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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 6 - 이집트와 싸워 제국을 이룬 히타이트!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2.01.24|조회수109 목록 댓글 0

앙카라 6 - 아나톨리아 박물관에서 이집트와 싸워 제국을 이룬 히타이트를 회상하다.

 

 

여행 이틀째인 5월 14일 앙카라 시내 구시가지에 있는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

에서 최초의 세계대전인 카데시 전투후에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담은 점토판

문서 를 보면서 세계 최초로 철제 무기 를 사용한 "히타이트제국" 을 회상합니다.

 

 

히타이트 유적 핫튜사 (현재 터키 동부 보아즈칼레 마을) 는 1834년에 발견된 후에......

 1906년 독일 고고학자가 카데쉬 전투 후에 만들어진 1259년 람세스 2세와

하투실리스 3세간 이집트- 히타이트 평화협정 점토판 을 발굴해 제국 실체가 드러났지요!

 

 

이집트에는 룩소르(테베) 카르낙 신전 의 부조와 아스완 아부심벨 신전 입구의

홀 벽에 새겨진 부조에 시리아 카데쉬 전투 장면이 등장하는데....

앙카라 동쪽 보아즈칼레 (Hattusa 핫투샤) 에서 동일한 문서가 발견된 것입니다!

 

 

원래 계획은 모레 앙카라에서 08시 50분 Metro Bus Osmancik 행을 타고 12시에

순구룰루 Sungurlu 에 도착해서는 미니 Bus 나 택시를 환승해 30분 걸려

보아즈칼레 Bogazklale 에 도착해 핫투사슈 & 바이칼 호텔 에 체크인을 하고는.....

 

 

걷거나 택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핫투샤 Hattusa - 야즐르카야 Yazilikaya

 - 알라자효육 Alacahoyuk 을 돌면서 고대 히타이트 유적을 보려했는데.....

비용이며 일정 때문에 여기 앙카라 문명박물관 에서 발굴 유물을 보며 대신 합니다.

 

 

성경에 다윗왕 이 우리야를 전쟁터에 보내 죽게한후 아내 바셰바 를 취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우리야가 히타이트인 이니, 5천년전에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과 나일강 룩소르에서

인류 문명이 발생한 이래... 아나톨리아 에는 하티(Hatti) 라 불리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독자적인 언어 를 갖고 있었으나 문자는 없었지만 원거리 무역 을 하였다는데....

BC 2000년에 이르러 히타이트인 이 이주하여 하티를 정복하고 소국 을 형성합니다.

 

 

BC 19세기에 이르러 쿠샤라의 왕 아니타시 는 카파도키아 를 지배하였고 BC 17세기

 후반에 하투실리스 가 북시리아에 군대를 진격시켜...... 통일 왕국의

수도를 하투샤(보아즈칼레) 에 두고 무르실리스 1세  바빌론 왕국 을 멸망시킵니다! 

 

 

미탄니를 물리친 투드할리야시 2세 는 BC 15세기에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신제국(新帝國)

 을 건설하였으며 4대 수필룰리우마스 는 미탄니와 시리아에 있던 여러 소국을

멸망시키고는 수도에 견고한 성벽을 쌓는 등 히타이트 를 세계적인 제국으로 발전시킵니다.

 

 

여기에는 히타이트인 의 용감한 기질과 더불어 철제무기 와 말과 경쾌한 2륜전차(二輪戰車)

에 의한 새 전술의 도입이 큰 몫을 하였으니, 무와탈리스 는 시리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와 오론테스 강변 카데시 에서 세계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을 벌입니다.

 

 

 

 룩소르 카르나크신전 비문에는 람세스 2세의 승리 가 기록되어 있으나 시리아는 히타이트

수중에 있었으니, 이집트의 람세스 2세는 BC 1275년에 아몬, 라, 프타 및 세트 

신의 이름으로 명명된 4개 사단 2만의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여 가나안의 항구 를 확보합니다.

 

 

 람세스 는 아몬 사단을 이끌고 카데시에 이르니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시  노련한 군주로

 3만 대군을 동원하고는 베드윈족 2명을 거짓 투항 하게해 람세스를 안심시킨 후에...

