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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7 - 몽마르트 사크레쾨르 대성당에서 보불전쟁을!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1.07.16|조회수263 목록 댓글 6

파리 여행7 - 몽마르트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에서 보불전쟁과 파리코뮌을 생각하다!

 

 

2018년 5월 10일 몽파르나스에서 지하철을 타고 콩코르드역에 내려 오랑주리 미술관 에 들러 

모네의 수련 구경하고는.... 다시 지하철로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과 블로뉴 숲 을 산책한

후에 지하철을 타고 플라스 드 클리시 광장 에 내려 몽마르트 묘지 를 찾아 사연들을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걸어서 관광객 으로 엄청 붐비는 몽마르트 언덕 을 올라가서는....  수많은 인파가

몰린지라 줄을 서서 사크레쾨르 대성당 Basilique du Sacre Coeur 으로 들어

가는데 여긴 하얀색의 파사드와 높은 돔이 특징인  로마네스크 비잔틴 양식 의 성당 입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은 1870년에 보불 전쟁 과  1871년 파리 코뮌 시가전 때 죽은 병사와

시민들을 추모하고 대혁명 과정에서 희생당한 가톨릭 교도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건축되었다는데 정면 문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화려한 조각 이 새겨져 있는걸 봅니다.

 

 

 캐나다와 이집트, 아프리카와 인도등.... 식민지 쟁탈 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는 영국을 견제하고자 미국 독립전쟁에 함대와 군대 를 파견했는데.....

임진왜란에 7년간 20만 대병을 파병해 가혹한 세금징수로 농민반란으로 망한 명나라

처럼 엄청난 군비인해 재정이 파탄 나자 새로운 세금을 징수하려고 삼부회 를 소집합니다.

 

 

 하지만 이는 결국 1879년의 프랑스대혁명 으로 이어져 루이 16세와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트와네트 단두대에서 처형 당하자 대경실색한

유럽 각국은 프랑스혁명을 분쇄하고자...... 프랑스로 군대를 진격 시킵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영국과 러시아 등 유럽 각국의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침범하자 프랑스인들은 너도나도 군대에 입대하는데 세계 최초의

국민개병제 로.... 나폴레옹 은 유럽을 정복하고 프랑스의 위상 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니 프랑스는 왕정복고 가 되어 부르봉

왕조가 부활 했는데 프랑스인들은 1830년 7월 혁명 을 일으켜 샤를 10세를 몰아

내니..... 새롭게 왕위에 오른 오를레앙 가문의 루이-필리프 1세 는 부르주아들을 중심

으로 정치를 했으나 다시 1848년 2월 혁명 으로 폐위당하고는 제2 공화정 이 수립 됩니다. 

 

 

나폴레옹 1세의 동생으로 홀란드왕이었던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 은 18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정이 들어섰을 때 대통령으로 선출 되었는데.... 1851년 12월 쿠데타 

일으켜 황제에 즉위하였으니 바로 나폴레옹 3세 라고 불리는 인물로 해외 식민지

팽창에 열을 올리면서 1867년에 만국박람회 를 개최하는등....... 제국의 번영 을 추구합니다.

 

 

 이후 나폴레옹 3세 는 1870년 9월 프로이센과 보불전쟁 을 치르는데 이 전쟁은 프로이센의

지도하에 통일 독일 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 과 그것을 저지 하려는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이 충돌해서 일어난 전쟁으로... 그 전에 나폴레옹에

의해 정복당한 바 있던 독일은 그 이전 부터 수백년간 백여개의 나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동북 변경 에서 일어선 프로이센 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니...  1861

년에 프로이센의 국왕에 오른 빌헬름 1세 는 국력을 키우고 군대를 조련하여 10년후인

 1871년 보불전쟁에서 승리 를 쟁취해 독일제국을 선포한후 황제 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황제에 오른 빌헬름 1세는 라인강 뤼데스하임 Rudesheim 언덕에  "독일 통일과

독일 제국" 건설을 기념해 3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청동상 을 세웠는데 통일

6년 뒤인 1877년에 완성되었으니 오늘날 유람선을 타고 라인강을 지나는

관광객들은 거대하고 웅장한 청동 구조물 "게르마니아 여신상" 을 볼수 있습니다.

