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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신문] 일본인이 본 영화 '명량'의 매력_기타지마 기신

작성자혼돈나라|작성시간17.07.27|조회수663 목록 댓글 0


개벽신문65(20177)

 

일본인이 본 영화 명량의 매력

- 한국의 민중사상사적 관점에서 -


욧카이치(四日市)대학 명예교수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역자주) 이 글은 일본에서 간행되는<季論> 2016년 가을호에 게재된 韓国映画 '鳴梁'魅力とその現代的意義(한국영화 명량의 매력과 그 현대적 의의)라는 제목의 글로, 영화 명량을 한국의 민중사상사라는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다. 저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임진왜란에 관한 연구서는 물론이고 일본어로 번역된 <난중일기>까지 참고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역자와 함께 직접 진도로 내려가서 울둘목의 현장을 견학하고 왔다. 대중교통으로 서울에서 진도를 오가는 동안, 역자는 차 안에서 저자와 한국의 민중사상 및 일본의 불교사상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원래 일본어 원고에는 영화대사의 인용이 영어자막을 일본어로 번역한 문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국어로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역자가 영화를 다시 보면서 영화 속에 나오는 한글 대사로 바꾸었다.

 

 

시작하며

 

작년 10, 나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있었던 국제학술대회동아시아의 대동사상과 평화공동체 한중일의 대동사상과 대동운동(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주최)에 참가하였다. 대회가 끝나고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에 위치한 교보문고에서 2014년에 상영된 영화 명량DVD(영어자막판)를 구입하였다. 이 영화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에 맞서 싸우는 이순신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한국에서 큰 흥행을 거두었다고 일본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한국드라마는 이전부터 일본에서도 평이 좋아서 매일같이 TV에서 방영되고 있다. 그러나 영화 명량은 개봉되지 않았고 TV에서도 방영되지 않았다. ‘헤이트 스피치를 행하는 혐한(嫌韓)’ 세력, 개헌세력에 대한 커다란 공포심이 있어서일까? 그러나 이 영화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대 동아시아의 평화적 공생이나 주체적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소론에서는 명량의 문제제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1.명량의 줄거리


시대적 배경

 

명량(鳴梁)’이란 진도와 해남 사이에 있는 폭이 300미터가 채 안 되는 좁은 해협의 이름이다. 이 해협에서 15979월에 전개된, 13척의 조선함대와 133척의 일본함대의 유명한 해전을 그린 작품이 명량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제국을 정복하기 위해서 15928년에 두 차례에 걸친 조선침략을 감행하였다. 일본에서는 분록(文禄)케쵸(慶長)의 에키()’(한국에서는 임진왜란정유재란)라고 불리는 이 침략전쟁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록의 에키’(임진왜란)에서는 약16만의 병력을, ‘케이쵸의 에키’(정유재란)에서는 약 14만명의 병력을 각각 한반도에 투입했는데, 조선 전역에서의 의병의 봉기, 명군(明軍)조선군(朝鮮軍)의 반격, 이순신이 지도하는 수군에 의한 치명적 타격에 의해 정복계획은 그의 죽음과 함께 붕괴된다.

   제1차 침략전쟁기에는 세 척의 거북선을 선두로 한 당포(唐浦)해전(159262)을 시작으로 하는 일련의 해전의 승리에 의해 조선수군은 일본수군의 서진을 저지하고 지상군의 보급로를 끊고, 부산김해 부근의 일부를 제외하고 제해권(制海権)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큰 공적을 세운 이순신은 15971월에 전라병사 원균(元均) 및 서인세력의 모함에 빠져 감옥에 들어가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원균은 같은 해 7월의 (거제도)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전사하고,” 200여척의 조선수군의 함선은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한 경상우수사 배설(斐楔)12척만 남았다. 같은 해 722, 이순신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전라충청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되게 된다.”(北島万次, 壬申倭乱秀吉島津李舜臣, 校倉書房, 2002, 229230)

 

 

(2)조선군 사이에서의 전략의 불일치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돌아온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전선기지(前線基地)가 있는 어란진에서 20킬로 정도 떨어진 진도의 벽파진(碧波津)에 있는 임시 본영에 도착한다. 복직 12일째에 행해진 회의 장면으로부터 명량은 시작된다. 15977월의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친 경상우수사 배설은 해전을 멈추고 조선군 도원수(朝鮮軍都元帥 =최고사령관)인 권율 밑에서 싸울 것을 권한다. 그러나 거제현령 안위는 도망자 배설을 비난하고 그의 전술에 격렬하게 반대한다. 이순신도 배설의 전술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제 이순신 휘하에 있는 것은 배설의 12척의 함선과 수리 중인 1척의 함선뿐이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적은 수와 고단한 군대로 적의 대군을 감당키 어려울 터이니 수군을 파하고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군대와 합류하여 싸워라.”

