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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여행 꿀팁

[스크랩]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 1

작성자제니시스|작성시간17.02.10|조회수204 목록 댓글 0

 

 

 

         피카소 (Pablo Ruiz y Picasso)

 

        마르지 않는 조형(造形)의 샘


에스파냐 화가. 말라가 출생. 회화뿐 아니라 조각·석판화·도자기·소묘·무대장치·벽화·태피

스트리 등도 제작하였으며 미술사상 제작량이 가장 방대하다. 20세기 조형에 가장 큰 변

혁을 일으켰던 입체파의 창시자이며, 양식은 사실주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폭넓

다. 그의 회화역사는 기법과 주제가 다양하게 변화하며, 그 주제의 중심은 전쟁과 사랑·빈

곤과 절망·노여움과 기쁨·사랑과 성(性) 등이다. 미술교사였던 아버지 J.R. 블라스코(피카

소는 어머니 쪽 姓)의 가르침을 받아 소년시절부터 뛰어난 사실적 기법과 정서표현의 재

능을 보였다. 1895년 바르셀로나로 옮겨 이른바 <카탈루냐 르네상스> 약진기의 카탈루

냐시에서 지내고, 1897년 아르누보 시기에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에서 잠시

 공부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는 회화적·인간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1900년 파리에

서 첫 개인전을 열고, 1904년부터 파리에 정착하였다. 1900년 전후까지는 주로 카바레·

바 등을 강한 색채로 격렬하게 나타냈으나, 이른바 <청색시대>로 불리는 1901∼1905년

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절망·슬픔을 청색으로 표현하였다. 그 예로 한쪽 어깨를 올려 표현

적 자세로 그린 《생(生, 1903)》 《늙은 그리스도교도(1903)》 등이 있다. 1904년부터

 몽마르트르의 집합 아틀리에 <세탁선(洗濯船)>에 거주하며 M. 자코브·G. 아폴리네르·A.

 드랭·A. 살몽 등과 교우하였다. 이 무렵부터 장밋빛이 돋보이며 소재는 《공굴리기 곡예

(1905)》 같이 곡예사·유랑 예술인이 많아지는 <장미빛시대(1905∼1906)> 를 이루며,

부드러움·사랑을 주제로 하였다. 1906년 여름 안도라의 고솔마을에서 지낸 뒤 P. 세잔·이

베리아 조각·아프리카 흑인조각의 영향을 받으면서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原始 主義)

으로 전향, 형태의 단순화·평면화 등의 조형성을 추구하여 이듬해 입체파의 선구가 되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비슷한 회화이론을 지니고 있던 G. 브라크

와 함께 사진적 형식의 해체, 대상의 분석·종합에 대한 탐구가 제1차세계대전 무렵까지 이

루어졌다. 1911년 앵데팡당전 이후 입체파의 새로운 미학과 수법은 현대미술에 있어 결

정적인 것으로, 1920년대까지 끊임없이 나타났다. 제1차세계대전, 이탈리아 여행, 발레리

나 O. 코흘로바와의 결혼 등을 계기로 1919∼1924년까지 그리스풍의 당당한 인간상을

 표현한 <신고전주의시대>로 불리는 밝은 그림을 그렸다. 그 뒤 표현주의·초현실주의 등

을 받아들이면서 《거울 앞의 소녀(1932)》와 같은 다채롭고 풍부한 회화세계를 보여주

는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30년대 후반 그리스신화를 소재로 한 《미노타

우로스 연작》, 독일 공군에 의한 바스크 지방 게르니카의 폭격을 그린 대작 《게르니카

(1937)》로 절정에 이르며, 1930년대 유럽의 불안과 전쟁에 대한 노여움을 표현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중 파리에 머물렀고, 1944년 파리 해방 뒤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그렸다. 전쟁 후 남프랑스 앙티브, 이어서 발로리스에 거주하면서 많은 도

자기를 제작하였다. 1940년대 중반부터 점차 밝음·유희성 등이 나타나며, 1955년에 칸,

 1961년에 무쟁에 거주하였다. 만년에도 제작활동을 계속하여 판화 등을 포함해 하루에

 여러 점을 제작하는 다작 경향을 보였다. D.R.S. 벨라스케스·J.L. 다비드·G. 쿠르베 등을

 개작한 작품 연작군(群), 6·25를 주제로 한 《학살(1951)》, 발로리스성당의 《전쟁과 평

화(1952)》, 유채·판화를 포함하여 <화가와 모델> 연작 등 약 5만 여점의 작품을 남겼

다. 그림 외에 희곡 《꼬리 잡힌 욕망(1941)》과 시 등도 썼다. 바르셀로나와 남프랑스 앙

티브에 피카소미술관이 있다.

