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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프랑스] 예술과 문화의 도시, 파리 - 오르세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18.03.21|조회수313 목록 댓글 0

 


[프랑스] 예술과 문화의 도시, 파리 - 오르세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흔히들 파리를 예술과 문화의 도시라고 한다. 파리를 그렇게 부르는 가장 큰 이유라 하면 아마도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과 루브르 박물관(Musee du Louvre)을 위시한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댄 브라운의 화제작 다빈치 코드를 너무 감명 깊게 읽었던 터라 오래 전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대해 큰 기대를 안고 있었고 이번 파리 여행길에 있어서 루브르 박물관은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그에 반해서 오르세 미술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큰 기대를 갖지 않았었는데 그 명성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리에서 먼저 찾았던 곳은 오르세 미술관이었다. 개선문에서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까지 갔다가 그 곳에서 센 강 거너편으로 보이는 오르세 미술관을 향해 후와얄 다리(Pont Royal)에 올라섰다. 시원스럽게 펼쳐진 센 강의 왼쪽편으로 오르세 미술관이 위엄있게 서 있었는데 그 유명한 센 강은 탁한 물빛에 낭만과는 좀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워낙 많이 얘기를 들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실망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센 강의 낭만은 밤에나 느낄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오르세 미술관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미술품의 보고로 1939년까지는 오를레앙 철도의 발착점으로 사용되던 아르누보 양식의 오르세 역을 개조하여 1986년에 개관하여 1848~1914년의 회화, 조각, 사진, 공예 등을 2개 층에 분산해서 전시하고 있다. 고흐, 고갱, 마네, 모네, 세잔, 드가, 르느와르 등의 프랑스 출신 인상파 거장들의 주요 작품들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밀레의 만종과 이삭줍기를 바로 이곳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 앞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뮤지엄 패스 소지자는 단체 방문객 입구(B)로 입장할 수 있어서 줄을 서지 않고도 빨리 입장할 수 있었다. 2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주요 작품들은 모두 1층에 전시되고 있었다. 1층 중앙 홀에는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중앙 홀 양쪽으로 늘어선 전시실에 주요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 구조였다.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중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인상파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그림에는 문외한인 나에게도 눈에 익은 그림들이 수두룩하다보니 그림 하나하나가 각별하게 느껴졌으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특히, 사진으로 볼 때는 느낄 수 없었던 붓터치, 질감 등은 거장들의 뛰어난 솜씨를 직접 느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아래의 그림들은 오르세 미술관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 특별히 내 눈에 익었던 작품 일부를 정리해 본 것으로 오르세 미술관 홈페이지(http://www.musee-orsay.fr)에서 발췌하였다.

 

 [고흐, 자화상]

 

[고흐, 아를의 반 고흐 침실] 

 

[고흐, 별이 빛나는 밤] 

 

[고갱, 타히티의 여인들]

 

[드가, 발레 수업] 

 

[르느와르, 갈레트 풍차에서의 춤]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마네, 피리 부는 소년]

 

[밀레, 만종]

 

[밀레, 이삭줍기]

 

1층의 전시실 구조가 특이하여 대부분의 전시실은 하나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통로를 따라 걸으면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반면에 일부 전시실은 통로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중앙 홀에서 따로 찾아 들어가야 하는 곳도 있었는데 이런 구조 때문에 하마터면 밀레의 작품들을 보지 못하고 그냥 나올 뻔했다. 실제로 파리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오르세 미술관에 다녀 오고도 밀레의 작품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아쉬워하던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오르세 미술관을 다 둘러보는데 약 4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주요 작품들이 다 1층에 있다 보니 대부분의 시간을 1층에서 보내다 나오게 되었다.

 

꼼꼼하게 둘러보려면 며칠은 걸린다는 루브르 박물관은 하루를 꼬박 보낼 생각을 단단히 하고 찾아갔다. 지하철을 타고 루브르 박물관 역에서 내려 루브르 박물관으로 이동했는데 루브르 박물관을 상징하는 피라미드 앞에는 입장을 위해 긴 줄이 서 있었다. 다행히 뮤지엄 패스 소지자는 리슐리 외관 건물에 있는 별도 통로를 통해 피라미드 지하로 들어설 수 있어서 줄 서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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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아래 나폴레옹 홀의 모습. 다빈치 코드 때문에 왠지 이곳 바닥을 파면 뭔가가 나올 듯. 


 

나폴레옹 홀에서 올려다 본 피라미드의 모습. 유리 너머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너무나 이뻤다.


 

나폴레옹 홀에 위치한 안내 데스크에서 한글 안내 지도 한 부를 먼저 챙긴 다음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하는 곳에서 6유로를 내고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 받았는데 한글 오디오가 지원되어서 무척 반가웠다. 특이하게도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하면서 신분증을 추가로 맡겨야 했는데, 아마도 오디오 가이드를 반납하지 않고 그냥 가는 사람이 많았었나 보다.

 

주요 작품들이 거의 모여 있다는 드농관으로 입장하여 본격적인 작품 감상을 시작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오르세 미술관과는 달리 사진 촬영이 허용되었는데, 그래서 주요 작품들 앞에는 사진 찍는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럼 루브르가 자랑하는 주요 작품들을 한번 사진으로 만나 보기로 하자.

