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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3. '한국학'으로서의 원불교 연구: 유병덕의『원불교와 한국사회』를 읽고

작성자혼돈나라|작성시간18.02.08|조회수351 목록 댓글 0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제74집 
(2017년 12월호) 

       한국학’으로서의 원불교 연구
- 유병덕의『원불교와 한국사회』를 읽고 -

조성환(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2017년은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로서, 그리고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초대 소장으로서 '한국학으로서 원불교학'을 반석 위에 올려놓으신 고 여산 유병덕(1930-2007) 교수님 서거 10주기 되는 해이다.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는 10주기를 맞아 고인의 학문적 업적을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제반 여건이 맞지 않아 실현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조성환 박사가 여산 유병덕 교수의 학문적 성취가 집대성되어 있는《원불교와 한국사회》(1977)에 주목하여 고인의 학문적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옥고를 기고해 주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조성환 박사의 글을 개재하는 것으로 여산 유병덕 교수님의 10주기를 조촐하게나마 기념하고자한다. 독자 제위께서는 꼭 일독해 주시기를 앙망하는 바이다.

 

    2017년 12월 원불교사상연구원장 박맹수 합장

 

 

 


I. 들어가며 - ‘한국사상’으로서의 원불교

흔히 원불교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한국의 ‘민족종교’ 내지는 ‘민중종교’ 또는 ‘신종교’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원불교가, 천도교나 대종교 또는 증산교와 더불어, 주로 ‘종교’(religion)라는 서구적 틀로 이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원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대개는 종교학이나 불교학의 훈련을 받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반면에 철학과에서 원불교를 다루는 일은 거의 없는데, 그 이유 역시 원불교가 ‘철학’이라는 서구적 학문범주에 잘 맞지 않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견고한 학문범주, 또는 여기에 ‘역사’가 추가된 세 개의 학문범주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은 ‘사상’의 영역이다. 즉 원불교에 나타난, 철학이나 종교 또는 역사적 사건에는 잡히지 않는, 또는 그런 방편적 구분을 넘어서 있는, ‘사상’적 측면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원불교뿐만 아니라 동학이나 대종교 또는 증산교와 같은 이른바 ‘개벽종교’[*주1] 전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학이나 동아시아학 전체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 [주1] 여기에서 ‘개벽종교’란 자신들의 종교운동의 슬로건으로 (‘개화’가 아닌) ‘개벽’이라는 말을 채택한 ‘동학천도교, 대종교, 증산교, 원불교’와 같은 이른바 민중종교 또는 자생종교를 말한다(다만, 대종교는 ‘개벽’ 대신에 ‘개천(開天)’이라는 말을 썼다). 

   이때의 ‘개벽’은 “민중들이 토착적 사상과 심신의 수양 그리고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주체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간다”고 하는 ‘토착적 근대화’ 운동을 의미한다. 

   ‘토착적 근대화’ 개념에 대해서는 기타지마 기신, 〈토착적 근대란 무엇인가 - 서구중심주의적 근대에서 평화공생의 근대로〉(《개벽신문》 58호, 2016년 9월)와 조성환, 〈토착적 근대화와 개벽사상 - 한국근대사상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개벽신문》 68호, 2017년 10월)을 참조. 


‘철학’이나 ‘종교’라는 학문범주가 들어오기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이것들을 대신했던 개념은 ‘도(道)’였다. 가령 ‘동학(東學)’은 ‘천도(天道)’라고도 불렸는데(《동경대전》), ‘천도’란 “하늘을 중심으로 하는 신념체계・신앙생활・실천운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도’라는 개념 속에는 철학・종교・운동 등의 의미가 포괄적으로 들어있다. 그렇다면 원불교를 ‘도’로서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유병덕(1930-2007)의《원불교와 한국사회》(1986, 개정판)(*주2)가 이러한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비록 ‘종교’나 ‘철학’이라는 현대적인 개념이 사용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들을 포괄하는 ‘도(道)’로서, 또는 그것과 유사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학(學)’으로서, 또는 (‘도’나 ‘학’의 현대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 원불교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이 나온 직후에 국내 일간지에서는 “체계화된 원불교 사상서가 필요하다고 하는 시대적・교단적 요청이 이 책을 내도록 촉구하였다”고 보도하였고(주3), “원불교 60년 사상 최초로 철학적・종교학적 체계를 세워 원불교 사상을 구명한 책”이라는 평가를 하였다.(주4) 즉 이 책은 ‘사상으로서의 원불교’를 체계적으로 규명한 최초의 연구서라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도’나 ‘학’으로서, 또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철학과 종교를 아우르는 ‘사상’으로서 원불교를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원불교와 철학을 두루 섭렵한, 다시 말하면 종교와 철학이라는 학문적 훈련을 모두 받은, 그래서 양자를 포월(包越)할 수 있는 식견을 “겸전(兼全)”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이 책의 서문에서 당시 원광대학교 박길진 총장은 “(저자는) 그의 철학적 식견과 종교학적 이론을 토대로 원불교사상을 진지하게 전개하고 있다”(주5)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원불교라는 ‘도’는, 다른 개벽종교가 그렇듯이,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나왔다는 의미에서 ‘동도(東道)’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동’은 ‘동학’에서의 ‘동’과 마찬가지로, ‘동양’이나 ‘중국’이 아니라, ‘동방’ 즉 ‘한국’을 가리킨다. 그래서 ‘동도’는 지금으로 말하면 ‘한국사상’에 해당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제목《원불교와 한국사회》에는 이런 함축이 담겨 있다. 저자는 원불교를 종교나 철학이라는 학문 틀에서 바라보기보다는 ‘한국’이라는 지평 위에서 조망함으로써, ‘동도’로서의 원불교, 또는 철학과 종교와 실천을 아우르는 ‘한국사상’으로서의 원불교, 또는 그것의 다른 말로서의 ‘한국학’으로서의 원불교를 논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다음과 같은 말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원불교의 발상지는 한국이다. 원불교는 순수한 한국을 배경으로 탄생된 종교이다."(1장 원불교의 특징, 2절 한국으로부터의 종교」) 

