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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겹살과 캘리포니아산 샤도네, 그리고 지금의 미국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22.02.15|조회수127 목록 댓글 0

롱 위크엔드 Long Weekend.

우체부에게 롱 위크엔드는 푹 쉴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바로 다음주에 겪을 고생을 생각하게 되는 그런 때입니다. 로테이팅 데이오프 시스템이라는 게 있지요. 만일 제가 이번주에 월요일에 쉬었다면, 그 다음주엔 화요일에, 그 다음주는 수요일에... 하는 식으로 쉬는 날이 돌아갑니다. 그러다가 금요일에 쉬는 때가 걸리면 토요일까지 쉬게 되지요. 당연히 일요일엔 쉬고 그 다음주엔 주중에 쉬는 날이 하루도 없고, 그 다음주는 월요일부터... 하는 식이지요. 그리고 제가 쉬는 날엔 T-6, 혹은 캐리어 테크니션이라고 하는 우체부가 제 배달구역을 맡아 배달을 해 줍니다.

저도 오래 전에 이 캐리어 테크니션 직을 했던 적이 있지요. 다섯 개의 배달구역을 돌아가면서 해당 배달구역 담당 우체부가 쉬는 날마다 그 배달구역을 담당해 배달하는 겁니다. 당연히 이 직책도 마찬가지로 로테이션이 따로 있지요. 즉, 미국 우체국 시스템에서는 다섯 개의 배달 구역에 여섯 명의 우체부가 있는 셈이죠. 아무튼 이런 시스템 덕에 미국의 정규직 우체부들은 1주일에 40시간을 일하는 기준을 지키면서도 일주일에 6일동안 우편물이 배달되는 시스템을 지킬 수 있는 겁니다.

롱 위크엔드가 끼어 있는 주의 목요일은 그래서 언제나 마음이 가볍습니다. 금요일부터 쉬는 날이니까 그렇겠지요. 심지어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이렇게 창궐하는 요즘에도 롱 위크엔드의 목요일이 주는 설레임은 똑같지요. 일 하는 걸 좋아하지만, 이 일이 원체 힘들때는 힘든 일이어서(거의 매일 하루에 4마일 이상 걷고 계단을 적어도 3천계단 이상 뭔가를 들고 오르락 내리락 해 보면 제 심정을 이해할 겁니다) 어떤 때는 푹 쉬고 싶을 때가 있지요.

그런데, 원래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걸 그렇게 적극적으로 즐기진 않았고, 술도 당연히 집에서 마시는 걸 좋아했습니다. 술과 음식을 좋아하다보니 살은 빠지기 힘들지만, 그래도 이런 게 행복인지라. 물론 요즘은 식당 가서 먹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다시 깨닫게 되는 시간이긴 합니다만 (오늘은 냉면이라도 먹으러 갈까 생각중입니다. 집에서 제대로 하기 힘든 음식 중 하나가 아무래도 냉면인지라).

집에 돌아오는 길, 아내는 삼겹살을 냉동고에서 꺼내 놓았으니 먹자 합니다. 삼겹살은 이곳에서 한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음식이 됐습니다. 원래 이곳 코스트코엔 삼겹살이 없었는데, 몇년 전부터 코스트코에도 삼겹살을 비롯한 한국식의 먹거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지금은 한국산 라면이나 돼지고기 육포 같은 것들도 돌아옵니다. 심지어는 코스트코에서 OEM으로 생산해 판매하는 맛김 같은 것도 들어오지요. 가끔 약과 같은 것이 들어올 때 황당하긴 합니다. 비비고 만두 같은 건 오히려 한국마켓보다 코스트코에서 사는 게 포장도 크고 저렴하지요.

이미 캘리포니아는 오래전부터 그랬다지만, 이제 이곳 워싱턴주에서도 한식당의 셰프를 멕시칸들이 맡아 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한국인들과 함께 일하면서 한국의 식문화가 라티노들 사이에서도 크게 늘었습니다. 코스트코에서 생 삼겹살을 파는 건, 이곳에 한국인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멕시칸이나 러시안 등 타민족들이 우리 식의 고기문화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리고 멕시칸들 같은 경우엔 원래 자기들의 음식을 토르띠야라고 하는 전병에 고기와 야채를 볶아 싸 먹기 때문에, 우리의 쌈문화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요. 재밌는 건 이들은 토르띠야 안에 상추를 넣고, 그 위에 고기와 쌈장 혹은 그들의 살사 같은 양념을 넣어 먹는 식으로 우리 문화에 약간의 변형을 해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상추 안에 밥을 넣는 대신, 그들은 상추의 바깥에 전병을 싸는 거지요.

아무튼, 우리의 소울 푸드였던, 원래는 미국에선 베이컨 만드는데나 쓰였던 삼겹살은 새로운 국적을 얻은 셈입니다. 원래 파운드 당 2달러 정도였던 삼겹살은 요즘은 코스트코에선 파운드 당 3달러 69센트, 한국 가게에선 파운드 당 7달러 선에 팔립니다. 한국 마켓에서 파는 건 얇고, 코스트코 삼겹살은 두껍게 썰어냈다는 차이가 있지요.

