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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국가 정보 -여행시 참조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19.12.31|조회수50 목록 댓글 1




우크라이나[Ukraine] 

 

 

우크라이나(Ukraine)

우크라이나가 내건 슬로건인 '우크라이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여행지가 아닌 듯 하지만 여행을 단념시키진 못한다. 친절한 사람들, 환상적인 건축물, 스텝 대평원지대는 여행자들을 매료시킨다. 우크라이나는 주변 국가사이에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스모그가 많은 공업도시에도 말뚝 울타리, 오리 연못, 짐을 가득 싫은 마차가 아직도 존재한다.우크라이나는 현대적인 수도인 키에브(Kiev)에도 고딕, 비잔틴,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과 예술을 향기가 남아있어 외국 관광객들을 찾아오게 한다. 거의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은 백년 이상 된 성당과 민속 건물 야외 박물관, 미라로 만든 수도승이 있는 동굴과 절묘한 모자이크를 어디서건 볼 수 있다. 음식 역시 훌륭하고 반두라(bandura) 로지는 편안한 휴식을 준다.

 


  • 위치

    유럽 동부

  • 인구

    4,599만 4,287명(2008년 현재)

  • 면적

    60만 3,550㎢

  • 수도

    키예프(Kiev)

  • 화폐단위

    흐리브냐(Hryvnia, UAH)

  • 언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국기
(파란하늘에 펼쳐진 농지를 상징)

 

오랫동안 러시아에 대해 분리 독립을 주장해온 탓에 '독립 우크라이나의 깃발' 또는 ‘우크라이나의 기’라고 부른다. 위가 파랑, 아래가 노랑인 2색기이며, 2색은 그리스도교 도입 이전부터 오랫동안 이 나라를 상징하는 전통색깔로서 파랑은 하늘과 산과 물결을, 노랑은 금빛 대지를 나타내는데, 전체적으로는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농지()를 상징한다. 2색으로 된 기는 1848년 10월 리보프주()의 주도인 리보프에서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당시에는 파랑 바탕에 왕관을 쓴 노란색의 사자가 있었다. 볼셰비키와의 대립 속에서 1918년 1월 22일 독립을 선언한 후 3월 22일에 현재와 비슷한 기를 국기로 제정하였고, 소련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지 5년 만인 1996년 9월 3일 새로운 국기관련법에 따라 공식으로 재정하였다.

 

정의

유럽 동부에 있는 공화국.

개관

러시아 서부, 흑해 연안에 위치하며, 해안선의 길이는 820㎞이다.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한 공화국의 하나로, 면적은 60만 3,550㎢, 인구는 4,599만 4,287명(2008년 현재), 수도는 키예프(Kiev)이다.

주민은 우크라이나인 77%, 러시아인 17.3%, 벨라루스인 0.6% 외에 각각 1%가 채 안 되는 폴란드인·헝가리인·유대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종교는 우크라이나정교가 45%, 기타 가톨릭교와 러시아정교를 믿는다.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면에서는 독립국가연합 중 러시아 다음으로 부강한 나라이다.

2007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45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3,170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임기 5년의 이원집정부제의 공화제이며,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450석)이다. 주요 정당은 지역당, 티모센코 블럭, 우리 우크라이나당, 사회당 등이다.

역사

우크라이나인들은 1240년 키예프가 타타르의 침입을 받기 전까지 러시아인들과 같은 언어를 가진 공동운명체였다. 그러나 11세기에 양자 간의 분열이 시작되어 우크라이나는 14세기 중엽 리투아니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569년 폴란드와 합병한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정교를 믿는 우크라이나를 카톨릭교의 폴란드에 합병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러시아와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동맹국이 되었으며 1654년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1990년 우크라이나 최고회의에 루흐(Rukh)인민전선의 지원을 받은 민주파 개혁인사들이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조성되었다.

전체 의원수의 25%인 이들이 1990년 7월 16일 우크라이나 독립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1990년 12월 고르바초프(Gorbachev, M.)의 느슨한 연방안인 신연방조약에 대한 인준을 거부한 채, 쿠데타가 실패한 직후인 1991년 8월 24일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3세기에 걸친 러시아의 지배를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1994년 5월 우크라이나 내의 크림자치공화국이 독립헌법을 가결시킴으로써 양국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현 유센코(Victor Yushchenko) 대통령은 2005년 1월 취임하여 집권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우경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45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는 1992년 2월 10일 공식적인 수교관계를 맺고 1993년부터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으며, 2008년 현재 상주공관을 두고 있다.

양국은 1992년 7월에 과학기술협력 협정, 1995년 5월에 우편 및 전기통신부문협력 협정, 1995년 11월에 무역 협정, 1996년 12월에 투자보장 협정, 항공 협정, 1999년 9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2001년 7월에 원자력협력 협정, 2001년 10월에 관광협력협정, 복수사증교환각서, 2003년 4월에 군사비밀보호 협정, 2003년 5월에 세관 협정, 2005년 10월에 무상원조·기술협력 협정, 2006년 5월에 기업인복수사증교환각서, 사증수수료면제 및 무사증입국교환각서, 외교관여권사증면제 협정, 2006년 12월에 우주협력 협정, 방산군수협력 협정, 방산군수협력 협정, 외기권이용협력 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1996년 12월 쿠츠마 대통령이 방한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대 우크라이나 수출액은 2007년 현재 15억 4619만 달러로 주종목은 자동차·화학제품·가전제품 등이고, 수입액은 2억 9466만 달러로 주종목은 화학제품·철강·우라늄 등이다.

2007년 현재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중공업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3만 2,700명의 교민과 500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1992년 1월 9일 수교하였으며, 2006년 현재 주 러시아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양측은 1992년 2월에 친선 및 문화협력 협정, 1994년 6월에 무역·경제·과학기술협력 정부간위원회창설 협정, 1997년 10월에 항공 협정, 1999년 10월에 과학협조 협정, 2004년 11월에 형사범죄인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는 1917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국으로 선포되었고, 1922년 12월 구(舊)소비에트연방(Soviet Union, 蘇聯)의 창립회원국이 되었으며,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독립국이 되었다. 러시아 서부 흑해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유럽 동부와 러시아연방에 접경해 있다.

전체 인구수는 2010년 기준 4578만 명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의 인종은 우크라이나계가 77.8%, 러시아계가 17.3%, 기타 인종이 4.9%인데 이들은 벨라루스계, 몰도바계, 크림 타타르계, 불가리아계 등이다. 우크라이나의 수도는 인구 279만 명의 키예프(Kyiv, Kiev)이다. 주요 도시로는 인구 145만 명의 하리코프(Kharkiv)와 인구 101만 명의 드니프로페트로브스크(Dnipropetrovsk), 역시 인구 101만 명의 오데사(Odessa)와 97만 명의 도네츠크(Donetsk) 등이 있다.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국이 된 우크라이나의 국가 형태는 공화국이며 정치제도는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결합한 이원집정제이다. 국회의원은 450명이며 임기는 4년이다. 현재 대통령은 2010년 2월 25일에 취임한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이다. 총리는 2010년 3월 11일 취임한 아자로프(Azarov)이며 외교부장관은 2010년 3월 11일에 취임한 그리센코(Gryshchenko)이다. 24개 주의 지방정부(Oblast)와 크림 자치공화국이 있다. 주요 정당은 여당인 우크라이나 지역당을 비롯해 티모셴코 블록(Tymoshenko Bloc), 우리 우크라이나 연합, 공산당, 사회당, 국민당, 연합 우크라이나당, 산업·기업가당, 우크라이나 인민연합, 민주 우크라이나당 등이 있는데 140여 개 정당이 난립해 있는 상황이다.

2010년 말 기준 명목상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은 1366억 달러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3002달러이다. 일반적으로 지하경제규모가 국내총생산의 1/3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 국내총생산과 1인당 국민총생산(GNP, Gross national Product)은 앞에서 언급한 수치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교역량은 1107억 달러이며 이 중 수출은 518억 달러, 수입은 589달러이다. 우크라이나의 화폐 단위는 그리브나(Hr, Hryvnia, 통화표시: UAH)인데 1991년 독립 후 임시 화폐인 카르보바네츠(Karbovanets)를 사용해 오다가 1996년 9월에 도입했다. 우크라이나의 산업 구조는 1차 산업이 8.2%이며 2차 산업이 29.4%, 3차 산업이 62.4%로 형성되어 있다. 주요 생산품은 철강, 기계, 비철금속, 화학, 정유, 군수제품, 화학섬유 등이다.