그러나 이 해전을 포기하라는 왕명은, 이후의 전황으로부터도 구체적으로 밝혀지듯이, 전략적으로 커다란 결함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는 815일에 남원성이 함락한 후에 토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은 해전으로 전환하여, 육군과 해군이 서로 호응하면서 전라도 남해안을 서쪽을 향해 진격하려 했기 때문이다. 해로를 방치하면 지상부대의 전투를 지원하는 식량무기탄약의 보급을 용이하게 하여 조선의 패배를 결정짓게 된다.

토도 다카토라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수군은 전선기지가 있는 어란진에서 조선수군을 격파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준사(俊沙)의 보고를 통해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준사는 원래 쿠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 밑에 있던 일본인 병사였는데, 지금은 이순신의 가신이 되었다. 그는 일본수군에 들어가서 그들의 동정을 살핀 후에, 척후 임준영을 통해 군사정보를 조선수군에 보고하고 있다. 진도의 조선수군 전선기지(前線基地) 벽파진에서 척후는 이순신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적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적선은 이미 200척을 넘어 섰고, 보급선에 물자들이 실리기 시작했고, 인근 마을들에서는 약탈한 군량들이 시시각각 들어오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자들은 죽여서 코를 베고, 연습 삼아 아이들을 조총으로 쏘아 죽이고 있습니다. 저들이 말하는 이른바 주둔지 소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척후에게 묻는다.

 

이순신 : “25천 왜병 별똥군이 전주 쪽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냐?”

척후 : “. 사실인 듯합니다. 놈들은 우리 수군은 이미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 일거에 쓰러버리고, 한양으로 그들을 실어 나를 거라고 술 취해 떠드는 소리를 여럿 들었습니다.”

이순신 : “그대로 놓아두었다가는 한양이 쑥대밭이 되겠구나. 이 건갈을 준사에게 전하고 꼭 답을 받아 오거라.”

 

이런 상황을 파악한 이순신은 보좌관 나대용을 도원수 권율에게 보낸다. 나대용은 일본수군의 군함 구조를 숙지하여,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거북선 구축을 제안한 뛰어난 군인이었다. 나대용은 권율에게 수군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육군에 합류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대용의 필사적인 바람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런 현실을 안 이순신의 장남 이회는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임금을 비판한다.

 

이회 : 차라리 잘되지 않았습니까? 이참에 모든 걸 놓아버리시고 고향으로 돌아가시지요. 돌아가신 할머니 위패조차 제대로 안치하지 못해 저리 그저 두고만 보고 있지 않습니까? 남은 군사들을 육군에 넘기시고 병환이 깊어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하십시오.

이순신 : 네가 상감에 대한 원한이 깊구나.

이회 : 목숨까지 거두려했던 임금입니다. 아버님은 억울하지도 않으십니까? 아버님! 이제 다 죽고 12척만이 남았습니다. 지금 우리 형편을 수군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저 미력한 군사들로 전장에서 승리한다 한들 임금은 반드시 아버님을 버릴 것입니다. 아버님은 왜 싸우시는 겁니까?

이순신 : 의리다.

이회 : 저토록 몰염치한 임금한테 말입니까?

이순신 :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이회 : 임금이 아니고 말입니까?

이순신 : 백성이 있어서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이회 : 그 백성은 저 살기만을 바랄 뿐 아무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데도 말씀이십니까?

이순신 : 밥술 마저 뜨거라. 아까운 밥이다.

 

병사를 육지에서 싸우게 한다는 왕명에 이순신이 반대한 것은 나라의 존속, 나라를 만든 사람들의 존속을 최우선시 한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병사가 자기만 생각하는 입장에 서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칠천량 해전(15977)에서 붙잡혔다 도망쳐 나온 병사 오상구의 말을 들은 후에 이순신은 그 자리에서 목을 치는데, 그것은 일본 수군에 대해 공포에 떨면서 자기 목숨만 지켰기 때문이다. 오상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칠천량에서 6년 동안을 같이 한 동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요. 오늘 제 손으로 그들의 수급들을 묻고 왔습니다요. 정말 두렵습니다요. 이제 틀림없이 제 차례 같습니다. 이제 속절없이 이렇게 다 죽어야 합니까?