 

 

 빌헬름 1세 는 군국주의로써 프로이센을 일등 국가로 만들려고 생각하였으니 형을

이어 왕위에 오른후 비스마르크 를 수상으로 몰트케 를 참모총장으로 등용하여

독일 통일을 꾀하였으니..... 1864년 프로이센 - 덴마크 전쟁과 1866년에는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1870년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빌헬름 1세비스마르크 를 신임하였으며 내외 정치에 수완을 보여 독일을 유럽

제일의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니 독일 국민의 영웅으로.... 저 빌헬름 1세의

가계를 호엔쫄레른 이라고 하는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 1세 가 1701년에 프로이센 왕 이라 칭하면서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손자인 프리드리히 2세 는 오스트리아 공주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 에 오르자 남자만

왕이 될수 있다는 살리카법 을 내세워 침략전쟁을 일으켜 술레지엔 을 차지하니

이에 오스트리아는 절치부심해서는..... 작센과 스웨덴에 프랑스와 러시아 연합을

결성해 프로이센을 포위 하자 프로이센은 1756년 작센을 선제공격하니 7년 전쟁 입니다!

 

 

1759년 8월에 연합군과의 전투 패배로 고립무원의 상태 에 빠졌으니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자살 까지도 생각했으나..... 뜻밖에도 1762년 러시아에서 표트르 3세 가 즉위해 새 황제의 

정책 변경으로 러시아군이 물러가자 화의 가 성립되니 가까스로 기사회생 하는데.... 일본

센고쿠시대 포위당한 에치고의 우에스기씨오다 노부나가의 암살로 기사회생한 것과 같습니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합병 으로 영토 확장과 1740년의 200만에서 1752년에 400만으로

늘어난 인구 증가로 8만명 이던 병력이 1756년에는 15만명 으로 증가했으며, 국력을

키워 100년후인 1866년 6월말에 프리드리히 2세의 증손자인 빌헬름 1세 의 프로이센

군대는 오스트리아로 진격해 Sadowa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독일을 사실상 통일 합니다.

 

 

통일 독일 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 과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 나폴레옹 3세 

정책이 충돌하는데.... 비스마르크가 연출한 엠스 전보(電報) 사건으로

프랑스와 프로이센 두나라 국민들을 격앙케 하였으니..... 마침내 1870년

7월 19일 비스마르크의 술책에 넘어간 프랑스가 먼저 독일에 선전포고 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쉽게 승리할 것이라 여긴 프랑스인들의 기대 와는 달리 군비가 우세한 프로이센

북독일 연방제국뿐만 아니라, 남독일 제국들의 지지 까지 얻어서 병력을 증강하였으며

참모총장 몰트케프로이센군의 속도를 이용하여 신속히 공격 하는 전략을 택했으니

프로이센군은 동원시간을 5주에서 18일로 단축하고 "현장 지휘관에게 재량권" 을 부여합니다.

 

 

8월 초순 라인 지방에 집결한 프로이센군 은 프랑스군 3개 군단을 맞아 몰트케는 3군을

국경 넘어 알자스 북부로 진격시켜 프랑스군 우익을 포위 하려 했지만.....

프로이센군의 포위는 순조롭지 못했으나 다행히도 프랑스군은 당황해 더 허둥댔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방어망이 무너지고 있는 데 대한 극심한 불안 을 떨치지 못합니다.

  

 

1870년경 프랑스군은 기본적으로 직업 군대로서 50만명 수준이었으며 위력적인 샤스포

강선소총 으로 무장했고 탄약과 보급품 사정도 결코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전쟁 계획과 참모업무 에 있어서는 프로이센군 보다 한참 아래 수준 이었습니다.