 

사랑의 신의 키스로 소생된 프시케(일명, 큐피드와 프시케).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가 1793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저승에서 비너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받은 상자 속을 훔쳐본 죄로 죽음의 잠에 빠져버린 프시케를 큐피드가 키스로 깨우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빈사의 노예(Dying Slave). 1513~1515에 걸쳐서 완성된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각상이다. 


 

 

 

반란의 노예(Rebellious Slave). 1513~1515에 걸쳐서 완성된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이 역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반란의 노예(왼쪽)와 빈사의 노예(오른쪽). 


 

보르게세 화병. 기원전 1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정원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마르스와 비너스 상으로 나타낸 황제 부부. 로마 황제 하드리안(Hadrian)과 그의 아내를 형상화한 것으로 서기 120~14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로디테(일명, 밀로의 비너스). 기원전 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820년 에게 해 밀로스 섬의 아프로디테 신전 부근에서 한 농부가 밭갈이를 하던 중 발굴하였다. 루브르가 자랑하는 3대 작품(아프로디테,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날개, 모나리자) 중 하나로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작품이다.


 

 

사자의 몸에 왕의 얼굴을 하고 있는 스핑크스(Sphinx). 기원전 2600년경에 24톤이나 되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집트 외부에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한다.


 

 

싸우는 전사(일명, 보르게세의 검투사). 기원전 100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날개. 기원전 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뱃머리에 내려앉으려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1863년 에게 해의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견되어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날개라는 제목이 붙여졌으며 루브르의 3대 작품 중 하나이다.


 특이하게도 드농관 2층의 계단 옆 공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실제로 나의 경우에도 계단을 지나면서 처음에는 그냥 대수롭지 않은 작품이겠거니 하고 지나쳤다가 나중에 다시 찾아서 보기도 했다.


 

 

 

보티첼리의 프레스코화. 피렌체에 있는 렘미(Lemmi)가 별장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것을 떼어낸 것이라고 한다.


 

 

드농관 2층의 회화 전시실 모습.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다.


 

가나의 결혼식(The wedding feast at Cana). 베로나 출신의 베로네세(Veronese)가 1563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모나리자. 1503~1506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작품으로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 데 조콘다의 아내 엘리자베타 게라르디니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신의 손이 그의 상상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비관하다가 제작에 들어간 지 4년 만에 손을 완전히 떼고 미완인 채로 남겼다고 한다. 루브르의 3대 작품 중 하나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개인적으로는 넓은 벽면을 다 차지할 정도로 큰 그림을 기대하고 갔었는데 홀의 중앙에 외소하게, 그것도 유리벽 안에 전시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적잖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 세례 속에서 사진에 담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큐피드와 프시케(Cupid and Psyche). 피코(Picot)의 1817년 작품이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스스로 황제가 될 것을 주장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기록해 놓은 길이 14m, 높이 8m의 대작으로 로마에서 온 교황 대신에 자신의 손으로 왕관을 쓴 후 부인인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우려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두 점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중 하나는 베르사유 궁전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이곳에 걸려 있다. 


 

아탈라의 매장. 지로데 트리오종의 1808년 작품으로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의 소설 속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복고왕정에 반대하여 일어선 시민들이 3일간의 시가전 끝에 부르봉 왕가를 무너뜨리고 루이 필립을 국왕으로 세운 7월 혁명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고대 로마의 풍경이 그려진 갤러리(Gallery of VIews of Ancient Rome). 1758년에 지오바니 파올로 파니니에 의해서 완성된 작품으로 고대 로마 시대에 지어진 주요 건축물들이 그림 속의 그림에 그려져 있다.


 

근대 로마의 풍경이 그려진 갤러리(Gallery of VIews of Modern Rome). 이 작품 역시 지오바니 파올로 파니니에 의해서 1759년에 완성되었으며 근대 로마 시대의 주요 건축물들이 그림 속의 그림에 그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풍경이 그려진 갤러리'와 함께 나란히 벽에 걸려 있어서 다른 그림 찾기를 하듯이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한 그림이다.


 

초원의 성모. 성모화를 가장 아름답게 그리기로 이름난 라파엘로의 대표작으로 1508년에 완성되었다. 


 

자화상. 1660년에 완성한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작가의 노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목욕하는 밧세바(Bathsheba at Her Bath). 렘브란트가 1654년에 완성하였으며 구약 성서에 나오는 다윗의 부인이자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구성한 작품이다.



 

도살된 소. 렘브란트의 1655년 작품으로 파격적인 소재가 눈길을 끈다.


 

자화상. 알브레히트 뒤러의 1493년 작품이다. 


 

가브리엘 데스테와 그녀의 자매들 중 하나. 1595년 작품으로 앙리 4세의 정부 가브리엘 데스테(오른쪽)와 그 여동생인 빌라르 공작 부인(왼쪽)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유방을 만지고 있는 모습은 임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가브리엘이 왕의 아이를 가졌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드농관 반지하층에서 시작한 루브르 박물관 관람은 리슐리외관 3층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작품들(오디오 가이드용 번호가 붙어 있는)은 빠짐없이 둘러보려고 노력한 결과 대략 5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엄청난 규모와 약간은 복잡한 구조로 인해 많이 걸어야 했고 때로는 길을 찾아 헤매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체력이 소진되어 몸을 움직이는 것이 귀찮을 정도였다. 그래도 가슴 한편은 정신적인 포만감으로 가득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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