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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말러의 아내...... `코코슈카와 알마 말러`

작성자루시|작성시간20.08.13|조회수338 목록 댓글 0

말러의 아내...... '코코슈카와 알마 말러'

코코슈카는 오랫동안 알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심지어 알마와 똑같은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알마처럼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디자이너에게서 구입한

드레스를 입히기도 하고, 마차에 태워 함게 산책도 하고,

늘 침대에 두고 같이 잤다고 한다.

자신의 그림처럼 적나라하리만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격렬히 사랑했던 코코슈카에게는

알마를 잊는 데도 그만큼이나 격렬한 과정이 필요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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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skar Kokoschka, Knight Errant, 1915, Oil on canvas, 35 1/4 x 70 7/8 inches.

Solomon R. Guggenheim Museum. 48.1172 x380>

 

세계대전과 대량학살로 서두를 장식한 20세기. 젊은 예술가들에게 이 혼동의 시기는 폭풍 같은 광기였다. 와해되어가는 시대의 모순에 직면한 그들은 온몸으로 혼돈의 세계를 과감하게 표현했으며, 새로운 유토피아의 이상과 인간성 회복을 위해 발버둥쳤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1910~25년 사이에 당시 세계의 정치적 사회적 위기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탄생한 사조가 표현주의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표현주의는 ‘비이성’ ‘반전통’ ‘반서구’를 외치며 전쟁을 반대하는 폭넓은 정치 및 사회 운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표현주의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이나 가시적인 것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대신 인간의 내면에 있는 가장 모순적이고 가장 폭력적인 것을 발굴하고자 했다.


표현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 이후의 진정한 표현주의자 바로 노스탤지어와 공포, 절망으로 가득 찬 내면세계를 표현해낸 오스카 코코슈카(1863~1980)이다. 가난과 고통, 폭력, 격정 등을 미화하지 않은 표현주의 미술은 여과되지 않은 추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여져 대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비록 표현주의 운동의 기간을 짧았지만 그 영향은 지대해서 제1차 세계대전 후 사회주의 사상이 팽배하던 독일에서는 더욱 이론적으로 체宛?퓸?이후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표현주의 경향은 20세기 초에만 유행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회적 위기나 정신적인 불안감이 팽배할 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항구적인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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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skar Kokoschka, Bride of the Wind, 1914, Öffentliche Kunstsammlung, Basel>

 

자연의 혼돈 속에서

사랑의 빛깔은 핑크빛만은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쟂빛이다. 감당하기 힘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 <바람의 신부>의 두 연인이 휘날리는 천에 뒤엉켜 하늘에 몸을 맡긴 채 누워있다. 표현주의 화가이자 극작가인 오스카 코코슈카에게는 일생동안 그를 사랑의 노예로 얽매어 놓은 치명적인 여인이 있었다. 혁명적인 현대 음악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미망인 알마 말러.


그녀는 남편이자 스승인 말러가 예술적으로 열등감을 느낄 정도로 재능이 있었고, 만나는 남자마다 혼을 빼놓을 정도로 고혹적인 미모를 지닌 인텔리 여성이었다. 유명한 풍경화가 에밀 신들러의 딸로서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그녀에 비하면, 말러는 빈의 유대계 지식인아는 인종적 편견과 이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인해 극심한 의처증을 앓은 광기의 음악가였다. 그는 활달하고 사교적이면서 자신보다 19세나 젊은 아내에게 음악적 재능을 포기시키고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며 그녀를 집안에 가둔다.


