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화
구지혜
PARAN IS 19∣2026년 6월 20일 발간∣정가 12,000원∣B6(128×208㎜)∣165쪽
ISBN 979-11-94799-36-8 03810∣(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신간 소개]
솥단지 하나 없이 살아온 생들이 서로의 울음 속으로 겹쳐 들어간다
[주화]는 구지혜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뻐꾸기 그리고 뻐꾸기」 「고독」 「주화」 등 60편이 실려 있다.
구지혜 시인은 본명은 구명숙이며, 경상북도 영양에서 태어났다. 한남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1년 [시와 정신]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그늘을 꽃피우는 시간] [안녕, 나의 創世 편의점] [주화]를 썼다. 제5회 전국 계간지 우수 작품상, 제19회 [한남 문학] 운문 대상, 제2회 [창작 세계] 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2019년, 2022년 대전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구지혜의 시편은 ‘흔들림’ 어떤 ‘그을림’의 미학으로 수렴된다. 생과 사, 인간과 자연, 주체와 타자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의 내부에서 진동하며 끊임없이 스며든다. 「당신 이야기」에서 드러나듯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동과 변형의 과정이며 경계는 끝내 확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시적 세계는 감각적 이미지의 밀도와 파편적 서사의 결합 속에서 구축된다. 문장은 논리적 인과를 벗어나 도약하고, 그 비약 속에서 의미는 하나로 수렴되기보다 다층적으로 확산된다. 그 결과 구지혜 시는 명확한 해석을 요구하기보다 어떤 잔상이나 ‘그을음’처럼 희미하게 남는 감각으로 우리를 이끈다. 경계에서의 흔들림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을 드러내며, 경계는 넘어서야 할 선이 아니라 머물며 변형되는 자리이다. 결국 우리는 경계의 관계와 희미한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흔들림을 함께 감각하고 견디는 경험 속에서 비로소 존재한다. (이상 김홍진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추천사]
시집 제목도 그렇지만 이 시집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주화’다. 그렇다면 ‘주화’란 무엇인지부터 궁구하는 건 당연지사다. 그런데 이에 답하는 일은 곤혹스럽다. 물론 ‘주화’는 사람 이름이기도 하고, 등불이기도 하고, 주화신(主火神)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때론 동전을 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주화’를 그 무엇이라 지목하든 혹은 그 무엇 하나로는 결코 귀결되지 않는다고 단언하든 불충분하긴 매한가지다. ‘주화’는 “수천 개의 다른 얼굴 속에서 번들”거리는 과잉이며(「비늘」),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한 겹”씩 벗겨지고 돋아나는 잔여이기 때문이다(「이름에 대하여」). 그리고 ‘주화’는 “2025년 전의 안드로메다/수억 개의 은하 가운데/가장 먼 티끌 속 씨방”이며(「2025년 전의 주화」), “작은 동그란 그릇 하나에” 담긴 “죽음”이다(「찬란」). 그리고 그 “붉은 팥알 같은 두 눈동자는 창가를 떠나지 못”한 채(「2025년 전의 주화」) 이 시집 행간마다에서 그러하듯 우리의 “진짜 얼굴을” 언제 어디서나 “마주하고 있”다(「빅브라더에게 보내는 기도」). 그리하여 “주화,/그 말이 한 번만 건너와도 귀의 연못은 물살의 울림과 파문의 떨림을 휩쓸고 지나간다”(「두 물결의 몸」). 정녕 이러하다면 ‘주화’를 실재의 흔적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할 까닭은 없다. ‘주화’는 시편들 곳곳에 등장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우고 다시 쓰며 여전히” 그것으로 남지 않고 흘러넘친다. 그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만다라가 바로 이 시집이다. “주화는 오늘도 부르며 벗고 벗으며 부르고 있다”.(「이름에 대하여」)
―채상우 시인
[시인의 말]
복지관 지하 1층 실내 수영장
한 통의 물이 우리를 품고
몸들은 서로의 물결을 받아 적는다.
음~파 음파
습기 어린 계단 끝에서
우리는 같은 숨을 나눈다.