 

 

그들은 18세기와 마찬가지로 평시 최고 수준의 부대를 연대로 제한 하고 그 이상의 부대는

전시에 편성한다는 뒤떨어진 편제를 운용한 결과 훈련도 결여되고 계획 · 편성·

보급 · 철도 · 동원 등을 위한...... 효율적인 참모 제도 가 전혀 확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프랑스 지휘관들 가운데는 과거 식민지 전쟁 출신으로 용기 · 기개 · 순발력 등에서

뛰어난 장군들이 꽤 있었으나 나이가 많은 것이 흠 이었으니 나폴레옹 3세는

기본적으로 수비 위주의 계획으로 전쟁에 임했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여론에 밀려 대책없이 군대를 자르 지방으로 진격 시킬 만큼 즉흥적인게 패인 이 됩니다.

 

 

독불 양군이 모두 전선을 통제하지 못하는 혼란속에 프로이센군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투를 치르기도 했으나 자기들이 이기고 있고 프랑스군은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감" 에 차 있었으니.... 국경에서 퇴각한 프랑스군 주력부대는 9월 1일 스당 에서

프로이센군에 포위돼 소총 사정거리 밖에서 퍼붓는 대포 공격을 받고 사면초가 에 빠집니다.

 

 

대혼란에 빠진 프랑스군은 이튿날 결국 항복하게 되는데... 9월 2일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 3세 국왕을 포함한 104,000 명의 포로 를 잡으니 이 비보를

접한 파리에서는 공화제 국방정부 가 조직되고 내무장관 강베타 는 파리를

끝까지 사수할 것을 선언하니.... 이에 독일군은 진격하여 파리를 포위 하게 됩니다.

 

 

이후에도 프랑스인들은 파리와 메츠 포위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 했으나 9월 말에 이르러

스트라스부르, 10월 말 메츠 요새에 이어 파리도 1871년 1월 28일 마침내 성문을

열였으며 1871년 2월 베르사유에서 평화협정과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독일에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 하고 알자스- 로렌 지방을 할양 합니다.

 

 

굶주림에 지치고 병마로 시달리다가 죽은자들이 전사자들 보다 많았으니 빌헬름 1세

파리 함락 전인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황제 대관식" 을 올린후 독일제국

수립을 선포 하였고 이후 독일제국 군대는 파리에서 화려한 개선행진 을 벌였던 것입니다.

 

 

나폴레옹 1세의 손자뻘인 나폴레옹 3세 는 할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프랑스 제2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후 할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어 제2 제정(帝政)의 황제 

올랐으니 프랑스에게 좋은 시절을 제공했지만...... 말년에 비스마르크를

앞세워 통일 독일을 추구하던 프로이센과의 사이에 전쟁 이 일어나 패한 것 입니다.

 

 

패전국 프랑스는 1871년 2월 프로이센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국민의회를 소집 했는데

왕당파 의원 들은 프로이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왕정복고 를 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니.....

2월 8일 프랑스 전역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왕당파는 60퍼센트가 넘는 의석 을 확보 합니다.

 

 

그러나 파리만은 달랐으니 공화파가 다수를 차지 하자 임시정부의 수반인 아돌프 티에르

국민방위군의 무장 해제 를 명령하고 3월 18일 수비대가 보유하고 있던 대포를 철거

하려고 하자 노동자가 중심이 된 민중들은 저항했고 3월 26일 그들이 중심이 되어 치른

선거에서 혁명파가 승리 를 거두고 정부를 구성하였으니 파리 코뮌 (Paris Commune) 입니다.

 

 

파리 코뮌 은 극단적인 평등주의를 주장한 자코뱅파 에다가 사회주의자들인 프루동파,

폭력 혁명을 주장한 블랑키파 등 사이에 코뮌의 진로를 놓고

갈등이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민중 주도의 여러 정책 을 시행에 옮기게 됩니다.

 

 

이를테면 제빵공의 야간작업의 폐지, 노동자들에게 온갖 구실을 달아 벌금을 부과하는

고용주에 대한 과태료 부과, 폐쇄된 작업장과 공장을 노동자 협동조합에 양도하는

등의 조치와 함께 공창(公娼)제의 폐지, 교육의 세속화와 무상 교육임차인과

영세 상인을 위한 보호조치 등 현대에서도 진보적이라고 할 만한 조치들이 취해집니다.