1911년 구스타브 말러가 사망 후 감옥 같은 구속에서 해방된 알마는 빈의 사교계에서 일약 여왕으로 떠오른다. 수많은 구애의 손길 중에는 7년 연하의 혈기방장한 화가 코코슈카가 있었고, 이로써 이 두 사람은 비운의 만남을 갖게 된다. 존경하는 스승인 클림트 구스타브와 함께 같은 여성을 사랑하게 된 이 운명의 장난에는, 천재적인 재능과 잠재된 가능성을 알아보는 알마의 탁월한 감식안이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소도시 포슈라른에서 은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빈 공예학교를 다니며 미술과 문학을 함께 공부했다.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극작가로서도 알려졌고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알마와 만난 것은 말러가 사망한 다음해 4월 어느 날이었고, 그날 저녁 이후 그들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런 감정상태에서 그려진 것이 바로 <바람의 신부>이다. 당시 코코슈카가 알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거의 다 완성되어 가오. 번개, 달, 산, 솟구치는 물, 바다를 비춰주는 벵골의 그 불빛, 그 폭풍에 날리는 휘장 끝자리에 서로 손을 잡고 누워 있는 우리의 표정은 힘차고 차분하오. 분위기가 적절히 표현된 얼굴 모습이 내 머리에 구체적으로 떠오르며, 우리의 굳센 맹세의 의미를 다시 절감했소! 자연의 손돈 속에서 한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 그리고 그 신뢰감을 신념으로 수용해서 서로를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감이 잡혔으니, 이제는 몇 군데에 생명감을 불어넣는 시적인 작업만 남았을 뿐이오.


정신분열과 광기라는 점에서 말러와 코코슈카는 많이 닮아 보인다. 알마는 그런 코코슈카에게서 독점욕과 질투심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남편의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코코슈카가 2년 6개월 동안 4백 통의 사랑의 편지를 쓰는 열정으로 구애하지만, 알마는 이를 단호히 뿌리치고 1915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의 안정된 결혼생활을 선택한다.

 

알마가 코코슈카를 배신하기 전에 그려진 <바람의 신부>에서 알마는 코코슈카의 품에서 눈을 감고 자고 있지만, 알마의 손을 꽉 쥔 힘줄 선 그의 두 손을 왠지 불길하다. 그림에서나마 자신의 신부가 된 알마가 곁에 있지만, 온 근육이 뒤틀어진 채 시선을 허공을 맴돈다. 바람만이 알 것이다. 곧 폭풍이라도 몰아치면 그녀는 바람처럼 날아가 사라져버릴 허상임을.

 

코코슈카는 홀로 남겨질 가혹한 파멸을 직감했나보다. 두 사람은 껴안고 있으나, 칼끝으로 후비는 듯한 가학적인 몸짓들이 별리를 예감케 한다. 폭풍이라도 몰아치는 듯 심하게 소용돌이치는 어두운 주변의 공포감은 당시 진행되고 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암울함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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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5 x 125.7 cm), Gift of Mr. and Mrs. Donald Winston>
 

사실 어떤 글보다 그림이 훨씬 많은 것을 전해준다. 코코슈카는 비록 한순간이지만 현실에서 벗어난 세계를 갈망했는지 모른다. 황량한 불안감이 휘젓고 칙칙한 색이 뒤엉킨 거치 하늘의 소용돌이가 그의 심신을 샅샅이 훑어내리고 있다. 실연의 충격을 억누를 수 없었던 코코슈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한다. 하지만 1915년 우크라이나의 카자크에서 머리 총상과 폐를 총검에 찔리는 심한 중상을 입고, 1916년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슈류탄 유탄에 맞아 그 휴유증에 시달리는 채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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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koschka, Oskar, Landscape in Scotland - Findhorn River, 1929, Oil on canvas 
71.3 cm x 91.4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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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된 생활 속에서 자신의 그림 작업의 종말을 깨달은 코코슈카는 1924년 드레스덴의 미술학교 교수직을 버리고 멀리 지중해 남동쪽을 여행한다. <베네치아 도가나 항의 배들>에서 녹색의 교회 돔과 붉은 지붕들로 이어지는 베네치아의 물결은 크고 작은 배들의 갖가지 색으로 충만하다. 왼쪽 고풍스러운 건물의 위엄은 바로 앞 해수에 비친 빛의 파장으로 혼돈스럽게 나가온다. 거친 붓질로 표현된 베네치아 항 풍경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힘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는 코코슈카는 늘 추구한 초자연적인 힘과의 만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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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1/4 x 38 3/8 in.), Museum of Fine Arts, Boston>
 