몸이 지나온 장소들을 더듬다 보니
나는 어느 세계에 오래 잠겨 있었다.
함께 설 수 있는 단 하나의 자리
시는 구원이 아니라
물 위로 천천히 떠오르는 숨에 가까웠다.
우리는
어떤 몸을 입고
어떤 자리에서
다시 살아 낼 수 있을까?
[저자 소개]
구지혜
본명은 구명숙.
경상북도 영양에서 태어났다.
한남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1년 [시와 정신]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그늘을 꽃피우는 시간] [안녕, 나의 創世 편의점] [주화]를 썼다.
제5회 전국 계간지 우수 작품상, 제19회 [한남 문학] 운문 대상, 제2회 [창작 세계] 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2019년, 2022년 대전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좁은 문 – 11
뻐꾸기 그리고 뻐꾸기 – 12
오르는 몸 – 14
푸른 뱀 – 16
맨발 삼매 – 18
낙엽 – 19
안개 – 20
물류창고의 아라한 – 22
비늘 – 24
중부권의 모래바람 – 27
음력 8월 15일 – 30
찬란 – 31
서 있다 – 34
여기 여기 – 36
청리움 – 38
제2부
대기실 – 43
무명의 방 – 44
조제의 방 – 46
혈의 서랍 – 48
안마의자의 방 – 49
아이스팩 – 52
주차선 안의 몸 – 54
인등 – 56
밤이 내려앉으면 – 58
벽에 앉는 자세 – 60
고독 – 62
두 물결의 몸 – 63
비의 체온 – 66
열여덟 번 – 68
제3부
위로 – 73
웃지 않으면 시들지 – 74
면접을 기다리는 얼굴들 – 76
새마을 교실 이데아 – 78
혈(血) 씨의 궤도 – 81
신화, 출제되다 – 84
실업급여 창구 앞에서는 – 87
광대 – 88
제복의 철학 – 90
빅브라더에게 보내는 기도 – 92
성곽의 피 – 94
고명딸 – 96
같은 하늘 아래서 – 98
혼돈 – 100
운명의 학교 – 102
MBTI 거울 앞에서 – 104
제4부
주화 – 107
2025년 전의 주화 – 110
신의 Log – 114
이름에 대하여 – 116
관계 – 118
당신 이야기 – 120
다시, 정자교 – 122
깊은 연민을 들다 – 124
동거 – 126
낯선 바람의 시간 – 129
시절 인연 – 132
광명(光明) – 134
자정 무렵부터 – 136
혹한 – 138
자유 – 141
해설 김홍진 몸과 틈, 경계의 존재 시학 – 144
[시집 속의 시 세 편]
뻐꾸기 그리고 뻐꾸기
산밭에서 여자는 김을 맨다
몸을 일으키고 구부리고 펴는 동안
여자의 몸은 끝내 밭이랑에서 떨어지지 못한다
진흙은 잡초처럼 달라붙고
개여뀌, 금방동사니, 쇠비름, 명아주, 바랭이……
이름 가진 잡풀들이 여자의 혈관 속으로
땀과 흙먼지와 함께 스며든다
몸은 밭이 되고 밭은 다시 몸이 된다
보리밭 같은 싱싱한 기운
풀의 향
버석 마른 흙냄새 같은 어머니
(언제부턴가, 모든 어머니를 땅이라 부르게 되었을까)
아궁이 재를 물에 풀어 허기를 달이듯
여자는 밭이랑에 붙어 있다
똥물을 퍼다 마실 것 같은
이 억척의 목구멍
얼마나 찢어져야 살아 있다는 증명이 될까
꽃가마를 타고 시집오던 날
다홍치마 연두저고리는 잠시 몸을 빌려 썼을 뿐
무성한 풀은 여자의 몸에서 먼저 자라났다
이제는 잡풀조차 뿌리 내리지 않는 몸
넓은 하늘 아래
여자가 누울 곳이라곤
기울어 가는 황토 흙집마저 없다는 것 여자는 이미 알고 있다
그때, 뒷산에서 뻐꾸기가 운다
