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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

작성자소피스틘|작성시간19.09.24|조회수106 목록 댓글 0

장 도미니크 앵그르, [오시언의 꿈]The Dream of Ossian,
1813, 앵그르 미술관, 몽토방

아일랜드의 전설적 영웅 오시언은19세기 초 낭만파 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앵그르는 로마의 키리나레 궁전의 천정화를 주문받았을 때 이 작품을 제작했다. 이방은 나폴레옹의 침실로 사용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1814년 나폴레옹 실각 후 앵그르는 이 천정화를 다시 매입해서 수정했으며, 후에 고향 몽토방에 기증했다. 악기에 기대서 잠든 노시인의 머리 위에는 그가 꿈꾸는 서사시의 한 장면이 마치 얼음에 갇힌 세계처럼 모노크롬으로 그려져 있다. 고전파 화가로서는 드문 시적 표현의 작품이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고지방에 살았으며 그의 부친인 영웅 핀(핀골이라고도 함)이나 크프린을 노래한 시를 썼다고 전한다. 호메로스나 영역 성서를 연상시키는 격조 높고 낭만적인 서사시에 속한다. 오시안이라는 이름은 1765년 영국 시인 J. 맥퍼슨이 그의 시를 수집하여 영역본(英譯本) 《고지방수집 고대시가 단장(古詩歌 斷章)》(1760) 《핑갈 Fingal》(1762) 《테모라 Temora》(1763) 등 3권을 발표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관하여 S.존슨은 맥퍼슨의 자작시라고 단정하는 등 논의가 많았으나 오늘날에는 맥퍼슨이 옛 자료에 의하여 저작하였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대부분은 그의 창작이라고 보고 있다. 이들 시는 우울한 낭만적 정서를 담고 있으며 18세기 후반의 풍조에 영입되어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였다. 독일의 헤르더, 괴테, 실러, 영국의 워즈워스, 프랑스의 샤토브리앙 등 낭만파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8세기의 유럽은 오로지 프랑스의 영향만 받은 것처럼 보인다. 루이 14세의 군주정치는 소모적이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겨우 승리를 거두고 빠져나왔다. 프랑스의 적대국가들이 건축 양식의 모델을 찾으려고 온 곳은 베르사유 궁전이었고,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가 필요로 하게 될 사람은 프랑스의 작가들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막강한 프랑스의 영향력에 대해 균형을 잡은 국가가 있었으니, 이는 바로 영국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영향이라는 것은 철학사상과 법 해석, '사상의 자유'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이 시기에 볼테르는 세익스피어를 파리의 연극계에 소개하고자  했다.  1770년경에는 커다란 변화가 점차적으로 나타났는데, 미술이 먼저 그 징후를 보여주게 된다.

역사가들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발견과 탐사(1750년)글 신고전주의 출현의 기준점으로 삼는다.  '신고전주의'간 다소 애매한 용어이다.  발전하는 상업과 무역으로 예술의 대상이 다양해지고 잡다하게 뒤섞인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 훨씬 나중에(1880년) 만들어진 표현으로, 이는 이전 르브룅의 미학 강령으로 되돌아간다기보다는, 그리스 로마의 고대 유적과 직접적으로 혹은 상상으로 접촉하는 것과 관계가 있었?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

폼페이와 함께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에 묻힌 마을. 10여 헥타르에 5000명의 인구가 있었다. 18~20세기에 발굴되어 거주지와 물품들이 완벽하게 보존된 채 빛을 보게 되었다.
또한1725년 무렵 이후로는 전 유럽대륙을 일주하면서 미술품을 거래하는 상인들이 나타나게 된다. 가령, 프랑스와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어느 젊고 부유한 영국인이 처음에는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여행을 계획했지만, 미술품을 '생산하는' 국가들을 오가며 나중에는 영국과의 미교역에 관계하는 상인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다. 프랑스의 파리가 창조의  중심지라면, 이탈리아의 로마는 국제적인 변화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쇠퇴해 가는 베네치아와 국제적인 변화의 도시 로마로 분할되어 있었다.


에드워드 힉스 Edward Hicks, [코넬농장]The Cornell Farm, 1832년경
윌리암 크라이슬러 가르비치 기증, 워싱턴 국립미술관

청교도주의의 대표자인 힉스는 개척자들의 '신세계'와 유사한 '지상의 천국'이라는 주제로 자주 다시 돌아온다.  그림의 조명을 보면 그 시대의 미국의 풍경화가들과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화가는 고전화풍을 애호하는 의고작가로 남아 있으면서(섬세한 묘사와 '건설자 아버지들'에게 호소하는 연출을 통해 알 수 있다.) 20세기에 공식적으로 재등장하기까지 '소박화파'조류에 영향을 주게된다.

