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미술관 박물관 산책

[스크랩] 알폰스 무하

작성자pepemint|작성시간18.05.17|조회수261 목록 댓글 1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알폰스 무하

고국 체코에서 알폰스 마리아 무하(Alfons Maria Mucha)로 알려져 있는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는 1860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받던 슬라브 지역 중 하나였던 모라비아의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이반치체에서 7월 24일에 출생하였다. 그는 온드르제이(Ondřej) 무하의 여섯 명의 자녀 중 넷째였다. 아버지 온드르제이는 이반치체의 지방법원에서 안내원으로 일했으며 그의 대가족은 마을의 수감소로 사용하고 있던 오래된 석조건물에 살았다.




1

2

1878년 알폰스 무하 가족(뒤쪽 맨 오른쪽 남자가 알폰스 무하)

1875년경 이반치체의 무하생가


무하는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미술에 대한 열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무하가 기어 다니면서도 마루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무하의 목둘레에 연필을 묶어 주곤 했다고 한다. 현재 그의 초기작은 극소수만이 남아있는데 무하가 8세에 그린 예수의 십자가(Crucifixion) 작품은 가족 소장품으로 보존되고 있다. 무하의 초기 디자인은 어린 무하가 이반치체의 어느 교회의 좌석 위에 자신의 이름 이니셜의 모노그램을 새긴 데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무하는 매우 종교적인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 아멜리에(온드르제이의 두 번째 부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어린 무하는 수 년간 마을의 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였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알토 목소리를 지녔으며 실제로도 뛰어난 노래 실력 덕분에 모라비아의 수도인 브르노에 위치한 명망 높은 성 베드로 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성당과 성당의 예술-건축, 프레스코화, 조각과 장신구-는 무하에게 지속적으로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훗날 무하는 “나에게 성당과 회화 그리고 음악의 개념은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성당의 음악 때문에 성당을 좋아하는 것인지, 성당이 내포하는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라고 언급했다.


데생 중인 알폰스 무하


한편으로는 당시의 격렬한 정치적인 분위기는 10대인 무하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1860~1870년대 동안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로 인해 거의 근절될 뻔했던 체코어와 고유문화 그리고 국가 정체성을 다시 재건하는 민족부흥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특히 16세기부터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체코 지역(모라비아, 보헤미아와 실레지아)에서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독립을 위한 투쟁이 19세기 말 다시금 격렬하게 일어났다.

브르노에서 유학 중이던 무하는 비엔나(Vienna)의 영향에 반대하는 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모라비아의 전통 미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후 고향 이반치체로 돌아온 17세의 소년 무하는 지방 법원에서 서기로 일하는 동시에 예술적 재능을 살려 전단지 디자인 및 정치적 회동을 하는 회관의 장식 등의 수많은 애국 활동에 가담하였다.

무하가 브르노에서 거주하는 동안 그의 드로잉 선생님이었던 모라비아인 화가 조세프 젤라니(Josef Zelany, 1824-1886)의 조언에 따라 무하는 1878년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in Prague)에 입학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무하는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으며 학교 측으로부터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충고를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1년 후 비엔나의 무대미술회사인 카우츠키 브리오시 뷔르가르트(Kautsky-Brioschi-Burghard)에서 젊은 화가를 모집하고 있다는 신문 광고가 새로운 기회가 되는데 이 광고를 본 무하는 곧바로 지원하였고 채용되어 19세의 나이에 무대미술 분야의 견습생으로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비엔나(Vienna)와 미크로브(Mikulov)


1881년 링 극장의 화재


무하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비엔나에서 2년 남짓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높은 수준의 문화와 음악의 중심지로서 비엔나는 무하에게 아름다운 교회들과 박물관, 미술관 그리고 콘서트홀 등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회사 측에서 제공한 무료입장권들로 연극을 자주 관람할 수 있었다. 여가 시간에는 미술의 최신 흐름을 다루는 야간 수업을 수강하였는데, 당시 비엔나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한스 마카르트 (Hans Makart, 1840-1884)의 스타일을 공부하였다. 또한 그는 빌린 카메라로 사진 촬영을 하며 시각 표현에서의 가장 최신의 매체를 실험해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첫 도시 생활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1881년 12월에 회사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었던 링 극장의 화재로 실직을 하게 된 것이다.


