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여행3 - 산 정상에 옛스런 몬주익성에 올라 스페인 현대사를 회상하다!
2018년 5월 17일 바르셀로나 산츠역 Barcelona Sants 앞 호텔에 체크인을 한후 지하철을
타고 파랄렐역 에 내려서 푸니쿨라 를 타고 올라가 편도 12.5 유로 하는 케이블카
를 타고는 몬주익성역 에 내려 언덕길을 올라 해자에 놓인 다리를 건너 몬주익성
Castell de Montjuic 으로 들어가는데..... 해자 에 꽃과 나무를 가꾸었으니 공원 같습니다.
1700년 스페인왕 카를로스 2세가 아들없이 죽자 누나 중에 한명은 프링스왕 루이 14세 와
또 한명은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1세 황제 와 결혼했으니 서로 왕위 계승 을
주장하는지라 전쟁이 벌어지니 이른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인데 카를로스 2세는
후계자로...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를 지명했으니 왕은 마드리드에서 왕위에 오릅니다.
신성로마제국 레오폴트 1세는 아들 카를로스 대공 을 왕으로 내세움으로써 전쟁이 나는데
카를로스 를 지지하는 나라는 오스트리아,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프로이센,
스코틀랜드, 사보이, 포르투갈, 하노버, 아라곤~카탈루냐 이고 펠리페 를 지지하는
나라는 카스티야(스페인), 프랑스, 시칠리아, 나폴리, 바이에른, 헝가리, 만토바였습니다.
전쟁은 12년동안 유럽 전역 에서 벌어지는데 1진 1퇴를 거듭하다 오스트리아측이 마드리드
입성에 성공해 승기를 잡아 카를로스 대공이 왕위에 오를려고 할때 신성로마제국의
세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한 영국이 한발을 빼자 프랑스와 카스티야(스페인)군은
알만사(Almansa) 전투 승리에 이어 빌라르 원수가 1712년 드냉 전투에서 실지를 회복합니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으로 전쟁은 종결되는데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왕좌 를 지켰으나
프랑스 왕위는 계승할수 없으니 두 왕국이 합쳐질 위험은 사라졌으며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에서 스페인 영토 대부분을 확보하였고, 영국은 프랑스령
아메리카 식민지를 거의 획득하고 지브롤터 까지 얻었으며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굳힙니다.
그런데 아라곤~카탈루냐 는 오스트리아측 에 가담했다가 1714년 9월 11일 오랜 공성전
끝에 바르셀로나가 함락 되자 자치권을 상실하고 스페인 영토에 병합 되는데...
이런 연유로 작년에 바르셀로나등 카탈루냐지방은 스페인에서 독립 을
쟁취하기 위한 국민 투표 를 벌이며...... 스페인 중앙 정부와 격렬하게 충돌 했습니다.
카탈루냐가 스페인에서 자치정부 였던건 이슬람 무어인의 땅 사라고사를 획득해 수도로
삼은 아라곤 왕국 공주가 카탈루냐백국(바르셀로나)에 시집을 갔는데 친정에 아들이
없자 사위인 바르셀로나인이 아라곤 왕 이 되면서 아라곤~카탈루냐 연합왕국 을 이루어
시칠리아등 지중해를 차지했던 역사적 유래로 인해 마드리드 세력과 대립 했기 때문입니다.
100년이 흐른 1805년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 는 트라팔가르 해전 에서 넬슨의 영국
해군에 참패한후 1807년 나폴레옹은 앙도슈 주노 장군 에게 3만명의 병력을
주어 스페인을 지나 포르투갈로 진군하라고 명령하자 포르투갈 왕실은
남미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도피 했고..... 주노 장군은 포르투갈을 점령했습니다.
이 무렵 스페인에는 10만명의 프랑스군 이 진주해 있었으니 스페인도 왕실을
남아메리카로 옮기려고 계획해 먼저 안달루시아로 피신하려고 하자....
배신감을 느낀 스페인 국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국왕 카를로스 4세를
폐위 시키고는 그 아들 페르난도를 스페인의 왕 페르난도 7세로 옹립 합니다.
이에 나폴레옹 은 이들에게 협상하자며 프랑스 남부 바요나로 불러 카를로스 4세와
왕비 마리아 루이사, 재상 마누엘 데 고도이를 붙잡아 프랑스의 퐁텐블로성
으로 이송하고 페르난도 7세는 발렌시아성에 유폐 시킨후 스페인을 침공해
점령하고는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과 신대륙의 왕 으로 임명합니다.
마드리드인들이 궐기해 프랑스군과 싸우다 처형당하니..... 화가 고야 는“1808년 5월 3일”
그림에서 이 끔찍한 장면을 사실감 있게 표현했는데 이후 스페인 민중은 1814년
까지 곳곳에서 범국민적인 투쟁을 계속해 게릴라전 을 펼쳐나갔으나 스페인 민중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1809년에 프랑스군은 카디스를 제외한 스페인 영토를 모두 장악합니다.