우크라이나 개관

우크라이나 개관
국명

우크라이나(Ukraine(영어), Україна(우크라이나어))

위치

러시아 서부 흑해 연안
북위 44°20´ ~ 52°20´, 동경 22°5´ ~ 41°15´

면적

603,550㎢(한반도의 3.5배)

민족

우크라이나계 77.8%, 러시아계 17.3%, 기타 4.9%(벨라루스계, 몰도바계, 크림 타타르계, 불가리아계 등)

언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는 공용어는 아니나 일상 생활에서 널리 사용

종교

우크라이나 정교(모스크바 관구 및 키예프 관구), 가톨릭 등

기후

전체적으로 대륙성 기후, 남부 크림 반도는 지중해성 아열대 기후

인구

4578만 명 추정, 인구 밀도 76명/㎢, 도시 인구 69%(2010년 기준)

수도

키예프(Kyiv, Kiev), 인구는  279만 명

국가형태

공화국

정부형태

이원집정제

주요인사

· 대통령: 야누코비치(Yanukovych), 2010년 2월 25일 취임
· 총리: 아자로프(Azarov), 2010년 3월 11일 취임
· 외교장관: 그리센코(Gryshchenko), 2010년 3월 11일 취임

행정단위

24개 주(Oblast) 및 크림 자치공화국

국내총생산(GDP)

1366억 달러(2010년 말 기준)

1인당 국민소득

3002달러(2010년 말 기준)

무역액

수출 518억 달러(2010년 말 기준), 수입 589억 달러(2010년 말 기준)

화폐단위

그리브나(Hr, Hryvnia, 통화표시: UAH), 1 미국달러 ≒ 7.936 그리브나(2011년 9월 현재)

독립일

1991년 8월 24일(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로 독립 결정)

군사력

정규군 17만 7000명, 비정규군 464만여 명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느림(썸머타임 적용시 6시간, 그리니치 표준시보다 2시간 빠름)

교육

의무교육 8년(7~15세)

 (우크라이나 개황, 2011.9, 외교부)

 

 

우크라이나의 자연

1. 우크라이나의 지리

우크라이나는 위도 상으로는 북위 44°20´~52°20´, 경도 상으로는 동경 22°5´~41°15´이다. 남북 길이는 총 893㎞이며 동서 길이는 1316㎞이다. 국토 면적은 총 603,500㎢로 유럽 대륙의 5.7%에 해당하며 전세계 육지 면적의 0.44%에 해당된다. 한반도 면적과 비교하면 약 3.5배 크다. 우크라이나는 서쪽으로 폴란드와 헝가리, 슬로바키아와 인접해 있고 북동쪽으로는 러시아, 남서쪽으로 몰도바와 루마니아에 인접해 있다. 북쪽으로는 벨라루스에 인접해 있고 흑해와 아조프해 쪽의 접경국은 터키와 불가리아, 조지아(Georgia)이다.

2. 우크라이나의 지형

우크라이나는 국토의 95%가 평지이며, 전 국토의 80%가 경작 가능 지역이며 이 중 60%의 토지가 비옥한 흑토 지대이다. 서부의 카르파티아(Carpathian) 산맥과 크림 반도 등 은 최고 높이 2061m의 산악 지대이다. 수도 키예프(Kyiv)를 가로 지르는 드니프로(Dnipro) 강은 유럽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이다. 주요 천연자원은 철광석, 망간, 우라늄, 석탄, 천연가스, 원유, 마그네시아, 소금, 유황, 흑연, 티타늄, 마그네슘, 고령토, 니켈, 수은, 목재 등이다.

3. 우크라이나의 기후

우크라이나의 기후는 전반적으로 대륙성 기후이지만 남부 크림 반도는 지중해성 아열대 기후이다. 카르파티아 지역은 겨울이 온화하고 여름은 우기이다. 겨울 평균 기온은 -5 ~ -10℃인데 남부지역은 0℃이다. 여름 평균 기온은 15 ~ 26℃이며 최고 기온은 39℃이다.

 (우크라이나 개황, 2011.9, 외교부)

 

 

우크라이나의 역사

1. 우크라이나의 고대 정착민 역사

기원전 3500년에서 기원 전후에 이르는 기간 중에는 킴메리, 스키타이, 사르마티아인들이 현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 출현했다가, 기원후 첫 1000년 동안은 고트, 훈, 불가리아, 아바르, 하자르, 마자르, 페체네그 민족 등이 출현했다가 명멸하였다.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에는 기원전 수세기 동안은 타우리, 그리스, 로마인들이 거주했고, 기원후부터 중세까지는 아르메니아, 슬로바키아, 제노아, 투르크, 타타르인들이 거주했다. 현재에도 크림 지역에는 이들의 후손과 문화가 잔존해 있다.

2. 우크라이나 내 슬라브 민족의 형성

카르파티아(Carpathia) 산맥 북부 지역이 본거지로 추정되는 슬라브 민족이 7세기 초 사방으로 분산, 이동하면서 7세기경 드니프로(Dnipro) 강 서안에 동슬라브 민족이 정착했다. 8 ~ 9세기에는 동슬라브 민족의 최초 봉건국가인 키예프 루시(Kyiv Rus', 키예프 공화국)가 키예프(Kyiv)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남북으로는 흑해에서 발트해까지, 동서로는 볼가(Volga) 강에서 티사(Tisa) 강에 이르는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키예프는 1500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10 ~ 12세기경에는 인구가 약 15만 명에 이르렀다.

키예프 루시는 9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초반까지 200여 년간 봉건국가로서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특히 볼로디미르 대공(Volodymyr the Great) 치세(980년~1015년)에는 그리스도교를 수용(988년)하고 비잔틴 문화를 도입하여 문화적으로도 크게 융성하였다.

번영을 구가하던 키예프 루시는 1132년 므스티슬라프(Mstyslav) 왕의 사후, 왕자들 간의 후계 다툼이 발발하면서 여러 공국으로 분할되었고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1223년부터는 3차례에 걸쳐 몽고족의 침입을 받았고, 1240년 결국 몽고족에 의해 키예프가 폐허로 변하면서 키예프 루시도 멸망한다.

키예프 루시는 칭기즈칸의 손자이며 킵차크한국의 제 1대 군주였던 바투 칸에 의해 몰락했는데 이후 2세기에 걸쳐 몽고족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13세기 이후부터는 현 우크라이나 영토 대부분이 할레치안 볼리니안(Halytsian-Volynian) 공국의 영토가 되었고 할레치안 볼리니안 공국은 왕국으로 번성하며 14세기 중반까지 이 영토를 다스렸다. 그러던 것이 14세기 중반 이후에는 점차 리투아니아, 폴란드, 터키, 몰도바에 의해 분할, 예속되었고, 1569년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합병됨에 따라 드니프로 강 서안은 폴란드에 귀속된다.

3. 우크라이나 민족의 형성

중세에 동슬라브 민족이 확장·분화되면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역은 몽고의 지배를 거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인, 벨라루스인과 구별되는 그들만의 독자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우크라이나인은 16세기부터 카자크(Cossacks) 집단을 형성하였다. 우크라이나 중앙을 가로지르는 드니프로(Dnipro) 강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무장조직인 자포로쟈 카자크 시크(Zaporogian Cossacks Sich)의 주도하에 1648~1654년까지 독립투쟁이 전개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과 카자크 집단은 상호 깊은 연관이 있지만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민족성(ethnicity) 개념이고, 카자크 집단은 사회계층적 성격의 집단을 의미한다. 카자크 집단은 제정 러시아 시절 러시아 변방 지역에 대한 수비 임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자치 및 조세 면제 등의 혜택을 받은 사회 집단으로, 대부분 범법자나 도망 농노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자포로쟈 카자크, 러시아 지역에는 돈 카자크와 쿠반 카자크 등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카자크 집단이 존재했었다. 제정러시아 시절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 내에는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자포로쟈 카자크 집단이 주류를 형성하였고 대(對)폴란드 독립 투쟁도 이들 우크라이나인 카자크 집단이 주도했다.