"소태산은[*주6] 1935년에 그가 저술한《조선불교혁신론》을 통하여 불교의 시대화생활화대중화를 역설했다. “외방의 불교를 우리나라의 불교로, 과거의 불교를 현재와 미래의 불교로, 산중 승려 몇몇 사람의 불교를 일반 대중의 불교로 혁신한다.”고 하였다."(7장 원불교사상의 지향성」, 7절 원불교의 현대화 방향 481쪽)

 

   * [주6] ‘소태산(少太山)’은 원불교의 창시자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의 호로, 원불교 내부에서는 ‘대종사(大宗師)’라는 존칭을 붙여서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원불교가 한국에서 탄생한 일종의 ‘자생종교’임을 강조하면서, 소태산의《조선불교혁신론》에서 말하는 ‘혁신’에는 이러한 ‘자생’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즉 기존의 한국불교가 “중국불교를 한국화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원불교는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불교”이고, 바로 이 점이 당시의 다른 불교개혁론과의 차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의 자생종교”라는 말에서 초래될 수 있는 일반적인 편견을 경계한다. 즉 원불교는 단순히 중국의 유불도를 혼합해서 만든 이른바 ‘혼합종교’나 편협한 국수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민족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원불교 특징의 하나로서 ‘한국으로부터의 종교’라 함은 결코 한국 민족만이 고유하게 지녀온 ‘animism’적 신앙의 집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어떠한 외래사상을 자기중심적으로 습합시킨 ‘syncretism’적 종단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하여 원불교는 단순한 하나의 국가주의나 우월한 민족성을 합리화하려는 ‘nationalism’적 신앙형태가 아니라는 것도 밝혀둔다. 
   따라서 원불교를 ‘한국의 종교’로 국한시키려는 속단을 불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으로부터의 종교’라고 표현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원불교는 한국에서 발생했으니 먼저 한국의 상황을 정돈해서 세계의 모범을 만들어야 할 긴절(緊切)한 사명감이 있을 따름이요, 어디까지나 금후의 전 세계 인류를 구제하려는 뜻에서 탄생된 종교라는 것이다."(1장  원불교의 특징 2절  한국으로부터의 종교 77쪽) 

여기에서 우리는 저자가 생각하는 원불교의 사상사적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원불교는 한국에 국한된 이른바 민족주의적 종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삼교(三敎)를 혼합해서 만든 절충주의적 종교도 아닌, 한국에서 발생하여 세계로 향하는 ‘한국으로부터의 종교’라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한국학으로서의 원불교’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원불교를 한국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한다. 

"초기교서는[*주7] 한국학 자료로 매우 귀중하게 다뤄질 것이라고 본다."(4장  불교와 원불교」, 5절  원불교의 불교관 305쪽)
 

  * [주7] ‘초기교서’는『불법연구회규약』이나『불법연구회 통치조단규약』과 같은 교단 규약집, 또는『월말통신』이나『회보』와 같은 교단 정기간행물, 또는『수양연구요론』이나『보경육대요령』과 같은 초기 교리서 등을 가리킨다. ‘불법연구회’는 현재 ‘원불교’의 전신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저자가 원불교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원불교를 종교나 철학이라고 하는 서구적인 학문 분류체계에서 접근하기보다는, 한국이라는 ‘역사적문화적 지평’ 위로 끌고 가서, 한국인이 성취한 문화 또는 사상의 일환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한국학 연구의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 관점은 원불교를 바라보는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우리가 원불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시사를 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칫 원불교를, 또는 다른 한국종교들을, 내가 ‘믿는’ 또는 내가 ‘믿지 않는’ 특정 종교집단으로만 취급하기 쉽고, 그래서 그것에 매몰되거나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가령 원불교 관계자라면 쉽게 매몰되기 마련이고, 타종교인이라면 배타적이 되기 쉽고, 종교가 아예 없는 사람이라면 무관심하기 십상일 것이다.)

 


II. 본 론

지금까지 서론에서는 저자가 원불교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시각과 입장을 살펴보았다. 이하 본론에서는 구체적으로 책의 본문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먼저 책의 형식적인 구성과 내용적인 성격을 살펴보고, 이어서 저자의 ‘원불교론’을 고찰하기로 한다. 

1. 책의 구성과 성격

(1) 책의 구성

이 책의 초판은 1977년 11월에 원광대학교 출판국(익산)에서 나왔고, 그로부터 9년 뒤인 1986년 10월에 시인사(서울)에서 개정판이 나왔다. 초판은 서문과 본문 그리고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고 분량은 423쪽이다. 개정판은 여기에 내용이 추가되어 초판에 비해 125쪽이 늘어났고(548쪽), 한자가 한글로 많이 바뀌어 있다(그러나 순한글은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초판과 개정판의 목차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판본

                     초판

                      개정판

  서문

   수정증보판 서문

  서문(박길진)

   서문(박길진)

  자서

   초판 서문

  추천사(윤성범)

  본문

  제1장 원불교의 출현

 제1장 원불교의 출현

  제2장 일원상의 진리관 *[주8]

 제2장 일원상의 진리관

 제3장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

  제3장 불교와 원불교

 제4장 불교와 원불교

  제4장 원불교의 창업정신

 제5장 원불교의 창업정신

  제5장 원불교 반백년대

 제6장 원불교 70년의 개관

  제6장 원불교 사상의 지향성

 제7장 원불교 사상의 지향성

  부록

 Appendices. A Study on the Thought of the Venerable So-Tae-San

  Appendices. A Study on the Thought of the Venerable So-Tae-San

 1. Venerable So-Tae-San, The Great Master

 1. Venerable So-Tae-San, The Great Master

 2. Proof of the Experience of IL-Won-Sang

 2. Proof of the Experience of IL-Won-Sang

 3. The Ontological Research of ‘Eun’ or ‘Obligation’

 3. The Ontological Research of ‘Eun’ or ‘Obligation’

 4. The Social View of Won Buddhism upon Korean Society

 4. The Social View of Won Buddhism upon Korean Society

 5. The Influence of Won Buddhism upon Korean Society

 6. Won Buddhism as a Mahayana Buddhism

 색인

 

