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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1. 한국학으로 독해한 원불교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 백낙청의 원불교 공부》를 읽고

작성자혼돈나라|작성시간17.07.27|조회수120 목록 댓글 0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72 (2017.06) 484-495

 

한국학으로 독해한 원불교

-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 백낙청의 원불교 공부를 읽고 -

 

조성환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I. 들어가며

 

백낙청의 원불교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외부인이 바라본 원불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단순한 감상이나 파편적 단상의 차원을 넘어서, 일정한 체계를 갖춘 하나의 ’(theory)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가 이미 자신의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그는 자신의 사상 틀을 바탕으로 원불교를 해석하고 있고, 그것이 그만의 독특한 원불교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원불교 내부에서 바라본 기존의 원불교론과의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인상적인 점은 그의 사상에 나타난 균형 감각이다. 평생 동안 영문학이라는 서양 인문학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사상의 핵심을 짚고 있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까지 내려와서 서로 어우러지고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이야기 속에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있고 사상과 현실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균형감각과 현실감각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고리타분하지 않은 원불교론과 과격하지 않은 개벽사상의 세계로 인도해준다.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백낙청이 바라본 원불교론의 가장 큰 강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원불교 전문가도 아니고 동양학자도 아닌 그가 어떻게 체계적이고 균형잡힌 원불교론을 피력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 원천이 한국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백낙청은 자신은 서양학(영문학)을 연구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관심영역은 한국학이다. 그는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고민하고 동양이라는 틀로 서양을 바라본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영문학자이면서 동시에 한국학자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그만의 독특한 힘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한국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백낙청의 원불교론에 어떻게 녹아 있는가?

                          

II. 본 론

 

1. 한국학자 백낙청

 

일본에서 6년 동안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 중의 하나는 대부분의 일본학자들은 전공에 상관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19세기의 메이지유신이나 최근의 ‘3·11 대지진과 같은 일본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설령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해도 암암리에 자신들의 문제를 의식하면서 학문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전공 이야기로 일관하는 한국학계와는 학문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석1]

    한번은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쟈크 데리다의 저서들을 번역하신 교수님의 학부강의를 청강한 적이 있었다. 내가 자신을 중국철학을 연구하고 있는 한국유학생이라고 소개하니까 대뜸 돌아오는 반응이 도겐(道元. 13세기)의 사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일본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연구경력도 일천한지라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프랑스철학의 권위자의 입에서 일본 중세의 불교사상가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은 나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기왕이면 서양 것을 많이 알아야 하고 영어로 강의를 해야 인정받는 한국학계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학계와 한국학계의 이런 분위기의 차이는 과연 학문의 지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 프랑스철학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의 정신은 대부분 프랑스에 가 있기 마련이다. 몸은 한국에 있는데 마음은 외국에 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분열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서양철학이나 서양학문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동양철학이나 동양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조선유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그 사람의 마음은 조선시대에 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학문의 지점이 자기가 살고있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시대와 공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한국의 문제를 진단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우에도,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그 시대와 그 공간의 방법과 생각으로 처방을 내리기 일쑤이다.

    반면에 일본학자들이 일본의 근대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그들의 학문의 지점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21세기의 일본에 있다는 뜻이 아닐까? 이러한 학문적 태도를 우리는 주자학의 개념을 빌려서 실학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주자는 유교윤리를 부정하는 불교를 허학(虛學)’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신유학이야말로 실학(實學)’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실학이란, 주자학에서와 같은 도덕실천의 학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둔 학문이라는 의미로, 학문의 지점을 자기가 딛고 있는 현실에 두는 학문적 태도를 말한다. 반대로 자기 현실과 동떨어진 채 남의 문제를 고민하는 학문은 허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작 가려운 자기 다리는 안 긁고 남의 다리를 긁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글에서 말하는 한국학, 그 전공이 서양학이든 동양학이든, 철학이든 역사이든 관계없이, 학문의 지점을 자기 현실에 두고 있는 학문을 말한다. 백낙청은 그럼 점에서 분명히 한국학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학의 관점에서, 기존에 학계에서 폄하해 왔던 동학이나 원불교와 같은 개벽사상을 평가하고 있다. 나는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21세기의 한국학을 하는데 있어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백낙청은 구체적으로 어떤 한국학적 관점에서 원불교를 바라보고 있는가? 즉 그의 원불교론에 나타난 한국학적인 측면은 무엇인가? 이하에서는 그가 주목하고 있는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개벽과 혁명

