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사상과 한국의 근대 다시 보기
《해월문집》을 통해본 최시형의 동학 재건 운동(2)
於戱! 先生布德當世, 恐其聖德之有誤, 及于癸亥, 親與時亨, 常有鋟之敎, 有志未就.
아! (수운) 선생께서 덕을 펼치실 당시에 (하늘님의) 성스러운 덕이 잘못될까 두려워, 계해년(1863)이 되자 친히 (최)시형에게 항상 (목판에) 새기라는 가르침이 있었는데, (그동안) 뜻은 있었지만 이루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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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풀이】
鋟(침) : 새기다
榟(재) : 가래나무
鋟榟(침재) : 나무에 새기다, 책을 간행하다
越明年甲子不幸之後, 歲沈道微, 迨將二十餘年之久矣, 而極念前日之敎命, 謹與同志, 發論詢約. 數年間自東峽與木川, 雖是齊誠刊出, 實無慶州之刊刻爲名, 此亦似欠於道內
그 다음 해인 갑자년(1864년)에 불행한 일이 있은 후에, 세상이 침체되고 도가 쇠미한 지 이십여 년이 되려고 하는데, 일전의 (수운 선생의) 가르침과 분부를 생각해서 삼가 동지들과 함께 논의를 시작하여 자문하고 약속하였다. 수년 동안 동협과 목천에서 (먼저) 정성을 다해 간행했지만, 경주에서 간행했다고 되어 있는 경전은 없었으니, 이 또한 우리 도(道)에 있어서는 흠이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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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 여기서 ‘불행한 일’은 1864년에 수운이 교수형을 당한 것을 말하고, ‘이십여년’은 그 후 20년 동안을 말합니다. ‘동협’은 지명을 나타내는데, 바로 뒤에 ‘영남동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迨(태)’는 ‘미치다’는 뜻이고, ‘도내(道內)’의 ‘도’는 ‘동학 교단’을 말합니다.
惟我慶州, 本先生受道之地. 布德之所, 則似不可不以慶州刊出爲名. 故自湖西公州接內, 發論設施, 與嶺南東峽, 幷力刊出, 以著無極之經綸. 而謹與二三同志, 不顧世嫌, 掃萬除百, 極力大成剞劂之功. 玆豈非慕先生之敎, 而遂弟子之願哉! 歲在癸未仲夏, 道主月城崔時亨, 謹誌. 우리 경주는 본래 선생께서 도를 받은 땅이고 덕을 편 곳이었으니, 경주 판간으로 이름을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호서 지방의 공주 접내에서 논의를 시작하고 일을 계획하여, 영남의 동협과 함께 힘을 합쳐 찍어 내어 무극의 경륜을 드러내었다. 삼가 두세 명의 동지와 함께 세상의 혐의를 개의치 않고, 만사를 제쳐두고 있는 힘을 다 해서 판각하는 일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어찌 선생의 가르침을 사모하며 제자들의 바람을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 계미년(1883) 중하(음력 5월) 도주 월성 최시형 삼가 기록하다. |
【뜻풀이】
掃萬除百(소만제백) : 직역하면 “만 가지를 치우고 백가지를 제거한다”는 말로, “만사를 제쳐두고”라는 의미. 편지글에서는 “除百事(제백사)”라고 주로 쓰이는데, “생략하고”라는 뜻이다.
剞(기) : 새김칼, 판각하다.
劂(궐) : 조각칼, 판각하다.
玆(자) : 이것
豈非(기비) : 어찌~이 아니겠는가!
遂(수) : 완수하다, 이루다
仲夏(중하) : 음력 5월
【김봉곤】 “與嶺南東峽"(여영남동협)에서 ‘與(여)’는 ‘~와’라는 의미이니까 “영남의 동협과”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남과 동협”이라는 번역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박맹수】 먼저 이 강독의 서두에서,《해월문집》강독을 통해서 동학의 역사에서 해월 최시형이라는 인물의 의미를 다시 재조명해보자고 했는데, 동학경전을 집성·편찬·간행·보급한 이가 바로 해월입니다. 원불교로 말하면 제2대 정산 송규가 창시자인 소태산의 가르침과 언행을 정리한 것과 비슷합니다. 아쉽게도 경전이 간행되기 직전(1951년)에 돌아가셨습니다만 -. 원불교의 오늘날의 터전을 만든 분이 제2대 정산 종사인데, 동학 역시 제2대 최시형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리더십의 스타일이나 분위기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동협’은 강원도 인제를 말하는데, 이곳 인제에서 1880년에《동경대전》초판이 나오고, 1888년에는 그것을 수정한 수정판이 나옵니다. 이것으로 보면 강원도 인제가 동학 경전의 지속적인 간행지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수정판인 1888년 판본입니다.