아무튼, 지금부터 이야기의 본론이.. ^^;; 죄송합니다 -_-;

원래 삼겹살은 가벼운 레드가 딱입니다. 그래서 키얀티라던지, 혹은 프랑스 산 그레나슈(스페인에서는 가르나차라고 불리우는)로 만든 와인이 좋지요. 물론 잘 맞추면 카버네 소비뇽이나 멀로 역시 좋지만, 그런 것들은 쇠고기에 훨씬 잘 어울립니다. 오랜 와인 음주 경력(?)에 비춰보면, 삼겹살엔 화이트도 나름 잘 갑니다. 우리 식으로 상추에 쌈장 넣고 양파에 마늘 넣고 하면서 싸 먹을 때 물론 소주가 짱이겠지만, 와인으로 맞추자면 저는 우선 리즐링을 생각합니다. 매우 여기저기 잘 맞는 와인이지요. 우리 쌈장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짭짤함과 리즐링이 갖고 있는 감미가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단 맛이 마음에 걸릴 때, 저는 주저없이 샤도네, 그것도 캘리포니아 샤도네를 선택합니다. 오크통 안에 넣어 숙성시킨 샤도네는 이른바 말로락틱 발효 과정을 거쳐 부드러운 버터 같은 풍미가 나지요. 삼겹살의 기름기와 이 와인이 갖는 밸런스 잘 맞춰진 산도와 감미가 맞으면 샤도네도 나쁘지 않습니다. 물론 샤도네는 크림 파스타나 닭고기 요리에도 잘 어울리지만, 화려한 캘리포니아 샤도네 역시 잘 어울립니다.

한때 미국엔 참 많은 작은 와이너리들이 생겨났었습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실리콘 밸리를 중심으로 한 거품경제가 생겨났을 때, 와인 역시 그 시절의 풍요로움을 반영하듯 사람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지하에 와인 저장고를 놓는 것은 새로운 집의 건축에 있어 반드시 필수 조건이 될 정도였지요. 그때쯤 한국에서도 와인 붐이 광범위하게 퍼졌습니다. 그리고 수요는 공급을 창출하게 돼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새크라멘토에 있는 UC 데이비스의 포도주 관련 학과들에서 졸업한 이들이 대거 와인업계로 진출하며 포도원과 와인 가격들도 엄청나게 뛰었지요.

그리고 나서 미국을 덮친 서브프라임 사태는 와인 업계에 직격탄이 됐습니다. 적지 않은 부띠끄 와이너리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이 와인 문화를 지켜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대형 와이너리들에서 해고된 이들이 자기들만의 와이너리를 만들기도 했고, 와인 맛을 알게 된 이들이 조그마한 와이너리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의 대부분이(말 그대로 대부분이) 다시 대형 와이너리에 인수합병되거나(이 경우는 그래도 운이 좋은 경우였고), 혹은 와인만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손에 들어온 와인들이 꽤 됩니다. 처음 릴리즈 됐을 때 30달러 이상의 가격에 나왔던 것들을 10달러가 채 되지 않는 가격으로 넣게 된 것들이 꽤 되지요. 아마 저는 지금 이 와인의 황혼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유럽처럼 와인이 생활 속 문화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곳에선 그렇지 않겠지만, 와인도 자본의 흐름에 따라 유행처럼 번졌던 미국에선 와인 문화는 다시 상대적 소수만이 꾸준히 즐기는 문화로 돌아간 셈이지요.

어제 저녁에 그리하여 잡았던 것이 세인트 트리폰 Saint Tryphon 와이너리의 산타바바라산 와인이었던 거지요. (이 말을 하려고 이렇게 긴 서설을 깔게 됐...) 2015년산의 이 와인을 만든 와이너리는 지금은 원래 그들이 위치하고 있었던 캘리포니아 산타 마리아를 떠나 지금은 텍사스로 옮겨갔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텍사스 와인도 미국에서 괜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레드와인의 수요가 상대적으로 높은 곳이기도 합니다. 원체 쇠고기가 저렴한 지역이라.

와인을 오픈하고 나서 처음엔 산화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곧 안정됩니다. 저는 화이트 와인도 실온에서 마시는 걸 즐기는 편입니다. 향 때문이지요. 조금 차게 마시는 것이 정석이라고들 말하지만, 개취가 다를 수도 있지요. 더운 지역에서 자라는 오크통 숙성 샤도네만이 갖는 파인애플 향을 제대로 즐기려면 실온에서 마시는 게 아마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의 소울 푸드 삼겹살, 바짝 구워서 로메인 상추에 올려 쌈장을 놓고, 지인께서 만들어 주신 고들빼기 김치도 놓고 해서 저녁 한 끼를 가족과 함께 구워 먹습니다. 삼겹살은 성인병에 그다지 좋은 음식은 아니라고 하지만,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구워 나눠먹는 삼겹살만큼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이 또 있을까요.

그래도, 역시 샤도네보다는 끼얀티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닙니다. 생각한대로 파인애플 향, 적절한 유질이 느껴지는 이 와인은 정석대로 새우와 알프레도 소스를 넣어 만든 파스타라던지, 그릴에 구운 담백한 생선이라던지, 샐러드와 함께 맞춘 로티서리 치킨이라던지 하는 음식에 맞추면 훨씬 좋았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겹살에도 생각한 대로 그럭저런 괜찮은 궁합이긴 했습니다.

세상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한 끼 나가서 식사하는 것조차도 꺼려지는 지금, 이런 식의 가족 만찬 형태는 계속되겠지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삶의 방식들이 갑자기 바뀌고, 경제는 악화되어 시애틀 지역의 경우 다섯 명 중 한 명이 7월달 집세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이 초유의 사태, 그리고 언제든지 감염의 위협이 상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해서 바이러스 확산세가 하루 확진자 4만명을 넘어가는 이 미국의 상황, 저는 어떤 식으로 이걸 헤쳐나가야 할 지는 모르겠습니다. 늘 그렇듯 주어진 하루에 충실할 뿐이지요. 그리고 가끔씩 찾아오는 휴식의 시간에 진짜 푹 휴식을 취해 면역력을 높여 놓아야, 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겠지요.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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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와인리더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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