그러자 웰링턴 장군 이 지휘하는 영국군이 포르투갈에 상륙하여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고
스페인 각지에서 전투가 계속되자 프랑스군은 병력과 물자가 고갈되기 시작했는데
게다가 나폴레옹은 1811~1812년에 러시아를 침략 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3만명 을
차출하니 웰링턴 장군은 1813년 빅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이겨 전쟁을 종결시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본토 까지 진격하자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계속 점령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에서 철수 시키고는 1808년에 퇴위시킨 페르난도를
석방하니....... 마드리드로 돌아온 페르난도 7세는 1814년에 스페인 왕위 에 오릅니다.
프랑스군과 싸운 스페인 민중들은 남부 카디스에서 의회 를 소집해서 1812년 헌법을 제정해
공포하는데... 대혁명을 일으킨 1791년의 프랑스 헌법을 모방했으니 입한군주제 로,
귀족과 성직자등 절대 왕정주의자들인 보수주의자 들과 그 반대편에 서 있던
자유주의자와 대립 을 낳게되니 한때 자유헌정의 길을 걷다가 패해 왕정체제로 복귀 합니다.
프랑스 는 1823년 10만 프랑스군을 스페인에 파견해 카디스 자유주의 정부를 붕괴 시키고
페르난도 7세를 절대군주 로 선언하니 왕은 복수 를 자행하는데, 본토에서 왕당파와
자유주의자 간에 혼란이 어어지는 도중인 1810년에 멕시코를 시작으로 라틴아메리카
스페인 식민지들은 거의 모두가 1810년 부터 1825년 사이에 스페인에서 독립 하게 됩니다.
1895년 호세 마르티 를 중심으로 쿠바의 제2차 독립전쟁 이 시작되자 쿠바 혁명군은
스페인에서 독립을 쟁취해 쿠바공화국 을 수립했으나 스페인의 보복이 이어지는
가운데, 1898년 2월 쿠바의 아바나항에 정박해 있던 미국의 순양함 메인호 에서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아..... 미군 장교 두사람과 사병 258명의 사상자 가 났습니다.
1898년 4월 미국은 군대를 출동시켰으니 미국과 스페인 전쟁은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 로
끝났고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주권 포기 와 전쟁 보상의 명목으로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양도 하였고, 마닐라의 미국점령 인정 등을 받아들여야 했으니
400년에 걸친 쿠바 통치는 막을 내렸고 태평양에 마지막 보루 필리핀과 괌 도 잃었습니다.
1931년 공화파 의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다수를 이룬 제헌의회 가 구성되자 불만을 품은
국왕 알폰소13세는 프랑스로 망명 하니 가톨릭교도 사모라가 초대 대통령이 되고
마누엘 아사냐는 개혁적인 사회주의자들과 공화파 인사들로 이루어진 초대 정부를
이끌었으니 제1공화정이 붕괴된지 60년만에 군주제가 무느지고 제2공화정이 탄생 합니다.
1936년 2월 총선거에서 스페인에 인민전선 내각 이 성립되자 이에 반대하는 프랑코 장군 이
인솔하는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치열한 내전 이 일어나는데... 개방적이고 관대하며
급진적이고 범세계적인 지식인과 진보주의자 들의 세력과, 가톨릭적이고 맹목적
이며 엄격하고 스스로 폐쇄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보수주의자 들의 세력이 충돌한 것 입니다.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군사봉기 가 일어났으니 다음날 18일 프랑코 장군 은
좌천당해 근무하던 카나리아 제도에 계엄령 을 발동하고 아프리카 반란군의 지휘 를
맡았으니 세계를 뒤흔든 스페인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19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가 있던 프랑코는 북아프리카 주둔 스페인군에게 본토로 이동 하라고 명령합니다.
본토 상륙 작전은 중대한 분기점이니 공화국 정부군의 작전상 실수로 이탈리아의 지원 을
받은 프랑코의 본토 상륙을 허용했으니 '실패로 끝났을 쿠데타' 가 '내전' 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는데... 반란군을 지지하는 스페인 국민과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는 또 다른 스페인 국민 “두 스페인” 이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전은 공화국 정부군 쪽이 우세한 가운데 시작되었으니 주요 도시와 우수한 무기, 많은
자원, 공업 지대, 풍요한 농촌 지대, 외화 등이 모두 공화국 정부군의 손 안에 들어
있은데 비해 반란군은 각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군수 물자마저 부족했는데
사기를 비교하면 반란군 쪽이 더 높았으니 반란군 진영의 복수심이 밑바탕 에 있었습니다.