폴란드 점령지가 아니었던 드니프로 강 동쪽은 1654년 잠시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카자크 지도자 흐멜니츠키(Khmelnitsky)와 러시아 차르 사이에 페레야슬라프(Pereyaslav) 협정이 체결되면서 이 지역은 러시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1772년 폴란드가 해체됨에 따라 드니프로 강 서쪽의 폴란드 점령 지역 대부분도 러시아에 편입되었고, 갈리치아, 볼리니아, 이바노프란코프스크 등 일부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그러던 것이 1905년 이후 제정 러시아 내에서 반 황제 혁명 움직임이 확산되자 우크라이나에서도 노동자, 농민들의 대규모 봉기가 빈발했다.

4. 우크라이나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역사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당시 우크라이나 인민대표 회의가 결성되었으며 1917년 12월 25일 하리코프(Khar’kov)를 수도로 하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던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Galicia–Volhynia)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퇴에 따라 1918년 11월 서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폴란드 민족의 봉기와 신생 폴란드 정부의 무력 개입으로 독립에 실패하였고 이 지역은 1919년 7월 폴란드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한편 이바노프란코프스크(Ivano-Frankovsk) 지역은 신생 헝가리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Greater Ukraine)에서는 1917~1921년 사이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과 볼셰비키파 등 6개 정파 간의 내란이 발생하였고 독립 쟁취에는 실패하였다. 1917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중심으로 러시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선포되어 활동을 벌였지만 수개월 후 볼셰비키 세력에 패하여 소멸되고 만다.

그러나 내란 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의 반(反)러시아의식과 민족의식이 크게 확산되었다.이에 따라 1921년 모스크바 볼셰비키 정부의 전략적 양보 하에 조약체결권과 영사관할권 등이 주어진 제한적 외교 주권을 가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창설 조약에 서명하여 창립 회원국이 되고, 이로써 외교주권을 일부 상실하게 된다. 소련 연방 가입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민족의식은 꾸준히 지속되었으며 모스크바 중앙정부는 이러한 민족의식 말살을 위해 강력한 억압정책을 시행한다. 1932~1933년에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이 실시한 집단 농장 추진 과정에서 인위적인 기아 정책이 집행 되어 우크라이나 농민 800만 명이 아사한다. 또 전쟁, 기근 등으로 많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1939년 당시 4100만 명의 인구가 1945년에는 2700만 명으로 대폭 감소하게 된다.

1934년 키예프(Kyiv)는 소비에트연방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수도가 되었으며 소비에트연방 당시에는 모스크바(Moskva),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다음으로 큰 제3의 도시로 성장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대전을 계기로 소비에트연방은 폴란드에 귀속된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과 벨라루스, 베사라비아, 북부 부코비나를 병합했다. 이 병합으로 인해 1941년 당시 소비에트연방 내 우크라이나 영토는 56만㎢였다. 한편 1941~1944년 동안 우크라이나 전역이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1945년 소비에트연방 내 러시아, 벨라루스와 함께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 회원국으로 참여하여 유엔 창설 회원국이 된다. 1954년 소비에트연방 정부는 우크라이나 합병 300주년을 기념하는 선물로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이양한다. 1953년 스탈린 사후에는 우크라이나에 로켓, 전자, 화학, 조선 산업 등 중화학 시설이 건설된다.

5.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의 역사

1980년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Mikhail Sergeevich Gorbachyov)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소비에트연방 중앙정부의 장악력이 약화됨에 따라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독립선언법’을 채택하고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독립을 최종 확정했다.

1991년 12월 5일 레오니드 크라프추크(Leonid Kravchuk)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991년 12월 8일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3개국 정상이 소비에트연방 탈퇴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독립 후 1994년 3월과 1998년 3월, 2002년 3월에 각각 제 2, 3, 4대 총선이 있었으며, 1996년 6월 28일 ‘신헌법’이 채택되었다. 1994년 5월 제2대 대통령으로 레오니드 쿠치마(Leonid Kuchma)가 당선되었으며, 그는 1999년 10월에 제3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2004년 11월 제4대 대통령 선거에 대해 야권이 불복함으로써 오렌지 혁명이 일어났고 2005년 1월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가 제4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는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가 당선되어 2010년 2월에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우크라이나 개황, 2011.9, 외교부)

 

 

우크라이나의 외교

우크라이나 정부의 대외정책은 러시아와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훼손하지 않는 것을 기조로 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이런 협력은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 통합 정책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추진한다는 전략에 기초한다. 우크라이나는 2010년 6월 ‘국가 대내외 기본 정책법’을 통해 몇 가지 외교정책 기본 방향을 명기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우크라이나는 어떠한 군사·정치 블록에도 가입하지 않는 비동맹을 준수한다.
둘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및 여타 군사·정치 블록과의 건설적 협력 관계는 유지한다.
셋째, 유럽 집단안보 시스템 개선 및 발전에 적극 참여한다.
넷째,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유럽식 정치, 경제, 법적 체제로 전환한다.
다섯째, 외국투자유치 등을 위한 국제협력을 강화한다.

 

 

 우크라이나의 경제 

우크라이나는 603,700㎢에 달하는 광활한 국토의 80%가 경작이 가능하고, 90여 종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인구는 4,578만 명에 달하는데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소비에트연방 시대의 우크라이나는 연방의 분업체제 가운데에서 철강, 조선, 항공우주 산업 등 주요 전략산업을 담당했다. 이러한 산업 기반은 독립 후 우크라이나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연방 당시 전체 산업생산의 20~25%, 군수산업의 30~40%를 생산했다.

소비에트연방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철광석 및 석탄을 활용하기 위해 주요 군수산업을 우크라이나에 집중 배치하였다. 그 결과 1991년 독립 당시 우크라이나 공업은 전체 소비에트연방 GDP의 46%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주항공, 조선, 탱크 등 우크라이나 소재 군수산업은 전 소비에트연방 군수품의 25~30%를 생산했다. 기타 철강, 기계화학 공업 등 전략산업의 집중 육성으로 정유, 비철금속, 시멘트, 비료, 건축자재, 자동차, 공구류, 화공설비, 전기제품, 섬유, 화학섬유, 의료기기가 발전했다.

주요 매장 자원은 철광석, 망간, 티타늄, 니켈, 흑연 등으로, 이 광물들은 세계적인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석탄은 456억 톤, 철광석은 259억 톤, 망간은 23억 톤에 이른다. 또 천연가스가 1조 1천억㎥, 석회석이 12억 5천만 톤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티타늄, 수은, 유황, 화강암, 고령토 외에도 희토류, 금, 다이아몬드, 형석, 베릴륨, 리튬, 납, 아연, 중정석, 인회석, 인광석 등 희소 광물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원유 및 천연가스는 국내 생산이 되고 있으나 국내 소비 충당에 태부족이다. 2008년 기준, 원유는 총수요의 19%에 해당하는 420만 톤을 국내에서 생산했으며, 천연가스는 26.5%에 해당하는 201억㎥를 국내에서 생산했다. 흑해 대륙붕에서 원유 탐사를 추진하고 있으며 내륙 지역에서는 천연가스의 일종인 셰일 가스(Shale Gas) 개발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우크라이나 경제 약사

2. 우크라이나의 주요 경제 정책
  1) 국제통화기금 조기 극복 및 경제 회복 주력
  2) 유럽연합으로의 통합 강화
  3) 물가 및 환율 안정화
  4)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 노력
  5) 산업 육성 정책

3. 우크라이나의 주요 산업
  1) 철강 산업
  2) 항공 산업
  3) 우주 산업
  4) 조선 산업
  5) 에너지 산업
  6) 화학 산업
  7) 자동차 산업
  8) 농업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외교관계 수립

한국은 1991년 12월 30일 우크라이나를 국가로 승인했고 1992년 2월 10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리고 1992년 12월 주(駐)우크라이나 대사관을 개설했다.

