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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알비2 - 알비파를 무느뜨리고 세운 세실대성당!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2.01.27|조회수174 목록 댓글 5

 

프랑스 알비2 - 알비에 도착해서 알비파를 무느뜨리고 세운 세실 대성당을 구경하다!

 

 

5월 19일 툴루즈 Toulouse- Matabiau 역에서는 프링스 국영철도 SNCF 파업으로 기차

없으니 바로 옆에 자리한 버스터미널인 Gare Routiere 로 가서는 알비 Albi 

가기 위해 오늘 하루 2편 밖에 없는 11시 15분발 막차인 로데즈 Rodez 행 버스를 탑니다.

 

 

버스는 포도밭과 밀밭 평야지대를 달려 도중에 몇몇 소도시 에 들른후 출발한지

2시간이 가까운 오후 1시에 알비 기차역 Albi-Ville 앞에 도착하는 데.....

 

 

그런데 세상에나??? 이게 막차 라 툴루즈로 돌아가는 버스가 없다니? 난감하지만....

그건 나중에 걱정하기로 하고 우선은 걸어서 알비 대성당 으로 찾아갑니다.

 

 

세실 대성당 Cathedral Cainte Cecile 이라 불리는 알비 대성당 은 1282년에 기공해 1397년

에 일부 완성된 남방 고딕 양식의 전형이며 외부는 성채 모양 을 하고 성당 서단에는

높이 78m 인 탑을 하나 세웠으며  남쪽에는 플랑보와이  양식 장식을 붙인 입구가 있습니다.

 

 

세실 대성당 은 1480년에 최종 완공을 보았으니 벽돌 로 지은 것 중에는 세계

에서 가장 크며 똘레도 대성당이나 바르셀로나 사그리다 파밀리아와

견줄수 있으니....  종교 반역자(이단?) 를  위협 하기 위해 지었기 때문 입니다.

 

 

붉은 벽돌로 원통형 으로 지어진 거대한 규모의 알비 대성당 은 교회당이라기 보다는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군사적 요새인 철옹성 으로 보이니 위압적인데 이 성당이

이렇게 지어진 이유가 있으니....... 바로 알비파를 몰살시킨 십자군 전쟁 때문 입니다!

 

 

중세 시대에 그리스도교 알비파 Albigenses 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저들이 직접 남긴

기록은 전혀 없고 모두 반대파인 로마 가톨릭의 기록 에 의지할 뿐인데

역사는 객관적인 사실의 기술이 아니고....  승자가 자신의 입장  에서

기술하는 것이니.... 역사에서 잊히거나 잘못 알려진 사건이 많다는걸 새삼 느낍니다.

 

 

프랑스 리옹에 살던 페트루스 발두스 Baldus 라는 사람은 상인 출신으로 성실하기

짝이 없는  경건한 신도  였으니  자신이 정직한  만큼.....

다른 사람도 정직하다고 여겼고 나아가 모든 문장도 정직하게 쓰였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마태복음 19장 24절) 라는 예수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 들였으니.....  여기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  됩니다.

 

 

누가 너의 왼 뺨을 때리면 달려들지 말고 오른 뺨도 내어주며 누가 너의 윗옷을 벗기면

역시나 대항하지 말고 바지 까지 벗어서 주라는...... 말도 비슷한 비유인가 합니다?

 

 

너의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 는  성서의 가르침  에 따라 자신의

재산으로 빵과 밀가루를 사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사업을

접었으니 그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신학자들의 성서 해석은 너무나도 복잡했으니, 말 그대로 해석하면 쉬울 것을!!!

