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미술관 박물관 산책

[스크랩] 다비드는 고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작성자세팅|작성시간19.10.04|조회수115 목록 댓글 1

다비드는 고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다비드가 로마에서 그린 첫 유화는 가로로 긴 캔버스에 그린 <파트로클로스의 장례식>52이다. 『일리아드』에서 주제를 구한 작품으로 로마 시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아 그의 초기 양식(신고전주의 이전의 로코코풍)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는 이 작품을 평가받기 위해 1779년 4월 파리의 아카데미로 보냈다. 심사위원들은 다비드의 명암효과는 구성을 명료하게 하는 데 적절한 방법이지만 명암을 좀 더 정교하게 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공간적인 모호함을 지적하면서 심오한 관망에 대한 공부가 더욱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평가가 있었지만 이 작품에서 다비드의 재능을 엿보기에는 충분하다.

 

 

54

 

 

55

 

 

56

 

이후 다비드는 17세기 대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강렬한 힘을 느끼게 하는 카라바조의 구성과 푸생의 정확한 관망과 이성적 내용을 보고 자신의 화법에 변화가 필요함을 깨달았다.53, 54 남자누드55, 56를 그리면서 명암에 의한 인물의 중량과 밀도의 변화를 알게 되자 자연히 모델을 면밀히 관찰하게 되었다. 그는 윤곽이 가장자리의 선인 동시에 부피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런 깨달음은 아카데미에 함께 기숙하던 조각가 장 밥티스트 지로로부터 얻은 것이다. 지로는 다비드에게 고대 미술품이 아카데미 드로잉 매너리즘의 근본임을 가르쳐주었고 라마리는 외곽선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57

 

다비드가 새로운 양식으로 보여준 드로잉 기교는 1778~80년 고대 그리스의 프리즈57 형식을 취한 이야기 전개식 파노라마 드로잉 <영웅의 장례식>58에서 잘 나타났다. 그는 로마 석관의 릴리프 형식으로 드로잉했는데 석관은 로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오브제였다. 그는 석관에서 볼 수 없는 인물의 정교한 제스처와 파토스 그리고 강렬한 감정의 표현에 역점을 두었다. 드로잉 형식이나 기법, 그리고 길이가 동일한 것으로 봐서 한 작품으로 그리려 했던 것 같다.

 

1779년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에 나폴리를 여행한 다비드는 고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여행 전이나 이후 그의 작품에 현저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비엥은 1779년 8월 파리에 있는 당지비에 백작에게 보낸 편지에 “다비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최선을 다해 진정시키려고 하지만 그의 우울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프랑스로 돌아가라고 권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적었다. 이 시기에 다비드에게는 여자와의 스캔들이 있었고 비엥 부인의 하녀와의 추문도 무성했다. 그러나 여자 문제는 곧 극복되었고 9월 말 건강을 회복한 그는 유학을 한 해 더 연장해줄 것을 청한 후 로마에 남기로 했다.

 

비엥은 다비드에게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마르세유에 있는 라자렛 예배당의 제단화를 그릴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었다. 제단화의 주제는 <역병을 물리쳐달라고 성모에게 간청하는 성 로츠>59였다. 1720년 마르세유에 역병이 퍼졌을 때 14세기 역병으로 세상을 떠난 성 로츠가 나타나 성모에게 역병을 물리쳐줄 것을 간구했다는 전설에서 구한 주제였다. 다비드는 제단화를 완성할 때까지 아틀리에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61

 

다비드는 전통 종교화의 구성을 따르면서 상단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를, 하단에는 역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천국과 지상 사이에 중재자 성 로츠가 있도록 구성했다. 몇몇 화가들의 종교화를 참조하면서 특히 푸생의 <성 야고보에게 나타난 성모>61를 참고했다.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로마에 거주하던 이탈리아의 노화가 폼페오 바토니가 다비드에게 말했다.

 

내가 이 도시에 거주한 지 50년이 넘었고 각 나라에서 온 화가들을 만나보았다. 그들의 작품을 봐서 알고 있지만 어느 한 점도 너의 것만큼 훌륭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2년 동안이나 소장하다 마르세유로 보냈는데 당지비에는 이 작품이 파리의 로열 콜렉션이 되지 못한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마르세유 시는 작품에 대단히 만족하면서 다비드에게 계약금 외에 350리브라를 더 주었다. 제단화에 대한 칭찬으로 다비드는 유명해졌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다. 폴란드의 귀족 스타니슬라스 포톡키 백작이 소문을 듣고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했다. 다비드는 그의 초상화를 로마에서 그리기 시작했지만 파리로 돌아와서 완성시켰다.62 다비드는 바로크의 유명한 초상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의 <말을 탄 사보이의 왕자 토마스>63를 참조해 거의 같은 스케일로 그리면서 밝고 생기 있는 색을 사용했다. 이런 요소들은 과거 작품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들로 그의 양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과거에 그린 초상화들에서는 가장 밝은 부분이 흩어진 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대각선 명암의 효과로 포톡키의 왼쪽이 밝게 드러났으며 말 다리의 어두운 부분은 극적인 장면으로 보여진다. 폴란드의 고귀한 귀족 출신의 백작 포톡키는 아내가 가져온 신부지참금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미술품을 수집하게 되었고 이탈리아로 여행도 했으며 다비드에게 많은 돈을 주고 초상화를 의뢰할 수 있었다. 학자이기도 한 그는 빙켈만의 저서를 번역했으며 그의 별명은 ‘폴란드의 빙켈만’이었다. 포톡키의 모습이 너무 온화하고 덤덤하게 보여 그의 아주머니 코사코우스카는 좀더 포톡키를 닮게 그리라고 요구했지만 다비드는 원화를 보존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제작년대를 하단 왼쪽 가장자리 달마티안 개의 목걸이에 적어넣었다. 그림값으로 포톡키로부터 받은 돈은 3,500~5,000리브라 사이였다.

 

로마에서 다비드의 양식에 변화가 생긴 것은 무엇보다도 로코코 양식을 완전히 버리고 좀더 극적이면서 사실주의적인 묘사에 충실한 데 있으며, 대가들의 구성과 기교를 두루 관찰하면서 전통을 따르려고 한 것도 요인이었다. 그는 고대 작품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차분하고 조화로운 고대와 르네상스의 전통을 비판 없이 따르기보다는, 17세기의 수사적 양식의 범위 안에서 선호했다. 그가 고대 세계에 대해 갖고 있었던 이미지는 활력 있고 힘이 솟아나는 다이나미즘이었다. 그는 훗날 1808년 라파엘로의 작품을 보고 매우 감동했으며 그의 작품을 통해 고대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다고 술회하면서 3백여 년 전의 대가 라파엘로의 제자라도 된 듯한 태도로 그로부터 배움을 구하려고 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그의 작품에서 라파엘로의 영향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성 로츠>59와 포톡키의 초상화가 성공을 거두자 서른두 살의 다비드는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로마에 한 해 더 체류할 수 있는 선택을 마다하고 파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비엥과 궁정 책임자 당지비에 백작이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파리 화단에서의 입지를 마련하는데 자신이 있었다. 파리로 돌아가면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궁정 화가로서 의뢰를 받아 작업하는 꿈이 속히 실현될 것만 같았다.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7인의문화읽기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나이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10.04 감사합니다 천천히 즐길게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