“동협과 목천에서”라는 대목에서 ‘목천’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인제에 이어서《동경대전》이 간행된 곳이 경주와 목천입니다. 1883년 계미년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계미판’이라고 불리는데, 이 중에서 목천판은 이 해의 봄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계미중춘판’이라고 부릅니다. 뒤집어 말하면 ‘계미중춘판’이라는 간지가 찍혀 있는 판본은 목천에서 나온 것이지요. 이 판본은 1883년 봄(음력 2월)에 목천에서 1,000여부를 찍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목천은 천안 옆의 독립기념관 옆에 있습니다. 이곳은 충남의 동학 소굴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에서 계미중춘판(=목천판)이 나오고, 3개월 뒤인 1883년 음력 5월에 경주에서 계미중하판이 나옵니다.
경주는 초창기에 워낙 초토화 된 탓에 비밀리에 활동은 하고 있었지만 동학을 중흥시키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경제적 기반도 없고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공주에서 소요 경비를 대고, 경전간행의 노하우가 축적된 강원도 인제가 도와서, 경전간행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 추측이 맞다면 본문의 “與嶺南東峽(여영남동협)”의 ‘동협’은 강원도의 동협, 즉 인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상을 정리해보면, 공주가 경제적 지원을 하고 강원도 인제와 영남이 힘을 합해서 나온 것이 1883년 계미중하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경주판을 내려고 애를 썼을까요? 경주가 동학의 성지이기 때문이지요. 원불교로 말하면 영광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경주 이름으로 나온 판본이 없으면 부끄럽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편 종교 교단에서 경전이 간행된다는 것에는 내적인 의미와 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어느 정도 교단의 기반이 축적되었다, 내적인 역량이 성장했다는 의미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경전을 간행할 수 있는 경제력이나 인력 등이 확보되었다는 뜻입니다. 외적으로는 경전의 내용들을 수용할 수 있는 수요가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경전간행은 한 종교가 성장해 나가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분수령이 됩니다.
시간이 지나 동학농민혁명 직전이 되면, 경전 간행권 또는 경전 소유가 동학 조직 내에서 일종의 파워가 됩니다. 그래서 비록 늦게 입도했더라도 돈이 있는 경우에는 자기가 직접 경전을 찍어서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경전을 간행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아래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은 동학 조직 내에서의 질서의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는데, 이런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편의장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1880년대 후반에서 1890년대 초반에 가면 사사로이 간행하는 일이 생기고, 간행을 못하면 경전을 베끼기도 합니다.
【김봉곤】 지금까지《동경대전》 행의 배경과 종교교단에서 경전을 간행하는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어서 「법헌강결」로 넘어가겠습니다. 세 편이 연속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먼저 첫 번째 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法軒降訣 三首 乙酉 법헌이 내리는 비결 삼수 을유(1885년)
《書》曰: “天降下民, 作之君, 作之事. 惟曰其助上帝.” 君以敎化禮樂以化萬民, 法令刑戮以治萬民, 師以孝悌忠信以敎後生, 仁義禮智以成後生, 皆所以助上帝者也. 此我道人, 敬受此書. 《서경》에서 말하였다: “하늘이 백성을 내려 임금으로 삼고 스승으로 삼았으니 오직 상제를 돕기 위해서이다.” 임금은 교화와 예악으로 만민을 변화시키고 법령과 형륙으로 만민을 다스리며, 스승은 효제충신으로 후생을 가르치고 인의예지로 후생을 이루게 하니, 모두 하늘님을 돕는 것이다. 우리 도인들은 경건히 이 글을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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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
以化萬民(이화만민) : ‘化’가 ‘和’로 되어 있다.
【김봉곤】 이 강결의 제목에 나와 있는 ‘법헌’은 사전적인 의미가 “천도교에서 교리를 해설하며 여러 가지 종교 의식을 행하는 집. 또는 그 집에 있는 종교 기관의 교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법헌강결’을 직역하면 “법헌에서 내리는(降) 비결(訣)”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동학에서 보통 ‘법헌’이라고 하면 최시형을 가리키기 때문에 “최시형이 내리는 비결”이라고 해석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맹수】 맞습니다. 기록에 보면 1887년경에 충북 보은에 처음으로 동학 총부가 공개적으로 설치됩니다. 이 때 이름은 ‘육임소’(六任所)인데, 나중에는 여섯 가지 주요 직책을 말하게 됩니다. 해월은 이들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는데, 이 때 해월이 머물고 있는 숙소를 ‘법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법헌이 특정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데, 해월이 늘 이곳에 머물러 있으니까 나중에는 해월의 호가 된 것이지요. 정리하자면, 원래는 보은에 들어선 동학 본부 안에 있는 해월의 거처가 법헌이었는데, 나중에는 해월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이게 됩니다.
