자는 “도는 어디에나 있다”(無所不在)고 하는 ‘전중심주의’(omnicentrism)를 주장하였다(브룩 지포린 참조). 즉 세상의 모든 것이 중심으로, 애초에 단일한 중심 같은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모든 것이 서로 의존적 관계에 있고, 따라서 단일한 가치의 중심을 설정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하는 전일론적(holism) 세계관이 깔려 있다.
이것을 세종에게 적용해보면, 세종에게 있어 세상의 중심은 단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도 될 수 있다, 즉 적어도 두 개의 중심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다중심주의적(multicentrism)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때 한국이 중심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의미하고, 바로 그렇게 본 세상이야말로 ‘도’라는 것이다. 실제로 세종은 한글뿐만 아니라 한국의 실정에 맞는 음악이나 달력 등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곧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중국과는 다른 자신만의 중심이 필요하다는 독립의 선언이다.
세 번째 반대 이유는 쓰기 편리한 한글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이 굳이 어렵게 성리학을 공부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단지 27자의 언문만으로도 세상에 입신출세할 수 있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관리들이 고심해서 성리학을 궁구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최만리는 한글로는 성리학과 같은 심오한 철학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으로 말하면 이른바 외국어 지상주의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한자나 영어로 철학이나 학문을 해야 만이 심오한 철학과 수준높은 학문이 가능하다는 생각인 것이다.
여기에는 성인은 항상 바깥에 있고 진리는 항상 외국어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하는 정신적 식민지의식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 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한국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다. 최만리가 자신의 글자를 만들어서 자신의 생각과 학문을 담아낼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반면에, 세종은 한국인의 소리구조에 맞는, 그래서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고 사용하기에도 편리하여 모두에게 접근가능한(=공공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를 ‘발명’(作)하면, 그것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공공성의 기준을 중국과 지식인이 아닌 한국과 일반인에 두고 있는 것이다.
창조경제와 영혼의 탈식민지화
장자는 바람을 타고 다니는 신선 열자를 “여전히 바람에 기대고 있다”(待於風)고 비판하였다.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도’를 말할 수 없는 것은 ‘가르침’에 얽매여 있기(束於敎) 때문이라고 하였다. 세종의 입장에서 보면 최만리의 주장은 전통(古), 중화(華), 그리고 한자(文)에 기대고 있고, 유학이라는 가르침(敎)에 얽매여 있는, 그래서 영혼이 굳어버리고 만 ‘성심’(成心)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오사카대학의 후카오 요코 교수는 이런 상태를 “혼(魂)의 식민지상태”라고 표현하였다. 가정과 학교의 교육이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속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만리는 비단 500년 전의 조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한국과 일본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사회를 뿌리깊게 지배하고 있는 중국중심, 서구중심, 권력중심, 학력중심, 지역중심, 어른중심과 같은 온갖 ‘중심주의’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고질적인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의 영혼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으며, 따라서 새로운 창조를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경제란 반(半)식민지 상태에 있는 우리의 영혼을 해방시키는 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초등학교부터의 교육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뒷받침되어야만 비로소 한국문화가 ‘술’의 문화에서 ‘작’의 문화로 전환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대전환의 프로그램을 구상하는데 있어 신라의 풍류와 중국의 장자, 그리고 서양의 리버럴 아츠 전통이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치원이 말하는 “포함삼교”(包含三敎)는 유불도 삼교의 어느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이들을 자유롭게 오가며 소요하는(風流) 창조적인 영혼을 양성하겠다는 뜻이며, 그것은 서양의 리버럴 아츠 정신과도 상통한다. 인문학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고전공부나 교양습득이 아니라, 갇힌 사고를 트인 사고로, 닫힌 마음을 열린 마음으로, 구속된 영혼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탈바꿈시켜 주는 도구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경제나 인문한국(HK)은 대다수의 국민이 이런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참고문헌】
조성환, 〈세종의 한글창제와 동학의 개벽정신〉, 《리더십에세이》155, 2014.03.10.
조성환, 〈세종이 장자를 나눠준 까닭은?〉, 《리더십에세이》168, 2014.06.10.
노경덕,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교육〉, 《한국일보》, 2015.12.03.
후카오 요코, 〈혼의 탈식민지화란 무엇을 말하는가?〉, 《동양일보》 2017.04.23.
Brook Ziropyn, “How Many are the Ten Thousand Things and I?,” Hiding the world in the World edited by Scott Cook,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