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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독살 사건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4.05.26|조회수22 목록 댓글 0


모차르트 독살 사건


https://youtu.be/1uaLaFNzwgc?si=JBwge0qBd5GAfkbV



후궁으로부터의 유괴는 이탈리아어 일색이던
비엔나 오페라계에 모국어인 독일어로 된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등장하면서
요제프 2세를 비롯 많은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독일어권 유럽에 빠른 속도로 이 오페라가 알려지며
모차르트를 전 유럽에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떨치는 계기를 만든다.

재미있는 일화는 요제프2세의 반응인데
오페라에 대한 평으로 모차르트에게
“음표가 너무 많네” 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후세에도 해석이 무성한데
좋은 음표들이 너무 많았다는 칭찬과
뭔가 알지 못하는 요제프2세의
뜬금없는 평이었다는 의견으로
갈리기도 한다

1782년 모차르트는 슈비튼(Schwieten) 후작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슈비튼은 바흐와 핸델 등
바로크 시대 대가들의 필사본 악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때 모차르트는 바로크 대가들의
악보를 손수 공부하며 그 시대의 작곡 기법에
큰 영향을 받는데 특히 푸가(Fugue)를 후에
오페라 마적이나 교향곡 41번 (K551) 주피터에
응용한다.

여기서 모차르트의 주피터 교향곡 마지막 악장을
들어보겠다. 칼뵘의 지휘와 비엔나 필하모니의 연주이다.
주피터는 모차르트의 곡 들 중에서도 많은 찬사를 받는
마지막 심포니이다. 유명한 영화 감독이자
배우인 우디 알렌은
“모차르트 교향곡 41번은 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https://youtu.be/yRUlzJn8UeU?si=EnFBKyyKwS4PNBrf


1784년 경 모차르트는 하이든과 친분이 두터워지는데
둘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무렵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Freemason)에도
가입하였다. 음악을 모임이나 행사에서 중요하게
여긴 프리메이슨 또한 모차르트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다.
프리메이슨은 음악에 메이슨의 심볼들이 들어있게
했는데 숫자 3과 알파벳 b가 중요했던 터라
b와 모양이 같은 플렛 “b”이 세개 있는 C 단조 곡이
많이 쓰였다.


모차르트의 친필 악보인 메이슨 장례곡 의 첫 페이지
b이 세개 붙은 C 단조이다.


메이슨 친구들의 장레식을 위해 쓴 모차르트의 곡을
직접 들어 보겠다. 네빌마리너의 지휘와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의 연주.
Maurerische Trauermusik
(Masonic Funeral Music)
in C minor, K. 477


https://youtu.be/okFlNAl7HQQ?si=61Gtlif7bb0UIzcN



모차르트는 후궁으로부터 유괴가 크게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페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다가
거의 4년 만에 일생의 역작들을 만드는 계기가
생긴다. 그건 바로 유명한 대본가인 로렌초 다 폰테
(Lorenzo da Ponte)와의 만남이었다. 이 둘의 협업은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ro)을 시작으로
돈 조반니(Don Giovanni)와
코지 판 뚜떼(Cozi fan Tutte)까지
3개의 명작을 탄생 시키는데 이를
다 폰테 트리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Lorenzo Da Ponte (1749-1838)

다 폰테는 이태리 베네치아 출신으로 언어에 능통해서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고 성직자 생활을 하던 중 사창가를
운영하고 유부녀를 납치한 혐의로 베네치아에서 쫓겨나
런던을 거쳐 비엔나로 오게 된 특이한 인물이었다.
다 폰테에 관한 일화는 많아서 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피가로의 결혼은 보마르쉐(Beaumarchais) 원작의 희곡을 다 폰테가 대본으로 각색했는데
하층계급 시종들이 귀족을
곯려먹고 교훈을 준다는 당시로서는 큰 논란의 여지를
가지는 내용이었다. 처음 아 작품의 문제성을 지적하던
요제프 2세는 끈질긴 설득과 귀족들에게 자극적인 내용
일부를 빼는 조건으로 공연을 허락했다.
논란은 많았지만 대 성공이었다.


바람기 많은 알마비바 백작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백작부인과 피가로와 당일 결혼식을 올리는
시종 수잔나는 산들바람이 부는 소나무 아래로 백작을
불러내기 위한 편지를 쓰며 이중창을 부른다.

