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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강좌

나의 글쓰기 제 7강/ -읽어야 글이 나온다-

작성자보니/강길수|작성시간26.06.08|조회수79 목록 댓글 0
    나의 글쓰기 제 7강
                         -읽어야 글이 나온다- 

    여러해 전 삼육대학교에서 잠깐 파견 목회자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내게도 작은 사무실이 하나 배당되었는데  방 가운데 석유난로가 하나 있고 아주 작은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 작은 주전자가 문제였다. 물을 가득 채웠는데도 주전자가 너무 작아서 뜨거운 난로 위에서는 30분도 안되어 물이 마르는 것이었다. 건조한 실내 공기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거의 삼십분 마다 한 번씩은 물을 떠 날라야 했다. 집에 가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10리터가 들어가는 주전자를 하나 사왔다. 문제는 이 큰 주전자에 물을 채우려면 작은 주전자에 수십번 담아 부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 가득 채운 물은 거뜬히 한주일도 버텨냈다. 
  그렇다. 많이 담지 않으면 많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담은 것이 없는데 어찌 많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얇은 독서로는 담아 낼 것이 없다. 따라서 좋은 글을 쓰려면 오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의 삼다(三多)의 원칙 즉,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은 글 쓰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철칙일 것이다.  많이 읽고 많이 써보고 많이 생각하는 일이다. 
   글을 쓸 때의 어휘나 지식의 깊이는 그 사람의 독서량과 정비례 한다고 해도 토를 달 사람이 없다.  그래서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이미 삼다(三多)의 원칙을 말한 구양수는 삼상(三上)의 독서를 말했다.  마상(馬上), 침상(枕上), 측상(廁上)이 그것이다. 그는 말을 타고 가면서 책을 읽고 목침을 베고 누워서 책을 읽었다. 목침도 매끄럽게 다듬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울퉁불퉁한 채로 두어 불편해서 잠이 들 수도 없는 목침이었다.  불편한 목침을 배고 아픔을 참고 졸음을 쫒아내며 책을 읽고 문장의 내용을 궁리했다는 말이다.  세 번째는 측간에 앉아서 볼일을 보면서도 그 시간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오래 역사에 남는 걸작이 되었다. 
   물론 삼상의 독서는 꼭 책을 읽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글 쓸 내용을 생각하고 궁리하는데 가장 좋은 곳이 또한 위에 말한 삼상이 될 수도 있다.  나도 때로는 글이 잘 안될 때는 누워서 잠들지 않고 뒤척이며 생각에 꼬리를 물다보면 영감이 떠오를 때가 많이 있었다. 
  책을 읽는 것도 그냥 무조건 읽는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무턱대고 책을 읽느라고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못했다. 중학교에 입학시험은 쳤지만 도무지 입학금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그 몇 해 동안, 다른 아이들이 멋진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것을 한없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여름에는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골목을 누비고, 겨울에는 눈보라 속에서 찹쌀떡을 외치며 다녔다. 그러나 그 시절에 나는 다른 아이들 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만화에서부터 벽에 바른 신문지나 무슨 글씨든 눈에 띄기만 하면 무조건 읽었다. 김종래의 만화 <엄마 찾아 삼만 리>도, 이광수의 <사랑>이나 <무정>도, 빅톨 위고의 <아, 무정(라 미제라블)>이나  장자크 룻소의 교육론 <에밀>도 그때 읽었다. 대학생 형을 둔 어떤 친구의 집에서 빌린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비판>은 몇 페이지를 읽다가 도로 갖다 주고 말았다. 중학교도 가보지 못한 아이가 도무지 읽어낼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그 책은 입구에 읽을 수 있는 자만 들어오라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책에는 내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독학으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삼육 대학에 들어간 것이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그 몇 해 동안 대학에서 꽤 많은 책을 읽었다. 도서관장이시던 이영숙 교수님이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해달라고 해서 책을 정리하고 새로 들어온 책의 대출카드를 쓰면서  책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 
  어느 해 여름 방학에는 머리를 빡빡 민적도 있었다. 안식일학교다 청년선교회다 하기봉사대다 하고 하도 불러내는 곳이 많고 동아리나 학회 일 때문에 나다니는 일이 많아서 아예 머리를 빡빡 깎고 두문불출하고 책을 읽기로 작정한 것이다. 내가 읽는 방법은 무작정 읽는 것이었다. 도서관의 맨 앞쪽 맨 위 선반에서부터 뒤져가면서 차례로 읽었다. 나중에 안 일이이지만 에이브라함 링컨도 그런 식으로 읽었다고 들었다. 삼육대학 도서관에 반야심경이 있는 것도 그때 알았고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도 거기서 읽었다. 이런 식의 독서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체계적인 독서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소위 말하는 문사철( 文史哲)에 대한 좀 더 체계적인 독서를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되는 것이다. 
   