* [주8] ‘일원상(一圓相)’의 ‘일원(一圓)’은 원불교(圓佛敎)에서 생각하는 궁극적인 진리를 표현한 것이고, ‘일원상’은 그것을 동그라미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 표로부터 알 수 있듯이, 개정판에는  개정판 서문,  추천사, 그리고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 영문 논문 2개, 그리고  색인이 추가되었다. 아울러 초판 제5장의  원불교 반백년대가 개정판에서는  원불교 70년의 개관으로 제목이 바뀌어 초판과 개정판 사이에 20여년의 간극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각 장마다 부분적으로 내용이 추가되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개정판 서문에 소개되어 있다.

개정판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당시 감리교신학대 학장이자 한국종교사학회 회장인 윤성범 교수의  추천사이다(주9). 이  추천사는 이 책이 지니는 무게를 가늠하게 해 줄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이 책과 잘 호응하고 있다. 

 

예를 들면 “원불교의 기원은 멀리 신라불교에까지 더듬어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한국불교와 원불교와의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이 있느냐에 대한 물음에 대답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8쪽)라고 하여, 원불교를 한국사상사라는 거시적인 지평 위에서 이해하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식의 이해야말로 이 시대의 분위기이자 이 세대의 공통관심이었을 것이다. 즉 어느 분야를 연구하든지간에 ‘한국학’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과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학문이 지나치게 전문화되고 세분화되어 한국학이 파편화되고 있는 상황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각 장의 내용과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원불교의 출현」

현대 과학문명의 대두에 따른 새로운 종교의 필요성에 의해 ‘철학적 종교’로서의 원불교가 탄생했으며, 그 특징은 과학혁명에 대해 ‘도덕혁명’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보고 있다.

제2장 「일원상의 진리관」

동서철학을 넘나들면서 ‘일원상’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태허‧주편[원만]‧순환’ 등으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제3장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

원불교가 지니는 종교적인 신앙과 도학적인 수양이라는 두 측면을 일원상, 사은(四恩), 삼학(三學), 그리고 그것이 바탕이 된 사회정의의 실천으로 나누어 상술하고 있다.

제4장 불교와 원불교

원불교를 대승불교, 선불교, 그리고 한국불교사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로, 특히 제3절 「한국불교의 원융사상」은 승랑에서 보우에 이르는 5명의 대표적인 승려들을 다루고 있어 마치『한국불교소사』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제5장 원불교의 창업정신

‘창업’ 또는 ‘창조’라는 관점에서 원불교를 보는 저자의 독특한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제6장 원불교 70년의 개관

원불교 역사를 교화, 교도, 출판, 전망으로 나누어서 일목요연하게 개관하고 있다.

제7장 원불교사상의 지향성

원불교의 사회철학적 측면을, 평화혁명, 구원관, 역사관, 사회관, 국가관, 경제관, 실학 등으로 나누어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2) 책의 성격 

이 책은 요즘식으로 말하면 ‘인문학 서적’과 같은 서술방식이 특징적이다. 즉 종교학이나 철학과 같은 특정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들을 나열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폭넓게 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성격을 “한국학세대의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지식에 뒷받침된 인간론과 종교론에 입각한 원불교 인문학”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이러한 성격은 이 책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는 제1장  원불교의 출현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저자는 이 서론에서 철학과 종교, 동양과 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과 종교 그리고 문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면서, 원불교를 문명사적 지평 위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현대 인간에 있어서 최대 비극은 인간이 자신을 모른다는 것이다.”(23쪽)

"[슈바이처 박사의 문명과 전쟁론을 인용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하는 전쟁의 도살자는 바로 문명이다."(22쪽) 
   
"앞으로 종교는 인간화작업(Humanization)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68쪽) 

"인간의 고귀한 가치는 깨달음을 펼 수 있다는 점이다."(115쪽)

"현대는 확실히 자기 종교를 선전하기에 급급해서는 안 될 시대이다. 오늘날 종교인들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종교에로의 선도가 아니라 종교 일반을 통하여 성현의 정신, 또는 성(聖)의 절대가치를 속인들에게 인식시키는 일일 것이다. 

   종교인들이 자기종교의 선전에 급급한다거나 자기종교의 특징만 자랑하기에 바쁘다면, 그것은 사실상 닫혀진 종교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종교는 현대인들에 대해서 교화의 위력을 상실한 것이라 본다.”(24쪽) 

여기에서 저자는 현대문명의 비극적 측면들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인문학적인 종교로, ‘인간화작업’에 힘쓰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열린’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다. 새로운 종교에 대한 저자의 요청은 원불교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진다. 

즉 저자는 원불교를 이러한 시대적, 문명사적 요청에 부응하여 출현한 종교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원불교가 지니는 ‘현대사’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일종의 ‘원불교해석학’을 시도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는 본문에서 이 책의 저술목적을 “원불교사상 전개를 위한 해석학의 일단을 제시하고자 한다.”(143쪽)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취지의 원불교해석학에서 특히 인상적인 점은 ‘종교’와 ‘원불교’ 사이의 관계 설정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교단에 몸담고 있거나 특정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가 먼저이기 마련이다. 가령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하면 예수나 성경에 대한 찬양이나 인용이 앞서기 십상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관계를 ‘상식적으로’ 역전시키고 있다. 즉 종교 위에 원불교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원불교론을 말하기에 앞서 종교론을 먼저 말하고 있다. 마치 한국이라는 지평 위에서 원불교를 바라보았듯이, 종교라는 토대 위에서 원불교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칫 자기 종교에만 빠져, 종교 일반과 특정 종교 사이의 관계가 역전될 수 있는, 가령 ‘종교⊃원불교’가 아니라 ‘원불교⊃종교’로 되는 폐해를 경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저자는 원불교를 먼저 보편적인 토대 위에 자리매김한 뒤에,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원불교론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한다. 특히 제1장 원불교의 출현과 제5장 원불교의 창업정신, 그리고 제7장 원불교 사상의 지향성은 각각 “탄생-창업-지향”이라고 하는 원불교의 일대기를 시간순으로 서술한 것으로, 이 세 개의 글만으로도 하나의 완결된 원불교입문서 내지는 원불교인문학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2. 유병덕의 원불교론