  

(3) 이순신의 해전 결의와 전망

 

이러한 공포심을 일으켜서 전투의지를 빼앗는 것이 일본수군이 노리는 바였다. 그러나 이 전략이 일본수군 사이에서 반드시 의견이 일치하였던 것만은 아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일본수군 쿠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는 적군을 잔인하게 죽이는 방식을 택하는데,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그런 행위를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오히려 적의 분노를 증폭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쿠루시마의 생각은 정반대로 잔인한 방식은 적의 전의를 상실시킨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병사 오상구의 공포심은 쿠루시마의 의도가 적중했음을 보여준다. 이순신은 적의 전략적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침략에 대한 저항의지를 잊고, 그저 공포에 떨며 자기 목숨만 부지한 부하를 굳이 처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순신의 행위는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쳐 나와 일본수군과의 싸움을 부정하는 배설 등의 분노를 사게 된다.

   이순신은 해전책을 생각하기 위하여 부하인 거제현령 안위와 함께 선박목수이기도 한 노인의 안내를 받고 명량해협의 입구에 있는 피섬이라는 작은 섬에 조사하러 간다. 그 때 주고받은 안내 노인과 안위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안내인목이 제일 좁은 곳이다 보니까 물살이 항시 부딪히고 돕니다. 오죽하면 물살이 울면서 돌아나간다고 울둘목이라고 부르겠습니까요.

안위 : 이곳이옵니까? 허나 장군! 적들이 이 좁은 목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판단컨대 적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옵니다. 저 물살들을 보십시오. 저 빠른 물살을 타고 적들은 더욱 더 빠르게 우리 판옥선에 들러붙을 것이온데, 승산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안내인그래서 구선(=거북선)이 필요한거 아니겠습니까요? 구선이 앞에서 충파로 때려 주고 뒤에서 우리 판옥선들이 화포로 타격을 해준다면야 -.

안위 : 물살이 바뀌는 시간까지 족히 반나절인데 그 때까지 구선이 버틸 수 있겠소이까?

안내인 : 조류가 바뀌면 여기 피섬 앞바다는 잠잠해집니다요. 헌데 시방 물소리는... 평상시 대조기 때 우는 소리와는 조금 달라졌습니다요. 지금은 뭔가 굵직한 남정네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문제는 회오립니다요. 대조기 때도 저런 소리는 잘 안 나는데, 어쩌다가 저런 소리가 나서, 그것이 저 대조기랑 맞물리면 바다에 큰 회오리가 일었습니다요. 내일 모레면 큰 대조기인데... 왜 저런 소리가 나는고...

 

조선수군을 재정비하고 일본수군을 격퇴하는 것은 단순한 전략전술'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병사들의 의식을 변화시켜야 하는 문제이다. 그 의식변화란 공포심을 전투의식으로, 용기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이순신이 전개하려고 하는 해전을 불가능하게 하려는 음모가 경상우수사 배솔 무리들에 의해 행해졌다. 그것은 이순신 암살계획으로, 수리를 마친 거북선을 방화하는 것이었다. 암살 시도는 장남 이회와 거제현령 안위의 방어로 저지되고 이순신은 간신히 도망쳐 나오지만, 유일하게 남은 거북선 한 척도 방화에 의해 완전히 불타게 된다.

이 소식은 곧바로 일본수군의 토도 다카토라의 귀에 들어가고 일본수군은 출정의 결심을 굳힌다. 일본수군의 전략에 대해서는 이순신에게 전달된 준사의 전령문으로부터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일 아침 수류에 맞춰 출병할 예정으로 적선의 규모는 모두 330척입니다(北島万次壬辰倭乱秀吉島津李舜臣에 의하면 133). 그리고 알아보라고 하신 적선의 선봉은 공교롭게도 전혀 새로운 자입니다. 수류가 이곳과 흡사한 에히메의 해적왕이라고 알려져 있는 쿠루시마 미치히사라는 자인데, 다행히도 중군을 맡은 자가 한산에서 장군에게 대패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입니다. 장군에게는 위안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겠습니다.