(우크라이나 개황, 2011.9, 외교부)

 

 

북한과 우크라이나의 외교일지
· 1991년 12월: 북한, 우크라이나를 국가로 승인
· 1992년 01월: 외교 관계 수립
· 1992년 10월: 우크라이나 주재 대사관을 개설하고 초대 대사로 조성범 파견
· 1998년 01월: 우크라이나 주재 북한 대사관 철수

2) 북한과 우크라이나의 협정 체결
북한과 우크라이나는 여러 가지 협정을 체결했는데 과학기술 협정과 무역경제협력 협정을 체결했고, 영사 협약도 체결했다. 또 무역·경제 및 과기협력 정부 간 공동위원회 설립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외교부 간 정례협의 개최 의정서, 항공 협정 등을 체결했다. 또 2003년 10월 북한 중앙재판소 법률 대표단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여 우크라이나 법무장관과 민사 및 형사 법률 공조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대표단의 단장은 북한 중앙재판소 김병률 소장이었다.

2. 북한과 우크라이나의 경제·통상 관계

1) 북한과 우크라이나의 교역
2010년 북한과 우크라이나의 교역량 중 북한 기준 수출액은 2백 5십만 달러였고 수입액은 2백 7십만 달러였다. 양국 간의 교역 액수는 미미한 수준이다. 지속적으로 수·출입되는 특정 품목은 없으며 특히 대(對)북한 수출이 대폭 격감하고 있는 추세이다. 우크라이나 측은 북한으로부터 전체 수입의 45%를 차지하는 천연탄산 마그네슘을 주로 수입하고 동 및 동합금, 당밀 등을 수출하고 있다.

2011년 9월 현재 북한과 우크라이나 간 현재 상호 투자는 일어나고 있지 않다.

2) 우크라이나의 북한에 대한 원조
1997년 8월 우크라이나는 대북 식량지원을 결정했으며 1998년에 80만 달러 상당의 식량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원된 식량은 총 1000톤이며 지원 품목은 밀 500톤, 기타 잡곡 200톤, 동물유 100톤, 육류 100톤, 설탕 100톤 등이다. 1999년에도 밀 15만 달러 상당과 육류 및 설탕 24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는 식량 원조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수송료 부담에 대한 양측의 이견으로 무산되었다.

(우크라이나 개황, 2011.9, 외교부)

 

 우크라이나현재는 키예프와 인천공항간의 직항로가 없다. 대부분 모스코바를 경유하여 키예프로 들어온다. 모스코바를 경유하지만 공항내부에서 갈아타기 때문에 비자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특별히 기록할 것도 없다. 다만 키예프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신고서만 기록하여 제출하면 된다.

 

대부분 모스코바까지 약 8시간, 모스코바공항에서 키예프행 티켓확인 후 면세점 및 대기부스에서 약 3시간 가량을 기다린다. 티켓의 항공기번호와 일치하는 게이트번호가 화면에 뜨면 소지품검사 후 약 30~40여분 기다렸다가 키예프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키예프까지는 약1시간 30분정도 걸린다고 본다면 총 약 13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우크라이나 여행 가이드

2004년의 오렌지 혁명은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면서 우크라이나의 새 시대를 예고하였습니다. 번화한 수도인 키예프에서는 시민들이 최신 패션으로 차려 입고 현지 카페나 클럽에서 새로 찾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나라에는 관광객들이 상상할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1000년 동안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습니다. 9세기 동안 키예프에 꽃핀 키예프루시 문화는 또 다른 나라 벨로루시와 러시아를 탄생시켰습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비행기를 이용하여 수도인 키예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작은 보리스필 공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 외, 훌륭한 열차 시스템은 모스크바와 유럽으로 연결되며 영국과 같이 먼 곳에서도 일반적인 코치 서비스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아 자가운전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매력은 서부의 카르파티아 산맥의 빼어난 자연의 아름다움에서부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이며 역사적 유물인 리비브에 이릅니다. 우크라이나는 놀랄 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500개 이상의 우크라이나의 도시들은 900년 전부터 건설되었으며 대부분은 고대의 건축물과 유물, 그리고 아름다운 궁전들로 가득합니다. 키예프와 리비브에서 관광객들은 슬라브 문화에 흠뻑 젖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흑해 도시인 오데사에서 현대 우크라이나 인들이 어떻게 진화하고 사회화 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숙박시설은 일부 도시에서는 다소 부족한 편이지만 주요 도시에서는 적당한 숙박시설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키예프에는 많은 고급호텔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숙소는 중간 정도의 적당한 가격 수준입니다. 식사에 있어서는, 관광객들의 저녁식사가 양배추와 감자로 제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믿기 어려울 만큼 긴 역사와 유럽, 터키, 러시아 사이의 지리적 위치덕분에 우크라이나는 단순하면서도 맛과 풍미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뛰어난 요리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돈을 벌고 쓰는 새로운 열정이 있는 곳, 특히 수도인 키예프에서는 나이트 라이프 또한 활발합니다.

기후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는 계절 사이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상당히 황량한 기후를 나타냅니다. 겨울은 춥고 혹독하며 한낮에도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는 일이 드뭅니다. 우크라이나의 북부지방은 한층 더 심해서 기온이 영하 10도에 달하며 영하4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일이 없습니다. 남부지역은 조금 나은 편이지만, 겨울은 여전히 상당히 춥고 북부지역만큼 황량합니다. 겨울은 우크라이나에서 일년 중 가장 습한 시기로 습기를 머금은 추위가 한층 더 불쾌한 느낌을 줍니다.

여름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더운 시기입니다. 북부지역은 기온이 15도 정도로 온화하게 서늘하고 7월과 8월에는 최고25도에 이릅니다. 남부지역은 여름에 한층 더 덥습니다. 적당한 양의 강수량이 연중 고르게 분포하며 지나치게 비가 많이 내리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수도인 키예프에서는 스텝 지역에 있는 위치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보다 일별, 월별 기온의 변화가 두드러집니다. 봄과 가을은 일년 중 관광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입니다. 날씨는 보통 쾌적하고 계절의 변화는 세계 어느 곳보다도 아름답습니다. 만약 겨울에 우크라이나를 방문한다면 따뜻한 옷을 충분히 준비하세요. 그 외의 다른 시기에는 가벼운 옷들과 함께 스웨터나 자켓을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역사

흑해 북쪽의 스텝지역은 오랫동안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문화의 교차로였습니다. 기원전 7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이 지역을 지배한 최초의 세력은 스키타이족으로 알려져 있지만, 루시라고 알려진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이동해 온 후, 이 지역은 하나의 지배세력아래 통합되었습니다. 루시는 882년에 키예프를 점령하여 10세기 말에는 발틱해에서 볼가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으며 키예프 루시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998년, 키예프루시의 지배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로써 우크라이나의 정치와 문화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 비잔틴 문화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1520년, 우크라이나의 모든 해안가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15세기에는 전염병과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많은 인구가 사망하였으며, 도주 노예와 그리스 정교 피난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와서 국가를 세웠고 이후 코사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크라이나가 현대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폴란드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자치주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는 1840년대에 다시 부활하였고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금지시켰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의 전제군주제가 붕괴되자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주장할 기회를 얻었지만 수많은 당파들로 인한 내전으로 인해 무정부상태가 됩니다. 1992년 구 소련이 우크라이나를 연방에 편입시키면서 내전은 종결되었습니다. 두 번째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물결에 스탈린은 격노하여 우크라이나의 인구를 말살하고 문화와 교육기관들을 파괴하여 굴욕의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1986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참사와 소련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최후의 독립운동으로 점화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우크라이나는 그들의 대통령과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오랜 동맹을 단절하고 유럽과 서구세계와 수교를 맺었습니다. 2005년의 오렌지 혁명으로 여론은 압도적인 지지로 빅터 유센코를 지도자로 추대하였습니다. 비록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러시아, 터키, 유럽의 영향권의 교차로에 자리잡은, 세계에서 보다 흥미로운 미개척 지역으로 남아있습니다.

