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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닉4 - 제1차 십자군 니케아성 공방전을 회상하다!

작성자콘스탄츠|작성시간21.06.29|조회수158 목록 댓글 0

이즈닉 여행4 - 이즈닉 성벽과 호수를 보며 1차 십자군 니케아성 공방전을 회상하다!

 

 

6월 4일 아침에 이스탄불의 예니카프 부두에서 9시 45분에 고속 페리 를 타고는......

마르마라해 를 건너 11시에 아시아쪽의 항구 도시 얄로바 Yalova 에 도착합니다.

 

 

  도로에서 돌무쉬 를 세워서 타고 이즈닉 Iznik 에 도착해 아스카니오스 호수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 1차 니케아 공의회 를 개최한 아야 소피아 성당 Ayasofya Kilisesi 을 보았습니다.

 

 

그 외에도 이슬람 사원 예쉴 자미 Yesil Camii 며 니케아 성벽의 북문인 이스탄불문

 Istanbul Kapisi 에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를 장식한 이즈닉 도자기 

유명한 공방들을 보았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동문인 레프케문 을 보러 찾아갑니다.

 

 

이즈닉 성벽 Iznik Suru 은 모두 7개의 성문 이 있으니 서쪽에 굘문, 북쪽에 이스탄불문,

남쪽이 예니쉐히르문 그리고 동문은 레프케문 Lekke Kapisi 이며 북문과 동문

사이에 톱문, 동문과 남문 사이에 호로즈문, 서문과 남문 사이에는 사라이문이 있습니다.

 

 

그중에도 보존 상태가 아주 좋은게 바로 여기 동문 인  레프케문 Lekke Kapisi  인데

천수백년 세월 을 어찌 견디고 살아남았는지... 볼수록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돌무쉬 dolmuş 를 타고 오스만 투르크의 수도 부르사 를 보고는 무단야 항구로 가서

페리를 타고 이스탄불 에니카프 부두로 돌아가야 하는지라... 시간이 없으니

오토가르 를 물어 물어 찾아가는데 부르사로 가는 버스 시간을 모르니 걱정이 앞섭니다.

 

 

오토가르 를 찾았는데 버스 회사 매표소에 들러기도 전에 돌무쉬 dolmuş 한대가

출발해 나오는데 보자니....... 버스 전면에 부르사 Bursa 라고

적혀있으니 이게 왠 횡재냐 싶어 두손을 번쩍 들어 버스를 세우고는 올라 탑니다.

 

 

오늘 운이 좋은게....... 지금 시간이 13시인데 다음 버스 시간은 아무리 빨라도 한시간

이후일 것이니 만약 이 버스를 놓쳤다면 부르사 를 구경하고 근교에 있는

무단야항에서 이스탄불행 마지막 배인 18시 페리 를 탈수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이게 행운 인게....... 이 버스를 타고도 우린 마지막 페리에 간신히 오를수 있었으니 만약

다음 버스를 탔다면 이스탄불로 돌아가지 못해 이스탄불 호텔은 그대로 요금 을

지불해야 하고... 추가로 돈을 내어 무단야에서 호텔방을 구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 입니다.

 

 

돌무쉬 버스 는 도시를 빠져나가는데 "성벽" 이 보이는게.... 조금전에 우리 부부가 마음이

급한 탓에 대충 눈도장만 찍었던 북쪽 성문인 이스탄불 문 인가 생각했더니 방향도

반대고 모습도 다른 것이 그럼 여긴 남문인 예니쉐히르문 Yenisehir Kapisi 인가 봅니다?

 

 

그러고는 버스는 멀어지는 성벽을 뒤로 하고 조금 달리니 니케아성 해자 역할을 한

아스카니오스 호숫가 에 도착하는데.... 불현듯 제1차 십자군 때 성을 둘러싸고

비잔틴 황제 와 제후 십자군 그리고 셀주크 투르크 군대가 벌인 공방전이 떠오릅니다.

 

 

동로마 비잔틴 제국 시절에 셀주크 투르크족 수령 알프 아르슬란 은 2만 5천의

군대를 이끌고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에서 노르만과 투르크

용병이 포함된 대군 인..... 비잔틴 황제 로마누스 4세의 5만 대군을 격파 합니다.

 

 

비잔틴군은 셀주크군의 유인으로 매복 에 걸리니 노르만 용병 에 이어 투르크 용병 이 봉급을

받지 못했다며 배신 하고.... 비잔틴 지휘관인 안드로니쿠스 두카스 마저 배신해 병력을

이끌로 퇴각하자 비잔틴 황제가 이끄는 본대는 투르크군에게 포위 돼 황제는 포로로 잡힙니다.

