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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 7 - 앙카라성에서 셀주크 투루크 제국의 역사를!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2.01.31|조회수155 목록 댓글 2

앙카라 여행7 - 산 정상에 쌓은 앙카라성에 올라 셀주크 투루크 제국의 역사를 회상하다.

 

 

5월 14일 터키의 수도 앙카라 구시가지 울루스 지역 언덕에 있는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

을 구경하고는........ 앙카라성 Ankara Kalesi( Hisar ) 으로 가려고 언덕을 오릅니다.

 

 

여기 언덕 양쪽에 기념품 숍들을 구경하고는 다시 가파른 골목길 을 걸어 올라가는데....

  언덕의 집들은 오래된 고택 으로 기념품숍에 수도 가 있어 물맛을 보니 마실만하네요?

 

 

삼거리에 이르러 길을 잘못들어 오른쪽으로 올라갔더니 전형적인 달동네 로 쓰레기도

많으니 서민들의 생활모습 그 민낯 을 보는데, 여긴 언덕이라 계곡 너머 건너편

언덕이 잘보이니... 높은 성벽위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있는 터키 청년이 손을 흔듭니다?

 

 

자칫 굴러떨어지면 바로 즉사할 위험한 자세라 마주보고 손을 흔들어주기도 위태로워 

그만 돌아나와서는........ 3거리에 도착해 왼쪽길로 조금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가는데 입장료를 받지 않으니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지라 청소상태가 부실하네요?

 

 

할머니들이 쭈그리고 앉아 조악해 보이는 기념품을 팔고있는게 저 아래 고층 빌딩 화려한

터키가 맞는지 헷갈리는데... 가파른 계단을 올라 위태로운 길을 지나 성벽에 오르니

저 아래 보이는 앙카라 시내 전망은 환상적 이지만 청소를 하지않아 유쾌한 기분은 아닙니다.

 

 

앙카라성 은 히타이트를 침략한 프리지안인을 몰아낸 켈트인(갈리아) 일종인 갈라티아인 

처음 성채를 쌓은후 이 땅을 정복한 로마인들이 새로 축성 했다는데 10세기경 오구즈의

후예인 셀주크 가 지휘하는 유목민이 볼가강 넘어 흑해 연안 있는 스텝지역으로 건너옵니다.

 

 

셀주크 는 부족을 이끌고 남하하여 이란 북부에서 이슬람 수니파로 개종한 후 페르시아

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여서는......  페르시아 왕조의 용병 으로 있었습니다.

셀주크 부족은 처음에는 사만왕조와 동맹 하고 카라한왕조 및 가즈나왕조와 항쟁 합니다.

 

 

셀주크족은 사만 왕조가 권력투쟁에서 패하자 독립된 권력을 쟁취하고자 자립 했고.....

1073년 비잔틴(동로마) 제국을 침략한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의

니케아 를 차지했지만 1101년 1차 십자군이 공격해 오자 기독교도에게 도시를 뺏깁니다.

 

 

 셀주크 투르크 는 1227년에 다시 니케아를 탈환 했으나 이후 몽고의 침략으로 망한 후에

그 일족인 오스만 투르크 가 다시 아나톨리아를 차지하는데... 1832년경 오스만

제국의 치세때 이브라힘 파샤 의 명령에 따라 앙카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 했다고 합니다.

 

 

 터키인의 조상은 튀르크족(돌궐) 인데 당나라에 패해 8세기부터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서

옛날 훈족 에 이어 다시 소아시아를 침략한후....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 터키족 

차그리 베이를 시작으로 투그룰 베이가 숨질 때까지 소아시아에서 정복전쟁 을 수행합니다.

 

 

셀주크 투르크 는 11세기에 수도를 니샤부르에서 서쪽인 레이로 옮긴뒤에 투그룰 베이 는 

 비잔틴에 승리 를 거두었으며 알프 아르슬란 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손을 잡은

비잔틴제국에 선제공격을 감행하니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Battle of Manzikert) 입니다.

 

 

비잔틴 황제 로마누스4세 는 노르만 용병과 투르크 용병이 포함된 5만 병력으로 출진했으며

알프 아르슬란 의 군대는 2만 5천 정도로 투르크는 유인을 위해 후퇴하자 비잔틴은

군대를 둘로 나눈후 투르크 역습으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노르만 용병이 배신 합니다.