 

이 전령을 읽고 이순신은 임금에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는 왕명을 어기고 해전을 감행하겠다는 결의를 서술한 것이다. 이에 반해 이순신의 부하 지휘관들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전쟁은 일본수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기회에 싸울 것을 건의한다. 이순신은 그들의 건의가 필사적인 것임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징벌을 주는 대신 수군병사들을 소집하라고 명령한다. 해전 전야인 916, 소집된 전 병사들 앞에서 이순신은 부하 몇 명에게 전선기지(前線基地)를 불태우게 하고 다음과 같이 병사들의 전의를 북돋운다.

 

아직도 살고자 하는 자가 있다니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정녕 싸움을 피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냐? 육지라고 무사할 듯싶으냐? 똑똑히 보아라! 나는 바다에서 죽고자 이곳을 불태운다. 더 이상 살 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 목숨에 기대지 마라!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고 또한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병법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명의 적도 떨게 할 수 있다하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을 두고 하는 말 아니더냐!

 

 

(4)명량해전에서의 이순신의 승리

 

1597917일 오전 8, 썰물(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조류)을 타고서 330척의 일본수군이 비좁은 명량해협에 들어왔다(北島万次 교수에 의하면 133). 맞서 싸우는 조선수군은 불과 12척이었다(北島万次 교수에 의하면 13). 이순신이 탄 지휘함대는 조류를 거슬러 닻을 내리고서 쿠루시마 미치후사가 보낸 선발대의 제1군을 대포로 격파한다. 이어서 닻을 끊고 조류가 완만한 피섬을 등지고 무리지어 오는 제2군과 선상에서의 격렬한 백병전을 행하면서 에워싸인 일본함선의 측면에 지근거리에서 대포를 쏘아 단숨에 몇 척을 격침시킨다.

   좁은 해협을 가득 메운 너무나도 많은 함선에 공포심을 느끼고 후방에 후퇴한 조선함대는,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몇 척이나 되는 적 함선을 차례차례 격침시키는 이순신의 지휘함에 용기를 얻어, 맨 앞에 있던 거제현령 안위와 중장군(中將軍) 김응함(金應諴)의 두 척의 전함이 지원하기 위해 이순신에게 접근한다. 접근해 오면서 안위는 쿠루시마 미치후사의 부하로 이순신의 목숨을 노리는 저격수 하루를 활을 쏘아 쓰러트린다. 해전 당초 겁먹고 후방에 물러선 안위를 질책하며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안위야! 내 너를 엄히 군법으로 다스려야 하나 지금은 전세가 시급하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라! 너는 반드시 여기 피섬을 막아내야 한다. 알겠느냐?

 

피섬을 사수하는 안위의 전함에서는 일본 수군병사들과의 사투가 펼쳐진다. 쿠루시마 미치후사는 화약을 실은 자폭선을 이순신의 지휘선을 향해 보낸다. 그러나 일본군에 붙잡혀 자폭선의 노를 젓고 있던 척후 임준영은 그 배가 화약을 실은 자폭선임을 이순신의 지휘선에 있는 준사에게 알린다. 하지만 이미 포탄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지휘선은 자폭선을 폭파시킬 수 없다.

일본병사에 의해 중상을 입어 빈사상태에 있는 임준용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서, 강 건너편에 있는 아내와 피난하는 백성들에게 조선수군 함대에 신호를 보내달라고 멀리서 지시를 보낸다. 이 지시를 알아차린 백성들은 힘을 합쳐 손짓과 함성으로 자폭선의 접근을 알린다. 백성들의 신호를 본 중장군 김응성은 함선에서 대포를 발사하여 자폭선을 격침시킨다. 이에 다른 전함들도 일제히 전열에 가담하여 대포를 발사하면서 일본 함선에 돌격하여 격침시킨다.

오후 2, 조류의 흐름이 바뀌고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기자, 수많은 일본 함선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침몰해간다. 이 싸움에서 일본수군의 선두에 섰던 쿠루시마 미치후사는 배 위에서의 전투에서 이순신에게 패한다. 돛대에 쿠루시마의 목을 건 이순신의 지휘함과 전 함대가 과감하게 공격을 계속하는 상황을 지켜본 토도 다카토라는 결국 일본수군에게 퇴각명령을 내린다.

명량해전이 승리로 끝난 후에 아들 이회는 아버지와 다음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화 : 아버님, 울둘목의 회오리를 이용하실 생각을 어찌 하셨습니까? 아버님!