 

 

소아시아가 셀주크족에 넘어가자 비잔틴 황제는 로마 교황청에 원군을 요청하니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공의회 가 열려 교황이 십자군 을 제창하지만.... 유력한 군주인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및 영국왕 은 내란 으로 인해 동방에 군대를 파병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은자 피에르 가 인솔한 민중 십자군과 프랑스등 영주들이 콘스탄티노플로 집결하기로 하는데

1096년 4월 피에르가 쾰른에 도달하자 그를 따르는 민중 십자군이 4만명 에 달하니...

선발대가 헝가리를 지나며 군량이 떨어지자 기독교 도시 셈린에서 약탈을 시도하다가 패합니다.

 

 

약탈에 의지한 민중 십자군 은  어찌어찌해서 바다를 건너 투르크 수도 니케아 에 도착했으나

 준비한 식량 이 없으니... 주변 지역으로 약탈을 나갔다가 셀주크 수비대에게 몰살 

당하지만.... 제후들의 십자군 은 비잔틴 황제의 도움으로 바다를 건너 니케아성에 육박 합니다.

 

 

 당시 룸 셀주크국의 술탄 은 동족인 투르크족 다니멘슈드와 전쟁중 이었는데 1097년 5월

작년에 이어 더 강한 십자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다니슈멘드와 휴전

하고는 황급히 니케아로 돌아오나 이미 수도 니케아(현재 이즈닉) 는 포위된 상태 였습니다.

 

 

서쪽 호수 를 제외하고 북쪽에는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가 동쪽에는 풀리아 백작 보에몽과

조카 탕크레드, 남쪽은 툴루즈 백작 레몽과 아데마르 주교의 부대가 배치되었는데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마련한 식량과 물자의 수송은 보에몽 이 책임졌다고 합니다.

 

 

비잔틴 제국이 건설한 니케아성 은 길이 5km 성벽과 250개 망루 에 서쪽에 있는 아스카니오스

 호수는 천연 해자 였으니 십자군과 비잔틴군은 맹공 을 퍼부었지만 함락하지 못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민족 침입을 막으려 건설한 성벽이 주인인 비잔틴 황제의 접근을 막습니다.

 

 

5월 14일부터 공선전에 돌입하니 21일 도착한 술탄은 남쪽 레몽의 십자군을 공격 했으나

응원군을 끌고 나온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의 부대와 합심한 중무장한 십자군

군대에 격퇴되니 훗날을 생각해서 셀주크 기마대를 보존 하기 위해 군대를 퇴각 시킵니다.

 

 

사기가 오른 십자군은 시체에서 머리를 잘라내 공성기로 성벽으로 발사했으니 매우 잔인한

방법이나 심리전 이었는데 한쪽이 호수로 연결된 도시를 해군의 도움 없이 완전히 포위

하기는 어려웠으니 니케아성 투르크군 은 호수를 통해 식량을 공급받으며 한달 을 버팁니다.

 

 

 비잔틴 황제 는 6월 17일 호수에 배를 보내 보급선을 차단하고 타키티오스는 2000명의 지상군

을 이끌고 십자군에 합류하는데, 알렉시우스 1세 는 도시를 십자군이 점령하도록 놔두지

않았으니 도시를 점렴하는 날에는 니케아성을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니케아 시민들은 한세대 전만해도 비잔틴 황제의 백성들이었고 대다수가 기독교인 이란 사실은

약탈에 눈먼 십자군 에게는 사소한 문제일 것이라 동맹과 배신 을 밥먹듯이 하는 클르츠

아르슬란과 알렉시우스 1세 간에..... 은밀한 물밑 협상 을 통해 서로 최선의 결과를 얻어냅니다.

 

 

젊은 술탄은 냉철한 판단 을 보여주었으니 니케아가 수도이긴 하지만 기마 민족인 투르크족 

권력이 도시가 아니라 투르크 전사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고 6월 19일 십자군이

전리품을 약탈할 기대에 들떠 니케아 성벽에 도달 했을 때 발견한건 비잔틴 제국의 깃발 이라?

 

 

황제는 도시를 손상없이 획득한데 만족했으며 술탄의 왕비와 갓 태어난 자식 들은 콘스탄티노플

로 이송되어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니케아 함락후 황제로 부터 선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전사들은 분개 했으니.... 약탈했다면 더많은 전리품을 얻을수 있었을 것이라?

