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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고전주의 미술과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작성자디아니|작성시간20.07.17|조회수203 목록 댓글 0

신고전주의 미술과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그림73-1)<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The Oath of Horatii. 1784.

18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감성적인 환상의 미술에 반기를 들고 옛 고전주의 양식을 선호하는 신고전주의Neo-Classcism 미술이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1748~1825)에 의해서 태동되었다. 신고전주의 미술은 여성적인 로코코 양식을 배제하고 영웅심과 용기를 찬양하는 남성적인 양식을 지향했다. 감정 대신에 사상을, 사치스런 여성 대신 강하고 애국적인 남성 주인공을 역사에서 선택했다. 그래서 18세기 말q1는 엄격한 윤리적 미덕과 시민적 헌신, 영웅주의, 자기희생 정신이 감수성 시대의 로맨스와우유부단, 부드러운 정감을 대치했다.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그림73-1)는 18세기 말 고전미술의 복고 운동과 정치적 시대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주제는플루타르크 전기에 나오는 애국심과 사랑의 갈등이 담긴 로마사 중의 한 에피소드다 고대 로마와 이웃의 알바 군대는 싸움을 해야 할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군대 전체가 전투를 하는 대신 양쪽에시 세 대표를 선정해 승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로마의 대표로는 호라티우스의 삼형제가 뽑혀 알바의 대표인 쿠라티어스 가의 세 아들과 대결했다. 문제는 호라티우스 가의 여동챙 카밀라가 쿠라티어스 가의 한 아들과 약혼해 시집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림에서는 호라티우스의 세 형제가 한동아리가 되어 칼을 들고 있는 아버지에게 팔을 들어 엄숙하게 선서하고 있다. 아버지 뒤에서는 검정 옷을 입은 큰며느리가 두 아이들을 달래고, 둘째 며느리는 실의에 빠져 기절한 듯 축 늘어져 있다. 그 옆의 소매 없는 흰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약혼한 카밀라다. 그녀는 머리를 의자에 댄 채 팔을 늘어뜨리고 슬퍼하고 있다.

전쟁에서 호라티우스 가의 형제들이 쿠라티어스 가의 삼형제를 죽이고 개선했다. 오빠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카밀라가 자신의 남편 될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항의를 하자 큰오빠는 여동생 카밀라를 죽여버렸다. 또한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죽인 아들을 칭찬했다. 나라를 위해서는 형제마저도 희생한다는 이 비극적인 로마의 설화는 코르네유Pierre Cormeille가 각색하여 수년전에 파리에서 공연되었기 때문에 다비드는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림 73-2)[사비니 여인의 강탈]The Rape of the Sabine Women,1634-35

 

[사비니 여인의 강탈]The Rape of the Sabine Women,1637-38

그가 호라티우스의 삼형제의 맹세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로 결정한 얼마 후에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1594-1655)의 그림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1636>(그림73-2)를 보게 되었다. 다비드는 푸생의 고전건축을 배경으로한 박력있는 납치장면에도 감명을 받았다. 신전 계단에서 로마인들에게 납치의 신호를 하는 총 지휘자 로무로스의 인물묘사에 큰 매력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푸생의 그림과 경쟁할 수있는 <사비니 군의 공격에 뛰어든 여인들>(그림 73-3)을 그렸다. 다비드의호라티우스는 푸생의 로무로스를 모방 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팔의 제스처는 바꾸었지만 내디딘 두 다리와 붉은 토가(로마인의 복장은 거의 그대로 모방된 것이다.

(그림 73-3)[사비니 여인들]The Sabine Women. 1799

사비니의 여인들의 납치는 리비Llvy, 프르타르크Plutarch, 오비드Ovid에 나오는 이야기로 로마 초창기에 인구성장을 위해 축제에 초대된 사비니 처녀들만 로마인들이 납치하고 남자들은 국외로 추방했다. 3년후에 사비니의 남성들은 보복공격을 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의 아내가 된 여인들은 다비드의 <사비니군의 공격에 뛰어든 여인들>(그림 73-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편과 친정아버지와 오빠들 사이에 자기 자식들을 던지며 전쟁을 막아 평화를 이끌었다는 이야기이다.

용맹스럽고 결단에 찬 호라티우스가의 세 아들과 아버지는 로마 양식의 건물인 반원의 아치형 기등 앞에 서서 자랑스럽게 맹세한다. 한편 뒤쪽에 있는 아치형 안에는 맥이 빠지고 축 늘어져 우는 여인들이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인물로, 남자들과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느 여교수는원전에 여성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도 다비드는 여자들을 약한 자로 해석했다고 불평했다.

다비드는 남성들에게만 결투를 암시하는 붉은 빛의 강한 색을 쓰고, 골격과 근육에 힘을 주었다. 한편 여인들은 긴 옷에 창백한살결의 아름다움만을 강조했다.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열광적인 인기를 얻으며 미술뿐만 아니라 정치판도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그의 그림은 자기 희생과 명예로운 애국심을 고취하는 대신 폭력과 무정부 상태를 야기시키고 혁명을 자극한 선전예술이 되었다. 다비드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그린 후 채 10년이 못 되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그림을 주문한 왕과 왕비는 단두대에서 이슬처럼 죽어갔다. 그로부터 프랑스는 걷잡을수 없는 공포와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었다.

(그림73-4)[마라의 죽음]Jacques-Louis David. Death of Marat. Oil on canvas. 1793.

다비드의 혁명동지였던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는 피부병 때문에 목욕탕에서 안정을 취하다 샤를로트 코르테라는 여인에게 살해당했다. 그래서 다비드는 친구의 갑작스런 피살을 그의 그림 <마라의 죽음>(그림73-4)에서 추도했다. 마라는 나무상자 같은 궤짝에 잉크병을 놓고 집필하다 쓰러진 순교자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넘어진 마라의 시체와 침울하고 차게 느껴지는 벽은 몸서리쳐지는 살인의 비극성을 폭로한다. 그의 한손에는 면회를 요청할 때 샤를로트 코르테가 가지고 온 피 묻은 청원서가 아직도 들려 있고, 다른 손에는 깃펜이 쥐여진 채 마라는 가슴을 난자당해 피를 흘리며 죽어 있다. 목욕탕 바닥에는 상아의 칼이 피 묻은 채 놓여 있다. 그는 목욕 중에도 혁명과업을 완수하려다가 죽은 열사처럼 모사되어 있다. 투명한 잉크병이 놓인 낡은 궤짝에는 마치 비문처럼 마라에게 다비드가 바친다.A MARAT,DAVID'라는 글이 쓸쓸하게 씌어 있다. 다비드는 마라를 예수와 같은 순교자로 묘사했다. 그의 목욕탕은 아무 것도 없는 청렴한 애국자를 나타내듯 장식이 없이 그려졌다. 그는 마라의 팔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라파엘로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에서 보이는 늘어진 예수의 팔처럼 그렸다. 또한 순교자 마라의 손과 가슴에는 상처 자국이 있으며. 머리에 감은 흰 수건과 담요 외에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다비드는 후에 나폴레옹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나폴레옹이 교황의 손에서 금관을 받아들고 그의 부인 조제핀의 머리에 스스로 대관하는 찬란한 결혼식 그림을 볼 수 있다. 불행히도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벨기에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이국 땅에서 외롭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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