 

 

우크라이나

통계 자료

국명 : 우크라이나
면적 : 603,700 sq km
인구 : 52,000,000
수도 : 키에브 (인구 2,600,000)
인종 : 72% 우크라이나인, 22% 러시아인, 벨라루시안, 몰도바인, 불가리아인, 폴란드인, 헝
          가리아인, 로마니아인
언어 :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벨라루시아어
종교 : 우크라이나 정교, 우크라이나 자치 정교, 우크라이나 천주교
정체 : 공화국
대통령 : 레오니드 쿠참 (Leonid D Kucham)
수상 : 발레리 푸스토보이텐코(Valery Pustovitenko)

지리 및 기후

우크라이나는 프랑스보다 조금 큰 크기로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나라이다. 동쪽과 북쪽은 러시아, 북쪽에 벨라루스, 서쪽에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흑해와 아조브(Azov)해가 남쪽에 위치한다. 지형학적으로 대부분 스텝 대평원 지대에 속한다. 서북부에서 남동부로 고지대가 이어지지만 높은 산은 서쪽 끝의 카파티안(Carpathians)으로 짧게 뻗어있고 남쪽은 크림 반도(Crimeans)다. 산림과 습지가 북부에 위치하고 남부의 나무가 거의 없는 광활한 스텝지대와 3,000개의 강이 우크라이나를 흐른다.소련의 곡창지대로 알려졌던 우크라이나는 국토의 절반 이상이 보리, 호밀, 귀리, 사탕무 재배지고,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 중에 하나인 중부의 부식토 지대는 국토의 2/3를 차지한다. 거대한 지역이 방목지로서 봄에는 흔들거리는 마키(maky, 붉은 양귀비 꽃), 소냐쉬니키(sonyashnyky, 해바라기), 황금 겨자의 물결을 볼 수 있다. 평지는 거대하게 조성된 목초지로서 오크, 단풍나무, 리덴, 물푸레 나무 등이 드문드문 보이기도 한다. 버드나무와 포플러 나무는 강을 따라 자라며 얇은 산림 벨트는 북부로 가로지르는데 전나무, 너도밤나무, 오크가 주종을 이룬다. 쉽게 눈에 띠는 동물은 하얀 거위와 오리로 수많은 연못이 전역에 걸쳐있다. 여우, 사자, 담비, 가젤 영양 등의 동물과 350여종의 새, 200여종의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내륙은 온화한 대륙성 기후로 7월이 가장 덮고 온도는 평균 23도이며, 가장 추운 1월에는 영하의 기온을 유지한다. 동부지역은 차가운 시베리아 풍의 영향을 받지만 서부는 따듯한 지중해 풍의 영향을 받아 해안도시인 얄타(Yalta)와 오데사(Odessa)는 내륙도시보다 따듯하다. 내륙은 6-7월이 가장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이고 해안은 12-1월에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

역사

우크라이나는 역사는 기원전 7-4세기 스키티아인(Scythias)에 의해 스텝지대부터 흑해 북부지역을 지배받으며 시작됐다. 스키티아 문화의 흔적은 동물과 인간을 자세히 묘사한 뛰어난 금 세공품이 남아있는 키에브의 동굴 수도원(Cave Monastry)에서 찾을 수 있다. 스키티아인에 이어 오스트로고스(Ostrogoths), 훈(Huns), 투르크-이란 카자(Turko-Iranian Khazars)의 지배를 받는다. 스칸디나비아인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장기간 지배했는데, 키에브는 기원전 882년 러시아에게 점령당한 후 10세기까지 다뉴브강 서쪽의 볼가(Volga)에서 발틱해의 남부에 이르는 영토였던 키에브인 러시아(Kievan Rus)의 중심도시 역할을 했다. 키에브인 러시아의 지도자인 볼로드미르(Volodmir)는 988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현재의 이스탄불)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정치와 문화적으로 비잔틴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520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우크라이나의 해안지역을 통제했다.  15세기에 전쟁과 전염병의 많은 인구가 사망했으며, 인접 국가의 카작인(kazaks, 코삭 인Cossacks) 농노와 정교도 피난민들의 우크라이나로 이주해왔다. 우크라이나인 코삭(Ukrainian Cossacks)은 공식적으로 폴란드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나 결국 국가를 만들어 자치를 했으나 20년 후 폴란드와 러시아로 분리됐다. 1940년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대두로 러시아는 학교에서 우크라이나 언어 교육, 언론과 책을 금지시켰다.  1차대전 후 전제군주제가 붕괴돼 우크라이나는 독립의 기회를 얻었으나 당파로 인해 내전이 발발하고 6개의 군대가 키에브를 일년동안 다섯 번이나 바꿔 통제하는 무정부상태를 야기했다. 러시아와 폴란드가 개입한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인종적 당파간의 연속적인 전쟁의 결과로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의 서부를 러시아가 나머지 우크라이나를 차지하게됐고 1922년에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편입됐다. 스탈린이 권력은 잡은 1927년 우크라이나에 억압을 가했고 1932-33년의 기근으로 7백만명이 사망했다. 지식인에 대한 사형과 강제출국은 인구감소를 심화시켰고, 스탈린은 종교정책으로 250개의 교회와 성당이 파괴됐다. 1937-39년의 숙청기간동안 백만명이 사형을 당하거나 소련의 강제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으며, 2차 대전동안 소련과 독일군의 전쟁으로 6백만명이 추가로 사망하거나 강제출국 당했다. 20세기 초반 50년 동안의 전쟁, 기근, 숙청은 우크라이나 남자의 50%, 여자의 25%에 해당하는 사람이 죽는 대가를 치뤘다. 1989년 발생한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소련의 느린 보상으로 인해 광범위한 반소련 감정이 일어났다. 키에브의 지식인과 작가가 중심이 되 일어나 재건설을 위한 우크라니아 민족운동은 1990년 선거에서 다수석을 차지하게 했다. 7월에 국회는 자치권을 선포했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91년 8월에 발생한 소련 쿠테타의 실패로 우크라이나 공산당(Commist Party of Ukraine, CPU)의 활동이 금지됐고 12월에 국민의 지지를 얻어 독립해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의장이었던 레오니드 크라브훅(Leonid Kravchuk)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파주의로 인해 92년 9월 정부는 사임을 하게되고 러시아의 핵무기와 흑해 함대(크림 반도의 항구인 세바스토폴Sevastopol) 문제로 인해 양국간에 긴장이 고조됐고, 높은 인플레이션과 기름 부족, 구매력 감소로 경제 위축과 더불어 지역간, 인종간 격차가 더욱 심화됐다. 친 러시아 인사인 러오니드 쿠차마(Reonid Kuchma)가 94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고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다수당이 됐다. 9년대 후반은 우크라이나와 NATO의 외교관계로 인해 러시아와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경제

GDP : US$ 175billion
1인당 GDP : US$ 3,370
경제 성장률 : -4%
인플레이션 : 9%
주요 산업 : 석탄, 전기 발전, 광속, 기계류, 운송장비, 농업
주요 교역상대국 : 러시아, 중국, 이태리, 스위스