거의 모든 유럽 건축 양식의 유행을 주도하고 있던 프랑스 건축은, 이즈음 고대 양식과 다시 만나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팔라디오 양식으로 소(小)트리아농 정원을 제작한다(1768년 완공). 조각에서는 비엔나 궁정과 주변 도시로 대표되는 '로코코식' 장식이 사라져가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대가들은 고전적인 범주에 머물지 않고 새롭게 개성적으로 표현하며 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첫 번째 조각가인 팔코네(1716~1791년)는 '생생하고 활기차며 정열적인' 조각을 원했고, 디드로의 찬사를 받는다.(<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 1778년 완성). 우동(1741~1828년)은 프랑스 르네상스의 은혜를 입었지만(<다이아나>, 루브르 박물관) 동시대인들로부터 '이상(理想)이 부족하다'는 비난은 면치 못했는네,  원기왕성한 인물 조각가였던 그는 미국으로 가서 <워싱턴상>으로 워싱턴을 불멸의 인물로 만든다.  여기에는 그의 스승이라 할 피갈(1714~1785년)의 영향도 있었는데, 피갈 역시 1776년 알몸 위에 침실 가운을 걸친 볼테르를 조각하여 대중을 자극했었다.
하지만 건축 분야, 그리고 장식조각 분야에서는I6세기 베네치아식 별장에서부터 영국의 전원 별장에 이르기까지 [팔라디오 양식]이 부활하게 된다. 단순하고 편안하며 공간을 존중하는 이 양식이 프랑스로, 특히 남서부의 아키텐 지방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신대륙에까지 미치게 된다

The Death of General Warren at the Battle of Bunker Hill
존 트럼벌John Trumbull,(American, 1756-1843),
[1775년 6월 17일의 벙커힐 전투 와렌 장군의 죽음]
The Death of General Warren at the Battle of Bunker Hill on 17 June 1775, 1786년,
예일대 미술관, 뉴헤이번

벤저민 웨스트의제자인 트럼벌은 유럽 신고전주의화가들 가운데 독립전쟁의 혁혁한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공식적인 주문을 받은 첫 세대 미국 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아카데믹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그로(Gros)를 예고하는 열정을 담고 있다.

[팔라디오 양식]

1715년경부터 18세기 말엽까지 지속된 영국 건축 양식. 이탈리아의 건축가 팔라디오와 영국의 건축가 이니고 존스의 사상에 내재한 순수함을 되찾아, 바로크의 인위적 감각적요소를 지적 ·고전적 자연스러움으로 바꾸려 했다

북아메리카 : 식민지 양식

1770년부터 북아메리카에서는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역시 네오 팔라디오양식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건축이. 영국이나 네덜란드로부터 이민 온 식민지 개척자들의 건축을 대체하게 되었다. 소위 '식민지 양식' 혹은 '버지니아 양식' 이라고 불리는 이 최초의 양식은 무엇보다도 매우 간결한 것이 특징으로, 목재와 흰색의 페인트가 이 양식의 가볍고도 차분한 특징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독립선언 이후, 특히 1812년 영미전쟁 이후에 공공건물은 거의 모두 고전주의식으로 지어진다. (개인 건물은 더 오랫동안 버지니아양식을 고수하게 된다). 그것은 민주주의 정신이 고대 그리스에 대한 기억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때 목재 대신 석재가 사용되었다. (워싱턴 국회의사당 건축, 1793년) . 미합중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은 리치먼드 의사당의 도면을 그렸고, 나중에는 이를 확대하여 자신의 유럽에서의 추억이 담긴 샬러츠빌 대학을 설계했다.

회화 분야는 식민지인들이 오랫동안 지녀왔던 청교도적인 엄격함 때문에 간결한 가족 초상화로 제한되어 있었다. 독립 이전에 영국이나 파리의 아틀리에를 빈번히 출입하던 몇몇 예술가플은 초상화(코플리)와 역사화(벤저민 웨스트의 명성은 상당했다)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식민지의 신비롭고 순진한 전통은 이어지고 있었다.(힉스)


토마스 제퍼슨, [몬티첼로],
1796년, 샬러츠빌, 버지니아

미국 독립선언문의 아버지인 제퍼슨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에 대사로서 프랑스에 거주하며 프로방스 지방을 여행하였던 경험을 활용하였다. 때문에 다양한 로마식 건축물 (님의 카레 저택)이 장엄하고 정감어린 그의 건축물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이곳은 그 자신의 별장이다)

신고전주의의 유럽 학대

오로지 '아름다운 이상'만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는 1760년경, 자칭 이론가이자 고고학자인 빙켈만과 화가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이론가인 멩스에 의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독일인이었고 고대 로마에 대한 동경을 공유하고 있었다. 빙켈만의 영향이 멩스보다 크다면, 멩스는 미술가에게 '프로그램' 을 부과하고자 했던 반면 빙켈만은 고대 미술에서 발견한 점을 보다 깊이 분석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빙켈만은 좀더 다른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요청을 받아 마드리드로 간 멩스는,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위대한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가 일할 의욕을 잃게 하였다(1762~1767년).