 

 

이어 투르크 용병 도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철수했으며 비잔틴 지휘관

인 안드로니쿠스 두카스 마저 배신하여 휘하 병력을 이끌로 퇴각

하자 비잔틴 본대는 투르크 족에게 포위 되고... 결국 황제는 포로 로 잡힙니다.

 

 

이후 황제 로마누스 4세는 풀려나긴 했지만..... 그가 없는동안 제위가 찬탈당했기 때문에

죽임 을 당했으며, 셀주크 투르크 부족은 다니멘슈드 와 차카 의 지휘로 소아시아를

점령하는데 만지케르트 전투는 투르크족의 소아시아 정착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투르크 부족의 정복후 12세기 초 소아시아 에는  “터키(투르키예)”  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으니 당시 소아시아에는 아르툭, 투탁, 다니슈멘드, 살툭에

멘구쿡, 사브테긴, 아프쉰 등과 같은 투르크 부족 들의 공국들이 여럿 세워집니다.

 

 

셀주크 네 아들중 한명인  아르슬란 야브구 의 손자  쉴레이만 샤  는 1074년부터 소아시아

정복에 나선 투르크족 사령관중 한명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우르파 일대를 장악한후

안티오크와 알레포 를 손에 넣는데 시리아 셀주크 통치자 아티즈를 피해 서쪽으로 향합니다.

 

 

비잔틴 은 내부 권력투쟁과 발칸의 반란 으로 소아시아 침략에 나선 투르크족을 막을

 여유가 없었으니 투르크의 쉴레이만 샤 는 소아시아 중부 콘야 를 함락시킨후

비잔틴의 내분을 틈타 1078년 마침내 이즈닉(니케아) 을 함락시키고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스탄불 위스퀴다르에 세관 을 세우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선박에게서 통행세 

징수하는데 알렉시우스 콤네누스 가 비잔틴 황제에 오른 이후 상황변화로 투르크족은

점차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1082년 체결된 조약에서 드래곤 부룩이 국경으로 정해집니다.

 

 

쉴레이만 샤 는 1083년 타르수스, 아다나 정복후 아르메니아 공국에 불만을 품은 기독교도

의 청원을 받아들여 안티오크를 장악 하고 안텝과 이스켄데룬 도 취하는데 1086년 6월

그의 정복 사업과 명성을 시기하던 시리아 에미르인 투투스와 전투 를 벌이던중에 숨집니다.

 

에불 카심 이 소아시아 셀주크를 계승해 비잔틴을 공략해 성공 을 거두니.... 대 셀주크

제국의 술탄 말리크 샤 가 소아시아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기위해 대군을 파견합니다.

 

 

1092년 말라크 샤가 죽고 술탄이 없어지자 셀주크족은 소아시아 각지에 저마다

독립세력을 세우니... 기회를 잡은 비잔틴의 황제 미카엘 7세 는 소아시아

 영토를 수복할 목적으로 원정대를 파견하나 결국에는 셀주크 부족에게 패합니다. 

 

 

그후 말리크샤가 죽으니 쉴레이만 샤의 아들 킬리지 아르슬란 1세 가 1092년 호라산에서

3천 병사 를 이끌고 이즈닉 으로 돌아와 소아시아 셀주크의 술탄 이 되는데....

 권력을 잡은뒤 보니 소아시아 투르크족 지휘관들마다 자신들의 공국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장인으로 이즈미르에 나라를 세우고 해군을 양성해 인근 섬들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한 샤카 베이 도 소아시아의 투르크족에게는 위협적인 인물임을 자각한 

킬리지 아르슬란 1세 는 적국 비잔틴제국과 동맹을 맺은뒤 1094년 샤카 베이를 제거 합니다!

 

 

그러고는 동쪽으로 출진해 1096년 아르메니아가 장악하고 있던  말라티아 를 정복하는데

이 과정에서 킬리지 아르슬란 1세 는 1차 민중 십자군 이 소아시아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듣고 서둘러 수도로 되돌아오지만 제후 십자군이 이즈닉을 점령 해버린 뒤였습니다.

