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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4 - 단테의집을 보고 메디치가문의 영광을!

작성자콘스탄츠|작성시간20.11.02|조회수265 목록 댓글 4


 

 

피렌체 4 - 단테의집을 보고 베키오궁전에서 메디치가문의 영광을 생각하다!

 

 

 

5월 17일 피렌체 에서 두오모와 세례당에 종탑을 보면서 이 도시의 지배자인 메디치가

생각하는데 메디치은행 은 로마, 아비뇽에 피사공의회와 독일공의회등 "교황이 4명"

이나 할거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격렬하게 대립할 때.... 피사공의회에서 선출

됐다가 독일 황제에 의해 감옥에 갇힌 요한 23세 에게 석방 몸값 으로 거액을 대출합니다.

 

 

저 돈은 회수할 길이 없으니 다들 이제는 메디치 은행이 파산 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저런 놀라운 신용 을 지켜본 다른 교황을 포함한 유럽 각국의 왕과 영주들

그들의 돈을 신뢰할수 있는 메디치 은행 에 맡기면서 오히려 유럽 금융계를 평정 합니다. 

 

 

“불행에 처했을 때 도우는 자가 진정 친구라???” 이때 석방된 요한 23세는 빈털터리라!

 죽으면서 자기 손가락 하나 를 잘라 메디치 은행에 보내니 메디치 은행 금고에 고이

보관되었는데 후일 메디치 가문에서 레오 10세가 교황 이 되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불러“세례자 요한”“둘째 손가락을 들어 예수를 가르키는 모습”의 그림을 주문합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 이 치켜든 손가락은 바로 요한 23세 교황이 죽으면서 메디치

은행에 보낸 손가락 이니... “나 메디치가의 신용”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일러나??? 그러고는 칼차이우올리 거리 Via del Calzaiuoli 를 걷다가 왼쪽에

코르소 거리 를 만나 좌회전을 해서는 두 번째 블록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내려 갑니다.

 

 

거기 자그만 골목 광장에 사람들이 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데 보니 우리가 찾는 바로 그

단테의 집 이라... 4유로 하는 표를 사서는 입장을 하니 여러 사진들이 벽면에 가득한

데, 당시 피렌체의 생활과 무기류며 전투도와 지도 등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구경합니다.

 

 

단테 의 모습도 보이지만 당시 피렌체의 생활상 을 알수 있는 여러 자료들이 다양

하게 전시되어 있는데 단테는 1307년에 장편 서사시 “신곡”라틴어

아닌 “이탈리아어” 로 저술해 중세 유럽의 문학, 철학과 신학의 전통을

대표하는 데.....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와 함께 르네상스 문학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라틴어 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 이탈리아어로 시를 쓴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각성

이라고 보는데 이는 조선의 유학자가 한자 가 아닌 통시글이자 언문, 암문

으로 비하했던 한글 로 시를 짓고 글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니....

독일의 부르크하르트 르네상스의 출발점을 단테  에게서 찾는 이유인 것이지요?

 

  

단테피렌체 에서 태어나 어릴때 부터 고전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했는데“신곡” 중에서

단테의 인도자가 된 베르길리우스 처럼 라틴 여러 작가를 규범으로 했다는데

그는 고대 그리스의 문학적 전통이나 아랍세계의 사상도 도입하고 구이니첼리

영향을 받아서 “사랑”을 탐구한 것은 1274년의 베아트리체와의 만남 에서 비롯된답니다.

 

 

단테가 살던 당시 북이탈리아 는 로마의 교황청을 따르는 게르프(교황파)

신성 로마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황제파) 으로 두쪽으로

갈라져 서로 격렬하게 반목 했는데 피렌체에서는 게르프가 정권을 장악 합니다.

 

  

이후 피렌체 게르파(교황)자립정책을 내건 체키가 등 비안키(백당)

상업상의 이익에서 교황과 강력하게 결합한 도나티가

등 네리 (흑당) 로 분열하여 상호간에 또다시 치열한 정쟁 이 일어납니다.