에곤 쿠엔 벨라시 백작의 강데 성


젊고 자유분방했던 무하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예술가로서 자신의 운을 시험하기로 결정하였다. 프란츠 요셉 역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탄 뒤 오스트리아-체코 국경지대에 있는 경치가 아름다운 마을인 미쿨로프에 닿자 돈이 다 떨어져버린 무하는 그곳에서 하차하였다. 덕분에 무하가 그린 지역 귀족들의 초상화가 미쿨로프 지역의 대주주인 칼 쿠엔-벨라 백작의 눈에 띄었고, 백작은 무하를 백작의 저택인 엠마호프 성과 그의 선대의 고향이자 그의 동생 에곤 백작이 사는 티롤 지방의 강데(Gandegg)성의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일에 채용하였다. 백작 형제는 무하의 재능에 감탄하여 그의 후원자가 되었고, 후에 무하가 뮌헨과 파리에서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뮌헨과 파리에서의 학업과 초기 경력


1885년 무하는 뮌헨의 미술 아카데미(the Academy of Fine Arts, 원래는 the Royal Academy of Fine Arts)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독일에서 가장 유서 깊고 권위 있는 미술학교 중의 하나로서 학교 측은 예전 합스부르크 영토뿐만 아니라 새로운 독일 제국 전역에서 온 재능 있는 미술가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무하는 2년 동안 체코 출신 화가들인 요자 우프르카(Joža Uprka, 1861-1940), 루덱 마로드(Ludek Marold, 1865-1898), 카렐 마세크(Karel Mašek, 1865–1927), 또는 러시아 화가인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 Leonid Pasternak, 1862-1945)와 다비드 비드호프(David Widhopff, 1867-1933)등과 같은 슬라브족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속적인 우정을 쌓았다. 그는 민족주의적 열성으로 동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마침내 슬라브족으로 꾸려진 예술가 모임인 슈크레타 클럽의 대표가 된다. 또한 그는 미국의 노스다코타 주()에 있는 체코인 커뮤니티를 위해 세인트 시릴과 메토디오(Saints Cyril and Methodius, 1887)라는 제단화를 제작하였다.


1886년 슈크레타 클럽의 멤버들, 뮌헨


무하는 칼 백작의 후원 아래 파리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1887년 가을에 세계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 도착한 그는 줄리앙 아카데미(Academie Julian)에서 수학한 뒤 1년 후에는 콜라로시 아카데미(Academie Colarossi)에 편입하였다. ‘보수적’이었던 에콜 데 보자르의 대안으로 설립된 이 두 사립학교는 진보적인 젊은 미술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1889년 초 백작의 후원을 더 이상 받게 되지 못하면서 무하는 공부를 갑작스럽게 중단하였다. 그는 파리와 프라하에 있는 출판사의 책이나 잡지사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기 시작했고, 세심한 손재주와 개성 있는 장식 스타일로 능력 있는 삽화가로서의 인지도를 점차 높여가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무하는 그랑드 쇼미에르(Grande Chaumiere)에 위치한 마담 샬롯의 크레메리(Madame Charlotte’s Cremerie) 식당 위 층의 작은 방에 거주하면서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나 아우구스트 스트린버그(August Strindberg, 1849-1912) 등의 미술가들을 만났다.

돌파구와 ‘무하 스타일’의 탄생


1895년은 무하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파리 연극계의 수퍼스타인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1923)를 위해 디자인한 그의 첫 번째 포스터 ‘지스몽다(Gismonda)’가 새해 첫날 파리의 도심을 뒤덮은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전설적인 포스터로 잘 알려진 이 포스터의 탄생 비화는 1894년 성 스테파노의 날(12월26일)로부터 시작한다. 사라 베르나르가 그녀의 지스몽다 역을 위한 새 포스터를 주문하기 위해 르메르시에 인쇄소의 매니저인 모리스 드 브루노프(Maurice de Brunhoff)에게 전화했을 때 무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이 인쇄소에서 교정쇄를 감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르메르시에 인쇄소의 모든 정규직 직원들이 연말 휴가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며 ‘신성한 사라’의 다급한 요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무하에게 포스터 제작이 맡겨졌다. 헌데 이것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무하를 포스터 아트의 대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길고 폭이 좁은 사각형 안에, 실사 크기의 ‘신성한’ 여배우를 표현한 그의 디자인은 파리의 길가에서 보여졌던 기존의 포스터와는 완전히 달랐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던 무하의 포스터는 대중과 사라 베르나르를 매료시켰다. 수집가들은 무하의 포스터를 얻기 위해 전단지를 붙이는 이에게 뇌물을 건네기도 하고 심지어 밤에 몰래 면도칼로 포스터를 뜯어내는 모험을 하기도 했다. 사라 베르나르는 그 즉시 무하에게 포스터 디자인뿐만 아니라 무대와 의상 제작까지 의뢰하였다. 또한 1896년에 그는 인쇄업자 F.샹프누아와 광고 포스터와 장식 포스터 제작을 위한 독점적인 계약을 체결했다.