 

백낙청이 원불교에서 가장 주목하는 개념은 개벽이다. 그는 원불교의 개벽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개교표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시국에 대한 진단이자 현실에 대한 판단으로 본다(34, 314).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기존의 불교와의 가장 큰 차이라고 지적한다. 즉 불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원불교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찾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지적이다. 왜냐하면 기존에 원불교의 개벽에 대한 인식에는 시국이라는 급박함과 현장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일반 불교에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야말로 백낙청과 원불교가 만나게 된 접점일지 모른다. 즉 그의 사상이 한국이라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개벽을 시국진단이라는 사건으로 읽어낼 수 있었고, 반대로 원불교의 개벽론에 그러한 현실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그가 원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리라.

    그런데 그가 개벽을 시국진단으로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혁명론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개벽과 혁명을 구분하여, “마음공부를 도외시한 혁명론”(212)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원불교의 개벽은, 단순한 정치적·제도적 혁명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가 공부해서 새 세상을 만드는”(214) ‘공부에 의한 혁명또는 수양에 의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벽론은 단순히 원불교뿐만 아니라 그것의 선구로 알려진 동학의 개벽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흔히 역사가들이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할 때의 혁명이라는 말은, 내가 아는 한 당사자들은 쓴 적이 없다. 그들은 개벽이라는 말을 썼을 뿐이다. 그리고 이때의 개벽은 백낙청이 말하는 공부나 수양에 의한 인문개벽에 가깝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보다는 동학농민개벽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주석2]

    그래서 혁명(revolution)’이 서양 전통에서 나온 개념이라고 한다면(물론 혁명이라는 한자어 자체는 주역》「혁괘(革卦)의 주석에 나온다), ‘개벽은 한국적 상황에서 나온 사상 용어이다. 따라서 백낙청이 개벽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시국진단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원불교를 한국학의 일환으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근대한국사상의 흐름으로서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2. 도덕과 문학

 

백낙청이 개벽을 혁명과 구분하고 공부와 연결시킬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동아시아의 도덕(道德)’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道德‘moral’을 구분하면서, 도덕은 단순한 도덕률이나 윤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와 거기에서 나오는 힘”(300)을 말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동양고전에서의 도덕 개념, 특히 도가의 도덕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399쪽 각주2), 일찍이 아서 웨일리(Arthur Waley. 1889~1966)는 노자의도덕경“The Way and Its Power”(1958)라고 영역하였다. 이에 의하면 는 우주론적인 원리나 작용을 말하고, ‘은 그것을 내 몸에 체득하여 얻은 힘을 의미한다.

    백낙청은 이러한 동아시아 전통 속의 도덕 개념에 입각하여 윤리나 규율은 도와 덕을 실현하다 보면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고 본다(300). 그래서 위계상으로 보면 --”(300)의 순서가 되는 셈이다. 이것은 노자가 인()이나 예()와 같은 윤리규범은 도와 덕을 상실 한 후에 강조되는 덕목이라고 본 것과 상통한다(도덕경38).

    여기에서 은 오늘날로 말하면 수양이나 내공에 가깝다. 또는 마음공부라고 할 때의 공부나 원불교에서 하는 훈련과 유사하다. 즉 동아시아 고전에서 덕을 쌓는다고 할 때의 , 특히 도가사상에서는, “포정의 해우에서 볼 수 있듯이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어 온 심신수련의 힘을 말한다. 바로 이 점이 서양철학과의 가장 큰 차이이다.