솥단지 하나 없이
살아온 생들이 서로의 울음 속으로 겹쳐 들어간다 ■
고독
절벽 속에는 아무 기척도 머물지 않았다
부서진 뼈들은
바람의 스침만으로도 기울어질 방향을 오래 고르는 듯했다
지네들은 어둠의 살갗에 말없이 달라붙어 있었다
차가운 돌바닥 위로 이끼들의 숨결이 낮게 번져 갔다
아득했다
위태로운 습한 기운이 가장자리에서부터 천천히 포위망을 좁혔다
가늘고 길게 늘어진 생각들은
돌아갈 길을 잊은 채 검푸른 파도의 그림자만 바라본다
석순들은 아무 말없이
어둠과 닿은 모양 그대로 묵묵한 굴곡의 몸을 기댄다
미로는 들어갈수록
소리 없이 높아지는 척추처럼 여러 갈래의 고요를 세우고
한여름에도 조금 더 깊은 냉기를 품는다
그러나
왜
그 모든 침잠의 중앙에 온화한 미소 하나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가만히 들어앉아 있었을까 ■
주화
간밤 불의 흔적을 찾다
늦잠에서 깬 주화가 블라인드를 개었을 때 맞은편 동 큰 문 열리고
그때마다 긴 막대 자루 하나 불쑥불쑥 튀어나와 까맣게 낀 출입문 바닥을 연신 문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닥을 붉은 양탄자로 덧댈지 아궁이를 치고 큰 폭으로 반등해 이 그을음을 뜰까? 까만 대걸레가 중얼거리는 듯 들락거리며 연신 거뭇거뭇한 아궁이에 남아 있는 재를 쳐내고 있었다
주화는 거실문 닫고 부엌 안으로 돌아와 아궁이에 불을 피웠다 주전자 밑바닥이 타는 그을음 일었다 침실 돌아 거실을 타고 주화가 조금 전까지 누워 있거나 서 있던 바닥 몇 페이지에도 거뭇거뭇한 그것이 고여 있는 듯도 하였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따위의 일정표를 모아 ‘다시 지필까?’ 하고 주화가 중얼거렸을 때 화요일 해는 멀리서도 불씨를 살리고 있었다
주화는 사그라진 지난 달력 한 장을 앞으로 돌렸다 ‘무시하거나 방치하거나 함부로 땔감으로 쓰면 안 되는 이유가 있지’ 주화는 ‘말해 뭐해’ 특이한 말투로 ‘말해 뭐해’ 그 말을 몇 번이고 입속으로 되뇌었다
‘희귀해서 수백만 원’ 주화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어 있던 주화를 일순 놓쳤다 원탁 위에 탁! 불꽃 일었다 테이블 위에는 네 귀퉁이 끄물끄물한 책이며 불쏘시개로 쓸 노란색 포스트잇 덕지덕지 달라붙은 노트북 타다 만 거멓게 식은 기형의 커피잔
지름이 900센티미터쯤 되는 원탁 그 가장자리 쪽으로 주화가 상체 일으켰을 때 주화의 몸 찌지직거렸다 ‘구석에 처박힌 주화나 길바닥에 엎어져 있는 주화의 그을음 잘 보살펴 보아야지’
지난밤, 향초는 그을음 켠 벽을 남기고 주화가 ‘혹시, 빨간 돼지 저금통을 한국은행에 들고 가면 싫어하나 눈치 보지 않았니’ 주화는 주화를 다시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 놓은 걸 일순 놓쳤다 ‘아니, 쨍그랑거리며 귓바퀴에서 몇 바퀴 불씨를 피우다 이내 사그라진들 말이야?’
주화 속에 박제된 의관을 갖춘 노인의 눈빛이 새어 나와 주화의 눈빛 속으로 그을음이 흘러들었다 박제된 그을음의 눈빛을 다른 쪽으로 돌리자 ‘100’이란 숫자의 불씨가 아직 살아 있는 듯도 하였다
주화는 다시 베란다 블라인드를 깔려고 했을 때,
건너편 출입문 앞에 가물가물 까만 그것이 꺼졌고 불의 흔적을 우물거리며 주화는 그곳이 잔뜩 낀 일정표를 들고 현관문을 힘주어 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