이순신 : 지금 뭐라 했느냐?

이회 : 절체절명의 순간에 몰아친 회오리 말입니다. 그 회오리가 아니었다면...

이순신 : ...천행이었다.

이회 : 천행이라뇨? 그렇다면 아주 낭패를 볼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이순신 : 그래. 그랬지. 그 순간에 백성들이 날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회 : 백성을 두고 천행이라 하신 겁니까? 회오리가 아니구요?

이순신 : 니 생각엔 무엇이 더 천행이었겠느냐?

 

 2.현대적 의의

 

영화 명량은 한국에서는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다.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의 조성환 박사에게 시민들의 반응을 물었더니, “백성과 군인이 일치단결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리더십 부재가 문제시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이상적인 리더의 모습을 그려 주었다라는 평가와 함께 영화 전반부에서 이순신이라는 복잡한 인물의 감정묘사가 단순히 처리된 느낌이 든다,” “일본 장군의 심리묘사가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상내용으로까지 들어간 분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명량은 사상내용으로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그 진정한 의의를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대한 하나의 시도로서 몇 가지 분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1) 사회역사의 주인공으로서의 민중과 이순신

 

이순신은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병사들 속에 만연해 있는 공포심용기로 전환시킬 수 있으면 일본수군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과거에 양적으로 충분한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던 조선수군이 원균, 이억기의 지휘 하에서 일본수군에 완패한 것은 분명한 사상도 없고 전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범용한 지휘관 스스로가 공포심에 사로잡힌 채 그것을 용기로 전환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포심은 과거에 이순신에게 격파된 일본수군에게도 있었다. 159278일에 있었던 한산도해전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간신히 퇴각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北島万次의 앞의 책, 208)고 하는 공포스런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이 와키자카가 쿠루시마와 함께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 참전하고 있었다. 공포심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용기로 바뀌고, 반대로 용기도 공포로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공포심은 자기 목숨을 고집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보고서, 도망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하는 육상의 전선기지를 굳이 불태워서 퇴로를 차단한다. 그리고 스스로가 선두에 서서 지휘함 혼자서 일본수군과 싸워 많은 일본 함선을 격파한다. 그 격파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명량해협에서 생기는 밀물과 썰물의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을 계산하여, 썰물로 변하는 시기에 생기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일본전함들끼리 충돌시키는 작전을 생각했다. 저 멀리 물러나 있던 조선수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순신의 싸움에 용기를 얻어 밀물을 타면서 일본수군을 과감하게 공격한다. 그런 가운데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조선수군이 일제히 이순신의 함선에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최초로 접근한 것은 거제현령 안위와 중장군 김응성이었다. 안위는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피섬을 사수하고, 김응성은 이순신이 타고 있던 지휘함선에 돌진하는 자폭선을 격침시킨다. 다른 전함이 밀물을 타고 일제히 참전한 것은 이런 상황을 보고 나서의 일이었다. 안위는 이순신을 존경했지만 그 전투방식을 파악하지 못하여 일체가 되어 행동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김응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의 의문은 이순신의 행동에 의해 일찌감치 불식되었다.

   이순신은 확실히 뛰어난 제독이었다.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병사들의 공포용기로 전환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러한 전략을 생각나게 한 것은 민중의 생활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는 확고한 삶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삶의 방식이 있었기에 좁은 명량해협에서 펼쳐지는 해전을 지켜보던 육지의 주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자폭선의 접근을 함대에 알리거나, 이순신의 지휘함선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자 구출해내기 위해 수많은 어선을 타고 와서 로프를 걸고 끌어당긴 것이다. 이것은 영화의 세계에서만 묘사된 모습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된다. 앞서 인용한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임진왜란과 히데요시진도이순신󰡕에도 민중이 지지하는 모습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을 이 지역 민중들은 환희하며 맞이했다. 난중일기“(정유년 9) 17(*18일의 오기) 을사乙巳, 맑음. 외도外島=여오을도汝吾乙島.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智島邑 어의도於義島에 이르자, 피난선 약 300여척이 먼저 와서 수군의 대첩을 알고서 앞 다투어 축하의 말을 보냈다. 그리고 많은 군량미를 관군에게 보내 주었다.” “(정유년 9) 20일 무술戊戌(*21일 무신戊申의 오기), 맑고 순풍. 배를 몰아 고참도古參島=위도蝟島라고도 한다.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위도에 이르자, 난을 피해 있던 사람들이 수업이 배까지 달려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량의 대승에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2389