 

 

이즈닉(니케아)  은 십자군에 포위된  후에 1097년  협약에 의해  비잔틴 으로 넘겨지는데

셀주크의 킬리지 아르슬란 1세 는 물러나 수도를 남쪽 내륙인 콘야 로 옮깁니다.

그리고 다니슈멘드 왕조로 부터 군사원조를 받아 에스키쉐히르 지역에서 십자군과 싸웁니다.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십자군 물결 을 막을수는 없었으나 1102년에는 거의 물리치는데

1차 십자군 전쟁이 끝나자 킬리지 아르슬란 1세 는 투르크족 공국들을 흡수하니

영토 확장을 통해 소아시아 셀주크 는 대셀주크 제국(이라크) 의 영토와 인접하게 됩니다.

 

 

그는 모술 까지 정복했지만 하부르 강변 전투에서 대셀주크 제국 에미르 챠브리 에게 패해

죽으니.... 기회를 틈타 비잔틴 은 투르크족을 소아시아 중부로 몰아내는데 아들인

세힌샤가 권력을 장악했지만 곧 다니슈멘드 왕조의 지원을 얻은 동생 메수드 에게 뺏깁니다.

 

 

메수드 는 1116년 콘야로 진격해 제위를 차지하는데 40년간 통치를 통해 소아시아 셀주크

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고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세력이 된

다니슈멘드 왕조 의 군주 에미르 가지의 보호 아래에 있었으니 바로 메수드의 장인 입니다.

 

 

1134년 장인 에미르 가지가 죽자 메수드 는 앙카라와 찬크르 등을 다니슈멘드로 부터 되찾고

1144년에는 십자군의 손에 있던 마라쉬 까지 함락시키자 비잔틴 황제 마누엘 콤네누스 

콘야로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도로 돌아와서는 비잔틴 군에게 참패 를 안깁니다.

 

 

메수드 가 세력을 강화할때 독일왕 콘라드 3세와 프랑스왕 루이 가 이끄는 제2차 십자군 

소아시아에 도착하자 1147년 에스키쉐히르에서 독일군 을 물리치니, 프랑스왕 루이 

소아시아 진입을 포기하고는 지중해를 끼고 안탈랴로 가서 바닷길을 통해 아카로 진입합니다.

 

 

  메수드 는 아르메니아를 침략한 뒤 다니슈멘드마저 장악했으니 메수드는 소아시아 셀주크

를 최강으로 만든 뒤 1155년 숨지는데, 죽기전에 킬리지 아르슬란 2세 에게 콘야를

맡겼으나 동생들은 통제에 따르지 않고 킬리지 아르슬란 2세에 대항해 권력투쟁 을 벌입니다.

 

 

그러자  킬리지 아르슬란 2세  는  비잔틴 황제 마누엘 콤네누스,  아르메니아 공국, 무술,

알레포, 누레딘 젠기, 다니슈멘드의 베이 야히바산 등과 협약을 맺어

방어하는데 그는 형제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후 소아시아 셀주크 질서를 수립합니다.

 

 

킬리지 아르슬란 2세 는 비잔틴과 불가침조약  체결후 1163년 다니슈멘드를 무력화시켜

누레딘 젠기에게 복속시키자 이에 불안해진 비잔틴 황제 마누엘 콤네누스 

프랑크족과 헝가리, 세르비아  병사들을 모아 1176년 봄에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합니다.

 

 

비잔틴군 은 1176년 9월 1일 데니즐리 인근 미리오케팔론 계곡에서 킬리지 아르슬란 2세가

이끄는 "투르크 군에게 참패" 를 당하니..... 비잔틴 황제 콤네누스 는 간신히 풀려납니다.

 

 

 미리오케팔론 전투  후에는  "소아시아는 투르크족의 땅"  임을 증명했으니 이후 비잔틴 

투르크족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킬리지 아르슬란 2세 는 비잔틴 문제를

해결한후 다니슈멘드를 거두고 동부의 적들마저 제거하고는 아르메니아 공국 을 정복합니다.

 

 

이어 실리프케 를 정복하고 시리아와 알 자지라 로 영역을 확장했으니 셀주크 서부 국경은

데니즐리(파묵칼레) 까지 확장되는데 1186년 자신의 영토를 11명의 아들들에게 분할해

준후 콘야에 머물면서 재상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자 아들들의 권력투쟁 을 불러 일으킵니다.