광기의 폭풍우

열애와 상처만 남긴 사랑이지만, 코코슈카는 오랫동안 알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심지어 알마와 똑같은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알마처럼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디자이너에게서 구입한 드레스를 입히기도 하고, 마차에 태워 함께 산책도 하고, 늘 침대에 두고 같이 잤다고 한다. 나중에는 오페라 공연장에까지 이 인형을 대동하고 나타나기까지 했다니 그 집착의 정도가 짐작된다.


자신의 그림처럼 적나라하리만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격렬히 사랑했던 코코슈카에게는 알마를 잊는 데도 그만큼이나 격렬한 과정이 필요했나보다. 1919년 드레스덴의 미술학교 교수로 임명을 받고 축하 파티를 하던 코코슈카는 황홀한 별빛 아래서 적포도주 병을 휘둘러 알마의 분신과도 같은 인형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이 일로 머리 잘린 시체가 있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고 경찰까지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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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skar Kokoschka, Prague, Nostalgia, 1938, Oil on canvas, 56.00 x 76.00 cm>
 

40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코코슈카의 사랑은 한결같았다. 이미 뮤즈로서는 빛이 바랜 알마의 70세 생일에 코코슈카는 “사랑하는 나의 알마! 당신은 아직도 나의 길들이지 않은 야생동물이오”라고 시작하는 긴 편지를 보낸다. “코코슈카의 가슴은 당신을 용서하기에”라는 추신과 함께. 광기의 폭풍은 그 순간에는 마치 몸이 부서져 죽을 듯 힘들었지만 다행히도 무사히 지나갔고, 코코슈카와 알마는 각자 제자리에서 오래도록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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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의 사진>
 

코코슈카를 그토록 매혹시켰던 알마란 여성은 대체 어떤 인물일까. 일생동안 질병과 죽음의 유혹에 맞서야 했던 그녀의 전 남편 말러의 <교향곡 제5번>에서도 화단의 테러리스트 코코슈카의 분위기와 흡사한 영혼의 꿈틀거림이 느껴지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코코슈카는 90년이 넘는 세월동안 피맺힌 실연의 쓰라림을 안고 병마와 싸우며 살면서 결국 몽상적인 풍경화 같은 표현주의의 걸작을 탄생시켰다. 전쟁의 비인간적이니 잔학성을 고발하는 광기 어린 그의 그림들은 현대 표현주의의 물꼬를 트는 마지막 역할을 다했다.


나치를 피해 프라하로 이주한 뒤부터 코코슈카는 공개적으로 파시즘과 나치 정권에 저항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표현주의 미술가들과 같이 1930년 나치 정권에 의해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혀 독일의 공공박물관에 소장된 그림 417점을 모두 몰수당하는 수난을 겪는다. 그 속에는 대표작 <바람의 신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스카프 클림트, 에곤 실레와 함께 빈의 3대 화가로 꼽히는 코코슈카는 근래에 와서 극찬을 받는 화가임에 틀림없지만 여전히 평가하기 가장 힘든 화가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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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의 사진>
 
“중요한 것은 정신이다. 예술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내면에 비치는 심상을 표출하여 입증하는 일뿐이다.” 주관의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시킨 코코슈카 같은 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만 집착하다보니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되어버리는 위험성 또한 없이 않았다.
 
별다른 이유 없이 코코슈카를 떠난 알마는 그와의 고아적인 사랑이 은은한 달빛이 아니라 그림에서 보이듯 광기로 고통 받는 격렬한 폭풍우임을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 아닐까. 그를 떠난 것이 첫눈에 사랑하게 된 뜨거운 남자 코코슈카에 대한 뮤즈 알마의 배려였다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까.
 
 

                                                                                 정은미의 <아주 특별한 관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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