 


1. 인생

이 그림의 스케치에는 남자의 얼굴이 피카소 자신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성된 <인생

>에는 피카소의 얼굴이 없어지고 친구인 카사헤마스의 얼굴로 변했다. 카사헤마스는 바르

셀로나 시대의 동료 화가이며, 1900 년 가을 피카소와 함께 파리의 땅을 최초로 밟은 사

이인데, 실연한 나머지 자살 미수 소동을 벌인 장본인이다. 이 사건 때문에 피카소는 카사

헤마스를 데리고 급히 파리를 떠나야만 했고, 피카소는 이 쓰라린 경험을 잊을 수 없어

<인생>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배경 위의 그림은 고갱풍이고, 아래쪽 웅크린 여인은 고

풍으로 그려졌다. 그의 청색 시대의 중요한 모티브인 부성애와 청춘의 격렬한 사랑의 표

시를 표출시켜 '인생 축도'의 한 다면을 보인 또 하나의 걸작이다.

 



2. 늙은 기타수

피카소의 이 시기가 그레코에 심취하던 때였다. 굶주리고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성자의 그

늘이 있다. 왼쪽 어깨를 강조한 것은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라, 피카소의 '청색 시대' 인체

는 메마를 대로 메마르고 손가락도 뼈만이 앙상하다. 이 손으로 기타를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타는 노인의 신체의 일부처럼 달라붙어 있다. 노인은 장님이다. 그를 둘러싼 세

계와는 이미 창문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이 밀폐된 상태의 사나이의 조형이 무엇인가 우리

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3. 다림질하는 여인

1901년 피카소가 파리를 떠나기 전 이 <다림질하는 여인>을 제작하여 사바르테스에게 헌

정했다. 피카소는 이 시기에 있어서 화면 구성에 큰 변화가 있었다. 왼 쪽 어깨를 강조한

것이 마치 사원 실내의 건축적 구조와 같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그림은 '청색 시대'의 한 기

념비 적인 작품으로 되었는데, 왼쪽 팔의 만곡이 작품의 깊이를 효과 있게 하고 있다. 여인

은 매우 피곤 하다. 여인의 눈은 장님과도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인은 이상하리만큼 씩씩

한 모습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피카소의 극과 극의 융합 능력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4. 어부의 이별

노란색과 푸른색이 아름다운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청색 시대'의 경향인

 이 작품은 짙은 모성애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파리의 술집 광경이나 스페

인의 어느 바닷가 같은 곳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바르셀로나에

서 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과 같은 테마를 그리던 시기에서 이

작품에서도 지나치리만큼 생략된 풍경이 쓸쓸하고 허전하여, 오히려 그것이 짙은 모성을

느끼게 한다. 피카소는 예술이란 고통과 슬픔에서 낳아지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별이

란 인간의 숙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이국풍의 오르가니스트

얼굴을 옆으로 하고 왼쪽 어깨가 강하게 불거져 있으며, 양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있는 이

 늙은 손풍금 타는 사람에게서 젊은 피카소가 매혹당했던 카다르니야의 로마네스크 미술

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목조각 같은 노인과 아직은 어리디 어린 소년과의 대조를 준 것은

 보는 이의 가슴에 무엇인가 여운을 준다. 손풍금을 중심으로 하여 노인과 소년을 삼각형

으로 배치한 구도는 화면을 시원하고 안정되게 하고 있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오랜 세월

에 퇴색한 것 같은 색조이면서 밝고 소박하다는 것이다.

 



6. 카날 부인의 초상

얼굴의 부분들은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신체는 큼직 큼직하게 처리한 것은 피카소가 제작

한 초상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이다. 이 작품에서는 섬세하고 날카로운 표

정과 거의 반원형에 가까운 신체의 선과의 대조가 독특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검정, 갈

색, 황토색 등을 주조로 한 색조에서는 피카소에 흐르는 스페인 사람의 피를 보는 듯하다.

 피카소의 뛰어 난 데상력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바이나, 특히 이 작품에서는 그의 타고난

 천분이 번쩍이고 있다.