 

 

한편 파리 코뮌 의 성공에 힘입어 프랑스 곳곳에서 민중들이 베르사유 정부에 저항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결국 파리 코뮌은 고립무원의 처지 에 놓이게 되고

5월 21일 스파이들에 의해 열린 생클루 성문 을 통해 정부군이 파리 시내로 진입하자

이에 시민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바리케이드 앞으로 나아가 대항했으나 역부족 이었습니다.

 

 

독일군의 후원을 받는 정부군 은 이후 일주일 동안 잔학한 학살극 을 연출하면서 파리코뮌

을 파괴했으니....... 이 전투에서 파리 코뮌군 2만명이 사망한 반면 정부군은

고작 700여명이 전사 했을 뿐이었으며..... 이후 코뮌에 대한 박해는 더욱

거세게 진행되었으니 3만 8000명이 체포 되고 7000명 이상이 추방 당하기에 이릅니다.

 

 

그 무렵 파리의 다리 밑은 강물 대신에 시신이 흐를 만큼 백색 테러 가 만연했으며 체포된

자들 대부분은 사형, 강제 노동, 투옥, 유형 등의 징벌을 받았으니... 파리 코뮌

반대하던 문호 빅토르 위고 조차도 이때의 상황을 보고는 “누구를 징벌하는가?

파리에 벌을 내리는가?  파리는 자유를 원했을 뿐이거늘!!!”  이라며 분노했다고 합니다.

 

 

파리 코뮌은 고작 두달여 동안 지속되고 종료되었지만 노동자 계급이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

하였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으니.... 이런 이유로 코뮌이 존재하던 동안 유럽 전역의

지배 계급은 극도의 불안감 을 표출한 반면 노동자들은 이상적인 희망 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보불전쟁의 패배와 파리 코뮌 내란으로 상처받은 파리는 이것이 영적, 도덕적 타락 에 대한

징벌이라고 간주하여 이를 속죄하고 침체된 국민 사기를 고양할 목적으로 성당을

건립하기로 했으니...... 설계는 민족주의 테마에 바탕을 두었으며 성인 잔 다르크 

루이 9세의 기마상  뤽-올리비에르 메르송 은 세계에서 가장 큰 모자이크 를 만들었습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은 보불전쟁후인 1876년에 기공되어 1910년에 완성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항복 후에 헌당식을 한 이유 가 이 때문인데,

성당 앞에 잔 다르크의 동상 이 있고 비잔틴 양식으로 하얀 돔 이 우아한

자태로 솟아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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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7.17 이제 장마도 끝나고.....
    불볕 더위가 시작되나 봅니다!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1.07.17 아름다운 파리
    덥지만 즐거운 시간되세요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7.17 몽마르트 언덕은 낭만적인데다가
    거리의 화가며 언덕위에 선 성당등
    볼거리도 많은데다가 입장료도 없으니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연중 붐비나 봅니다.
  • 작성자레고박사 | 작성시간 21.07.18 파리를 3번가면서 몽마르트언덕을 지나오고 사크레쾨르성당을 들어갔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7.19 몽마르트는 우리 한국인 관광객들이 엄청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지요? 언덕 위에 저 사크레쾨르성당은
    보불전쟁에서 전사한 장병을 추모하는 곳이라......
    손자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라 했는데.....
    실속없이 자존망대했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적국인 프로이센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임진왜란때 조선이 일본에 대해 전혀 몰랐듯이.....
    지금도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겉으로 들어난 일부분이고 일본과
    일본인들의 진짜 모습은 거의 모르지 않나 싶습니다.
    세계경찰역에 피로를 느낀 미국이 제2의 몬로독트린으로
    아시아에서 철수하면서도 부상하는 중국을 상대하자면
    일본을 키워야 하니 미국과 일본이 1905년 필리핀과
    조선을 나누어 먹었던 태프트~가쓰라 협정 처럼.....
    제2의 협정을 맺은 일본이 미국을 등에 업고 한국을 거두려 하겠지요?
    한국이 일본과 미국 두나라를 상대로 싸워 독립을 지킬수 있을까요?
    적에 대해 모르는데... 1592년이나 1905년 처럼 다시 당할수 밖에 없을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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