 

이 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저자가 원불교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원불교에서 특히 무엇을 강조하고 있고 원불교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 개벽론・교리론・원불교론 등으로 나누어서 하나하나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개벽론 : ‘창조’로서의 원불교 

먼저 저자의 원불교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창조’나 ‘새로움’ 또는 ‘혁명’이나 ‘개척’과 같은 이른바 ‘진취적인’ 또는 ‘개벽적인’ 어휘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가령  서문에서 “소태산의 위대한 창조작업”(6쪽)이라고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소태산의 지도는) 한 사회의 개혁자로서 새생활운동에서 출발하였다”(37쪽), “(소태산의 저축조합과 방언공사[*주10] 운동은) 실학적 부흥운동이기도 하였다”(38쪽), “(원불교가 지향한) 평화혁명의 길”(416쪽), “(방언공사는) 개척정신의 효시”(322쪽) 등이 그것이다. 

 

  * [주10] 방언공사 : 1918년 4월부터 1년에 걸쳐 소태산과 구인제자(九人弟子)들이 전남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앞의 개펄을 막아 농토를 개간한 간척사업을 말한다. 둑의 길이가 약 1,600미터이고 전체 면적이 4만평이며, 농토는 2만 6천평으로, 교단창립의 경제적 기초가 되었다. (〈정관평 방언공사〉, 《원불교신문》,  2005년 4월 8일) 


이러한 용례들을 대표적인 것만 선별해서 대략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창조 : “민중 속의 창조적 주체자”(177쪽), “새로운 종교적 창조집단”(303쪽), “(방언공사와 같은) 창조작업”(323쪽), “(방언공사에 나타난 소태산의) 창조성”(323쪽) “창조의 의욕”(324쪽), “새로운 가치창조”(329쪽), “창조적인 술어”(325쪽), “(소태산의 훈련법은) 창조행위”(329쪽), “창조적 역사의식”(411쪽), “대종사의 역사창조의 위대한 맥박”(417쪽), “새 역사 창조의 원동력”(443쪽) 

② 창업/창립/창안 : “창업의 줄기찬 시련”(303쪽), “창립의 수난”(329쪽), “내가 고생을 하고 창립을 하여”(《대종경》인용[*주11], 323쪽), “스스로 창안”(303쪽)
  * [주11]『대종경(大宗經)』은 소태산의 언행을 기록한 원불교의 핵심경전으로, 총 15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③ 혁명 : “원불교와 종교혁명”(26쪽), “혁명적 종교관”(91쪽), “도덕적 혁명”(83쪽), “부녀자 혁명”(356쪽), “평화혁명의 길”(416쪽), “나는 일찍이 혁명의 사상을 가지고...”(조송광 인용. 42쪽) 

④ 개혁 : “사회의 개혁자”(37쪽), “(개화기의) 사회개혁자”(323쪽), “원불교는 점진적으로 인간을 개혁해 나가는 자세”(416쪽), “낡은 ‘에토스’를 과감하게 개혁”(57쪽), “한 사회의 제도개혁”(57쪽)

⑤ 개척 : “개척사업”(322쪽), “개척정신의 효시”(322쪽), “위대한 개척정신”(327쪽), “자립갱생의 개척정신”(355쪽), “한국 개척사상의 효시”(421쪽)

⑥ 개조 : “굳어진 습성을 개조”(90쪽), “인간개조의 입국론”(331쪽), “자기 심신의 개조”(416쪽) 

이 중에서 특히 ‘창립’이나 ‘창건’과 같은 말은《불법연구회창건사》나 “창립총회”와 같이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전신) 시절에도 공식적으로 쓰이던 말이다. 

 

저자가 이런 개념들을 부각시키고 있는 데에는 초기의 원불교가 지니고 있던 개혁적 측면이 널리 알려져서 일반인들이 원불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나아가서는 그런 도전과 개척 정신이 한국 전체에까지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평화혁명”(416쪽)과 같은 개념은 ‘평화’와 ‘혁명’이라는 일견 모순되는 듯한 개념을 병치시킴으로써 원불교가 추구한, 더 나아가서는 동학・천도교나 증산교와 같은 개벽종교가 공통으로 지향한, ‘개벽의 길’이 지니고 있는 양면적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평화혁명” 개념은 원불교가 지향하는 사회변혁의 방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나아가서는 동학농민혁명이나 3・1 운동과 같은 한국근현대사의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2) 교리론 : 원불교해석학

저자는 원불교를 “철학적 종교”(27쪽)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철학적 종교’란 “종교적 교리가 철학자들에게도 타당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27쪽). 그리고 이러한 규정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원불교의 핵심교리들을 저자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일원(一圓), 사은(四恩), 도덕(道德) 등이 그것이다. 