수많은 콘서트와 오페라 동영상이 있지만 영화
쇼생크 대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에서
이 음악이 나오는 장면 또한 명장면이다.




https://youtu.be/5Hfe_1Fny-Q?si=zKGakKvsrr4P6DLZ

주인공 앤디 뒤프레인은 억울하게 쇼생크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제실에서
교도소 안 모든 재소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이 음악을 튼다.
평생 한번도 이런 음악을 듣지 못했던 앤디의 친구
레드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난 지금도 그 이탈리아 숙녀분들이
뭐라고 노래했는지 모른다.
사실은, 알고 싶지도 않다.
모르는 채로 있는 게 나은 것도 있으니까.
난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그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 목소리는 그 회색의 공간의 어느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을 만큼
하늘 위로 높이 솟아 올랐다.
마치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우리가 갇힌 새장에 날아 들어와
그 벽을 무너뜨린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그 순간에,
쇼생크의 모든 사람은 자유를 느꼈다."


음악이 주는 힘이다.


피가로의 결혼은 프라하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며
바로 돈 죠반니의 의 촉탁과 프라하 초연으로
이어진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을수록 모차르트의
삶도 화려 해졌다.
비싼 당구대와 말과 화려한 옷 등
많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저축을 하기에는 힘든 지출이었다.

1788년 발발한 오스트리아와 터키와의 전쟁은
천하의 모차르트도 불경기를 타게 만들었다.
비엔나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이사를 간다.

명목은 생활비 절약이었지만 이사 가면서
오히려 집의 크기는 커지고
이미 커진 씀씀이는 줄어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다 갚았지만 빛까지 지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가
작곡 되었다. 30대의 젊은 나이 지만
그는 이미 클래식의 정점을 두드리며
낭만파 음악을 살짝 맛 볼 수 있게 하는
소름 돋는 독일 특유의
끈끈한 화성 진행을 보여준다.
멘델스존, 브람스 와 바그너를
예견하고 있었다.

마술피리 중 사제들의 합창을 들어보겠다.
베이스 파트가 풍성하게 들리는
불가리아 오페라 합창단의
연주이다.


https://youtu.be/tXWVjmXNRes?si=Yl13jChTNwt1bGom




드디어 올 것이 오는가……
발섹 (Walsegg) 백작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한 레퀴엠을 모차르트에게
촉탁한다. 선금 반을 주고
나머지 반은 곡이 완성된 후 지급하기로 했다.

1781년 9월 마술피리의 초연 얼마 후
모차르트는 알 수 없는 병마와 싸움을
시작했다. 열병과 피부의 발진을 동원한
증상은 부종과 고통을 동반하는 구토로 이어지며
천재 작곡가를 침상에 묶어 놓았다.
침상에서도 레퀴엠의 작곡은 계속 되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모습

사경을 헤매이는 모차르트의 유작은
자기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 되고 있었다.

침상에서 악보를 들고 주변 사람들과
레퀴엠을 부르던 모차르트는 Lacrymosa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오열하며 악보를 내려놓고
그날 늦은 밤 1시 경 완성되지 못한
레퀴엠을 뒤로 하고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1781년 12월 5일이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하나인
모차르트는 시립 공동묘지에 묻히며
묘비 하나 남기지 못하고 떠나갔다.

수많은 명곡을 비롯해 800여 곡을
남긴 그의 음악사에 끼친
영향을 고려했을 때,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현재의 고전 음악은 지금과는 많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https://youtu.be/0T7eMctuJLQ?si=r5ax44t6uJ9qRVEx




천재 작곡가의 때 이른 사망은
여러가지 추측을 자아내었다.
피로 누적으로 몸이 안 좋았을
수는 있지만 갑자기 발병하여
곧 사망에 이른 배경은
의구심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프리메이슨이나 유대인이
죽음의 배경이라는 설도 있었다.

가장 많이 알려진 가설은
동시대에 살며 활동하던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능력을
질투한 나머지
노력형 보통 작곡가 살리에리가
독살 했다는 것이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Antonio Salieri)
1750-1825


훗날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의 연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영국 극작가 피터 쉐퍼의 연극 “아마데우스”의
영감이 되고 그 후로 이 연극은
아카데미 8개 부문 상을
수상한 동명의 명작 영화가 된다.


오늘날에는 모차르트가 독살 되었다는
어떠한 가설도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https://youtu.be/k1-TrAvp_xs?si=HJTpoEC0gZ4gvJ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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