오론테스 강에서 2진으로 뒤따라오던 이집트 라 사단 5천의 부대 를 기습으로 전멸 시킵니다.

 

 

그런후 히타이트왕 은 강을 건너 2,500대의 전차 를 몰아 이집트군의 배후를 공격하자.....

이집트군은 대혼란에 빠져 도망치니 중과부적으로 포위망 속에 전멸할 위기 에 처합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람세스 2세 는 기가 죽기는 커녕..... 일부 잔여 병력을 규합하여 오히려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가니 누가 보면 앞뒤 가리지 않는 자살 특공대 라!!!

하기사 훗날 알렉산더 대왕 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를 누가 막을수 있으리요?

 

 

그때 가나안인 으로 구성된 보조부대 나아란군이 시의적절하게 도착해 히타이트군의 후미를

치니 천신만고 끝에 겨우 전세를 역전 하는데, 히타이트 무와탈리시 왕 은 예비부대

1만 8천명을 투입해 전세를 재역전시킬수도 있었지만 그만 군사를 물려 화평 을 도모합니다!

 

 

이집트 3진 프타사단 과 4진 세트사단 이 도착하기도 했거니와 여기서 이집트군과 맞장을

떠서 설사 승리 한다고 하여도 히타이트군도 병력손실 을 보아야 할 것이고....

머나먼 땅 이집트 본토 까지 행군해 점령해도 다스리자면 대군을 장기간 파견 해야 하는데!

 

 

히타이트는 소아시아 에서 일어선후 바빌로니아와 미탄니등  국가를 정복하기는 했으나!

그 땅에서 다시 아시리아 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가 많이 상하고 대군이

빠져나가면 제 부족들이 반란 을 일으킬 것이니 그 뒷감당을 할수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BC 1270년 에 작성된 평화 조약문 내용에 보면 서로의 땅을 침범하지 않기로 하고...

히타이트에 적이 쳐들어 왔을때 이집트가 군사원조 를 하기로 한 것은

일방적인데, 이때 이집트 인근에는 달리 침략할 만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집트 람세스의 승전 주장 은 1906년 히타이트의 수도였던 터키 보아즈칼레에서 점토판

이 발굴되어 전투의 상세한 전적보고서가 출토 됨으로써 과장된 것 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니 역사에서는 어느 한나라 일방의 기록만으로는 사실을 정확히 평가할수 없는 것이라!

 

당시 이집트군은 청동제 무기 를 사용한데 비해, 히타이트군 은 훨씬 날카로운

철제무기 를 가졌으며... 이집트 전차가 2명이 타는 소형 이었음에 비해

히타이트 전차 는 마부, 궁수와 전투병 등 3명이나 타는 대형 이었다고 합니다!!!

 

 

병사의 수도 이집트 2만 5천 대 히타이트 3만 5천 으로 중과부적인 데다가 무와탈리시왕의

교란과 포위작전에 말려 이집트군은 분리되고 기습을 받아 각개격파된 상황이었습니다.

BC 1269년 히타이트는 이집트와 우호조약 을 체결하고 공주를 람세스 2세에 출가 시킵니다.

 

 

 

이후 히타이트는 아시리아 성장으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BC 1190년경 서방에서 침입해온

바다민족에 의해 붕괴 되는데 트로이 전쟁 과 동시대로 일부는 시리아 로 피하여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BC 717년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 가 카르케미시를 점령 함으로써 멸망합니다.

 

 

구약성서의 헤레인족이 힛타이트 제국 을 건설한 것은 빙클러 가 보아즈칼레(핫튜사) 유적의

왕궁에서 점토판 문서 를 발견해 알려졌는데, 보아즈칼레 에 사자와 황금독수리 조각상이

있으며 도보 15분이면 핫투샤 Hattusa 에 이르는데 입장료 7리라는 야즐르카야와 공통입니다.

 

 

둘레 6km 에 달하는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핫투샤 Hattusa 는 2시간 반이면 볼수 있는데

유적 입구 오른편에 대신전 Buyuk Mabet 에는 폭풍의 신과 태양의 여신

신전이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200개가 넘는 방에 곡물저장용 큰 항아리 가 있습니다.

