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저 1호에게
류성훈 ∣ 파란시선 0056 ∣ B6(128×208) ∣ 119쪽 ∣ 2020년 6월 20일 발간 ∣ 정가 10,000원 ∣ ㈜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꿈은 청색편이에도 적색편이에도 가깝지 않다
자꾸만 어긋나는 믿음과 공허한 우주의 별자리 속에서도 인과의 법칙을 발견해 내려 했던 한 천문학자처럼, 시인은 자꾸만 멀어져 가는 존재들의 차가운 척력 속에서도 서로를 끌어당기는 어떤 구심력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듯하다. “척력만이 있어서” “감히 끌어당기지 못”했던 너와 나의 관계 사이에 “운세를” 보듯 인과의 실마리를 부여하기도 한다(「장복」). 물론 그것은 누군가의 뜻과 안배에 의해 삶이 이끌린다고 여기는 종교 혹은 신앙의 방식이라기보다는, 텅 빈 생의 발걸음 속에서 삶의 이유들을 채워 나가는 일이자 자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 “있음 직한 점괘를 만들어 가는 일”(「청참」)에 가까운 것 같다. 요컨대 그 이끌림의 운동과 가속 속에서 탄생한 여분의 무언가가 실제 너와 나의 관계를 움직인다고 믿는 것, 어떠한 실체에도 기대지 않은 채 스스로의 묵묵한 걸음으로만 공허한 삶의 궤적들을 채워 나가는 것.
아마 보이저 1호가 지금보다 더 멀리 나아가게 된다면 그 흐릿한 점은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아질 것이고, 항해를 떠났던 그 시작점은 이내 잊히듯 사라질 것이다. 보이저 1호가 인류의 그 누구보다 멀리 최후의 저 너머까지 도달하더라도 “인간이 행한/최초의 교환은 고독”(「최초의 교환」)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금빛 레코드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홀로된 돌림노래만을 침묵처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시인의 묵묵한 발걸음과 발화 역시 끝내 아무런 도착지에도 가닿지 못하고 금세 희미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끝없는 걸음 뒤편에 남아 있었던 작고 희미한 푸른 먼지처럼, 이 시집 속에서 발화되었던 실체 없이 아름다운 시편들만은 그가 꿈꾸었던 불가능의 여분이자 인과의 흔적으로 우리에게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이상 조대한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류성훈 시인은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현재 숭의여대에 출강하고 있다. <보이저 1호에게>는 류성훈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 추천사
류성훈의 시를 제대로 향유하기 위해선 아득한 우주 공간을 홀로 여행하는 자의 심정이 되어 보아야 한다. 우주라는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고독함을 한 번쯤 느껴 보고 싶은 사람 역시 류성훈 시의 반가운 독자가 될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광대한 우주를 여행하는 길에 새삼 종점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있다고 해 봐야 영원히 유예되는 위치에서 상상되는 역, 몽상되는 역. 어쩌면 우주라는 공간 자체가 영원히 “종점이 없는 역”(「글로뷸」)일 것이므로, 홀로 여행하는 자의 우주적인 고독은, 아무리 뻗어도 뿌릴내릴 수 없는 두 발과 아무리 늘여도 가닿을 수 없는 시선으로 헤매는 심경일 수밖에 없다. 안착해야 하는 여기와 도착하고픈 저기가 모두 막막해진 상태에서 그보다 더 먹먹하게 읊조리듯 밀고 나가는 시, 항진하는 시, 그것이 류성훈의 시라면, 거기서 발견되는 풍경은 “아무리 걸어도 마주치지 않을 계절”(「총상화서」)처럼 해갈되지 않는 내면을 앞에 둔 풍경과 같다. 어디를 향하더라도 방랑과 방황이 예정된 그 길에서 미아와 고아와 탕아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날 때부터 고독을 타고난 이 화자들이 때로는 ‘보이저 1호’의 막막한 심경으로, 때로는 우주 소년과도 같은 무구한 마음으로 나직이 읊고 가는 말. 그것이 다시 류성훈 시의 언어라면, 그 언어가 내는 길은 앞으로도 내내 종점을 모르는 길일 것이다. 아니면 “다시 만나러 가는 길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길이 같은 종점”(「글로뷸」)을 두고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어떤 길이든 그 길의 끝에서 한 사람의 기원과 한마디 말의 기원과 한 줌도 안 되는 이 우주의 기원을 쫓아서 멀리멀리 항해해 가는 한 여행자의 뒷모습이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을 것이다.
―김언(시인)
■ 시인의 말
달리 뗄 입도 없이
약불처럼 거기 있었기를
호명할수록 지워져 가는
나의 마지막 이승들에게
■ 저자 약력
류성훈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현재 숭의여대에 출강하고 있다.