  수필을 쓰려면 우선 남의 좋은 수필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맞는 스타일의 글을 여러 번 읽는 것도 좋은 일이다. 수필을 쓰려는 분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 <인연>을 할 수 있을 만큼 여러 번 읽을 것을 권한다. 달달 외워도 괜찮다. 좋은 문장을 외우는 것만큼 자신의 글쓰기의 틀을 꼴 짓는 일도 따로 없다. 위대한 수필가의 첫 문장의 그 신선함과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문장의 치열함, 그리고 전혀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 놓는 결론은 수필을 쓰려는 사람들이 눈여겨보고 저리도록 익혀야 할 내용이다. 
   
  좋은 문장을 쓰려면 좋은 글을 읽어야 한다. 감동이 있는 글을 쓰려면 감동이 있는 글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그 문장의 아름다움과 감동이 가슴에 배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글을 쓰는데 있어서 철칙이다. 누구나 한글을 알면 글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읽지 않고는 깊이 있는 글,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 감동이 있는 글을 쓸 수는 없다. 
   
   우리말을 바로 쓰려면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 쓰기>를 읽으라. 전체가 일곱 권으로 된 방대한 저작으로 순수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이처럼 알차게 담아낸 책이 따로 없다. 평생 초등학교 교사로 지낸 분이지만 바른 우리글에 대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역작이다. 번역체의 문장, 왜색, 중국색, 그리고 근거도 없는 상스러운 말을 벗어나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글을 쓰려는 사람은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일곱 권 다 못 읽으면 첫 번째 책이라도 꼭 읽으라. 
  좋은 책을 읽고 내용을 요약하는 습관을 들이라. 중요한 구절들을 메모하라. 기억 좋은 머리보다는 몽당연필이 낫다는 말이 여기에 적용되는 말이다. 읽기만 하고 끝나면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내용을 요약하고 중요한 내용을 메모하는 습관은 그 책을 세 번 읽는 것 보다 낫다. 
   엘렌 화잇의 <정로의 계단>을 적어도 열번쯤 읽으라. 번역서이지만 아름다운 번역이며 영적으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할 수 없거든 다섯 번이라도 읽으라. 나는 적어도 30번 넘게 읽었고 전체를 노트에 베껴 쓰기도 했다.  많은 구절들을 외울 수 있다. 
  성경에 대해서 더 말해 무엇 하랴. 성경을 읽지 않고 신앙적인 글을  쓸 수는 없다. 새번역이나 공동번역, 현대어 성경 등을 읽으면 성경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편, 잠언, 전도서등, 문학서들을 읽으라. 그리고 아름다운 문장, 감동적인 문장을 밑줄을 쳐가며 베껴 쓰고 외워야 한다. 그래야 말씀이 젖어든 글이 나온다. 

  좀 긴 글이지만 다음 글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다산 평전>, 소설 <다산>, 그리고 <다산의 생애와 사상>, <다산의 편지들> 등, 적어도 다섯 권 이상의 책을 읽거나 참고했다. 