문화

술은 풍부하며 보드카를 즐겨 마신다. 서양국가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보쉿(빨간 순무가 든 러시아 스프), 그림을 그린 계란, 유명한 카삭 노래와 춤을 추는 전통은 우크라이나에서 기원한 것이다. 서 우크라이나인은 자신들이 순수한 우크라이나인으로 차처하고 있으며 문화의 선봉으로 우크라이나 언어를 쓰고 민족주의를 퍼뜨린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동부지역은 천만명의 러시아인이 살고 있으며 민족주의도 약하고 대부분 러시아어를 쓰고 있다.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 벨라루스어와 같은 동부 슬라빅 언어로 불가리아에서 전래된 정중한 슬라브 교회 이전의 키에브에 있던 9세기 스라브어와 가장 근접한 언어다. 러시아와 폴란드는 1876년 짜르 알레산더(Tsar Alexander) 2세 때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금지 시켰으나 현재까지 보존되고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1990년에 우크라이나어가  공식언어로 정해졌으며 러시아어도 통용된다. 우크리이나 문학작품은 12세기의 슬로보 오 폴쿠 이레빔(Slovo o Polku Ihrevim- Tale of Ihor's Armament)같은 중세 슬라브의 연대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 문학의 시작은 '우크라이나의 소크라테스'로 칭송 받는 18세기의 흐리홀리 스코보로다(Hrihorli Skovoroda)가 우크라이나어로 쓴 시와 철학 책으로 지식인보다는 일반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타라스 쉐브첸코(Taras Shevchenko)는 농노 출신의 국민적 영웅으로 최초의 대중적인 작가로 그의 작품은 우크라이나 문학의 황금기를 열었다. 20세기 초반의 가장 능력 있고 다작의 작가인 이반 프랑코(Ivan Franco)는 소설, 시, 드라마, 철학과 동화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썼다. 많은 작가들은 소련의 지배동안 고통받은 내용을 주제로 하고 있고, 불일치의 고뇌를 시로 쓴 Winter Trees('68), Candle in the Mirror('77)의 작가 바실 스투스(Vasyl Stus)는 소련의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키에브의 우크라이나 작가 연합은 91년 독립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음악은 백년이상 된 서사시와 코삭인의 업적을 찬미하는 발라드 서정시인 두마스(dumas)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민속 음악은 16-17세기 음유시인인 코즈바(kozbar)의 기타와 비슷한 악기인 코즈바(koaba)로 연주한 코삭 영웅의 노래가 기원이다. 45개의 현으로 된 커다란 악기인 반두라(bandura)는 18세기에 들어 코즈바를 대체했고, 반두라 성가대가 대유행하였으며 악기는 국가의 상징이 됐다. 키에브의 반두라 성가대는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클래식 작고가 중에는 우크라이나 민속 노래 피아노 작품으로 유명한 미콜라 리센코(Mykola Lysenko)가 있고, 현대 음악은 펑크 밴드인 플라치 예렘릴(Plach Yerelyl)과 싱어 송 라이터인 니나 맛비엔코(Nina Matvienko)가 유명하다. 우크라이나에 기독교는 10세기에 전래돼 천주교와 정교도로 1054년 분리된 후 정교도는 러시아 정교와 로마 천주교의 다른 영향을 받아 3개의 큰 종파로 나뉘어졌다. 교회건물은 나무로 만든 독특한 양식으로 박공구조와 지붕 널로 된 돔과 큐폴라스(반구 천장)가 못을 쓰지 않고 만들어져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막기 위해 소련은 12세기의 성당을 포함해 백여개의 신성한 건물을 1930년대 파괴시켰다. 그림은 지붕에 종교적인 주제를 그렸고, 17세기에는 예수, 성모 마리아, 천사, 성인의 작은 이미지를 라임나무에 그렸다. 코삭인의 부흥으로  민족주의를 주제로 한 종교 미술 학교가등장했고, 소련의 현실주의 등장으로 실험적 작품과 민족주의 주제가 다시 유행했다. 우크라이나 음식은 곡물과 감자, 배추, 콩, 버섯 같은 채소가 주요산물로 채식이 주를 이루며 고기는 대부분 쌂거나 볶아 먹는다. 디저트는 체리나 자두가 꿀과 함께 서빙된다. 라레니키(varenyky)는 작은 만두로 인기 있는 스낵이고 돼지 비게인 살로(salo)는 신성한 음식이다. 살로의 전통은 1세기가 넘는 것으로 프랑스인이 와인에 매혹된 것처럼 우크라이나인도 살로에 매혹돼있다. 보쉿(borscht)은 우크라이나에서 유래한 스프로 전국적으로 즐기고 있고, 소고기와 야채 스프는 전통적으로 크림과 같이 서빙된다. 우크라이나 음식을 제대로 맛볼려면 현재인 가정을 방문해야모순적으로 맛있는 우크라이나 음식은 우크라이나에서 찾기 어려운데 대부분의 고급 레스토랑은 유럽스타일의 음식을 판매하기 때문이다.

축제 및 행사

우크라이나는 신년에 휴일 축가를 부르며 정교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이다. 파스카(paskha, 부활절)는 정교도 교회의 연중 가장 큰 축제로 자정 예배로 시작해 전국적으로 교회 주변에서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르비브(Lviv)에서 열리는 국전기간인 5월은 음악과 극장공연이 한달 내내 이뤄진다. 수도에서는 5월 마지막 주말에 키에브의 날이라는 봄 축제가 있다. 8월에는 크림 반도 축제가 얄타에서 열린다. 8월 28일에는 포차일브(Pochaylv)의 수도원에 성모취임 대축일을 기념하기 위한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8월 24일 독립 기념일은 도시마다 공연과 특별 행사를 실시한다.

여행자 정보

비자 : 모든 방문자는 비자를 획득해야한다. 국경에서는 72시간 유효한 긴급 비자를 발급하고 1개
          월 비자는 키에브 보리스필 공항에서 발급 받을 수 있다.

보건위생 : 콜레라, 디프테리아, 기면성 뇌염
시간 : GMT + 2시간
전압 : 220V, 50Hz
도량형 : 미터법 (도량형 환산표 참조)

경비 및 환전

통화 : 우크라이나 그리니아 (grynia, UHA; 가끔 hryvnia로 표기하기도 함)
일반 경비 :
저렴한 현지 식사 : US$1-3  
중간 가격대의 레스토랑 식사 : US$3-8
최고급 레스토랑의 식사 : US$8 이상
저렴한 숙소 : US$5-15
중급 호텔 : US$15-25
고급 호텔 : US$25 이상

음식가격이 상당히 싼 편이고 숙소도 그다지 비싸지 않다. 편하게 여행을 하려면 하루에 US$50은 필요하며 수도인 키에브는 가격이 15-30% 높다. 중급 가격대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중급 호텔에서 잔다면 하루 US$30 정도면 충분하다. 직접 요리를 하고 도미토리에서 자고 일반 교통수단을 이용한다면 경비는 더 줄어들 것이다.  환전소의 환율은 호텔보다 높고, 경화은 어디서나 그리니아로 환전이 가능하지만 여행자 수표와 신용카드는 은행과 대도시의 일부 환전소에서 환전이 가능하다. 현금을 들고 다니는게 여행에 편리하며 미국 달러와 독일 마르크가 일반적으로 유리하다. 경화를 식당과 상점에서 사용하는 건 공식적으로 금지돼있지만 외국인 여행자들이 오는 곳에서는 경화가 통용된다. 여행자들을 위한 고급 식당은 5%의 서비스 요금이 영수증에 포함되지만 10-15%의 팁을 추가로 주는 게 좋다. 기념품, 수공예품 시장에서는 가격 흥정을 하는 게 바람직하고 가끔 불쾌한 경험을 당할 수도 있다.

여행 시기

우크라이나의 여행시기는 4월말부터 6월초의 봄 시즌으로 나무와 꽃들이 만발해 있고 여름에 비해 비가 적고 복잡하지 않은 시기다. 오데사와 크림반도의 해변은 여름에 붐비며 겨울은 춥고 눈이와 여행에 필요한 두꺼운 옷을 준비해야한다.

주요 여행지

키에브(Kiev)