반란군 진영은 서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횡적인 연락망이 충분하지 못했지만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만큼은 한명의 군사령관이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통솔 했으나
공화국 진영은 공화국 정부와 혁명을 지향하는 여러 정파가 서로 의견의 일치
를 보지 못하고, 내전이 “전쟁이냐 혁명이냐” 라는 소모적인 논쟁만 일삼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초기 단계부터 유럽과 온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니 소련이 공화국 정부군 을,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반란군 을 지원한데 비해 영국과 프랑스는
중립 을 취했으니 공화국 정부군에 무기 수출마저 금지했는데 반해 독일은 공군기 를
동원해 스페인을 폭격하니 피카소는 “게르니카”그림을 그려 학살을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공화국 정부군측에는 작가인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이 참여한 의용군 으로 이루어진
50개국에서 온 4만여명의 국제여단 이 활약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니
파시스트 정권 이 들어선 독일과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스페인에서 벌이는
투쟁이 곧 자기 조국을 파시즘의 마수로 부터 해방 시키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출신 공산주의자는 "이 내전은 스페인 사람들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다."
라고 말했으며 이탈리아 출신 국제여단원은 "마드리드를 거쳐 로마로 간다!" 가
자신들의 구호라고 말했으니 실제로 국제여단 이탈리아 연대는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프랑코군 편에 선 조국의 무솔리니 파시스트 부대에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전투에서는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지원 을 받은...
정규군으로 이루어진 반란군 쪽이 절대적인 우세를 보인 가운데 정부군은 이념 으로
적전분열해 서로 싸우는등 전열이 흐트러지니, 1939년 3월 28일 마침내 마드리드가
함락되고 몇달후에는 이 도시 바르셀로나 까지 무릎을 꿇으니 결국 반란군이 승리합니다.
2년 9개월 동안 스페인을 보수와 혁신으로 양분한 스페인 내전에서 약 30~ 60만명 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25~ 50만명의 공화국 정부군과 민간인들이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공화국 정부군의 패배 원인에 대해서 공화국 정부를 뒤덮고 있던
'태만의 정신', '미래를 향한 비전 결여', '충분하지 못한 조직화' 가 원인 이라고 봅니다.
“노인과 바다“ 의 작가로 유명한 어니스트 헤밍웨이 는 1차대전에 참전해 부상당한후
”무기여 잘있거라“ 는 소설을 썼는데, 혁명 스페인의 공화제를 열렬히 지지해
종군특파원 으로 자진해 스페인으로 갔고, 혁명군과 함께 보수파 반군인 프랑코
군대와 싸웠으니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를 쓰게 됩니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에서 게리쿠퍼 의 상대역인 잉그리드 버그만 은 3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12살때 아버지 마저 잃었으니 영화에서 파시스트에게 부모를 잃은 마리아역 에
딱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허리우드에 진출해 1942년에 카사블랑카 를 찍었고 다음해
이 영화를 찍었으니 전성기인데... 훗날 암투병 중에도 "골다라고..." 를 찍다가 죽었네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건 우리 모두를 위해 울리는것이다.
왜냐하면, 나 또한 인류의 한명이고,
한사람의 죽음은 또한 나의 죽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랑코 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억압하고 군부 독재정치 를 계속하는 가운데
망명한 알폰소 13세의 아들과 손자를 귀국 시킨후 36년간 통치하다가
1975년 사망하니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왕 으로 즉위합니다.
정작 프랑스에서는 부르봉왕가가 단절되었는데 비해 스페인에서 부르봉왕가의 부활
인데 국왕은 수아레스를 수상으로 임명해 민주체제를 회복 하면서
1976년 국민투표로 헌법을 제정 하고는 그 다음해에 국회의원 선거 를 실시합니다.
1981년 테헤로중령이 군부쿠데타 를 일으켜 의회를 장악한후 프랑코체제로 복귀를 요구하자
국왕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현 민주체제 유지를 단호하게 밝히니 쿠데타는 무혈진압
되는데, 이후 경제위기시에 딸의 부퍄스캔들로 왕정폐지 시위 도 있었으나 2014년 요트
국가 대표 아들 펠리페 6세가 즉위하고 왕비 레티시아의 조력도 있어 안정 되었다고 합니다.
유서깊은 몬주익성 Castell de Montjuic 에서 스페인의 오래된 역사와 국민이
둘로 쪼개져 나라를 피로 물들인 스페인 내전에 왕정과 민주체제 회복
까지 회상하고는..... 밖으로 나와 요트들이 떠있는 바다를 내려다 보며
구경하다가 이윽고 일어나서 내려와 숲길을 지나 몬주익 공원 으로 걸어갑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카패지기 작성시간 21.11.17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맛을 모른다
이리하여 몸을 닦는 것은 마음을 바로
잡는데 있다고 이르는 것이다
-"大 學"-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11.18 유교 경전에 나쁜 말은 전혀 없고
하나같이 올바른 가르침인데.....
조선의 사대부 선비들은 평생을
저 학문으로 몸을 갈고 닦으며......
저 공부로 과거에 합격해 지방 사또로 나갔는데
왜 하나같이 백성을 수탈하고 쥐어짰을까요?
돈 욕심에 눈이 멀어 나라를 그르치게 했으니...... -
작성자카패지기 작성시간 21.11.18 즐거운 시간되세요
여행이 시작됩니다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11.18 그렇지요? 내년 개나리 필 때 쯤이면....
봅의 훈풍을 제대로 느낄수 있을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