<노을빛 치마>

질마재의 저녁놀 
 저무는 한해를 작별하기에는 곰소만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고향 질마재의 서낭너머 만한 곳도 별로 없다.  선산(先山) 언저리에 무리를 이루어 가지에 파도소리를 잔뜩 머금은 노송(老松) 한그루 등으로 기대고 앉아 꽃잎이 아직 두엇 남은 억새 한줄기 입에 물고서 썰물과 함께 잦아드는 노을을 보는 것은 ‘아!’ 소리가 저절로 새어나올 만큼 아름답다. 갯벌에 엎드려 바지락이며 농게 등, 찬거리를 찾던 아낙들도 허리를 펴고 서서 지는 해를 한참씩 바라보는 것을 보면 아마 그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노을빛의 추억이 한 자락씩은 있으리라.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마을은 오른쪽의 변산반도와 왼쪽의 선운사가 있는 도솔산 줄기가 양팔을 벌려 곰소만을 안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 때는 더러 황포 돛을 높이 세운 고깃배가 드나들던 시절이라 눈시울 그렁그렁하게 수평선에 떠있는 바다 건너 고슴도치 섬, 위도(蝟島)의 망월봉 너머로 짙은 노을 속에 저녁 해가 가라앉을 때쯤 고기를 가득 실은 돛단배가 노을과 함께 돌아오곤 했다.  연지곤지 곱게 찍고 노을 빛 분홍치마에 가마타고 해리 쪽으로 시집가던 육촌 누나 때문이었을까? 그 붉은 노을이 유달리 허전함과 그리움으로 가슴에 짙게 물들던 것이.  아마 그 누나가 유별나게 나를  아껴주던 분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산의 하피첩(霞帔帖)
 다산(茶山)이 강진에 귀양간지 십여 년이 되었을 때 그의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노을빛 활옷을 인편에 보내온 적이 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여 년 세월동안 만나지 못한 병든 아내가 보낸 노을빛 분홍치마를 손에 쥔 다산의 감회가 어땠을까? 그는 이 치마를 잘라 한지(韓紙)에 붙여 서첩(書帖)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하피첩(霞帔帖)이라 이름을 붙였다. “노을색 치마”로 만든 책이란 뜻이다. 그 서첩을 만든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 병중의 아내가 보내 온 낡은 치마에/ 천리 밖 애틋한 속내 담겨있네/ 흐른 세월 오래라 붉은 빛은 바래고/ 늙어가는 서글픔 가눌 길이 없구나./ 헤진 치마 잘라서 작은 서첩 만들고/ 아이들 경계코자 글을 적었네/ 바라건대 어버이 뜻 잘 헤아려서/ 맘에 깊이 새겨두고 살아가려무나./
  그리고 그 서첩  두 장에는 각각 두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하늘이나 사람에게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안정되어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우러나온다.” 
 “아무리 잘 만든 그릇이라도 구멍 하나만 새면 깨진 항아리로 치지 않더냐. 마찬가지로  모든 말을 다 미덥게 하다가 한마디만 거짓말을 해도 도깨비처럼 되니 늘 말 조심하거라.”
“근(勤.부지런함)과 검(儉.검소함), 두 글자야 말로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더 값진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구구절절이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출렁거리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한 삼년 후에 남은  또 한 장의 하피첩에 매조(梅鳥)를 그리고  시집가는 딸에게 축하의 글을 써서 보냈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 가득한 축하의 시다. 