    흔히 노장사상은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실체적이지 않고 해체적이라는 점에서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의 해체철학과 비교되곤 한다(대표적인 예가 김형효의《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 그러나 서양의 해체철학에는 덕론이 없다. 그것은 서양철학 자체에 수양론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아무리 서양의 현대철학이라고 해도, 니체나 하이데거와 같이 서양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서양의 철학 전통에 없는 수양학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반면에 동양은, 노장이 됐든 불교가 됐든, 세계관이나 존재론의 차원에서는 서양 현대철학과 친화적인 해체철학을 지향한다고 해도, 수양에 바탕을 둔 개념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양철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이 차이가 개벽과 개혁의 차이로까지 이어진다. 백낙청은 동아시아의 도덕개념이 지니는 무게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修德)에 바탕을 둔 - 개혁론과는 다른 - 개벽론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낙청은 이러한 도덕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문학론을 전개한다. 백낙청에 의하면 문학이란 도덕의 표현이다. 즉 문학가가 자신의 예술을 치열하게 하다 보면 저절로 의 세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거기서 나오는 덕을 담은 것이 문학이라는 것이다(301). 이것은 북송시대의 성리학자인 주렴계의통서(通書)에 나오는 문이재도(文以載道)”의 문학론과 일맥상통한다. “문이재도도가 실린 것이 문학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세계 전체’, 지금으로 말하면 공공성의 다른 말로 볼 수 있다. 백낙청은 문학가는 독선(獨善)’이 아닌 보살을 지향해야 된다고 본다. 이것을 동아시아적 개념으로 표현해 보면, ‘대승문학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낙청의 도덕론은 비단 문학계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원불교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가령 원광대학교가 도덕대학을 표방하고 있다고 할 때의 도덕개념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moral’이나 ‘ethic’ 또는 인성(人性)’이나 덕성(德性)’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가 빠진 ’, 그것도 ‘moral’이나 ‘ethic’으로서의 이 강조되는 인상이다. 그래서 덕의 출처가 어디인지 불분명하고, 그로 인해 덕을 실현시킬 동력도 약해지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도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진부함이나 밋밋함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 를 제시하고, 그것에 바탕을 둔 을 권장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한국학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3. 여성과 살림

 

한국학자로서의 백낙청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논의 중의 하나가 그의 여성론이다. 그는 서구적인 평등론에 대해서 동양적인 조화론을 내세운다. 평등론이 수학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조화론은 음양의 우주론에 근거하고 있다. 음양은 동양인문학의 핵심개념이다. 서양사상이 실체’(substance) 개념에서 출발한다면 동아시아사상은 음양에서 시작된다.

    확실히 오늘날 여성의 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권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서구적인 평등이 요구된다. 원불교는 일찍부터 남녀권리동일로 이것을 실현시키고 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수위단과 같은 최고결정기구에 참여하는 것이다(381).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것은 기계적 평등이 아닌 차등적 조화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 차이들의 조화가 있어야 살림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즉 남녀가 모두 상생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생각을 일찍이 和而不同(화이부동),” 차이(不同)가 있어야 비로소 어우러짐()이 가능하다고 설파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지 음양의 조화뿐만 아니라 동서의 조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평등과 조화의 조화인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의 서구적인 양성평등과 백낙청의 동양적인 음양조화 사이의 어우러짐(coherence between equality and harmony)이야말로 한국학으로서의 여성학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어우러짐이 가능해지려면 두 학문 사이의 조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양성평등이 서양의 사회과학 논리 위에 서 있다고 한다면, 음양조화는 동양의 인문학 기반 위에 서 있다. 서양의 사회과학의 근간에는 과학적 사유가 있고, 동양의 인문학의 바탕에는 도학적 사유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서양의 과학 전통에 있는 학자들은 도학을 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대화의 단절을 가져오는 가장 큰 문제이다. 장자의 용어를 빌리면, 학문 사이의 양행(兩行)’(제물론)이 안 되는 것이다. 원불교의 도학과 과학의 병진은 학문의 양행을 하겠다는 것이고, 백낙청은 이 노선 위에 서 있다. 원불교는 종교와 종교의 회통뿐만 아니라 학문과 학문의 회통까지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이 경우에 회통양행이나 병진의 의미).


4. 중도와 통일

 

이 책에 나타난 저자의 한국 사회에 대한 가장 큰 관심은 통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한 당위론이나 감정론의 차원을 넘어서 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백낙청은 통일을 학문적으로논하는 마지막 세대나 인물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이른바 지식인들은 통일을 논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념논쟁에 휘말리기 쉽다.