1
2

1896년 ‘카산 필 인쇄소’ 포스터를 작업 중인 무하

발 드 그라스가에 위치한 그의 스튜디오에서 이젤과 함께, 파리



이로써 ‘무하 스타일’이 시작되었다. 무하는 파리 아르누보의 주창자로서 그 입지가 확고해졌다. 그 후로 5년 동안 무하는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파리의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연극과 광고 포스터부터 장식 패널, 잡지 커버, 레스토랑 메뉴, 엽서와 달력에 이르기까지 각종 의뢰가 넘쳐났다. 그가 디자인한 보석, 식기, 직물 등에 대한 수요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무하는 일반 사람들의 집과 그들의 생활양식을 향상하는데 필요한 모든 견본을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장인을 위한 핸드북’을 구상하게 된다. 1902년 파리의 미술 대학의 중앙 도서관에서 발간된 『장식 도큐멘트(Documents Décoratifs)』는 그의 장식 작업을 집대성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1900년 파리: 아이디어가 탄생하다


1899년 무하는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표격으로 1900년에 개최될 파리 세계박람회에 선보일 실내 장식에 대한 공식적인 의뢰를 받는다. 무하는 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파빌리온의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 발칸 반도를 여행하며 영감을 얻고 스케치를 하였다. 그가 파빌리온을 위한 드로잉들을 완성하는 데에는 꼬박 7개월이 걸렸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위하여 일하는 자신의 상황과 제국의 통치 아래 고통받는 슬라브족의 딜레마에 고통스러워하였다. 무하는 이 경험으로부터, 훗날 슬라브 족 사람들의 고통과 영광을 위한 기념비적인 작품 [슬라브 서사시(The Slav Epic)]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1
2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파빌리온, ‘르 피가로’에 삽입된 일뤼스트레 (1900년 3월)

1899년, 축제 의상을 입은 보스니아인들- 발칸반도의 답사 여행에서



무하는 파빌리온 작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기금 조성 마련을 위하여 미국에 가게 되는데 그의 이러한 선택은 미국을 여행하면서 기금 마련에 성공하였던 사라 베르나르의 사례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무하를 추앙하는 파리의 미국인들이 그가 아마도 초상화가로서 상당한 액수의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무하의 아메리칸드림은 그다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904년부터 1909년 사이에 걸쳐 이루어진 5번의 미국 방문은 무하에게 상당한 협찬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만 키워준 좌절의 시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하기도 하였다. 1906년에 그는 자신보다 19살 어린 아름다운 체코 처녀 마루슈카 히틸로바(Maruška Chitilová, 1879-1959)와 결혼을 하였다. 1909년에 딸 야로슬 라바가 태어나고 1915년에 아들 이르지가 태어난다. 그리고 슬라브 민족을 사랑한 미국의 갑부인 찰스 리처드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 1858-1939)이 [슬라브 서사시] 제작을 후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조국으로의 귀국


1910년 초반 무하는 그의 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조국으로 돌아온다. 모국에서의 첫 번째 작품인 새 프라하 시청의 시장실 장식을 마친 후에 그는 남은 생애를 [슬라브 서사시] 제작에 전념하였다. 몇 점은 6x8 미터에 달하는 20여 점의 이 기념비적인 회화들은 1000년이 넘는 슬라브족의 역사를 축복하며 체코와 관련된 다른 슬라브족 사람들은 다루었다. [슬라브 서사시]는 1912년과 1926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몰락시킨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무하의 조국은 191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로 재탄생 하게 된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위해 무하는 우표, 지폐와 국가의 휘장 및 경찰 단복 등 국가에 필요한 것들을 무상으로 디자인하였다. 192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 10주년을 맞이하자 무하와 찰스 크레인은 [슬라브 서사시]를 프라하 시에 공식적으로 기증하였다. 1928년과 1933년 사이에 이 연작은 프라하, 브르노와 플젠의 세 도시에서 전시되었다.



1
2

1917년경 야로슬라바와 이르지와 함께 있는 마루스카 (무하의 아내와 두 자녀)

슬라브 서사시 연작 6번을 그리고 있는 무하 (1924년)



슬라브 서사시를 창조함으로써 무하는 인류의 평화라는 보편적 목표를 위해 모든 슬라브 민족이 함께 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독립을 이룩한 지 채 20년이 되지 않아 1938년 뮌헨 협정이 체결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 나치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939년 3월 15일에 독일군은 프라하를 침공하였고 무하는 게슈타포가 첫 번째로 체포했던 인물들 중 하나였다. 비록 심문 후에 집으로 보내졌지만 무하는 정신적으로 약화되고 건강을 해쳤다. 그는 79세 생일을 열흘 남겨 둔 1939년 7월 14일에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7월 19일에 프라하의 비셰흐라드 공동묘지에서 행해진 그의 장례식에는 공공집회와 연설에 대한 독일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많은 군중들이 참석하였다. 화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막스 스바빈스키(1873-1962)가 다음과 같은 장례 연설을 낭독하였다.

“가장 고귀한 장소 슬라빈의 가장 성스러운 곳 비셰흐라드 이곳에 체코와 프라하는 당신을 묻는다. 당신은 이곳에서 히라드차니와 성 비투스 성당을 보게 될 것이다. 어두운 가을의 구름이 당신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겨울의 흰 눈이 슬라빈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곧 봄이 다시 돌아올 것이고 체코 영토의 목초지와 숲은 온통 꽃으로 덮일 것이다. 영원한 평화 속에서 편히 쉬거라! 체코는 훌륭한 아들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폰스 무하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Emerald Home School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18.05.17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