翩翩飛鳥 息我庭梅 (편편비조 식아정매, 훨훨 날아온 새, 내 뜰 매화가지에 쉬고 있네) 
有烈其芳 惠然其來 (유열기방 혜연기래, 매화향기 짙게 퍼져 향기 찾아 날아왔으리라)
爰止爰棲 樂爾室家 (원지원서 낙이실가, 부디 여기 머물러 가정 이루고 행복하게 살거라)  
華之旣榮 有賁其實 (화지기영 유분기실, 꽃은 이미 만발했으니 열매 또한 넘치리라) 
 
  엊그제 색동옷 입고 무릎 앞에 기어 다니며 절하는 연습한다고 재롱을 부리던 어린 딸이 이제 자라서 자신이 골라 중매한 신랑에게 시집을 간다니! 아버지의 가슴이 얼마나 설레고 기뻤으랴. 딸자식이란 모든 아버지들의 가슴 속에 담은 영원한 애인이다. 한시라도 잊을 수가 없는 그런 애인이다. 그런 자식이 잘 되기를 비는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가 구구절절이 묻어있다.  그 딸이 그리우면 /내 어린 딸 아이 단옷날이면 깨끗이 새 단장하고,/푸른 창포 꽂은 머리에 붉은 모시 치마를 입었지./ 절하는 자태며 술잔 올리는 모습 예쁘기도 하였는데,/ 오늘 같은 단옷날에는 누가 있어 손에 쥔 구슬처럼 사랑해 줄까./라는 시로 그리움을 달랬던 바로 그 딸이다.  
 
   복숭아 빛으로 붉은 볼을 하고 시집와서 꿈같은 신혼을 함께 보냈던 아내가 이제 오십의 나이가 되어 빛바랜 분홍치마는 왜 보냈을까? 추억이나마 복숭아 빛으로 물들었던 신혼 시절을 함께 그리워하자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저물어 가는 인생의 황혼에 대한 회한을 그렇게라도 말하고 싶었을까?  또 그 치마폭에 자식들에게 보내는 경계(警戒)의 글과 축복의 시를 적어 보내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은 늘 함께 있어서 자식들의 행복을 빈다는 것을 이르고자 함이었을까? 이 가족들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정서의 교감(交感)의 묘(妙)가 부러울 뿐이다. 그리움이 절절이 묻어나는 아내의 붉은 노을빛 치마에 자식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담았다는 것이  한층 더 그 간절함을 더하고 있다.  

  어찌 보면 자식들에게 잔소리 많이 하기로는 다산(茶山)을 따라갈 만한 사람도 그리 흔치 않으리라. 유배지 강진에서 고향집에 있는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의 양만 보아도 그렇다. 대충 보아도 백여 통에 이르는 편지에는 그야말로 상관 안하는 일이 거의 없다.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이며, 무슨 책을 읽어야 하고 어머니나 큰 아버지, 그리고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후취(後娶)로 온 할머니께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손님은 물론이고 하인들 대하는 법, 심지어 닭은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길러야하는지 까지 세세한 잔소리를 다 하고도 모자라 “내가 옆에 있었다면 더 자세하게 가르쳤을 것을 그렇지 못한 것이 한” 이 된다는 말까지 빼지 않고 있다.  특히 술에 대해서 그 해독을 일일이 설명하면서 마시지 말 것을  “제발 하늘 끝의 애처로운 이 아비의 말을 따르도록 하여라.”고 당부하는 것을 보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자식들을 따라다니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만큼 크게 이름을 날리지는 못하였지만 그런대로 시문(詩文)에 능해서 큰 아들은 문장과 의술(醫術)에도 상당히 이름을 날렸고, 둘째 아들은 농가월령가를 지었던 사람으로 짐작하는 것을 보면 그의 잔소리가 적지 않은 효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아버지의 이런 편지들을 허실(虛失)없이 알뜰히 보관하여 후일에 전하는 것 또한 그 자녀들이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여간 소중히 여긴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다산(茶山)처럼 자식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질 만한 사연을 가진 사람도 그리 흔치는 않을 일이다.  요새 같으면 신문에 날만한 열다섯 어린 나이에 한 살 위인 홍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어 본처에게서 무려 여덟이나 되는 자식을 낳았다. 그중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장성하기 전에 잃는 상명지통(喪明之通 눈이 머는 것 같은 고통)을 당했다. 그 슬픔이 오죽했으랴. 거기다 그가 유배를 떠날 때 막내아들 농(農)은 세 살배기였다. 집 앞 점포에 나와 엄마 품에 안겨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그 천진난만한 아이가 그 이듬해 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비통한 심정을 적은 글을 보면 남의 일이라도 눈물이 절로 날만 하다. 다산은 요절한 아이들 생각을 하면서 “구장이와 효순이는 산등성이에다 묻었고, 삼동이와 그 다음 애는 산발치에다 묻었더니 농아도 필시 산발치에 묻었겠구나!”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하니 어쩌란 말인가”라고 비통한 심정을 기록했다.  결국 두 아들과 딸 하나가 남았는데 그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이 어땠을까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폐족(廢族)의 가족으로 살아가면서 그들이 겪었을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어찌 다 말로 위로할 수 있으랴.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희망을 가지라는 다산의 간절하고 애절한 글을 보면 가까이서 부모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누구보다도 더 자식들 곁에 있어서 그들을 붙들어 세우려는 애절함이 서리서리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산도 아마 저물어가는 강진만 물가에서 서서 쿨럭이며 드나드는 바다위로 저무는 노을을 자주 보았을 것이다.  고향의 가족들과 멀리 보길도에 유배되어 살아생전 다시 못보고 만 둘째 형 약전에 대한 그리움이 아내의 낡은 노을빛 치마처럼 그렇게 가슴 저미는 색깔이었을 테니 말이다.