    백낙청의 통일론의 특징은 단순한 정치나 경제 논리에 머물지 않고 동양적 또는 한국적 사상 전통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의 원불교론이 그러하듯이, 그의 통일론은 혁명이 아닌 개벽, 모럴이 아닌 도덕, 무력이 아닌 수양(공부)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 일종의 인문학적 통일론인 셈이다. 이것을 그는 지혜의 통일”(76)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심에서 그는 원불교의 제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의 건국론에 주목한다. 특히 자신의 변혁적 중도주의론과 관련해서 건국론에 나타난 중도주의에 주목한다. 송규가 말하는 중도주의는 어느 한 편에 고집하거나” “어디 일개 국가의 정책에 맹목적 추종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백낙청이 자신의 통일철학의 바탕에 동양의 ()’의 사상을 두고 있고, 그것의 선례를 원불교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통일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더 나아가서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이른바 양극화 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과 중도주의를 표방한 민세 안재홍이 내세운 한국정치철학의 이념도 다사리였다. 이 때 다사리란 말 그대로 다 살린다는 뜻으로, ‘홍익인간의 한글식 표현이다. 여기서 가 곧 인 것이다. 은 좌우나 동서 또는 상하의 중간이 아니라, 그것들을 아우르는 바탕이다. 이 바탕은 자기 비움과 자기 부정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5. 일원과 불교

 

이러한 자기 비움과 자기 부정을 바탕으로 하는 중도가 동양식 중도이다. 가령 장자에서는 환중(環中)’비움’()으로 해석하고,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부정’()으로 풀이한다.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견고한 틀(成心)을 비우고 버려서 허심(虛心)의 상태가 되어야 이질적인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원불교에서 말하는 ()’이야말로 이런 의미의 ()’이라고 생각한다. “원불교적 사유방식의 핵심은 바로 이 (‘이나 로서의) ‘에 있다. 그리고 이 이야말로 원불교와 불교를 구분짓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불교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 내지는 수단의 성격이 강하다. 즉 불교적인 마음공부나 해체적 세계관()을 실천하고 깨달아야 원불교가 지향하는 하나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원불교의 하나’(한울)를 지향하지만 그 하나가 동질적인 하나가 아니라 이질적인 하나이다. 자기 안에 타자를 포함하고 있는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원광대학교의 수덕호에는 타 종교(유교, 불교, 그리스도교)와 서양철학(소크라테스)의 창시자들의 동상이 의 둘레 위에 세워져있다. ‘풍류를 설명하는 최치원식으로 말하면 포함사교(包含四敎)”인 셈이다. 이것은 여느 불교대학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발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불교는 회통불교가 아니라 회통종교이다. 단순히 불교를 토대로 유불도 삼교를 종합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모든 종교의 근원적인 같음을 전제로 하면서 현실적인 다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이능화가 말한 백교회통(1912)과 상통한다.

    이상의 해석이 일리가 있다고 한다면, 백낙청이 제기한 중도주의, 그리고 그가 주목한 원불교의 중도주의, 단순히 통일문제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전반적인 갈등상황을, 적어도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커다란 시사를 준다고 생각한다. 백낙청의 중도론은 그동안 우리가 을 너무 서구적인 시각에서 보아온 것이 아닌가라는 성찰을 하게 한다.

 

III. 맺으며

 

백낙청의 사상은 동양 전통 위에 서서 그것을 바탕으로 원불교는 물론이고 서양 사상까지 재해석하고 있다(가령 로런스를 개벽사상가로 이해하는 것처럼). 바로 이것이 그의 원불교론이 깊이가 있으면서 그의 사상이 서양 사조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단지 그가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해박하게 이해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학문의 지점이 그가 딛고 서 있는 한국이라는 현실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자력양성을 중시한다고 한다. 보경육대요령에 명시된 남녀권리동일도 여성의 자력양성의 차원에서 규정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학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정신적인 자력양성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구한말의 최제우는 동학’(=한국학)이라는 학문으로 제시하였고, 오늘날의 최진석(서강대 철학과 교수)독립적 사고로 표현하고 있으며(탁월한 사유의 시선), 김태창(동양포럼 주간)영혼의 탈식민지화라고 말하고 있다.

    어찌 보면 개벽이란 것도 사상적 독립의 다른 말일지 모른다. 조선의 유학자들처럼 중국적 사고에 기대거나 구한말의 개화파처럼 서양적 사고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전통 속에서 찾아낸 사상문화를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생각하자는 것이 이른바 사상의 개벽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원불교에서는 자력양성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나는 백낙청으로부터 사상의 개벽과 자력 양성의 모델을 보았다.


* [주석1] 조성환,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2) 주체적 근대의 모색 - 한국학으로서의 동학」 《개벽신문55, 20166.

  [주석2] 조성환, 동학사상의 현대적 의의 - 사상으로서의 동학, 2016년 전라남도 문화관광재단 국제학술회의

                      <진도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적 의미와 그 위상>, 201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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