5세기에 형성된 도시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의 기원이 되는 도시다. 3개의 국가는 9-11세기 슬라브의 강대한 국가인 키에브인 러시아(Kievan Rus)에서 유래됐다. 그 후 키에브는 몽고의 침략, 사회주의자의 도시화 정책, 세계 2차 대전간의 대규모 파괴로부터 살아 남았다. 구시가(Old Town)는 부리차야 볼로디미르스카(vulitsya Volodymyrska)의 동북부 주변으로 키에브의 역사적인 장소가 모여있다. 11세기에 지어진 키에브에서 가장 오래된 성 소피아 성당이 가장 큰 볼거리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가 잘 보전돼 있다. 성당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상점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부리차야 크레쉬차틱(vulistya Khreschchatyk)이다. 크레쉬차틱의 남쪽 끝은 베사랍스키(Bessarabsky) 시장으로 과일과 야채 노점상이 가득하다. 구시가는 키에브 도심에서 걸어서 다녀 올만한 거리에 있다.  키에브에서 가장 매력적인 거리인 안드리이브스키 브즈비즈(Andriyivsky vzviz)는 구시가에서 역사적인 상업지구이며 항구인 포딜(Podil) 구역으로 이어진다. 안드리이브스키는 미술관, 상점, 식당과 카페가 즐비하고 포딜의 중앙은 콘트락토바 프로쉬차(Kontraktova ploschcha)로 크고 하얀 콘트락토바 딤(Kontraktova Dim)이 중앙에 위치하는 공원같이 생긴 광장이다. 1871년부터 건물 안에는 식당, 미술관, 사무실이 가득히 들어서 있다. 북서쪽으로 조금 가면 역사상 최악의 핵 참사였던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문서를 전시한 체르노빌 박물관이 있다. 체르노빌은 박물관으로부터 북으로 불과 100km 떨어져있다. 남쪽은 포딜에서 가장 오래된 1631년의 미콜라 프리티스코 교회가 있는데 우크라이나 바로크 건축양식의 표본이 되는 건물이다. 구시가의 남부는 강을 따라 있는 페처스크(Pechersk) 구역은 역사적으로 성직자들의 중심역할을 한 곳이며 1051년에 건설된 동굴 수도원(Caves Monastery)이 위치한다. 중심으로 몇 킬로 벗어난 남쪽은 나무가 심어진 경사지로 황금 돔으로 된 교회, 미라가 된 수도승들이 있는 지하 미로, 한 때 스키티아인의 금을 저장했던 박물관으로 쓰이는 우아한 모자이크 건물이 있다. 11세기에 건설된 수도원의 일부로 사용되던 도미션 성당(The Dormition Cathedral)은  2차 대전 당시 러시아 붉은 군대에 의해 일부 파괴되긴 했지만 우크라이나 바로크 양식 건물 중 가장 훌륭한 건물이다. 성당의 북쪽은 역사 보물 박물관으로 가공물과 보석, 귀금속을 전시하고 있고 기원전 4세기부터 만들어진 스키이타인의 금 세공품이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다. 또한 키에브의 12세기 모델과 우크라이나,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장인들이 만든 고블렛(손잡이 없는 술잔), 십자가, 술잔이 장식되어 있다. 도시 버스들 이용해 키에브 도심에서 페처스크 구역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민속 건축 박물관은 키에부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져 있는데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다. 경치가 좋은 언덕에 17-20세기의 목조 가옥, 교회, 농장, 풍차가 많이 보이며 아름다운 정원과 실내 가구가 잘 보존되어 있다. 박물관은 지역적 특색에 따라 7개의 작은 마을로 구분돼있으며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가 있고 특별 이벤트가 열린다. 키에브에서 버스로 방문이 가능하다.

르비브(Lviv)

우크라이나(Western Ukraine)의 수도인 르비브는 1939년까지 한번도 러시아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1980년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다시 발생한 도시다. 2차 대전의 피해를 입지도 않아 르비브는 고딕양식부터 현대의 건축까지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서부 건축 박물관이다. 사회주의 기간의 기괴함과 좁고 오래된 골목길과 색채감 넘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가볼 만한 곳이다.  신시가의 중심가 바로 동쪽이 구시가로 프로쉬차 리녹(Rynok)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잘 보존된 도시 광장을 위치한다. 19세기의 시청과 그 주변은 아름다운 지나치게 정교 석조 조각이 있는 16-18세기 건물들이 있다. 남서 코너의 반대편에 있는 로만 카톨릭 성당은 르비브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양식 건물로 14세기에 지어졌다. 성당 안에 있는 보임 예배당(Boyim Chapel)의 석조 조각은 환상적이다.  남동부 코너의 반대편에는 르비브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 있는데 1735년에 생긴 곳으로 16세기 거물인 압테카 박물관(Apteka Museum)과 같이 사용되고 있고 약제기구가 전시돼 있다.  르비브의 대중 건축과 생활 야외 박물관은 구시가에서 2km 떨어져 있으며 100여개의 목조 농장, 대장간, 풍차, 교회, 학교가 60헥타에 걸쳐있다. 전국의 민속 전통에 따라 건물들은 매일 쓰는 물건들로 치장돼 있고 버스와 트램이 박물관으로 운행된다.

얄타(Yalta)

크림반도의 남부 해안에 위치한 얄타는 18세기에 러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해 흑해의 전형적인 리조트로 발전해 갔고 짜르 알렉산더 2세의 여름 별장이 인접한 리바디아(Livadia)에 위치했다. 러시아 혁명 전에는 귀족들의 소유지였으나 혁명 후에는 노동자들의 휴양소로 사용됐다. 얄타의 중심가는 얄타만의 동쪽 끝에서부터 이어진다. 모든 이들에게 매력적인 차가 없는 강변 산책로인 나베레즈나 레니아(naberezhan Lenia)는 선착장, 야자수, 자갈이 많은 해변, 상점, 예술품 시장이 있다. 얄타의 가장 좋은 해변은 비스트라(Bystra) 입구의 서쪽에 있는 얄타만에 있다. 얄타만의 절반에 이르는 길과 나베레즈나의 뒷편은 의자식 리프트가 있고 사원처럼 생긴 전망대가 언덕에 있다. 리프트의 서북부는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Alexander Nevsky Cathedral)으로 신 비잔틴 양식의 건물로 백년 전에 지어졌다. 위대한 러시아의 극자가인 안톤 체홉(Anton Chekov)의 팬이라면 그의 생애 마지막 5년을 보낸 체홉 생가 박물관을 방문할 것이다.

오데사(Odessa)

오데사는 유혹직인 해변 휴양지이며 매연이 심한 공업 항구이기도 하다. 흑해에서 오래된 선박기지이며 우리크라이나 남부의 중심 도시로 1905년의 혁명 당시 반체제 노동자들을 지원한 전쟁선 포템킨 타브리체스키(Potemkin Tavrichesky)의 반란의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로도 유명하다. 현재는 박물관의 훌륭한 소장품으로 인해 도시가 잘 알려져 있다. 도시의 중심부는 해안에서 불과 몇백 미터 거리에 있는데 아름다운 저층 건물, 가로수가 이어진 길, 오페라와 발레 극장으로 이루어져있다. 1880년 비엔나 건축 디자인으로 지어진 극장은 바로크와 르네상스의 향기가 혼재해 있다.인접한 파사즈(Pasazh)는 호화스런 쇼핑 몰이 들어서 있다. 도시 중심부는 오데사의 유명한 박물관들의 현장이기도 한데 고고학 박물관은 1875년에 설립돼 보석과 동전을 포함해 흑해 문명의 창조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길 건너에 있는 해양 역사 박물관은 선박제조, 항해술 모델, 해군 장식품이 전시돼 있다. 문학 박물관에는 세브첸코(Shevchenko), 프란코(Franko), 체홉(Chekov), 푸쉬킨(Pushkin), 톨스토이(Tolstoy), 고르키(Gorky)의 작품을 맛 볼 수 있다. 오데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거대한 포템킨 계단으로 1925년 아이센스타인의 영화 전쟁선 포템킨(Battleship Potemkin)의 촬영장소였다.  카타콤비(katakombi)로 알려진 오데사에 있는 1,000km의 터널은 19세기에 건설됐는데 밀수꾼, 혁명 당원, 2차 대전 당시의 게릴라들의 피신처로 사용됐었고 게릴라 대원이 만든 터널안의 피난처는 박물관(Museum of Partisan Glory)으로 쓰이고 있고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로 관광객을 위한 가이드 투어를 실시하고 있다. 카타콤비는 버스로 이동이 가능하다.