 

   이순신은 왕에 대한 을 축으로 하고 있지만, 그 전제는 왕이 민중에 따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를 구성하는 것은 민중이기 때문이다. 그가 왕명에 따르지 않고 해전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도()야말로 사람들을 구하고, 그 결과 나라를 구하게 된다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었다. ‘국가를 민중·시민에 선행시키는 세속권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오늘날에도 통하는 명확한 사상을 이순신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근저에는 하늘사람의 상호의존성, 천인공창(天人共創)’이 깔려있다는 시사를 조성환 선생으로부터 받았다. 처음에는 영화의 영어자막의 신의 은총(Grace of God)”의 의미와 신과 인간의 관계가 불분명했었는데, 조성환 선생이 이 부분의 한국어 대사를 알려준 덕분에 분명해졌다.

   조선생에 의하면, 영어에서 ‘God’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은 원래 대사에서는 으로 되어 있는데, ‘은 한국어로는 하늘,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에게 있어 하늘은살아있는 모든 것이 공유하는(공공하는) 것으로 위치지워지고 있다.”(조성환,천도의 탄생의 일본어 요약번역본). 따라서 인간은 하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고, 타자를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하늘인간의 관계는, 해월 최시형에 의하면 하늘은 자신의 작용(=조화)을 사람의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표현할 수 있기때문에, “서로 의존하는”(天人相依) 관계에 있다.

   이순신은 확실히 거대한 소용돌이로 인해 명량해전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 시간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현지 노인에게 배워서, 그 시각에 맞춰 일본수군과 싸움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천행(天幸)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사전에 알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순신의 싸움이 민중에게 용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민중은 일치단결하여 이순신의 지휘선을 거대한 소용돌이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하늘과 인간의 공동(共働=collaboration), 민중과 이순신의 평등한 공동(共働), 하늘과 인간의 상의관계(interconnectedness)를 엿볼 수 있다. 천행을 소용돌이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하늘과 민중, 이순신과 민중을 상의(相依)관계공동(共働)관계로서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토착적인 하늘사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순신의 아들 이회에게 있어서는 천행·소용돌이·민중이 하나로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 이회는 대단히 성실하고 부정을 증오하며 정의로운 싸움에 참여하는 일에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는 훌륭한 젊은이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토착사상을 축으로 한 삶의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젊은이는 현대세계에 사는 양심적이기는 하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생각된다.

 

(2)8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명량

 

이 영화는 한국의 민주화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1980년에 시작된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민주화 투쟁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 중 하나로 민주화되면 북한이 쳐들어오지 않을까?”라는 민중의 공포심도 자리잡고 있었다고, 어느 한국인 연구자가 말해 주었다. 끈질긴 싸움 속에서 그 의식을 불식시킴으로써 1987“610일에 시작된 민주화 데모는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이 되고, 이러한 움직임은 전국으로 퍼졌다. 그리고 26, 전국에서 국민평화대행진이 거행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집회가 열리고 610일에 항쟁이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인 100만명 이상이 참가한 집회가 되었다.(<かいあう日本韓国朝鮮歴史>, 大月書店, 2015, 253)

이와 같이 시민에 의해 지지된 민주화운동은 승리하고 민주헌법을 쟁취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이래의 민주화 운동사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는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저항하는 동학농민혁명에서의 토착적인 하늘을 축으로 한 공생(共生)비폭력(非暴力)비복종(非服従) 사상이 저류에 있고, 그 사상이 민중을 사로잡았을 때 역사는 크게 열리는 것이다.

영화 명량은 이와 같은 풍부한 내용을 지닌 근대 민주화운동을 시야에 넣은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화운동의 원점은 동학사상에 있다. 동학사상의 특징은, 나라(奈良)여자대학의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명예교수에 의하면, ‘시천주’(侍天主=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늘을 모시고 있다)’, ‘보국안민’(輔國安民=나라를 도와서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후천개벽’(後天開闢=가까운 장래에 이상적인 시대가 도래한다)(7한일시민이 함께하는 동학농민군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자료집, 2012)에 있고, 동학농민군의 사대명의(四大名義)의 첫 번째는 물살생(勿殺生), 물살물(勿殺物)’이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은 동학농민혁명 이래로 지하수맥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공생의식을 현대사회에 부활시켰다. ‘명량은 이와 같은 민주화운동을 낳은 민족주의를 무너뜨리는 문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공생과 명량

 

명량의 매력은 민족주의적 스테레오타입을 불식시키고 공생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명량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조선=정의’, ‘일본=이라는 틀에 끼워 맞춰서 일본에 대한 민족주의적 분노를 증폭시킨다는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임진정유 양란에서 조선군은 내부대립을 안고 있었다.