 

 

단테귀족의 공직취임의 금지가 완화 되자 명목상으로는 의약업

조합에 가입하여 1295년 부터 시 행정의 공무 에 임하고

백인 위원회의 일원 이 되었으며 1300년에는 플리오레 가 되었습니다.

 

 

비안키(백당) 에 속하였던 단테 가 로마 교황청에 사자로 가 있는 사이에 피렌체에서는

흑당이 우세해져 결석 재판에서 단테는 시외추방과 벌금형 에 처해집니다.

그후 벌금을 지불하러 출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이 선고 되었으므로 이후 

고국 피렌체의 땅을 밟지 못하고 떠돌이 망명생활 중에“신곡”등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신곡 지옥편 에 단테는 지옥으로 가는데 자신이 살던 세상이 지옥같아서 악몽을 꾸는걸까?

지옥 입구에 이르러 보니 "여기 들어오는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신곡의

원 이름은 "희극 La Commedia" 로 추방된 자의 서적이라 피렌체에서는 "금서" 였으나....

 

 

보카치오  "데카메론은 인곡" 인 반면에.... " 단테의 저서는 신곡" 이라고

불러 이후 피렌체에서도 널리 읽히게 되는데 망명생활의 초기에 단테는

동지들과 모의해서 피렌체 복귀를 획책 했으나... 모두 실패 로 끝나고

시인으로서 어려우며 힘든 길을 걸었는데 1321년에 동쪽 라벤나에서 객사 합니다.

 

 

이탈리아를 공격 해온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7세 가 1313년에 급사한

후에는 고국 피렌체에 돌아갈 희망이 없어져 고난스러운 생활 중에

지옥ㆍ연옥ㆍ천국의 3계 를 생각했었을까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과 연옥을 여행하고 천국에서 연인 베아트리체 를 만나는데...

 

 

그럼 자신의 사랑 고백인데 연옥편에서 "사랑의 지성을 가진 여인" 이라는 표현을

 썼으니... 기독교 세계에서 "사랑이란 하나님의 전유물" 이었는데

욕망 밖에 모르는 인간이 사랑을 하다니 이는 혁명(?) 이라!!! 놀랍지요?

때문에 단테의 신곡을 "중세 기독교 세계의 장송곡" 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단테의 신곡” 하면 바로 연상되는

것이“괴테의 파우스트” 인 데..... 두 사람 모두 정치를 했고 

물러난 뒤에는 오히려 문학적으로 성숙해 신곡과 파우스트

썼으며 인간 구원은 베아트리체와 그레첸 같은 여신 을 통한다는 공통점 등...

 

 

하기사 몇년전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피에타로 황금사자상 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도 여자 (엄마 미선 - 조민수) 를 통한 구원 을 말했지요?

괴테 는 1786년 9월 독일의 칼스바트를 떠나 남국인 이탈리아를 여행 했으니...

 

 

베로나 파도바 베네치아 페라라 볼로냐 피렌체 페루자 아시시 로마, 나폴리와 시칠리아라!

남국은 음울한 분위기 독일 과는 달리 하루하루 새로운 껍질을 벗으며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라...“그나라를 아시나요”“레몬꽃이 피는 그 나라를 아시나요” 라고 적었습니다. 

 

 

괴테 가 1786년에 여기 피렌체에 도착해 단테의 집 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으나

13~14세기의 인물인 단테가 쓴 신곡 을 읽고 평한 얘기 는 전해집니다.

 

 

“지옥편은 처참하고 연옥편은 애매하며 천국편은 지루하다”  

훗날 괴테는 파우스트 에서 신과 악마가 인간을

통해 벌이는 진리와 욕망 쾌락의 이율배반 을 묘사했는 데.....

 

  

하지만 프랑스 혁명후 나폴레옹 을 만나기도 했으며 인간 이성의 발현

찬미하던 개화된 시절 에 살았던 그이기에......

기독교 문명의 암흑시대 "중세를 이해" 하기 힘들었기 때문 일러나?

 

  

피렌체 출신 으로 고국에서 추방된 이 중에는“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 도 있는 데...