 



7. 가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프랑스와즈 지로는 이 초상화가 티벳의 승려를 닮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분명히 표정에서

 금욕적이며, 엄격함을 보여 주는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가 누구의 초상이라는 것

보다는 그 당시의 피카소의 흑인 조각연구에 연유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1906년 봄,

피카소는 이 작품을 그리다가는 지워 버리고,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다시 그리기 시

작하면서 언젠가는 그녀를 닮겠지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비로 이 초상화의 모델은 아메리

카의 여류 작가 스타인이었다. 구도나 표현의 박력에서는 피카소의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

난 작품이나, 과연 스타인 자신이 만족했느냐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 없다.

 



8. 푸른 옷의 여인

1901년 마드리드에 머문 피카소는 일련의 부인상을 연작했다. 그것들은 대체로 모자를

 쓴 무용수 같은 여인들로서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다. 콤포지션도 대담 하지만 묘사력

도 능란한 작품이다. 피카소의 부친이 피카소에게 인물을 묘사할 때는 특히 손을 정확히

 그리라고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서도 왼쪽 손의 묘사가 뛰어난다.

 피카소의 '청색 시대' 때 작품 가운데 대부분은 인물이 주제로 되어 있는 데, 그 많은 인물

작품들에서 보여 주는 것은 손의 멋진 묘사력이다. 90도 각도로 뻗은 팔과 양산을 잡은 왼

손만 보아도 이 모델의 활달한 성격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9. 아비뇽의 아가씨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직접적으로 힌트를 준 것은 이 벨리아 조각과 흑인 조각이라고 전

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의 오른 쪽 여인의 얼굴 습

작이며 다분히 흑인 조각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가면을 쓴 여인으로서 가면 뒤 쪽

의 목 처리로 보아서 가면에 숨겨진 머리는 가면보다, 훨씬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피카소

는 왜 <아비뇽 의 아가씨>의 오른쪽 두 여인의 코를 그렇게 과장해서 그렸으며, 또 삐뚤게

 했을까. 피카소는 이렇게 말을 남기고 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의 삐뚤어진 코를 보고 그

들의 코는 삐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0. 근위기병과 나부

피카소의 최근작에는 이로우터메니아(erotomania)화한 작품이 많고 이것도 그중의 하나

다. 나부의 얼굴이 이전과 같이 정면상과 프로필의 융합이면서도 아무래도 정면상으로 살

아있지 않은 흠이 보인다. 이런 종류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피카소가 감상자를 향하여.

"두 개의 유방 말입니까?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감상자에게 영합이라

고 하는 것인지 색채도 품격을 다 잃어버리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피카소의 성적 절

망으로까지 논하기도 하나, 아무튼 지난 날의 그토록 번쩍이던 피카소는 보이지 않고, 낙

서같이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11. 두 형제

'분홍색 시대'는 1905년에 시작되어 주조색은 오크로 루즈이다. 이 작품은 1906년에 제

작되었으며 또다른 <두 형제>라는 작품과 쌍을 이루고 있다. 소년의 몸은 언뜻 보기에 해

부학적인 정확성이 결여된 것같이도 보이나, 아직 성숙하지 않은 아이의 몸으로 사실성이

 있고 따뜻한 색이 더욱 즐겁다. 피카소가 이 시기에 있어서는 처음 모델을 정확하게 묘사

한 다음 점차적으로 자기화한 제작 방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초상

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특징적인 소년을 표현하고 있다. 좋든 나쁘든 간에 피카소가 오늘날

에 있어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된 그 뿌리는 '피카소화'라는 조형적 역량일 것이

다.

 



12. 앉은 나부

앉은 나부로 되어 있지만 의자의 형태도 분명치 않아, 실제로는 여인이 서 있는 것으로 보

인다. 볼륨 표현이 극도로 억제되어 있는 까닭에 남자로도 보여진다. 이 작품은 <아비뇽의

아가씨들> 전후에 제작된 일련의 나부상으로서 단순 명쾌한 화면이 특징이다. "회화는 나

보다 힘이 세다. 회화는 생각하는 대로 나를 질질 끌고 다닌다."라고 말했다. 피카소의 경

우 회화란 별 수 없이 형태인데, 그 스스로가 만들어 낸 형태가 피카소를 끌고 다니는 것만

같다.

 



13. 긴 머리의 아가씨

이 작품이 제작된 1906년은 피카소의 필생의 걸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시작된 해이

며, 또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벨리아 조각을 처음 만난 해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이때부터

 '청색 시대' 때의 섬세한 감각을 떠나, 중량 감 있는 한 덩어리로서의 육체 표현을 했다.

