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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어파우스트 [유럽문화와 괴테 - 전창배]

작성자fineclub|작성시간19.01.07|조회수76 목록 댓글 0

 

유럽문화와 괴테

전창배

 

독일이 낳은 시성 괴테는 대 문호이자 자연과학자였으며, 현실정치가로 국정에도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음악과 미술을 비롯해 예술에도 깊은 조예를 가졌던 인물이다. 여든 두 해의 긴 삶을 통해 시와 학문과 예술분야에서 이룩한 업적으로 인해 괴테는 유럽의 마지막 르네상스적 천재로 불리고 있다. 실로 르네상스 이후에 괴테처럼 인간과 사회, 자연과 우주, 그리고 문화와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며 놀라운 업적을 남긴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르네상스 문화는 하늘로 향했던 인간의 시선을 땅으로 돌려 현실세계의 아름다움과 인간 스스로의 능력을 새로이 발견하고 이를 학문과 예술로 표현해내려 노력했다. 뒤를 이은 바로크와 로코코 문화는 인간내면의 이성적 능력을 최대한 발현하려는 계몽주의 정신에 뿌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척도로 작용하면서, 이성만능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괴테는 태어나 성장하게 된다. 청년 괴테는 그러나 내면으로부터 분출되는 자연적 감성이 이성보다 더 중요함을 깨닫고, 감성우위의 새로운 문화흐름인 질풍노도기의 문화에 합류하여 이를 정점까지 발전시킨다.

 

바로크 문화와 질풍노도기 문화의 차이점은 특히 정원예술에서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은 바로크 정원예술의 전형으로 인간의 이성, 즉 인위적인 힘에 의해 창조된 기하학적 조형미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영국식 정원예술은 질풍노도기의 문화를 표방하는데, 마치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듯,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자연미를 한껏 자랑한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이 앞 다투어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정예술을 모방하기에 여념이 없던 때, 괴테는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영국식 정원의자연미를 찬미하며,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자연적으로 발로하는 감성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다름아닌 한 권의 소설에 담아 설파했다. 바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그것이다. 젊은 작가 괴테를 하루아침에 유럽문학의 정상의 반열에 올려놓은 소설 “베르테르”의 열풍과 함께 새로운 질풍노도기의 문화예술적 취향은 온 유럽에 퍼져나갔다. 그 결과 18세기 유럽대륙은 프랑스풍과 영국풍의 예술이 공존하며 유럽문화는 그 풍요로움을 더하게 되었다. 괴테 스스로 바이마르 근교의 일멘아우 공원을 직접 설계하여 그의 이상인 영국식 정원예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괴테가 근본적으로 집착했던 것은 인간의 존재와 인식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은 괴테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청명한 하늘 아래 펼쳐지는 삶의 경쾌함과 즐거움을 직접 체험하면서 괴테는 북유럽의 회색빛 존재의 중압감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인들의 자연에 가까운 삶의 방식과 조화를 생명으로 한 그리스-로마 고전예술품의 아름다움은 괴테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삶과 예술은 진실함과 명료함, 그리고 소박함과 고요함을 추구해야만 한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로마의 고전세계의 완전하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새로이 창조해낼 것을 결심한다. 바로 독일고전주의 문화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고전주의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코르네이유와 몰리에르를 중심으로, 영국에서는 드라이든과 포프에 의해 그리스-로마 고전주의 예술이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고전예술의 규칙과 조화를 모방하는 것에 치중했다면, 괴테는 쉴러와 더불어 그리스 고전세계의 삶의 방식과 예술의 표현양식을 탐구하여 시대를 초월하는, 가장 숭고한,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 능히 성취할 수 있는, 인간존재의 모형을 구현하려 노력했다. 바로 이것이 독일고전주의 문화예술이 다른 유럽의 고전주의와 구별되는 점이다.

 

그리스-로마 고전예술세계에 담긴 진실성과 보편성, 그리고 인간애에 대한 괴테의 열정과 사랑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모든 창작 활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나아가 괴테는 그리스-로마 고전문화의 전통을 계승하지 않고서는 결코 유럽문화의 발전이란 불가능한 것으로 확신했다. “파우스트 2부”에서 파우스트가 조화와 절제를 바탕으로 한 헬레니즘 세계의 최고의 미를 상징하는 헬레나와 결혼하는 장면은 바로 이러한 괴테의 문화적 신념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년에 괴테는세계의 다양한 문화와의 교류를 꿈꾸며 “세계문학”에 대한 그의 이상을 구현하려 애썼다. 괴테에게 있어서“세계문학”이란 세계에 이미 널리 알려진 고전문학 작품을 보고(寶庫)화하는 것이 아니라, 각 민족의 문화와 정신이 담긴 문학작품을 통해 무엇보다도 그 민족의 현재적 상황을 보다 더 생동감 있게 인식할 수 있도록 세계 모든 민족의 문학작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민족간에 활발한 정신문화의 교류를 통해 궁극적으로 각 민족 상호간의 보다 깊은 이해를 도모할 것을 이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괴테의 세계문학은 바로 세계문화교류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괴테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작가는 문화간의 교류를 위한 세계문화의 옴부즈맨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만년에 발표한 “서동시집”은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서양과 동양이 정신문화의 교류를 통해 한데 어우러져, 현실을 명확히 이해하고, 인류애와 평화를 위한 보편적 가치를 함께 찾아 나누며, 서로의 문화와 세계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을 만년의 괴테는 꿈꾸었다.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바탕 위에서 조화롭게 공존하는 참된 문화를 창출해내는 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위대한 과업으로 괴테는 보았던 것이다.

괴테가 표방한 르네상스적인 세계인식, 헬레니즘적 미를 바탕으로 한 현실인식과 존재방식, 그리고 상생의 세계문화에 대한 괴테의 문화담론을 우리는 독일 바이마르 고전문화라 일컫는다. 독일 도시 바이마르는 진실과 절제와 조화를 바탕으로 한 괴테의 독일고전문화를 상징할 뿐 아니라, 유럽 고전문화의 중심지이자 참된 세계문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괴테의 도시로 자리매김 받고 있다. 문화의 세기라 일컫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문화간의 갈등이나 민족간의 불협화음을 접할 때마다, 독일 바이마르 고전문화를 상기하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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