① 일원과 사은의 철학적 의미

‘일원’(一圓)은 원불교가 표방하는 궁극적 진리를 나타내는 개념이고, ‘사은’(四恩)은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입게 되는 네 가지 은혜(천지은동포은법률은부모은)를 말한다. 저자는 이 일원과 사은을 생명철학적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

“일원대도(一圓大道)의 대생명력을 사은(四恩)이라고 본 것이다. 우주만물이 생성변화되는 원동력을 형이상학적으로는 일원상의 진리라고 표현하였듯이, 그 생성약동하는 하나의 기운, 무한생명력을 체받아 나갈 수 있는 원리를 새롭게 제시한 것이 곧 사은이었다.”(47쪽)

“은(恩)은 우주적 섭리에 근거하고 있는 무한동력이요 대생명력이다. 은(恩)은 우주의 생성원리이다.”(181쪽) 


“우주가 생성하는 힘이 바로 은(恩)”(183쪽) 


“소태산은 생명의 원(源)을 은(恩)이라고 표현했다.”(430쪽)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 중에 ‘은덕(恩德)’이라는 말이 있듯이, 저자가 말하는 은(恩)은 일종의 덕(德)을 말한다. 그리고 이때의 ‘덕’은, 인간에 한정된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덕이 아니라 우주론적인 차원의 ‘덕’으로, 구체적으로는 천지자연의 ‘생성력’ 또는 ‘생성작용’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의 덕은 일찍이《주역》에서 “천지(자연)의 가장 큰 덕은 생성이다”(天地之大德曰生)는 말로 표현된 적이 있다. 저자는 원불교에서 말하는 ‘은’을, 동아시아의 생명철학 또는 생성철학의 맥락에서 해석하여, 우주론적인 ‘덕’(자연의 생성작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만물은 그 덕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은’(은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은혜의 원리를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일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생명철학적 해석에 다시 불교의 연기설을 가미하여, 은사상을 원불교의 평화철학의 토대로 위치지운다. 

“불타는 이것(=인과)을 연기설로 표현했지만 소태산은 인간 자각을 통해서 은혜라고 하는 방향으로 인과법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생명철학을 제기한 셈이다. 우선 이 우주가 무심치 않다고 하는 사실을 내 스스로 체험해서 생명의 관계가 절대인과의 이치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354쪽)

여기에서 저자는, 소태산이 불교의 인과론을 일종의 은혜론으로 이해하여 생명철학을 제시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해석에 의하면 원불교는 “동아시아적 생명철학의 바탕 위에서 이해한 불교”라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해석은 원불교를 중국철학, 나아가서는 한국철학과도 손쉽게 대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철학은《주역》이나《도덕경》(“도생지道生之) 또는 주자학(“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생성철학 또는 생명철학이기 때문이다. 

한편 저자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은(四恩)에 대한 생명철학적 해석을 바탕으로 원불교 평화철학의 이론적 근거를 도출해내고 있다. 즉, 생명의 인과적 원리를 자각한 은혜론이 원불교 평화론의 철학적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자각의 인과도 원인적(原因的) 행위의 추구와 결과에 추종하지 아니하고 어떤 결과를 보든지 원인을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자가 되는 것이 필연적 인과법을 자각한 자의 행위 자세이다. 이 점이 철학과 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사은(四恩)이라는 은혜 속에서 나와서도 그 은혜를 모르거나 안다 하더라도 행하지 않는 배은자가 있다. 이렇게 은혜를 모르는 배은자의 행위의 자세가 될 때에는 점점 상대방향은 서로 막혀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은혜사상만 제대로 실천해 나간다면 전쟁을 불식하는 평화세계가 건설될 것이다. 그래서 소태산은 또한 평화철학을 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354쪽)

즉, 생명원리의 인과적 탐구와 그로 인한 자각이 은혜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곧 평화의 실현으로 확대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은혜의 원리에 대한 탐구와 자각이 없으면 맹목적인 행동이 되고, 상대방과의 소통이 막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원불교의 교리와 이념을 철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그 중에서도 특히 동아시아철학의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써, 원불교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해석학적 시도야말로 저자가 말하는 ‘원불교 해석학’의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원불교사상 전개를 위한 해석학의 일단을 제시하고자 한다.” 143쪽).

참고로 이러한 해석학적 작업은 동시대의 장일순(1928~1994)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장일순은 동학의 생명사상을 모든 것이 생명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생명연기론 내지는 생명인과론으로 해석하여,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고 하는 ‘한알사상’과, “그대가 나이다”고 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 그리고 이러한 원리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비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평화사상’을 도출해내고 있는데(주12), 이러한 논리전개 방식은 유병덕이 은사상을 생명철학과 연기설로 해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평화사상을 도출해내는 과정과 유사하다. 

② 도덕과 훈련의 철학적 의미

내가 생각하기에 원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특히 다른 개벽종교들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진 점은 ‘수양’에 대한 강조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원불교 최초의 교재의 제목이《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1927년)이고(주13), 그 서문에 “인생의 요도(要道)는 수양(修養)에 있고, 수양의 목적은 연구에 있고, 연구의 목적은 혜복(惠福)을 구함에 있다”라고 밝히고 있는 점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수양에 대한 강조는 원불교에서 자주 사용되는 ‘도덕’과 ‘훈련’ 또는 ‘공부’와 같은 개념으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공부’는 전통시대 동아시아사상에서 ‘수양’의 별칭으로 사용된 개념이고, ‘훈련’은 그것의 원불교식 표현이며, ‘도덕’은 수양을 철학적 측면에서 표현한 말이다. 

 

특히 ‘도덕’은,《도덕경》이라는 책 제목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철학개념 중의 하나인데, 저자 역시 이 점에 주목하여 원불교에서 ‘도덕’이 지니는 우주론적수양론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무릇 도란 쉽게 말하면 곧 길을 이름이요, 길이라 함은 무엇이든지 떳떳이 행하는 것을 이름이니, 그러므로 하늘이 행하는 것을 천도라 하고 땅이 행하는 것을 지도라 하고, 사람이 행하는 것을 인도라 하는 것이며, 인도 가운데서도 또한 육신이 행하는 길과 정신이 행하는 길 두 가지가 있으니, 이 도의 이치가 근본은 비록 하나이나 그 조목은 심히 많아서 가히 수로써 헤아리지 못하나니라.”(《대종경》인도품 1장 인용. 105쪽)