 청색 시대가 도회적 세련된 감각이라면, 프리미티브 (primitive)한 태양에 그을린 건강한

'흑인 조각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와 '흑인 조각 시대'는 같은 시기여서

 이때 묘사된 여인의 육체는 조형적으로 씩씩하고, 그 힘참 속에 원시의 생명력이 숨어 있

다. 이 작품의 특징은 지극히 조각적이라는 점이다. 평면 구성이라기보다는 입체 구성이

며, 여기에서 큐비즘의 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14.  배와 과일 그릇

아메리카의 여류 작가 가트루드 스타인은 스페인과 큐비즘의 내적인 관련에 관하여 다음

과 같이 말했다. "스페인의 건물은 언제나 풍경의 선을 단절시키고 있다. 인간의 영위 또한

여기에서는 풍경과 조화한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풍경과 적대 관계이다. 바로 이 점에 큐

비즘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닌지." 큐비즘이 세 잔에서 출발한 것은 사실이나 스타인의 말

도 일리는 있다. 이 작품에서도 세잔의 정물을 보다 의식적으로 입체화한 것이니까. 큐비

즘, 그것은 형태가 화면을 지 배한다. 그것은 자립한 형태, 독자의 묘미이며 허구의 세계이

다.

 



15. 목기 위의 정물

피카소는 이 작품에서 정확한 '자연주의'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앵그르풍

의 그림이나, 종합적 큐비즘의 작품들을 같이 제작하고 있어서, 이러한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을 제작했다 해서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1920년대 초 '신고전주의 시대'의 풍만한

육체 묘사와 병행하여, 큐비즘을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기 위의 정물을 매우 정밀

하게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그 배경에 있어서는 흐려 뜰이고 있다. 피카소의 인물화에 있어

서 얼굴은 정밀하게 묘사하면서도 다른 부분에 대충 끝맺고 마는 것과도 같다. 피카소는

 골고루 다 그리면 오히려 포인트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물의 리얼리티

를 높이기 위하여 배경을 단순한 분위기로 만들어 버린다.

 



16. 안락의자의 올가의 초상

올가는 러시아 육군 대령의 딸로서 1912년에 디아기레프 발레단에 있었다. 피카소는

 1917년 이탈리아 여행 중 올가를 만나서 이듬해인 1918년 7월에 결혼하였는 데 시인 쟝

콕도, 아폴리네르등을 초청하였다. 피카소가 올가를 맞이한 후부터 그 생활은 규칙적이 되

었고, 의복도 단정하게 변하여 그의 벗들을 놀라게 했다. 피카소는 이러한 생활을 하는 동

안 어머니와 자식간의 애정 어린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다분히 앵그르풍의

 리얼리즘이 보인다. 이 밖에도 올가를 그린 작품들이 있으나 그표정들은 한결같이 우수에

 잠겨있다.

 



17. 마 졸리

우리들은 어떤 물체를 한눈에 모든 각도에서 볼 수는 없으나, 큐비즘 작품들은 어느 정도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형태들을 상호 침투하면서 공간을 전개하며, 정지하

지 않고 조용히 호흡하는 것은 분석적 큐비즘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합적 큐비즘

 시대에 들어서면 화면은 또다시 조용해진다. 다시 평면적인 데로 복귀하는 것이다. 색채

의 수도 많아지며, 물론 그 색채란 화려하지 않고 친숙하며 소박한 분위기로 감싸여 진다.

 시인 폴 엘뤼아르는 큐비즘에 있어서 "색이란 공간에서 낳아진다기보다는 '색' 그 자체가

 공간인 것이다."라고 했다. 분석적 큐비즘 다음에 제작된 비교적 차분한 작품이다.

 

 



18. 앉아 있는 피에로

1917년 쟝 콕도의 무용극 '파라드'의 무대 장치와의 상을 맡아 피카소는 무대 위의 인물

들에 크게 흥미를 지녔다. 이 발레의 무대 막은 비현실적인 강력한 색채로써 만들어졌다.

 그와 같이 이 작품도 노랑, 빨강, 주홍과 같은 소리 높은 색채들이 피에로의 하얀 의상에

 흩어져, 비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피카소 '청색 시대' 때도 피에로를 즐겨 그렸

으나, 대상이 같다고 하더라고 그 결과는 판이한 것을 보여 준다. 청색 시대의 피에로가 현

실이 모습이며 그래서 공감을 더했다면, <앉은 피에로>는 실인생과 무대의 상이한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피에로는 인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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