 

 

폭풍의 신 Teshub 와 부인 Hepatu 를 모시는 신전으로 여기서 발견된 협정문 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에 전시중이며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가면 노란색 성채와

신 성채터가 나오고 아슬란카프(사자문) 가 나오는데 바깥쪽에 2개의 사자상 이 있습니다.

 

 

스핑크스문 은 암석 토대 위에 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아나톨리아 고원 이 한눈에

들어오며 아래쪽 제방에 70미터 아치를 가진 대지 문이 있고 왕의 문

kral Kapisi 은 왕성의 주요 문 으로 전사상의 진품 은 앙카라 문명박물관에 있습니다.

 

 

나산테페라 불렸던 성채 동쪽에 길이 9m, 10행에 걸쳐 기록한 문서를 히에로글리프

라고 부르는데.... 말기 무렵 왕인 스피르리우마 가 기록했다고 하며 제사장

 은 아치형 사당으로 왕 사이에 신상이 있는데 히에로글리프가 있던 방을 말합니다.

 

 

대성채 에서는 왕도의 아크로폴리스 로 공식 문서인 점토판 이 대량으로 발굴되었으며

아슬란카프 Aslani Kapi 는 3천년전의 석축 요새이고 규네에칼레 Guney Kale

 는 벽에 남긴 상형문자 로 히타이트 마지막 왕인 수필울리우마 2세 때 것이라고 합니다.

 

 

야즐르카야 Yazilikaya 는 핫투샤에서 3km 떨어진 제사터 로 문자가 있는 바위를 의미하는

히타이트의 성지, 바위 사이 골짜기를 갤러리라 부르는데 천이 넘는 신이 있으며

BC 13세기 신전을 지나 바위 골짜기에서 종교의식 을 거행했는데 암벽에는 주신

날씨의신 테숩 과 아내인 태양신 헤피투 가 많은 신들을 거느리고 만나는 부조가 있습니다.

 

 

소갤러리 B구역 입구는 날개가 있는 사자 가 지키고 있으며 내부는 투트하리야 4세를

모시는 성소로 왕의 모습 이 있으며 검의 형태를 한 다리로 전쟁의 신을 연상

시킨다는데.... 12신의 보존상태도 좋고 주신의 아들 Sarruma  딸 을 표범과

쌍두 독수리 가 보호하고 있으며 움푹한 곳이 제단인데 반대편에는 왕을 조각했습니다.

 

 

알라자효육 Alacahoyuk 은 보아즈칼레에서 35km 떨어져 있으며 알라자 마을 에서는

16km 거리인데 입장료는 별도니 5리라로... BC 5,000년경 석기시대 부터

존재한 오래된 유적으로 입구에 장중한 스핑크스문 은 히타이트 제국시대의 것입니다.

 

 

안쪽에 청동기시대 왕족의 무덤, 히타이트 시대의 석조터널이 있고 근처 박물관에는

역사와 도기등을 볼수 있는데 BC 3천년경의 황금장식이 있는 철제단검 이

있으니.... 바빌론을 점령 하고 이집트와의 전쟁에서도 승리 했으며, 금석문과

풍요로운 문화, 고유의 법전 까지 갖추고 있었던 히타이트 는 인류역사에서 잊혀졌습니다.

 

 

 규모가 작은 트로이 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덕분에 서양 문화사에 큰 영향력  행사했건만

그리스인과 로마인들도 핫투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는데 핫투샤 는 앙카라 동쪽 150km

1000m 고원지대 정상과 기복이 심한 비탈면에 8km 이중 성벽 으로 둘러싸여 건설되었습니다.

 

 

히타이트 제국 은 에게해에서 코카서스 까지, 북쪽 흑해에서 시리아를 지나 레바논의

끝까지 뻗어나간 광대한 영토 임에도 이런 산중에 수도가 건설된 것인데, 1834년

프랑스인 샤를 텍시에 는 보아즈칼레 마을 에 도착해 수레 바퀴자국 을 따라 올라갑니다. 

 

 

그는 언덕을 올라갔다가 거대한 돌덩이들이 똑바로 열을 지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고대 로마 시대의 켈트족 이 정착해서 살았다는 소아시아의 타비움(Tavium)

이라는 도시를 찾고 있었던지라 흔적들을 보고는 이곳이 바로 타비움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하지만 이 유적은 전성기의 아테네 만큼이나 큰 거대한 도시 였으니 사람이 조각된 거대한

두개의 성문과 양쪽에 사자 가 조각되어 있는 또 다른 성문을 스케치 했습니다.