 하늘 아버지의 편지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 속에 한없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호소와 경계(警戒)의 교훈이 들어있다.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지성을 깨우고 훈련시키는데 그 어떤 책, 아니 다른 모든 책들을 합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 성경이 다루는 주제의 위대함과 단순하나 위엄 있는 말씀, 그리고 비유의 아름다움은 사람의 사상을 일깨우고 향상시키는 일에 그보다 더 나은 내용을 찾기 어렵다. 
  성경의 장을 열면 어디서나 가장 오랜 역사, 가장 진실한 생애를 산 사람들의 전기(傳記), 그리고 국가를 통치하고 가족을 다스리는 원칙들, 곧 사람의 지혜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탁월한 원칙들을 볼 수 있다. 성경에는 가장 심오한 철학,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고 감격적이며 참으로 감상적인 시가 담겨 있다. 사람을 대하는 예절에 있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원칙을 뛰어 넘을 교훈을 찾기는 어렵다. 사업에 있어서도 성실과 정직, 근면과 긴 안목의 통찰력을 이 보다 더 분명하게 가르치는 글이 따로 없다.  (엘렌 지 화잇저, <교육> 시조사 간, 참조)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 받은 영감으로 쓰여 우리 손에 주어진 책이며 진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우리 생활에서 악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을 바르게 하고 옳은 일을 행할 힘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모든 면에서 온전하게 하시고 남에게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주십니다.』(디모데 후서 3장16-17절현대어 성경)

 다산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경계의 글들을 소중히 여기고 성실히 실천했던 것만큼만 오늘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편지인 성경을 성실히 실천한다면 세상이 달라지고 가정이 얼마나 더 행복해 질 것인가! 기독교 신앙을 이유로 지극한 불행을 당했으면서도 감동적인 가족애(家族愛)를 이루어 냈던 다산의 지혜와 불굴의 의지를 되새겨 보며, 우리에게 가족이란 얼마나 목이 메게 소중한 것인가를 저 노을 빛 속에 그려 본다.” 

   (당시 이 글을 읽고 특별히 격려의 글을 보내주신  대한성서공회 민영진 총무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과제
1. 최근 감동 깊게 읽은 책과 간략한 내용을 소개해 보자.
2. 최근 읽은 책의 독서 감상문을 써보자. 
3. 책을 읽고 내용을 요약하고 중요한 구절을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자.  

 
출처
https://cafe.daum.net/jsoopil/eue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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