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투트가르트 1 -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해 루트비히스부르크 궁전에 가다!
6월 6일 아침에 스위스와의 접경인 보덴호숫가 콘스탄츠 에서 Konstanz 08시 38분 기차를
타고 지그마링겐 Sigmaringen 에 내려서 독일 "호엔쫄레른 왕가의 고성" 을 구경합니다.
다시 지그마링겐 Gare Sigmaringen 역에서 타임테이블을 받아 슈투트가르트 로 향하는데
바로 가는 기차가 없으니 Immendingen 과 울름 Ulm 역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하네요?
인터넷에서 사전에 검색한 바로는 11시 50분 기차를 타면 13시 43분 슈튜트가르트
중앙역 Stuttgart Hauptbahnhof 에 도착한다지만 저 기차는 놓쳐버렸으니....
12시 10분경에 로컬 기차를 타고는 조금전에 콘스탄츠에서 올 때
거쳐왔던 바로 그 Immendingen 이라는 시골역에 다시 내립니다.
플랫폼에서 역무원에게 물어 정차중인 기차에 올라타고는 달려서 울름 Ulm 역에 내려서는
슈투트가르트로 가기 위해 뮌헨에서 출발해 도르트문트로 가는 ICE 급행 열차를 탑니다.
그런데 기차는 혼잡해서 자리가 없으니 나는 식당칸 으로 가자고 했더니 마눌은
음식을 시켜야한다고 생각해 돈이 아까운지 그냥 객차를 다니며 찾아보자네요?
일본인이나 영국 및 독일인 들은 이런 고급 기차는 좌석을 예약하지 않으면 빈자리가
있어도 아예 객차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는지라 민폐 가 될것 같아 그러는데....
그래서 이런 사정을 마눌에게 설명한 후에야 식당칸 으로 가서는....
8유로 짜리 음식을 시켜서는 서서 먹는 테이블에서 먹습니다.
오후 2시 50분에야 기차는 슈튜트가르트 중앙역 Stuttgart Hauptbahnhof 에 도착
하기로 내리는데 대도시인지라...... 역 구내는 혼잡하기 이를데가 없습니다.
호텔은 지하철 U-Bahn 을 타고 올객 Olgaeck 역에 내리면 되지만.....
혼잡하기 그지없는 역에서 티켓을 구입하는게 귀찮아 택시를 탑니다.
Charlottenstrasse 27 에 있는 호텔 에스펜로브 Hotel Espenlaub 에 내려 택시비 10유로
를 주고는 호텔에 체크인을 하는데 더불룸은 아침 제외 75유로( 112,000 원) 합니다.
이 호텔에서는 비밀번호를 받아 스마트폰으로 카톡 을 하는데.....
접속이 잘 되기로 오랜만에 내 홈페이지 까지 들어가 봅니다.
그러고는 슈투트가르트 관광을 위해 다시 호텔을 나와 트램역에 있는 티켓 자판기
와 씨름하는데 잘 되지를 않는지라..... 지나가는 신사에게 부탁을 합니다.
이 분이 자기 트램을 놓치면서도 도와주어...... 신용카드로 6.5 유로 짜리
원데이 패스 를 2장 발급하는데 그 조건과 절차가 너무 세세하고 까다롭네요?
중앙역에 내려서는 다시 S-Bahn 근교열차 를 타는데 내려가서 Schwabstra 나.....
Leopold Furse 방향을 확인하려니 여자분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자청을 하네요?
방향이 틀렸기로 다시 되돌아 올라오면서 여자분이 가르키는 벽을 보니
거기에 "근교 기차 노선도" 가 상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S-Bahn 5번을 타는데 노선도에는 4번도 가능하네요? 기차는 20분을 달려 루트비히스부르크
역에 내려 버스를 탈까 하다가 시내 구경도 할겸 그냥 걷기로 합니다.
역을 나와 대로를 걸어 행인들에게 물어 공원에서 우회전해 걷는데 15분 가량 걸었을까?
드디어 저만치 루트비히스부르크 궁전 Ludwigsburg Schloss 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가야할 것을 왼쪽으로 갔더니
거기에 문은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나오는 문" 이네요?
여기 문을 나오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이탈리아나 스페인등 라틴민족 이라면 적당히
웃어주고 그 사이로 들어갈수도 있겠다면 독일인 들은 절대로 용납이 안됩니다.
어쩔수 없이 궁전의 담을 따라 6~7분을 걸어서는 정문이 보이는데....
거기 매표소에서 9유로 하는 티켓 을 끊어 궁전으로 들어갑니다.
슈투트가르트 는 네카강 양안에 걸쳐 있으며 슈바벤 지방의 포도밭과 과수원 지대에
자리잡고 있는데 서쪽으로는 슈바르츠발트, 남쪽으로는 쥐라산맥이 이어져 있습니다.
13세기에 도시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아 1320년경 뷔르템베르크 백작 의 주거주지가 되었으며
1482년 이후에는 뷔르템베르크 백작령, 공작령, 왕국, 주 등의 도읍지였습니다.
16세기에 번성하였으나 30년 종교전쟁(1618∼1648) 과 루이 14세 때의 프랑스군의
침공(1681∼1684) 등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2차대전시 완전히 파괴 되었습니다.