리차드 윌슨 Richard Wilson, [낸틸 호수 Llyn Nantlle에서 바라본 소노우돈 산]
'Snowdon from Llyn Nantlle, 1765', 캐슬박물관, 노팅엄

윌슨은 푸생의 영향과 살바토레 로사의 영향을 받아 적절히 조화시킨 덕에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풍경화가가 되었다. 그의 투명한 제작과정과 신중한 장소 선택은 여전히 고전적이지만 역사적이거나 장식적인 요소가 없는 야생의 자연에 대한 취향은 전낭만주의의 그것에 다름아니다.

티에폴로의 아들이자 조수였으며, 아버지만큼이나 신고전주의에 무지했던 지안도메니코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몰락을 지켜보게 된다.  그는 이 마지막 석호(潟湖) 축제(베네치아의 축제들-역주)를 어떤 때는 풍자적으로, 어떤 때는 우수어린 분위기로 그려 내었다. 그럼에도 티에폴로 부자의 이 섬세한 예술보다는, 카날레토와 특히 과르디의 작품처럼 시간이 멈추어 버린 요정 세계에서 현실을 환기시키는 [베두타 예술]이 후대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베네치아는 쇠락해 가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로마와 더불어 당시 이탈리아 미술의 중요한 상업적 중심지였던 것이다. 프란체스코 추카렐리 (1702~1778년)는 카날레토나 과르디의 고객이기도 했던 어느 영국인을 위하여, 신고전주의적인 전원 풍경과 부세의 기억을 결합하기도했다.

[베두타 예술(Veduta)]:
원래 '보여진 것, 경치' 라는 뜻. 18 세기 베네치아파 화가들이 베네치아의 경관을  원근법적 구성아래 진짜 풍경처럼 즉물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말한다

프랑스의 신고진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유럽의 다른 신고전주의의 움직임에 저항하는 최전선이라고 말할수 있다. 회화분야에서 이 움직임을 주도했던 화가로는 비앵 (1716~1809년)을 들 수 있지만, 그는 이론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1780년경 정점에 달한 신고전주의는, 영국보다는 오히려 프랑스에서 신고전주의와 모순되는 다른 경향들과 결합되기에 이르며, 이들 경향은 전낭만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묶여진다.  따라서 이때의 흐름을 잘 살펴보려면 혁명 미술과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미술, 왕정복고하의 낭만주의 미술, 특히 회화는 서로 얽혀진 신고전주의와 전낭만주의라는 두 움직임을 성찰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전낭만주의의 발생

예술 창작이 변화하게 되고, 점차로 대중이 이 변화된 예술을 수용하게된 것은 세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국가의 고대유적 재평가작업이 미친 영향이다. 국가의 고대 유적이나 유물의 재평가작업은 프랑스에서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영국과 독일에서는 주로 문학 분야에서만 이루어졌다.
두 번째는 소설 문학의 영향이다. 나이가 고작 100살밖에 안 된 문학 장르인 소설이 회화적 영감의 원천으로서 고상한 시(서사시)와 겨루고, 심지어는 연극과도 거루게 되었다. 회화 자체도 분위기가 소설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세 번째는 자연으로의 회귀에 따른 영향이다. 루소의 영향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의 영향력은 그에
장 자크 프랑수아 르 바르비에 <철학자와 교육.(장자크 루소의 오페라,마을의 점장이>를 위한 판화),1783 국립도서관, 파리

[에밀]과 [사회계약론]의 저자 루소는 또한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한 예언자이기도 했다. 그는 저서에서 모순되는 당대의 거의 모든 열망을 요약하고 있는데, 그 열망은 이미 그의 죽음과 동시에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전혀 읽어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그의 명성이 이 판화에 잘 형상화되어 있다. 루소 자신은 오른쪽에 나타나 있고 시골 풍경 속에서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축제를 이끌고 있다.중앙의 그리스 사원은 '신성'이 존재함을 은근히 상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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