“덕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어느 곳 어느 일을 막론하고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이름이니, 하늘이 도를 행하면 하늘의 은혜가 나타나고, 땅이 도를 행하면 땅의 은혜가 나타나고, 사람이 도를 행하면 사람의 은혜가 나타나서 천만가지 도를 따라 천만가지 덕이 화하나니라.”(《대종경》인도품 2장 인용. 82쪽)

"(원불교에서 말하는) 도덕이란 곧 우주의 원리를 체득하여 실제로 인간생활에 유익을 주는 것이 그 표준이라 하겠다.”(83쪽)

지금은 ‘도덕’이라고 해서 하나의 개념으로 굳어졌고, 그 의미도 인간이 준수해야할 ‘규범’을 가리키지만, 원래 동아시아철학에서는 ‘도’와 ‘덕’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것이 가리키는 영역도 자연과 인간에 모두 걸쳐 있었다. 즉 ‘도’가 자연에 대해서 쓰이면 자연의 운행이 되고, 인간에게 적용되면 (그 자연의 운행을 따르는) 실천이나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도는 떳떳이 행하는 것”이라거나 “하늘이 도를 행한다”는 소태산의 말은 동아시아철학사의 기본 전통을 잇고 있다. 

한편 ‘덕’은 ‘도’가 행해진 결과로, 소태산의 경우에는 ‘은혜’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가령 맨 마지막의 “사람이 도를 행하면 사람의 은혜가 나타나서 천만가지 도를 따라 천만가지 덕이 화하나니라”라는 문장에서 소태산은 ‘은혜’와 ‘덕’을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다). 
 
따라서 원불교에서 말하는 ‘도덕’은 이러한 우주론적인 의미에서의 ‘도’와 ‘덕’(특히 ‘은혜’로 해석된 ‘덕’) 개념의 합성어이다. 그리고 ‘수양’은 이러한 “우주론적인 도를 행하여 덕을 쌓는 심신의 훈련”을 총칭하는 말이다. 즉 일원이나 사은과 같은 ‘도’의 원리에 대한 자각과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몸과 마음공부를 말한다. 따라서 원불교의 ‘도덕’에는 처음부터 ‘수양’의 의미가 강하게 들어있는 셈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도덕’과의 가장 큰 차이이다.

저자에 의하면, 소태산은 이러한 도덕론에 입각하여 “한국으로부터의 도덕적 혁명을 실현”하고자 하였고(83쪽), “도덕에 근거한 민족갱생운동”(324쪽)을 전개하였다. 원불교에서 ‘도덕=수양’이 강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사회변화의 요인을 도덕=수양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수양개벽 또는 도덕개벽(=심신의 훈련에 의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의 창립표어인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에서의 정신개벽도 수양개벽의 다른 말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러한 수양 또는 도덕의 궁극적 도달점을 ‘자유인’의 양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태산이《정전(正典)》[*주14] 총서편  제1장  개교(開敎)의 동기 에서 말한)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라는 표현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 듯하다. 그 하나는 추상도덕, 관념도덕으로 실천성이 희박해진 모습을 고발한 점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을 훈련시키려고 한 점이다. 훈련이란 어느 틀(norm) 속에 맞추어 낸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의 굳어진 습성을 개조시켜 자율할 줄 아는 진정한 자유인을 모색한 것이었다."(90쪽)

 

* [주14]『정전(正典)』은 원불교의 기본 경전으로 『대종경』과 합쳐서『원불교 교전』이라고 부른다.

이에 의하면 소태산이 생각한 도덕과 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의 획득에 있다.[*주15] 그리고 ‘훈련’은 고정된 틀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틀에서 벗어나서 정신적인 자유를 얻고자 하는 인식론적 노력을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불교에서 말하는 도덕이나 훈련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규범의 실천으로서의 도덕’이나 ‘습관의 반복으로서의 훈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굳어짐에서 벗어나서 유연함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임을 알 수 있다. 

 

* [주15] 이러한 해석은 소태산의 말과도 부합되고 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수도인(修道人)이 구하는 바는 마음을 알아서 마음의 자유를 얻자는 것이며’...”(『대종경』제11 요훈품 2절) ‘대종사’는 ‘소태산’의 존칭이다.

(3) 원불교론 : 실학불교

저자의 원불교론의 또 하나의 특징은 원불교를 ‘한국 근대’라는 역사적 지평 위에서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경제적 자립을 추구한 간척사업 등을 ‘새생활운동’으로 소개하면서, 실학정신의 실천이자 새마을운동의 효시로 평가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한국 근대화운동의 선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① 새생활운동

저자는 소태산을 한국의 근대화과정에서 ‘새생활운동’을 전개한 사회개혁자로, 그리고 원불교가 전개한 ‘새생활운동’을 ‘새마을운동’의 효시로 평가하고 있다. 

"(소태산의) 지도는 종교적 이론이나 신비가 아니라 한 사회의 개혁자로서 새생활운동에서 출발하였다."(37쪽) 

"대종사는 숯장사저축조합으로 이 일을 1년만에 성취시켰다. 이는 한국 개척사상의 효시라고 본다. … 조국근대화에도 원불교의 이 법칙을 하루 빨리 받아가도록 해야 했다.

   새마을운동이 원불교의 신생활운동과 동떨어질 필요가 없다. … 이미 60년 전에 내놓으신 대종사의 정신을 갖고 새마을운동의 효시가 못되고 있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먼 데서 찾을 것이 없다."(421쪽)

"(대산종법사의[*주16]  신생활운동강령 」) 우리들의 생활 자세에서 뜯어 고치지 않으면 안 될 인간개조의 강령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강령은《원광》에만 실렸을 뿐 과감한 실천의 모범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때 바로 면밀한 계획 아래 이 강령을 행동지표로 밀고 나갔더라면 요즈음 새마을운동에 새삼스레 참가해야겠다고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425쪽) 

 

* [주16] 대산종법사는 소태산 박중빈(1891~1943)과 정산 송규(1900~1962)를 이어서 원불교를 이끈 김대거(1914~1998)를 말한다. 