그리고 ‘강결’에 대해서는 저도 지금 고민 중인데, 동학의 주문수련을 하다 보면 초기 단계에 세 가지 신비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강령(降靈),’ 즉 신내림 현상이고, 두 번째는 ‘강화(降話)’ 또는 ‘강결(降訣)’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어떤 메시지나 가르침을 받는 체험입니다. 세 번째는 ‘영부(靈符),’ 즉 부적을 받습니다. ‘강령·강화·영부,’ 이 세 가지가 동학 주문수련의 초기단계에 나타나는 신비체험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해월이 주요한 지시나 강령을 내릴 때에는 ‘降’자가 꼭 붙습니다.
「강결」 옆에 을유년, 즉 1885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10여년 전입니다. 이 자료가 발굴되기 이전에는 이 시기의 기록이 없어서 당시의 해월의 행적이나 동학의 움직임을 알 수 없었는데, 이 자료가 발굴됨에 따라 1880년대 동학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조성환】 이 「법헌강결」 삼수(三首)는 이곳 이외에도 세 개의 동학계열 문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해월신사법설》 제35 「강서(降書)」이고, 다른 하나는 강필도(康弼道)가 쓴 《동학도종역사(東學道宗繹史)》의 「제8장 유적의 간포 및 강서(遺蹟刊布及降書)」이며, 마지막으로는 수운교경전에 수록되어 있는《동경대전》의 부록 「강서(降書)」입니다. 그래서 「법헌강결」은 모두 4종류의 문헌에 실려 있는 셈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세 번째 강결에 해당하는 「연운결(年運訣)」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순서가, 《동학도종역사》에서는 이곳과 동일한데, 《해월신사법설》에서는 바뀌어 있다는 차이가 있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동학도종역사》에는 이 부분이 “天降書”로 시작하고 있는데, 시간은 “을유년(1885) 11월 19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박맹수】 「강결」이 이렇게 여러 곳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널리 전승되어 왔음을 말해줍니다. 이에 비해 그동안 동학연구자들은 「강결」의 중요성을 간과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이 문헌에 대한 문헌비평 작업이 시작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현재 읽고 있는 이 판본이 제일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해월문집》의 「강결」이 먼저 있었고, 이후에 이것이《해월신사법설》이나《동학도종역사》또는 수운교의《동경대전》에 수록되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동학 초기에 해당하는 갑오년 전후에는 이런 식으로 문헌들이 따로 따로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 천도교에서 이것들을 모아서《신인간》이나《천도교월보》에 단편적으로 싣게 됩니다. 이후에 천도교가 조직적으로 활동하면서 이것들을 모아서 경전을 편찬하게 되지요. 따라서 시기적으로 보면《해월문집》이 일차 사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성환】 ‘降(강)’이라는 표현과 관련해서 조사해보니까,《동경대전》에는 장(章)의 제목을 「결(訣)」이라고만 했지 「강결(降訣)」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동경대전》에 「강시(降詩)」라는 제목의 장(章)이 있는데 내용은 겨우 한 줄 정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降(강)’이라는 말은 최시형에게 와서 하나의 개념어로 정착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박맹수】《동경대전》본문에는 ‘降靈(강령)’이나 ‘降話(강화)’ 같은 말은 나오고 있습니다.
【조성환】 이 단락에서 최시형이《시경》과《서경》의 ‘上帝(상제)’를 인용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해석학적 작업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고대 유교 경전에 나오는 ‘상제’를 동학의 ‘하늘님’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치 근세에 천주교를 전파하러 중국에 건너온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시경》과《서경》의 ‘상제’를 그리스도교의 ‘God’으로 해석한 것과 유사합니다. 마테오 리치가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유교 경전을 해석하였다면, 동학 역시 자기들이 결코 이단이 아니고 오히려 유교와 친화적이라는 사실을 어필하기 위해서 이런 해석학적 작업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유교 경전을 인용하고 있으니까 동학이 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유교를 동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오히려 유교를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마테오 리치가 그랬던 것처럼요.
그리고 “助上帝”(상제를 돕는다)에 대한 최시형의 설명에서도 동학적인 해석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늘이 군주와 스승으로 삼은 것은 상제를 돕는 것이다”고 하는《서경》의 말을 최시형은 “군주와 스승이 만민을 교화하는 것이 하늘님을 돕는 행위이다”고 풀이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하늘님을 돕는다”는 발상은 인간과 하늘님이 서로 돕는 관계에 있다는 동학적 천인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인관은 최제우 앞에 나타난 하늘님의 “노이무공(勞而無功)”이라고 한 말이나, 최시형이 “하늘님은 사람에 의지해서 자신의 조화를 드러낸다”고 한 것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이무공”은 “(하늘님이) 노력은 했지만 공이 없었다”는 뜻으로, 하늘님이 그동안 인간을 구제하는 공이 없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늘님도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최시형에게 “너를 만나 공을 이루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과 하늘님이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최시형은 “天人相與(천인상여)”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 단락에서《서경》의 “助上帝”를 인용한 것도 이러한 천인관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