그는 자기 으로 성서를 지역 언어로 번역한후 프로방스 지방에

배포 했으니.... 이때 부터  ‘가난한 사람들 (pauperes)’  이라고

불리는 발두스의 추종 세력인 발도파 (Waldenses) 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성서 말씀대로 살고자"  했습니다. 청빈한 삶가난한 사람을 돕는 삶,

신자와 수도자 사이에 평등 함을 유지하는 삶을 추구했고... 교황과

 교회는 이러한 삶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틴어 성서를 사용하지 않고 기존 교회에 비판을 아끼지 않는 이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 중세 종교재판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알려진 교황 루키우스 3세(1181~85)

가 활동을 금지시켰는데도....  이들은 지속적으로  청빈한 신앙생활  을 계속했고

스페인에서 독일, 이탈리아 남부와 헝가리에 이르는 지역으로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무렵 프로방스 지방에 파견되어 권력을 행사하던 교황의 사절이 살해된 사건 이 발생했고

이는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발도파(Waldenses) 를 눈엣가시 처럼 여기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1198~1216) 에게는 호기 였으니 그 무렵 발도파에 버금갈 만큼

기분을 상하게 하던 ‘선량한 사람들(bons hommes)’ 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방도를 찾았습니다.

 

 

‘선량한 사람들’  이란 이미 이단  으로 판정받은  알비파(Albigenses) 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바로 여기 이 도시 알비시 를 근거로 활동하면서

성서에 근거한 삶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선량하고 순진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1209년 교황이 두 이단에 대해 공식적으로 십자군 파견을 선포 하자 북부 프랑스와 영국,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지의 범법자 와 돈이 궁한 귀족 등이 이런 인생 일대에

"한몫을 챙길수 있는 절호의 기회"  를 놓치지 않으려고 선착순 을 외치며 몰려들었습니다.

 

 

40일 동안 십자군 으로 활동하는 자에게는 “빚에 대한 이자가 탕감 될 것이고 "과거와

미래의 죄" 가 사해질 뿐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사법적 대상 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엄청난 제안(?) 을 로마 교황청  으로 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왕 필리프 2세 의 군대도 이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니 프로방스 지역과 인근 발도파와

알비파 교인 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 을 맞이했는데... 이단 이기 때문에 순교라는

명칭도 받지 못했으니 십자군들은 평범한 가톨릭 교인과 이단자들을 어떻게 구분 했을까요?

 

 

베지에시 를 점령한 군인들이 선량한 가톨릭교도와 이단자를 가려내기 위해 우왕좌왕하자

따라온 교황청의 사절 이 말했습니다. “아들들이여, 가서 모두 죽이시오주께선

당신의  백성들을  알아보실 것이오.”  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그러니까 누가 이단인지 번거롭게스리 가려내지 말고 남자든 여자든 노인과 어린아이 까지

보이는대로, 닥치는대로 다 죽이라는 것이니... 어린애 하나도 살려두지 말라는 말이지요?

 

 

이 십자군 전쟁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시몽 드 몽포르 라는 인물이 있었으니 제4차

십자군 원정을 다녀온 인물로 베지에와 카르카손을 정복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그 지역을 부여 받았는데 약속한 40일이 지나자 대부분 전사들은 만족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시몽 드 몽포르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으니....  툴루즈 백작인 레몽 6세 의

오래된 영토 까지 모두 차지하였는데 툴루즈 백작은 이단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실패해서 가톨릭과 프랑스 왕으로 부터 땅을 몰수당한 상태 였습니다.

 

 

이제 몽포르 는 자신을 툴루즈 백작 겸 베지에와 카르카손 자작임과 동시에 나르본 공작

이라고 칭했으니 세가지 작위를 가진 것은 역사적으로도 유래가 드물 것인데

그러나 그의 욕심은 화를 불렀으니 전열을 가다듬은 레몽 6세의 반격을 받고 살해당합니다.

 

 

많은 발도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한 대가로 목숨을 건졌으나 신앙을 포기

수 없었던 사람들은 공격의 손길이 닿기 힘든 피에몬테 계곡 으로

숨어들었으며 그곳에서 종교개혁 때 까지 자신들만의 교회를 일구며 숨어 살았습니다.