우리는 흔히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면 70년대에 전개되었던 농촌근대화운동을 떠올린다. 그러나 저자는 원불교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간척사업과 저축조합 그리고 새생활운동이야말로 새마을운동의 시작이었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원불교가 지닌 이러한 전통을 이후에 발전시키지 못했던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저자의 관점을 참고하면, 70년대의 새마을운동이 정부 주도 하에 전개된 ‘위로부터의’ 새마을운동이었다고 한다면, 원불교의 새마을운동은 종교단체가 주도한 ‘아래로부터의’ 새마을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아래로부터의 새마을운동의 목표는 교단의 ‘경제적 자립’이었다. 

"원불교는 건전한 민중자본으로 형성되어 간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민중자본이란 외자를 도입한 바 없이 개척정신을 지니고 자력을 양성하여 구축해 나온 경제력을 의미하는 것이다."(477쪽) 

이처럼 원불교가 일찍부터 경제적 자립을 중심으로 하는 새마을운동(새생활운동)을 전개하게 된 데에는 ‘물질개벽’을 중시하는 원불교의 이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정신의 문제, 도덕의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경제의 문제, 생활의 문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원불교의 창립이념(“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이 있었기에 교단 초기부터 경제적 자립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리라. 

② 실학불교

저자는 원불교가 전개한 이러한 경제적 자립운동이야말로 진정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천이라고 하면서, 원불교를 ‘실학’으로 규정하고 있다. 

"공리공론이나 일삼고 있던 민중들에 대한 실사구시, 경세제민의 실학적 부흥운동이기도 하였다."(38쪽)

"소태산의 동정일여, 영육쌍전, 이사병행, 그리고 자립경제책 활용, 삼대력 등을 내걸고 실천수행으로 훈련된 인간을 양성한 것은 그 당시 민중의 기층에서 실학을 실천한 것”(487쪽)

그렇다면 원불교에서의 실학운동은 민중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는 의미에서, 조선시대의 ‘유학실학’ 또는 ‘선비실학’과 대비시켜, ‘민중실학(民衆實學)’으로 분류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원불교를 ‘실학불교(實學佛敎)’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망해버린 일제시에 오직 원불교만이 이 실학적 맥락에서 이용후생실사구시의 실천운동에 성공했다.…[원불교는] 실학이란 한국학의 한 장으로 다시 가설되어야 한다('학'으로서의 실학)"(490쪽). 

“원불교가 실학이라는 한국학의 한 장으로 설정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견해는 여러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종래의 ‘실학’ 개념이 주로 조선후기에 ‘탈성리학’적 경향을 보인 유학에 대해서 사용되었던데 반해, 저자는 그것을 원불교에 적용하여, 원불교야말로 이론적 차원을 넘어서 실제로 경제활동에 종사하여 민중자본을 형성한, 말 그대로 “현실을 변화시킨 실천적 학문”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종래의 실학 개념이 지식인이 중심이 된 서구적 근대화 움직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한다면, 저자가 원불교에 적용하고 있는 실학 개념은, 마치 오늘날의 한살림운동과 같이, 민중이 중심이 된 경제적 자립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실학 개념이 ‘실학허구론’까지(주17) 나올 정도로 문제가 많은 개념이라는 점에서, 저자가 원불교에 적용하고 있는 실학 개념은 진지하게 검토해 볼만한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개벽종교야말로 진정한 실학운동이었다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벽종교는 ‘일본’을 통해서 진정한 근대를 경험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민중의 차원으로 내려와서 서구적 근대에 한편으로는 저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수용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북학파가 청나라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서구문물을 접했다고 한다면, 개벽파는[*주18] 일본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서구 근대를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탈유교적이고 주체적인 사상적영성적사회적 대응이 개벽종교였던 것이다. 

 

  * [주18] 여기서 ‘개벽파’란, 개화파나 척사파와 대비되는 ‘개벽종교’를 지칭하는 가설적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개벽종교는 사상사적으로 보면 조선후기에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사상적 움직임(이른바 ‘실학’)의 ‘연속성’과 ‘단절성’ 상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③ 근대화의 선구  

저자는 “실학”과 “새마을운동”이라는 평가를 바탕으로 원불교를 “한국 근대화운동의 선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아가서 한국이 근대화를 진행해 가는데 있어서 참고할만한 선행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소태산이 이 회상(會上)[*주19] 창립에서 사명감에 불타는 인재들을 배출시키려 의도한 것은 한국 근대화운동의 선구였다고 평가할 것이다."(330쪽)

 

    * [주19] ‘회상’은 원래 “대중이 모인 법회”를 뜻하는데, 여기에서는 원불교를 가리킨다.

"민주화의 선구라 볼 수 있다. 소태산은 교당을 형성해 놓고 교단조직법을 짜놓았는데 이 때 간행된 책자를 보면 민주주의 방식으로 짜여있다."(356~7쪽)

"한국의 근대화가 개척정신을 찾을 때도 원불교의 개척과정을 잘 객관성있게 더듬어 연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356쪽) 
 
"정신수양과 소박한 경제윤리로서의 근검저축이소성대(以小成大)를[*주20] 빈틈없이 실현했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근대화하는데 인력의 계발과 자립경제 건설이라는 대전제 아래 공고히 밑받침이 되어야 할 경제윤리며 또한 참신한 지도자의 육성책을 모색한다면 곧 원불교 교단형성의 이면사를 탐구해야 될 것이다."(336쪽)

 

   * [주 20] ‘이소성대’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큰일을 이룬다”는 뜻으로, 원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이다.