 

 

당시는 도시를 함락하고 난후 약탈은 승자의 권리 처럼 생각되었으니 무슬림 군대도 비슷하게

생각했지만 십자군은 한층 더했는데.... 알렉시우스 1세는 술탄의 왕비를 극진히

대접했으니 오빠 가 에게해의 스미르나(이즈미르)에 해상세력을 구축한 투르크 족장 이었지요?

 

 

차카 는 비잔틴 제국을 정복할 야심을 가진 인물로 어린 클르츠 아르슬란과 동맹 하여 비잔틴

제국에 대항했으니 딸을 클르츠 아르슬란 에 결혼시켜 장인 이 되었지만 아르슬란은

비잔틴의 도움으로 장인 차카를 제거한 후에도 딸은 왕비 자리를 유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카가 죽은후 스미르나는 아들 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왕비는 오빠에게 보내지니 아르슬란의

군대가 패배했고 비잔티움의 군대가 스미르나를 치기 위해 온다는 소식을 전하자

오빠는 비잔틴 황제의 충고를 받아들여 싸워보지도 않고 자신의 왕국을 포기하고 도망칩니다.

 

 

니케아 공성전 이 끝난 1097년 6월 26일 십자군은 내륙으로 진격하는데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는

구릉지라 투르크군이 매복하기 좋은데 성지까지 가려면 어쩔수 없이 소아시아를 통과해야

하는지라  십자군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데  돈이 있으면 구입 했고..... 없으면 약탈합니다.

 

 

 하지만 십자군은 규모가 컸기 때문에 상당량을 콘스탄티노플에서 보급해 오는지라 거리가

멀어지니 문제가 심각해 지는데 보에몽과 탕크레드,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비잔티움 장군 타키티오스의 군대는 전위대에 속해서 먼저 떠납니다.

 

 

후일 예루살렘 왕 이 되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 과 보두앵, 총대장격인 레몽 4세,

블루아 백작 스테판 그리고 위그 백작의 군대는 후위대 로 그 뒤를 따랐습니다.

 

 

보에몽이 이끄는 전위대 가 니케아에서 가까운 도릴라이온 근처를 지날때 투르크 정찰병을

보고는 곧 대규모 부대가 나타날 것임을 예측했는데, 클르츠 아르슬란 은 적이 생각하는

것 보다도 대규모의 반격 작전을 계획했으니 도릴라이온을 반격의 장소로 택했던 것입니다.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은 적수인 다니멘슈드 를 반격작전에 끌여들였으니 다니멘슈드

역시 기독교 군대가 룸 술탄국을 점령한 후에는 자신도 공격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카파토키아의 하산 등 다른 동맹들도 끌여들여서는 병력은 30,000 정도 대군을 모읍니다.

 

 

니케아(이즈닉)에서 가까운 도릴라이온 에 집결한 투르크 연합군 은 1097년 7월 1일 새벽에

풀리아 백작 보에몽 이 이끄는 1만명 십자군을 공격하니  위기에 봉착하지만 보에몽 은

노르만 비잔틴 전쟁과 아풀리아 계승 전쟁을 통한 전투능력과 위기관리 능력 은 대단했습니다.

 

 

보에몽 은 말에탄채 산발적인 반격을 하는 기사들을 말에서 내리게해 전열을 유지 하고 공격을

막으라고 지시하니 보병과 비전투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갑옷으로 무장된 기사 들이

앞에서 검으로 버티고 있으면 가벼운 갑옷을 입은 투르크 경기병 들은 뚫고 들어오지 못합니다.

 

 

 투르크군 은 우세한 병력으로 포위하고는 기마 궁병들은 활 을 쏘면서 공격했는데 정오쯤

고드프루아 가 달려오고 뒤이어 후위 부대의 원군이 속속 도착해 레몽 4세의 기사들이

포위된 부대를 공격하는데 정신이 팔린 투르크 부대를 측면에서 기습하자 전세는 역전 됩니다.

 

 

 십자군 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개시 하니 좌측에는 보에몽과 탕크레드,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 스테판 백작의 군대가 중앙에는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레몽 4세

우측에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위그 백작의 부대가 위치해 투르크군을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이때 갑자기 아데마르 주교 가 이끄는 부대가 투르크군 진지 뒤에서 불쑥 나타나니

당황한 투르크 연합군 은 기마민족의 기동성 을 이용해서 신속히 퇴각 합니다!

 

 

투르크 군대는 황급히 도망가는 바람에 많은 전리품 이 십자군에게 남겨졌으니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 십자군  “신께서 너희를 부자로 만드실 것이다!” 라고 외칩니다!

예루살렘 탈환 을 위한 십자군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은 신앙심 외에 물욕도 대단했던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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