그는 르네상스 말기 이탈리아의 사상가 피렌체 공화정부의 서기관 으로 재직했습니다.

 

 

마키아벨리 는 외교, 군사면에서 활약하는 중에 숱한 저작을 펴냈으며 정치는

힘의 관계 에서 비롯되니... 분열된 이탈리아 통일 을 위해서는

도덕 관념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등 소위 "마키아벨리즘" 을 제창했습니다.

 

 

단테 는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멀리 동쪽 바닷가 라벤나 에서 쓸쓸히 죽었는데,

마키아벨리 는 반메디치파로 몰려 추방 되고.....

후일에는 오히려 친메디치파로 의심되어 배척되어 죽었던 것이라!

그런데 지금 피렌체시는 라벤나시에 단테의 무덤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네요?

 

 

피렌체 시내 두오모 남쪽 “단테의 집”을 나와 강변쪽으로 골목길을 세블록을 걸으니

별안간 넓은 광장 이 나오는데..... 이른바 피렌체의 중심인 시뇨리아 광장 입니다.

 

 

여기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 에 있는 베키오 궁전 Palazzo Vecchio

중세 피렌체 공화국 당시 피렌체의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 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뇨리아 광장은 시민의 공공 집회장 이었는데, 물의 요정에

둘러쌓인 넵튠의 분수 코시모 메디치의 기마상 과 여러 조각상

사이로 미켈란젤로 가 만든 다비드상사비니 여인 이 눈에 들어 옵니다.

 

 

피렌체 Firenze 예술의 도시요 꽃의 도시 라고 불리는 데...

멀리 에트루리아 시대 부터 기원 을 가진 도시로

르네상스 가 태동한 곳이며 단테와 마키아벨리 가 살았던 도시입니다.

 

 

시뇨리아 광장 한켠에 있는 베키오 궁전 앞에는 여러 조각상 이 서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미켈란젤로 가 조각했다는“다비드상”입니다!

 

 

조각을 하던 초기에 한 소녀가 왜 그렇게 계속 돌을 두드리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는 대답했으니.....“저 바위는 그냥 돌이 아니란다,

그 속에 잠자는 천사를 깨우는 중이란다라고 말했다나요? 지어낸 말일까요?

 

 

피렌체에서는 메디치가의 후원 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브루넬레스키, 보티 첼리, 도나첼로 등 예술가들이 남긴 많은 건축물 들을 볼수 있습니다.

 

 

메디치가 는 1434년부터 1737년에 걸쳐 피렌체에서 약종상 으로

출발해 은행업 에 진출해 성공한 명문가로 르네상스 시대에는

피렌체의 통치자 로서... 학문과 예술의 강력한 후원자 가 되었습니다.

 

 

조반니 디 비치 는 1420년 경에 교황청의 은행가 로서 거금을 모으자

정치계에 투신하여 활약 하였고.... 아들 코시모 메디치

시샘을 한 구 지배층에 의해 추방된 후에 다시 민중의 지지로 복귀 합니다.

 

 

코시모 메디치 그는 교묘한 처세술 로 정치, 외교에 업적을 올렸으며...

유럽 16개 도시에 은행을 세우는 등 상업 자본에 힘입어

미술가를 보호 하고 문화의 기초를 다졌으니 "국부의 칭호" 를 받았습니다.

 

 

1469년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 가 승계하여 경쟁자 인 파치 가

를 누르고 조부의 치적을 발전시켜 학자들을

지원하고 고대미술을 수집 했으며 국왕들에게 대부업 을 했습니다.

 

 

인문주의적 교양을 폭넓게 지녔던 그는 학예와 철학 연구를 장려 하였으나 뒤를 이은

피에로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자 시민들의 반발을 사서 추방 됩니다.

 

 

메디치가는 1512년 피렌체로 복귀 하여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와

레오 11세 를 배출 하였으며..... 이후 독일의 황제

카를 5세 군대가 남하했을 때 "로마의 검탈"피렌체에서 쫓겨 납니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곧 정치력을 발휘해 황제의 힘을 빌려 복귀 하였으며...