 

 

7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신앙적 후손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는데 반대로

카타리파로도 불리는 알비파는 운이 나빴으니 숱한 이단 법정의 고문 

박해와 교수형 을 당한 끝에.... 그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원래 순결파들은 마니교적 이원론에 바탕을 둔 교리 로 그리스도교의 신은 영적인 것만을

창조하였으며 반신(反神) 악마 는 신에게 반기를 든 인간을 물질속에 가두었으므로

인간은 물질적인 것으로 부터 해방 되어야 구원 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으니,

물질(결혼, 육고기 섭취, 사유 재산 등) 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배척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알비파 는 발칸반도, 북 이탈리아, 남 프랑스 등지를 거쳐 12세기 중엽 프랑스 툴루즈

지방의 알비 Albi 에 전파되면서 세력을 크게 떨쳤는데 금욕적인 계율 

지켰으며.... 대중 앞에서의 성서 낭독과 통과의례(通過儀禮) 등을

중시 하였으니  통과의례를  통하여  일반 신자는  완전한 자, 즉  ‘카타리’ 가 됩니다.

 

 

교회 에서는 이들의 이단에 맞서 이단 심문제도 를 만들었으며 또한 이들의 융성은 탁발

수도회의 발달 을 가져오기도 했다는데.... 알비파를 모두 죽인후 로마 교황청은

가톨릭의 위엄 을 보이고자 그들의 근거지에 이런 위압적인 대성당 을 건축했던 것입니다?

 

 

제가 가지는 의문은 그들이 설사 이단 이라면... “가톨릭“ 이나 ”그리스도교“.

”기독교“ 라는 명칭만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면

될 일이지 "로마 교황청이 그들을 모두 죽일 권리" 가 어디 있다는 것일까요?

 

 

"대량 살인을 할 권리는 누가 준  것일까요?" 또  이단 이라고  사람들을 죽인다면 그들

가톨릭교회의 어떤 기준대로 "일반 가톨릭 교인과 이단자들을 구별" 해야지요?

36년간 100만명의 사람들을 죽였다는데 이단자가 아닌 일반 교인들도 엄청 죽었습니다.

 

 

중세의 마녀 사냥 은 주로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부유한 여인 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이는 마녀의 집과 땅이며 재산 을 "밀고자와 가톨릭 교회 그리고 왕" 이

사이좋게  3분해 차지  했기 때문이니....  가난한 자는 죽여봐야 손에 쥐는게 없지요?

 

 

그러니 도시와 마을의 주민 전체를 모두 알비파로 몰아 모조리 몰살 시켜야 그들의

집과 밭이며 재산을 십자군과 로마 가톨릭 교회 그리고 프랑스 왕이 3등분

나눌수 있으니 구태여 누가 이단인지 심사할 필요 가 있을까요? 더욱이 그들이

자신들은 선량한 가톨릭교도라고 주장하면 실제로 단기간에 가려낼 방법도 없지요?

 

 

그런데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평소에 마녀 사냥 은 여자가 마녀인지 아닌지 가려내는

훌륭한(?) 방법이 있었으니.... 혐의자를 묶은채 물에 빠트리면 물은 개끗한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  마녀라면 물 밖으로  내쳐지기 때문에 떠오른다고  믿었습니다.

 

 

만약에 여자가 물위로 떠오르지 않고  익사하게 되면 마녀라는 혐의를  벗게 되지만

이미 죽은 후 이고.... 떠오르면 마녀임이 증명 되었으므로

화형을 당하게 되니 어느쪽이든 100% 죽는게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방식 이었습니다.

 

 

그런데 "선량한 사람들" 이라고 불리었던 저 불쌍한 알비파 는 저런 엉터리 

선택 조차도 없이 보이는대로 다 죽임을 당했던  인데...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인 부터 결과 까지 기록은 가톨릭 교회 측에서 작성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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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위대한유산 | 작성시간 22.01.29 즐감해요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1.29 성채처럼 생긴 육중한
    알비성당은 사람을 위압합니다!
  • 작성자레고박사 | 작성시간 22.02.04 프랑스의 어느도시를 가도 옛성당이 남아있고 중세시대때의 건축들이 남아있다는걸 느끼게됩니다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2.05 그렇지요? 엣 문화유산은
    제대로 보존하는 나라인가 합니다!
  • 작성자카페여행 | 작성시간 22.02.06 아름다운 나라에요
    즐감하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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