 

종래에 역사학계에서 일제시대의 근대화를 논할 때 주로 다루는 대상은 ‘개화파’였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적 연원을 조선후기의 실학파에서 찾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원불교야말로 근대화 운동의 선구라고 평가하면서, 향후의 한국 근대화가 참고로 해야 하는 선례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저자는, 개화파가 추구한 근대화가 “탈아입구(脫亞入歐)”와 같은 서구적 근대화의 길이었다고 한다면, 원불교는 자생적 근대화를 모색한 사례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천도교 역시 한국의 근대화를 논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그룹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천도교의 뿌리는 “탈아입구”를 추구한 개화파가 아니라 “척양척왜”를 내걸었던 동학이었다. 그리고 동학, 천도교, 원불교는 모두 ‘개벽’이라는 말을 공유한 개벽종교에 속한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인식 위에서 원불교를 한국근대화운동의 사례로 평가하는 것 같다. 마치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 1934~2016)가《일본의 근대화와 민중사상》(日本の近代化と民衆思想, 靑木書店, 1974)에서 민중사상사의 관점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보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④ 나아가야 할 길

마지막으로 저자는 원불교에 대한 이상의 인식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원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숨막히는 일제치하의 식민지사(植民地史) 속에서 역사적 창조의 새로운 자세를 굳건히 실현해온 소태산의 모습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바람직하지 않을까? … 여기에서 우리는 교리의 이해나 해석에 준한 교화만을 답습하지 않고, 한 걸음 나아가 역사의 새로운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역할이 될 가르침을 펼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교화는 교리의 실천만을 권하는 종교에서 역사의식을 되살려 주며 창조정신이 무엇인가를 드러내 주는 작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원불교뿐만 아니라 현대의 모든 종교는 역사를 창조하는 교화자세냐 아니면 역사의 뒤를 따라만 가게 하는 교화행위냐 하는 갈림길에 서있기 때문이다."(417쪽) 

이 제언은 ‘2세기 원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느낌이다. 그것은 초기의 창조정신과 개척정신을 계승하여 역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즉 공자식으로 말하면, 기존의 역사를 述하는(“따라가는”) 원불교에서 새로운 역사를 作하는(“창조하는”)[*주21]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 [주 21] “子曰 : 述而不作”(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과거의 것을 서술하지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 않는다.”『논어』술이」)


이어서 저자는 그것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의 하나로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원불교도 현재 소태산 대종사의 실학정신을 다 수렴하여 이를 발전시키고 있다고만은 볼 수 없다. 따라서 여기에 몇 가지 문제를 새롭게 제기해 보기로 한다. 

a. 연구풍토의 개선이 시급하다. 

실학 b패턴(응용가능한 이론정립의 실학)의 저조를 극복하기 위하여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학술언어사상예술 등의 탐구가 시급하다."(490쪽)

여기에서 저자는 원불교 ‘연구’, 즉 ‘원불교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원불교가 표방하는 “시대화대중화생활화”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즉 시대에 맞게 계속해서 새로운 언어를 연마하지 않으면 시대로부터,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중국철학에서 송대의 주자(朱子)가 고대 유학을 새롭게 해석하여 신유학을 제창했듯이, 1세기 원불교를 새롭게 해석하는 ‘신(新)원불교학’이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저자가 서두에서 ‘원불교해석학’을 표방한 것도 이러한 작업의 일환에 다름 아닐 것이다. 

 


III. 맺으며

지금까지 살펴본 저자의《원불교와 한국사회》를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한국’과 ‘사상’ 그리고 ‘창조’라는 세 단어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원불교를 “근대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역사를 창조한 새로운 사상운동”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종래의 원불교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뒤집고 있다. 

원불교를 단지 한국의 신종교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한국사상의 귀중한 자료로 인식할 것인가? 한국불교의 한 종파로만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 근대화운동의 한 사례로 볼 것인가? 나는 이 책의 문제제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오늘날 원불교 내부에서조차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이 책이 절판되어 시중에서 더 이상 구할 수가 없고, 저자의《전집》조차도 아직 출간되고 있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로부터도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점들이 오늘날 원불교를 한국사상연구의 대상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을 것이다. 즉 원불교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에서조차도 원불교가 진지한 사상연구의 대상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소홀’의 경향은 교토대학 오구라 기조 교수의 다음과 같은 한국인 비판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식은 거칠고 소홀하며 허위에 가득 차 있고 태만한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국의 역사에 대해서조차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자국을 분석하는데 당위와 연역과 도덕과 외과수술적인 언설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내재적으로 자국을 이해하려고 하는 소수의 성실한 언설은 부당하게 무시되거나 경멸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한국을 인식해서는 안 된다."(주22)

나는 저자의 원불교론이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종래에 한국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그런 식으로 원불교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각주]

(2) 초판은 1977년에 나왔는데, 이 서평에서 사용한 판본과 인용하는 쪽수는 개정판에 의한 것이다. 

(3)〈원불교와 한국사회〉, 《원불교신문》, 1977.11.25. 강조는 인용자의 것.

(4)〈‘민중 속의 원불교’를 구명 - 『원불교와 한국사회』펴낸 유병덕 교수〉, 《중앙일보》, 1977.11.22. 강조는 인용자의 것.

(5) 4쪽(강조는 인용자의 것). 이하에서 인용하는『원불교와 한국사회』의 인용문은 가급적 한자를 한글로 바꾸었고 필요에 따라 단락을 나누고 구두점을 첨가했으며, 굵은 글씨의 강조는 모두 인용자의 것임을 밝힌다. 

(9) 그런데 이 추천사가 쓰여진 시기는 개정판이 나온 1986년이 아니라 초판이 나온 1977년으로 되어 있다. 

(12) 조성환, 〈한국형 생명운동의 원류와 미래를 찾아서 _ 장일순의 한살림철학을 중심으로〉, 《개벽신문》70호(2017년 12월).

(13) 양현수(양은용), 〈최초의 교재,『수양연구요론』〉, 《원불교신문》, 2016.02.26.

(17) 김용옥,『독기학설』, 통나무, 1990.
  
(22) 오구라 기조 지음, 조성환 옮김,『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모시는사람들, 2017, 251~2쪽.


 한국학으로서의 원불교 연구(조성환)_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74(2017.1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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