가문을 이은 방계의 코시모 1세 1569년 민주 공화국을 폐지 하고

토스카나 대공 이 되어 군주의 지위에 올랐는데 아들 프란체스코 과중한

 세금 징수로 경제를 파탄지경에 몰고 갔으나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 였습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1737년 7대 대공 잔 가스토네의 죽음으로 단절 되는데 그에 앞서

로렌초의 딸인 카테리나(카트린)종조부 교황 클레멘스 7세 의 정치력으로

프랑스왕 앙리 2세의 왕비 가 되어 역사상 카트린 드 메디시스 (메디치) 로 알려집니다.

 

 

카트린 드 메디치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 앙리에게 시집간 것은

1534년인데.... 앙리는 형이 죽는 바람에 왕 이 되었으나 20살

연상인 애첩에게 휘둘리니 카트린은 숨죽이고 인고의 날을 살았다고 합니다.

 

 

시집갈 때 이탈리아 요리사들을 데려가 "포크" 를 소개하고 프랑스 요리 를 다양하게

발전시킨 이외에 마키아벨리“군주론”을 가져가 밤낮으로 읽으며

참고 참았다는데.... 마흔살 남편 앙리 2세가 마상 창시합에서 죽으니

카트린 그녀는 기다린 보람(?) 이 있어 세아들을 차례로 왕위에 올리며 섭정 을 합니다.

 

 

하지만 기즈 공작이 신교도를 학살하면서 내란 이 일어나니 수습을 위해 신교도 위그노

나바르 왕국의 여왕 진달브레와 협상해서 아들 앙리를 사위로 맞았으나

파리의 결혼식 에 참석한 신교도 들은 "성 바르톨메유의 학살" 수천명이 학살됩니다.

 

 

이후 학살을 주도한 기즈 공작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연금하고 있던 사위 앙리를 탈출

시켜 세력의 균형을 이룬후 아들 앙리 3세를 조종해 기즈공작을 죽이고

사위를 후계자 로 정하고는 카트린이 죽은후 앙리 3세 왕이 가톨릭 세력에게 암살당하자!

 

 

사위 앙리는 가톨릭으로 개종 앙리 4세 로 왕이 되어 "부르봉 왕조" 를 여니

군주론에 심취했던 카트린 이 설계한대로 된 것이라! 여기 수백년을

서 있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는 지금은 아카데미아 미술관 으로

옮겨 졌으니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품 인데 진품이나 다를바 없네요?

 

 

그 옆으로는 첼리니가 만든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의 청동상 이 보이는데...

 메두사 는 바다의 괴물로 폭풍을 지배하는 고르곤 자매중 하나로 미인이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메두사는 바다의 신 넵튠에게 감간 당한후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뱀으로 변하고 얼굴은 흉악해 졌으며 누구든지 보는 사람을만들어 버렸다네요?

 

 

이에 머큐리(헤르메스) 미네르바(아테네)페르세우스 에게

거울 방패 를 주고 거울에 비치는 메두사를 칼로 베라고

일러.... 그 머리는 아테나여신의 방패 에 장식물이 되었다던가요?

 

 

그러고는 1494년에 민중들을 선동해 메디치 가문의 피에로를 추방하고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던 수도승 사보나롤라 는 이 광장에서 알렉산더 6세 교황에 의해 처형됩니다.

이는 4년후인 1498년 반프랑스 외교정책을 취하라는 로마 교황의 명을 거부한 수도승

피렌체를 파문에 처하니 시민들에 의해 화형당한 것인데 그 돌비석 은 찾을수가 없네요?

 

 

지금은 시청사 베키오 궁전 Palazzo Vecchio 높이 94m 의 종탑

있는 고딕 건축물 로... 14세기 초에 시청사 로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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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루시 | 작성시간 20.11.02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콘스탄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11.03 르네상스를 견인한 메디치가!
    참으로 대단한 가문인가 합니다?
  • 작성자디아니 | 작성시간 20.11.04 "인생을 살아가며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열린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열린 마음은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재산이다."
    - 마틴 부버 -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콘스탄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11.05 별 재미도 없는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정성스레 달아주시니
    그저......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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