카미아넷-포딜스키(Kamyanets-Podilsky)

카미아넷-포딜스키는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루마니아 만나는 국경에 접하는 도시로 11세기부터 깍아지른 듯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위섬으로 스모트리치 강(Smotrich River)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가파른 길이 있다. 남서쪽에 있는 다리는 100년간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량으로 16세기의 9개의 탑이 있는 성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대부분의 탑은  공개되어 도시의 경관 뿐 아니라 주변의 지형을 조망할 수 있다. 민족학 박물관은 민속 공예품과 성에서 발견된 것들이 전시되고 있다. 자갈로 된 길을 따라 성에서 내려가면 아르메니아 지구가 나오는데 14세기에 만들어진 시장광장과 15세기의 교회가 남아있다. 광장의 북서쪽에 있는 1580년에 건설된 피터와 폴의 성당(Cathedral of SS Peter & Paul)은 승리의 문(Triumphal Gate)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투루크의 지배 당시 성당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됐고 첨탑이 세워졌으나 성당을 다시 회복한 후 기둥의 끝 부분에 금으로 된 성모마리아 상을 추가했다. 광장 북쪽은 도미니칸 수도원과 교회로 높게 주조된 종탑이 있다. 수도원의 북쪽은 14세기 시청 건물로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오래된 시청 건물로 2차 대전을 기념하기 위한 작은 박물관으로 현재 사용되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포차이브(Pochayiv)

키에브에서 동굴 수도원을 방문했다면 우크라이나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포차이브의 수도원을 방문해 보라.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우크라이나인에게 신성한 곳으로 종교적 축제기간에는 순례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우스펜스키 성당(Uspensky Cathedral)은 바로크 양식의 성당으로 실내는 6,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압도적인 표현의 정교 도해서는 화려하고 뛰어난 성인과 총주교의 그림이 벽면에 빛나고 있다.  100년 전에 지어진 황금 돔의 트리니티 성당(Holy Trinity Cathedral)은 우스펜스키 성당보다 작고 어둡지만 거대한 기둥과 얇은 아치형 천장은 유심론의 깊이를 느끼게 해 준다. 트리니티 성당의 서쪽에는 19세기 중반의 종탑이 있는데 높이 65m, 무게 11,180kg의 바로크 양식 탑으로 내려다보는 전망이 나쁘지 않다. 포차이브는 서 우크라이나 중부에있는 도시로 키에브에서 300km 서쪽에 있다. 크레메넷(Kremenets, 소요시간 40분), 테르노필(Ternopil, 소요시간 2시간), 르비브(Lviv, 소요시간 6시간)에서 오는 버스는 수도원 서쪽에 있는 버스터미널에 정차한다.

체르닙시(Chernivtsi)

150년간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 난 체르닙시는 우아하고 국제적인 중앙 유럽 분위기의 도시다. 혼합된 역사로 인해 비잔틴에서 바로크까지 다양한 형태의 건축 양식과 고상한 거리의 구시가 지구가 있다. 3차선의 부리차야 오 코비리안스카(vulitsya O Kobylyanska)의 보행자 거리는 카페, 레스토랑,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매우 다른 매우 오스만적인 체르닙시의 정원들은 목조 발코니와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 코비리안스키의 동쪽에 있는 아르메니안 성당은 19세기의 건물로 고대 아르메니아 디자인 양식으로 건설됐다. 실내는 지나치게 정교한 그림과 아름다운 오르간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구시가의 광장은 쩬트랄나 프로쉬차(Tsentralna ploshcha)는 19세기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 중 지역 박물관(Regional Museum)이 가장 흥미 있는 곳으로 중앙에 계단이 있는 아트 노보(Art Nouveau) 건물이다. 20세기 그림과 윤색된 민족학적 전시품이 실내에 있다.키에브에서 400km 서남쪽에 위치하며 기차로 11-13시간 소요되고 버스는 기차보다 오래 걸리며 작은 공항이 있다.

체르니히브(Chernihib)

8세기에 형성된 체르니히브는 우크라이나의 11-12세기 종교적인 건물이 있는 도시로 키에브 러시아제국의 공국 중에 하나였다. 프로쉬차 체르노바(ploshcha Chernova)를 조금만 벗어나면 사랑스런 피앗닛스카(Pyatnytska) 교회가 나오는데 12세기에 만들어진 교회로 1960년대에 재건설돼 키에브 러시아제국의 양식이 남아있고 외부의 벽돌공사는 석공기술의 진수를 볼 수 있다.남동쪽에 있는 디티넷(Dytynets)은 낙엽이 가득한 공원주변으로 종교적인 건물이 있는데 이 중 2개의 미사일처럼 생긴 종탑이 있는 스파소-프레오브라젠스키(Spaso-Preobrazhensky) 성당은 어둠고 신비스런 실내에 키에브 러시아 왕실의 무덤이 있다. 12세기에 건설된 보시소-흐립스키(Boryso-Hlibsky) 성당은 성당의 역사와 디티넷 지역의 박물관 역할을 한다. 체르니히브 역사 박물관은 19세기의 신고전주의 건물로 키에브 러시아제국, 코삭 전쟁용품, 유명한 1851년에 슬로빅어로 처음 쓰여진 오스트로 성경을 전시하고 있다. 키에브에서 100km 동북부에 있으며 버스와 기차가 두 도시를 정기적으로 운행한다.

레저스포츠

크림반도와 카파티안스(Karpathians)는 도보여행, 트레킹, 캠핑하기에 적당한 국립공원들이 산재해 있다. 크림반도의 남서쪽은 도보여행하기 쉬운 동굴 도시인 쿠프트-칼레(Khuft-Kale)와 만훕-칼레(Manhup-Kale)가 있고, 트레킹은 300m의 볼쇼이 캐논(Bolshoy Kanyon), 드주르-드주르(Dzhur-Dzhur), 우찬수(Uchansu) 폭포가 하이라이트 지역이다. 정밀한 지도만 있다면 카파디안스의 어디든 걸어서 여행할 수 있는데 이 지형은 대부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경관이 뛰어나다. 키에브에서 남서쪽으로 500km, 콜로미야(Kolomyya)에서 남서쪽으로 50km 떨어진 카파티아 국립공원이 트레킹하기에 적합하다. 드닙로(Dnipro)를 따라 키에브에서 오데라로 가는 보트 여행은 쉬면서 재미있게 우크라이나를 여행하는 방법이다.

우크라이나로 가는 길

키에브는 유럽의 주요도시와 북미 도시로부터 연결이 된다. 대부분의 국제 노선은 보잘것  없는 키에브의 보리스필 국제공항으로 운행되는데 도심에서 40km 외각에 공항이 위치한다. 르비브 공항은 도심에서 8km 떨어져 있으며 바르샤바, 프라그,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런던과 시카고로 국제선이 취항한다. 오데사 공항은 베니스와 모스크바로 가는 국제선이 있다. 국제 기차는 7개의 국가로부터 10개의 도시로 운행되는데 비자를 입국 전에 획득했다면 육로 입국에 지장이 없다. 우크라이나의 중요도시는 모스크바 행 국제 기차가 매일 운행되는데 키에브에 15시간, 르비브에서 28시간이 소요된며, 키에브에서 브레스트(10시간)와  바르샤바를 경유해 베를린(26시간)까지 이동이 가능하다. 기차역은 키에브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다.르비브에서 출발하는 국제 기차는 중요 동유럽의 도시와 러시아의 도시를 연결하며 기차역은 서쪽으로 3km 떨어져 있다. 카키브(Kharkiv)에서는 러시아 행 버스가 하루에 두 세 차례 운행되는데 모스크바까지는 20시간이 걸린다. 오데사와 얄타에서는 선박으로 이용해 흑해 연안 도시나 지중해지역의 도시로 여행이 가능한데 하이파(이스라엘), 리마쏠(싸이프러스), 피리우스(그리스), 포트 사이드(이집트) 항로가 있는데 이스탄불 항로가 가장 빈번하고 믿을 만 하다. 또한 오데사에서 다뉴브 강을 따라 동유럽의 강변 항구도시로 이동할 수도 있다. 크림반도의 케르치(Kerch)에서 러시아의 템리육(Temryuk), 아나파(Anapa), 노보로스리스크(Novorosslysk)까지는 차량을 실을 수 있는 선박이 운항되고 있다.우크라이나의 육로 국경 통과는 비자를 입국 전에 취득했으면 입국에 불편은 없으나 국경에서 긴급 비자를 받을 경우 입국이 거부될 경우도 있는데 특히 러시아에서 입국 시는 비자를 미리 취득 하는게 현명하다.

국내 교통편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간을 이동하는데는 버스보다 기차가 유용하다. 자주 운행되고 싸며 밤 여행에 편리하다. 그리니아를 절약하고 지체되는 시간을 상관치 않는다면 버스도 유용한데 특히 기차가 다니지 않는 소도시를 이동하는데 편리하다. 버스는 항상 지저분하고 복잡하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힘든 여행은 현지인을 만나는 것 이외에는 장점이 없다.  기름의 공급이 원할치 않고 부품 구하기가 어렵고 도로사정이 나빠 우크라이나에서 운전하는 건 권할만한 일이 아니다. 키에브의 고급호텔과 대도시에 렌트카 회사가 있는데 국제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운전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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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유랑1 | 작성시간 19.12.31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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