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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 컬럼

[교실은 지금 ①] 두 개의 참교육

작성자상징사전|작성시간26.06.18|조회수88 목록 댓글 0

— 학생인권과 교권은 시소가 아니다

 

요즘 전 세계가 같은 드라마를 본다. 무너진 교실에 한 남자가 나타나 '선을 넘은' 학생과 악성 민원 학부모를 직접 응징하고, 시청자는 후련해한다. 넷플릭스 '참교육'은 지난 6월 5일 공개된 뒤 2주 연속 글로벌 비영어권 1위에 올랐고, 주간 시청 수 2,110만 건을 기록했다. 그가 속한 '교권보호국'은 교육부가 세운 가상의 기관 — 현실에는 없는 조직이다. 우리가 박수를 보내는 것은, 현실에 없는 손이 대신 휘둘러 주는 응징이다. 그런데 드라마 밖 우리네 교실은 조용히 비어 간다. 지난해 수능 응시자 가운데 학교 대신 검정고시로 자격을 얻은 학생이 4.0%로 31년 만에 가장 많았고, 2024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교사도 28명으로 2020년 이후 가장 많았다. 후련한 판타지와 떠나는 현실, 그 사이의 거리가 묻는다. 우리는 왜 학교에서 '응징'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 하는가.

 

여기서 제목을 회수하자. '참교육'은 한 세대 사이에 그 뜻이 정반대로 뒤집힌 말이다. 1989년 이 말을 처음 내건 교사들에게 그것은 '교육의 민주화와 인간화'였다. 2026년 같은 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물리력이나 위력으로 굴복시키는 행위'를 뜻하는 인터넷 밈이 되었고, 끝내 그 드라마의 제목이 되었다. 같은 말이지만 가리키는 방향은 정반대다. 한쪽은 권력의 폭력에서 약자를 지키려는 '절차'였고, 다른 한쪽은 미운 상대를 절차 없이 짓밟는 '폭력'이다. 약자를 지키려던 말이, 이제 절차를 건너뛴 폭력에 '정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전도는 우연이 아니라, 30년간 격렬하게 요동친 교육사가 한 낱말에 응축된 결과다.

 

1980~90년대의 교실에는 교사의 체벌과 권위가 넘쳤다. 그 과잉에 제동을 건 것이 2010년 경기에서 처음 만들어진 학생인권조례와 2011년의 체벌 금지였다. 체벌과 차별, 사생활 침해로부터 학생을 지키려는 장치였다. 그런데 진자(振子)가 반대편으로 넘어가자, 이번에는 교사가 약자가 되었다. 정당한 생활지도조차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는 악성 민원 앞에서다. 2023년 서이초 교사의 죽음이 그 한계를 드러냈고, 그해 9월 국회는 교사를 무고성 신고로부터 보호하는 교권회복 4법을 통과시켰다. 진자는 체벌에서 학생 인권으로, 다시 교권으로 30년을 오갔다. 이쯤에서 분명히 해 두자. 두 참교육을 견주는 것은 '어느 편이 옳았나'를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낱말의 뜻이 어디로 미끄러졌는가를 묻기 위해서다.

 

'학생인권을 강화했더니 교권이 무너졌다.' 이 통념은 뿌리 깊고, 학생인권조례 폐지론은 이 인과를 핵심 논리로 삼는다. 이 통념을 가벼이 볼 일은 아니다 — 교사들이 느끼는 위기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자의 왕복을 '시소'로 읽는 순간 오해가 시작된다.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올라간다는 그 그림은 틀렸다. 진자는 시대의 무게중심이 옮겨간 자취일 뿐, 학생의 권리가 교사의 권리를 끌어내렸다는 인과의 증거가 아니다 — 그 인과는 데이터로 입증된 적이 없다. 학생인권은 교사의 자의적 체벌로부터 학생을, 교권 4법은 학부모·학생의 자의적 무고 — 정당한 지도를 아동학대로 둔갑시키는 거짓 신고로부터 교사를 지키려는 장치다. 지키려는 대상은 다르지만 맞서는 적은 같다 — 절차 없이 휘둘러지는 '자의적 폭력'이다. 학생인권과 교권은 애초에 서로의 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물음이 바뀐다. '누구 편을 들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줄일 것인가'다. 줄여야 할 것은 상대의 권리가 아니라, 양쪽 모두를 위협하는 자의성이다. 체벌이 자의적이어서 금지되었듯 악성 민원과 무고성 신고도 절차로 걸러져야 한다. '참교육'이 통쾌한 이유는 분명하다 — 현실의 절차가 너무 느리고 무력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법적 응징은 절차의 대안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의성일 뿐이다. 응징의 대상이 '당해도 싼' 악당일수록 그것은 더욱 정의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의처럼 보이는 것과 정의인 것은 다르다. '교권보호국'이라는 정부 기관의 외피를 씌워도, 절차를 건너뛴 폭력은 끝내 폭력이다. 그런 기관은 현실에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초법적 영웅이 아니라 작동하는 절차이고, 그 절차는 곧 학생을 지키는 절차이기도 하다.

 

두 개의 참교육이 있다. 하나는 약자를 폭력에서 지키려던 말이고, 다른 하나는 절차 없는 폭력을 정의라 부르는 말이다. 우리가 어느 쪽을 '참(眞)'이라 부를지가 앞으로의 교실을 결정한다. 학생을 지키는 손과 교사를 지키는 손은 같은 손이다. 그 손에 매를 쥐여 주는 순간, 우리는 둘 다 잃는다.


출처

  • 넷플릭스 '참교육': 2026.6.5 공개, 2주 연속 글로벌 비영어 TV쇼 1위·주간 시청 수 2,110만 건(넷플릭스 공식 집계, 중앙일보 2026.6); 가상기관 '교권보호국'·사적 응징 설정; 원작 웹툰(글 채용택·그림 한가람, 2020.11~ 네이버웹툰).
  • '참교육' 단어의 의미 전도: 1989년 전교조의 '교육 민주화·인간화' → '절차를 건너뛴 사적 제재' 밈(오마이뉴스, 2026).
  • 드라마 비평(응징 대상=가해자, 문제는 방식): 경향신문 칼럼(위근우, 2026.6) — "악당 하나를 조져서 문제를 해결하는 걸 누구도 시스템이라 하지 않는다"; 응징 대상은 학교폭력 가해 학생·악성 민원 학부모 등 '선 넘은' 가해자(한국일보·허프포스트·서울신문, 2026.6).
  • 진자의 30년: 학생인권조례 2010년 경기 최초·체벌 2011년 직접금지·서이초 2023·교권회복 4법 2023.9 국회 통과.
  • 학교 이탈: 검정고시 응시 비율 4.0%(31년 만 최고)·2024년 교사 자살 28명(최근 최다).

「교실은 지금」 — 2026, 사건 너머를 읽다 (전 5부)

다음 편 ② — 교사를 향한 아동학대 신고의 95.2%는 최종 불기소로 끝난다. 결과는 지켜졌는데, 왜 교사들은 여전히 무너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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