시집 <보이저 1호에게>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골절 – 11
굴드의 허밍 – 12
소서 – 14
언어의 기원 – 16
목성공포증 – 18
장복(臟卜) - 20
역언법 – 22
봄밤 – 23
밤의 도플러 – 24
수색 – 26
유리체 – 28
나의 채광창 – 30
가위 – 32
제2부
행성운동 4법칙 – 35
총상화서 – 36
회 – 38
산천어 – 40
공벌레처럼 걷기 – 41
절리 – 42
잠복기 – 44
강릉 – 46
글로뷸 – 48
검은 물 – 50
설기(洩氣) - 52
카마이타치 – 54
HAFE 현상 – 56
제3부
도선사 – 59
상 – 60
오월 – 62
배시스케이프 – 64
등화관제 – 65
애초 걸었던 길 – 66
섬모충 – 68
월면 채굴기(採掘記) - 70
틀니 – 72
거룩한 노랑 – 73
담낭암 – 74
서른의 방학 – 75
기일 – 77
졸업 – 79
제4부
공작왕 – 83
최초의 교환 – 84
푸주의 강 – 85
신천옹 – 86
까마귀 – 88
화장 – 90
사생대회 – 92
비문증 – 94
염 – 95
늘, 특수청소부 – 96
스페이스 할머니 – 98
옥수수 – 99
이장 – 101
보이저 1호에게 – 102
청참 – 104
해설 조대한 보이저 1호가 우리에게 남긴 것 – 105
■ 시집 속의 시 세 편
글로뷸
등줄기에 겨울 금성이 외롭게 고인다 저게 행성이라니, 너의 엎드린 피오르드 사이에서 한 방울도 자유롭기 싫고 아무리 짙푸른 밤도 방뇨의 혐의를 따라 흐르는
얄팍한 대기권 아래서
나는 네 위에 쏟아진 산광성운이었다
조금 비리면 어때 저 높은 항로의 하늘은 누가 보아도 정지해 있고 우리는 그럴 리 없는 쪽에 누워 있는데, 우주풍이 네 허리를 구긴다
빛도 빨아들이는 천체가 있대
질식한 별들을 고향에 보내는 날
다시 만나러 가는 길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길이 같은 종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내 과학은 너의 종교였지만 내 병든 종교에 상응할 너의 과학은 없었다
그럴 리 없기를, 꺼진 제례에 서로의 몸을 떨고 차라리 널 위해 몸을 녹일 수 있는 대기권에 참 오래도 누워 있었으니
빛도 물도 없는 곳까지
식별되지 않는 너를 더듬어 보면서
방전된 배터리를 심우주에 버린다
종점이 없는 역에서
나는 오래 서 있고 싶었다 ***
보이저 1호에게
물통 속에 밤이 퍼진다
내 붓은 차갑게 씻기고
안부라는 건
대개 꿈풍선일 뿐, 눈부신
우주 방사선 속에서
버릴 꿈이 없어서, 널 닮은
연체동물을 그렸다 저 외행성 출신의
물기 없는 입을, 활짝 핀
중력 없는 팔들의 짙푸른 기별을
축하한다
악수하는 법도 몰랐으면서
우리는 늘 몽상이라는 교신 위에서
지구에서의 너를 그렸으니
한때 색색 풍선보다 더 필요했던
날숨을, 더운 붓을 휘갈겨 본다
화장실 창밖이 밝아 오고
벌어진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다
그 금빛 껄끄러움 또한
교신,이라 생각했던 물음을 안고
나는 지금 태양권의 어디쯤을
쫓아가고 있을까 ***
오월
혼이 베개에 묻을 만큼 오래 잠들고 싶던 날
나는 귓구멍에서 내 가려운 잠을 파낸다
모두 뭉근한 불 위에 누웠던 때가 언제였을까
한 이불에서 발을 뻗었을 때가 언제였을까
혼자 왔다가, 혼자가 아니었다가, 혼자가 아닌 줄 알았다가, 혼자가 아니고 싶다가, 결국 혼자가 되는 삶들을 건조대에 널던 오늘은 달과 지구의 공전 거리가 가장 멀었다
행성과 위성이 멀어도지고 가까워도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가족이 살고 있었고
나는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았다
가족의 달에는 가족도, 가족 없는 희망도, 희망 없는 가족도 있으니 우리는 꼭 희망이 없이 살아도 나쁘진 않겠지 그것은 단어에 불과하고 오타에 가까울 테니
가령 살아,라고 쓰다 사랑,이라고 쳤을 때 언제든 어떻게든 삶은 실수이고 그래서 아름다워 보였듯이, 내가 글을 쓰는 게 다행인 때가 있었듯이
잠 속에서
잠 밖에서
또는 마지막 이승에서
더 많은 봄이 보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