보아즈칼레 성벽의 사자문에 조각된 사자 는 외부의 적들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이 폐허를 스트라보 가 언급했던 성소인 주피터 신전 으로 여겼지만 로마시대

의 어떤 건축물 도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특이한 형식 에 당황합니다.

그러고는 마을 사람들의 안내로 유적의 맞은편에 있는 고원지대 에 도착하는데.....

 

 

야질리카야 (Yazılıkaya, 글자가 새겨진 암벽) 라고 불리는 유적지 를 보게 되는데

뾰족한 모자 를 쓴 엄숙한 행렬의 사람들을 따라가자 삼중관 을 쓴

조각들이 나타났고, 날개 달린 인물 둘 과 무언가를 거머쥔 사람의 조각도 보였습니다.

 

 

 뾰족 모자와 언월도 같은 것을 둘러멘 12명의 신이 일렬종대로 진군하는 조각과 마주쳤고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으니 하늘을 찌를 듯한 산봉우리 천혜의  암벽 위에

거대한 바위들을 쌓아 만든 수수께끼 성벽을 건축한 도시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1839년 그는 파리에서 소아시아 소묘 라는 여행기를 발간했는데 삽화와 내용은 19세기 유럽

역사가들을 혼란에 빠트렸으니,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유적의 발굴에 집중해

파라오시대 이집트 문명과 아시리아 문명을 발굴한 시기로 보가즈쾨이는 수수께끼 였습니다.

 

 

“열왕기 하”  7장 6절에  보면  “주께서  시리아 군에게 대군이  쳐들어오는 소리 를,

병거대가 밀려오고 기마대가 달려오는 소리를 들려 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큰일났다. 이스라엘왕 이 헷의 왕들과 이집트 왕 들에게

돈을 주고 군대를 사다가 우리를 치는구나!” 여기에서 "헷이 바로 히타이트" 민족입니다.

 

 

보가즈쾨이의 정체 를 밝히지 못하는 가운데 1872년 아일랜드 학자인 윌리엄 라이트 

시리아 의 오론테스강 하마트라 에서 상형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비문 을 발견

했으며 이무렵 영국 박물관의 학자들이 유프라테스강 자라불루스 에서 폐허를 발견합니다.

 

 

조사 끝에 아시리아 사료 에 명시된 카르케미시(Karkemish) 라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그들은 발굴 과정에서 사람의 머리, 손, 다리, 동물 모양을 한 매혹적인

기호 들과 초승달, 갈고리, 오벨리스크 같은 기호들로 둘러싸인 유물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문자 체계" 임을 확신했으니 놀랄만한건 비슷한 유물이 시리아 뿐만 아니라

타우루스의 기념물 과 터키 스미르나 근처에서도 발견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샤를 텍시에  가 발견한  야질리카야의  문자  들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 기호들이 동일한 문자 라면 에게해에서 부터

아나톨리아를 거쳐 시리아 내륙 깊숙한 곳 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뜻이라?

 

 

1879년 아치볼드 헨리 세이스 라는 영국 학자가 지난 수십년간 소아시아와 북부 시리아

에서 발견된 불가사의한 기념물들과 금석문 들이 히타이트 민족 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다윗왕 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를  취하여 신의 벌을 받았다는  성경 속의

이야기에서 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와 야곱의 형 에사우 

아내로 맞이한 여인 이 히타이트인 이니 당시에는 소수민족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해석을 달리하면 열왕기하에서 고대 최강의 군주였던 이집트의 파라오 보다

먼저 언급된 것이  바로  함의 후손 인  “헷(히타이트)의 왕” 이라....

헨리 세이스 는 아나톨리아 유적의 주인 이 3천년전 히타이트 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그들은 이집트와 맞먹을 만한 강국 이었다고 주장해 학계에서는 논의가 불붙기 시작했으니

하지만 증거가 빈약 했기 때문에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으니.... 결국 독일의

호르즈니 가 이집트와의 조약문 점토판 을 해석함으로써 "히타이트의 실체" 가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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