 

 

1187년 쿠르드족 살라딘 아이유브가 예루살렘 을 장악하자 서방은 3차십자군 을 결성하니

킬리지 아르슬란 2세 는 십자군과 협정 을 맺으려 했지만 아들들은 다르게 행동했는데

공격을 받은 독일 십자군이 수도 콘야 를 공격하자 킬리지 아르슬란 2세는 도망치게 됩니다.

 

 

  킬리지 아르슬란 2세는 아들 기야세딘 케이후스레브에게 피신해 1192년 숨지니 기야세딘

케이후스레브가 권력을 승계했으나 1196년 동생 루크누딘 쉴레이만 샤 가

병력을 콘야로 움직이자 불리해진 기야세딘 은 오랜 적국인 비잔틴제국으로 피신 합니다.

 

 

쉴레이만 샤 는 투르크족을 통합하기 위해  아르메니아 왕 레온  과  비잔틴 군 을

무찌르고 공물을 받으며 투르크족 살툭 공국 을 정복한후인 1207년에 죽습니다.

 

그러자 기야세딘 케이후스레브 는 콘야로 복귀해 트라브존드 제국과 아르메니아를 무찌르고

흑해 무역 로드를 장악 했으며 아이유브 조의 침략 도 막아낸 후인 1211년에 숨집니다.

 

 

아들 알라딘 케이쿠바트 는 1226년 시노프에서 해군을 이끌고 크리미아 반도 

주요 무역항인 사그둑을 정복 하니 러시아 공국들과 킵차크 가 복속해 옵니다.

 

 

셀주크 투르크의 육군은 실리프케 에 이르는 모든 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해군은 지중해의

중요 거점들을  장악해서는 1223년 육군과 해군으로 지중해 알란야 성 도 함락시켰습니다.

 

 

그는 이곳에  성곽  을 쌓은 뒤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라이예” 라고 불렀으며..... 이곳에

소아시아 셀주크 최초의 해군 기지 를 세웠으니 이후 술탄들의 겨울 휴양지 가 됐습니다.

 

 

이때 징기스칸 이 이끄는 몽골 이 빠르게 서쪽으로 침략해 들어오니.... 알라딘과 동맹관계

였던 호레즘 의 군주 셀라레딘 은 몽골군을 피해 1225년 아제르바이잔으로 피신 합니다.

 

 

그러나 호라즘의 군주 셀라레딘 이 셀주크의 영역인 아흐라트를 파괴 하자 충돌이 일어나....

케이쿠바트 는 아이유브조와 동맹을 맺고 1230년 8월 에르진잔 야시 세멘에서 격돌합니다.

 

 

 케이쿠바트 는 호레즘을 격파 했으나 몽골군 이 소아시아 입구까지 침략해 오자.... 영토를

지키려고 침략군 몽골의 과중한 요구 를 받아들인후 대책마련 중인 1237년에 죽습니다.

 

 

아들인 기야세딘 케이후스레브 2세 는 통치 능력과 군사적 재능이 결여돼 있었으니...

1239년 부하인 군사령관 사아데틴과 코펙 등을 제거하는 실수 를 벌입니다.

이후 셀주크 투르크 는 바바 이삭의 반란 조차 제대로 진압하지 못할 만큼 허약해졌으니!

 

 

1243년 몽골군 대병이 소아시아로 쳐들어와 쾨세다으 에서 셀주크군과 마주쳐 7월 전투

에서 궤멸적인 패배 를 당하니... 이후 몽골은 소아시아 를 반세기 이상 점령합니다.

이후 셀주크 술탄은 몽골 꼭두각시 에 불과했으니 소아시아 셀주크는 1308년에 멸망합니다.

 

 

그러자  셀주크의 장군들이 독립  해서는  에레트나,  카라만 등 여러 공국들을 세웠고.... 

셀주크 튀르크 에서 갈라져 나온 오스만 부족 이 13세기말 비잔틴 제국의 접경

지역에 "오스만 투르크" 를 세워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하고 대제국으로 성장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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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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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여행 | 작성시간 22.01.31 즐거운 시간되세요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2.01.31 이스탄불이 수도인줄알았어요.
    ㅋㅋ
    여행다니면서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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