국왕, 권율, 원균의 전술도 이순신과 전혀 달랐다. 이순신이 이끄는 많은 수군 지휘관들도 처음에는 그의 전술에 찬성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수군의 총지휘관 토도 다카토라와 지휘관 쿠루시마 미치후사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고, 쿠루시마가 이 해전의 선두에 선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이 가깝다는 사실을 간파하고서 한반도를 자기 손에 넣으려는 목적을 위해서였다. 토도에게는 이런 쿠루시마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쿠루시마가 해전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해도 원군을 보내지 않고 자멸시킨다. 이렇게 해서 조선수군도 일본수군도 민족적으로 일치단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순신만이 사람들과 연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연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공생이다. 이순신 밑에서 일하는 일본인 준사의 존재는 흥미롭다. 그는 예전에는 쿠루시마 미치후사 휘하에 있던 병사였는데, 15927월의 안골해전에서 투항하였다(降倭). 이후에 일본수군에 침투하여 이순신에게 정보를 보고하고, 명량해전에서는 지휘선에 탑승하여 일본수군과 싸워면서 히데요시의 침략전쟁을 좌절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순신과 견고한 유대로 맺어진 준사의 존재는 억압과 침략에 저항한, ‘국가를 초월한 민중의 연대와 공생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순신을 지지하는 준사를 일본인 배우 오오타니 료헤(大谷亮平)가 연기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우리는 근대의 국민국가라는 틀로 사물을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준사라는 존재는 현재의 동아시아에서의 평화적 공생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국가 간의 정치적 대립에 이용되지 않고, 시민 차원에서 상호 문화와 역사를 이해해야할 필요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는, 역사교육자협의회(일본)와 전국역사교사모임(한국)의 공동편집에 의해 탄생한 <向かいあう日本韓国(마주보는 일본과 한국朝鮮歴史(조선의 역사)(근현대편)>(大月書店, 2015)이나, 나 자신도 참여했던 한일연구자에 의한 국제학술대회 글로벌시대 한국적 가치와 문명연구(20123)의 연구 성과를 모은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2)(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공생을 지향하는 한일연구자의 공동연구는 앞으로도 크게 진전될 것이다.

  

3. 맺으며

 

민중의 염원에 부응하여 민중에게 지지된 이순신의 싸움은 사람들의 공포를 용기로 바꿀 수 있었다. 거대한 소용돌이는 천행으로, 그것은 민중, 이순신, 준사, 병사들과 하늘의 공동(共働)의 구체화이다. 이 공동협력들이 없었다면 승리는 없었다. 우세와 열세는 상호연관성 속에서 쉽게 전화될 수 있는 것으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의 이순신상에는 공포를 용기로 전환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삶의 방식과 그 기저가 되는 하늘 사상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동학농민혁명 이래로 면면히 계승되어 온 민주화운동사가 반영되어 있다.

    2016618, 나는 명량해협을 실제로 보기 위해서 조성환 선생의 안내로 진도를 찾아갔다. ‘명량에서 대소용돌이가 일어난 오후 2시경, 갑자기 폭 300m가 채 안 되는 좁은 해협의 흐름이 빨라지고, 얼마 안 있어 작은 소용돌이가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비명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만조(滿潮) 때에 일어났다고 하는 거대한 소용돌이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었다.

    올해(2016)에 있었던 일본의 참의원선거에서 여당은 헌법개정발의에 필요한 3분의 2의 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지역주민이 심각한 사회적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오키나와(沖縄)나 토호쿠(東北) 지역에서는 야당 통일후보가 대승했다. 저 명량해협과 마찬가지로 점차 조류가 빨라지고, 작은 소용돌이가 눈앞에서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참의원선거나 이어지는 도지사선거의 결과는 작은 소용돌이, 변혁의 확실한 시작일 것이다. 그것을 거대한 소용돌이, ‘천행으로 이어나갈 수 있을지 여부가 우리의 과제이다.

                                                                  

(번역 : 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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