역사적 건축물로는 16세기에 중건된 고성, 자연사박물관이 되어있는 19세기 로젠슈타인궁과
고딕식의 15세기 장크트 레오나르트 성당이 있고 독일 최대 포도주 생산지 입니다.
여기 루트비히스부르크 궁전 Ludwigsburg Schloss 은 뷔르템베르크 대공의 별궁 으로
지어진 호화스러운 궁전으로 "슈바빙의 베르사이유" 라고 불린다고 하네요?
성안의 공방에서 만들어지는 독특한 비늘 모양 과 그물눈 도자기 는
마이센 도자기 와 쌍벽을 이루며 성 주변의 정원은 독일 최대 규모입니다.
정문을 들어서니 먼저 엄청 큰 정원 이 보이는데.....
붉고 노란 꽃들이 심어진 화단을 따라가면 거기 중앙에 큰 분수 가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걸어 본관을 만나는데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한바퀴 돌아
뒤쪽으로해서 들어가는데 거기에 또 문이 보이고 표 검사를 합니다.
실러의 작품 “간계와 사랑“ 에 보면 18세기 말에 여기 루트비히스부르크 궁전의 주인인
카를 오이겐 공작의 호화로운 궁정 생활에 대한 암시가 많이 나옵니다.
공작은 절대군주로 1745년부터 당시 인구 60여 만 명에 불과했던 뷔르템베르크 공국 을
지배했는데 그는 궁전을 독일의 베르사유로 만들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호화로운 여행과 축제, 무도회, 음악회, 썰매놀이, 사냥, 불꽃놀이 등이 연일 계속됐으니
이에 필요한 엄청난 경비 를 조달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부정부패와 독직 사건, 농민과 민중에 대한 착취, 부역 등 가렴주구가 심했으며 또한 궁정
에 애첩 제도 를 두는 외에 자국의 젊은이들을 용병으로 외국에 팔거나 대여하였습니다.
미국 독립전쟁(1775∼1783)과 7년 전쟁(1756∼1763) 을 위해서 당시 수많은
독일 청년들이 영국과 프랑스에 용병 으로 팔려갔던 것이네요?
실러 는 공작의 허가를 받지 않고 오늘날 기차로 불과 30분 거리인 만하임 으로 가서는
공연을 본 것 때문에 공작의 추적을 피해 슈투트가르트에서 도망칩니다.
당시 수백개 국가로 분열된 독일에서는 바로 이웃 도시 라도
외국이니 절대 군주의 허락이 필요했던 것인데.....
그는 헨리에테 폰 볼초겐 남작부인 의 호의로 튀링겐의 농촌 마을
바우어바흐에 있는 그녀의 별장에서 안식처를 얻게 됩니다.
독일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불리는 “간계와 사랑”에는 당시
절대군주가 다스리던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실상이 주로 나오지만.....
바우어바흐를 방문한 폰 볼초겐 부인이 대동한 16세 소녀인 딸 샤를로테 에게 마음을
빼앗기나 "신분의 차이" 는 도저히 극복할수 없는 것이니 극에도 반영되었던 것입니다!
궁전을 나와 마주친 정원에서 악기 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교외에 숲이야
말할것도 없고 이처럼 도시의 평지이건만 마치 숲 을 보는듯 합니다.
숲을 보니 불현듯 생각나는게 태평양에 타히티섬과 페루 중간쯤에
이스터섬 에는 모아이 라고 제주도 돌하르방을 연상시키는 석상이 있습니다.
이 섬의 원래 이름은 라파누이라 불렀다는데 천년전에 폴리네시아에서 이주해온
초기만 해도 20미터가 넘는 나무가 숲을 이룬 풍요로운 섬 이었다고 합니다.
해서 평화로운 가운데 부족민들이 번성하여 인구가 만여명에 이르니 경작지를 넓히려고
숲에 나무를 베어내니 토양침식이 심해져 농작물의 생산량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경작지를 서로 뺏으려는 씨족간의 불화와 다툼이 심해졌다는데 현재 섬에 있는
877개의 모아이 중에 제대로 서 있는건 1,960년 이후에 새로 세운 288개 뿐이라고 합니다.
1,722년에 서양인이 처음으로 도착했을때 모아이는 해안에 몇 개뿐
이었는데 그나마도 1,860년 까지는 모두 쓰러졌다고 합니다.
자원 고갈과 식량부족에는 모아이도 한몫했으니 씨족간 세과시용 모아이가 대형화되면서
운반 수단인 굴림용 통나무 수요가 느니 숲은 더 황폐해 졌습니다.
조상을 상징하는 모아이는 씨족의 수호신이니 전쟁으로 상대방 모아이를 쓰러뜨렸는데
숲이 줄어들면서 배를 만들지 못하자 어업은 고사하고 섬을 빠져나가지도 못하게 됩니다.
급기야 조인결투가 시작되었으니 씨족 대표가 해변까지 뛰어가 파도를 헤치고
암초에서 먼저 제비알을 꺼내오면 그 씨족은 1년간 농토 를 분배받습니다.
반면 패배한 씨족은 창으로 스스로 찔러 죽어야했다니 자원고갈의 위험은 당면과제라!
하지만 이들 독일인들은 숲을 이처럼 보존하고 있으니 그럴 염려는 없을라나?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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