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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 4 - 1차십자군의 툴루즈 백작을 회상하다!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2.02.17|조회수296 목록 댓글 0

 

툴루즈 여행4 - 옛날 수도원에서 1차 십자군 전쟁의 툴루즈 백작을 회상하다!

 

 

2018년 5월 19일 툴루즈 Toulouse 에서 버스로 알비 Albi 를 보고 돌아와 지하철로 에스퀴롤

역에 내려 오귀스탱 미술관 Les Augustins 에 들어가니 14세기에 지어진 수도원 건물에

그리스도교 예술, 석관,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머리등 종교 예술을 모아놓은 곳으로

들라크루아, 로트레크등 회화도 전시하는데..... 수도원의 흔적을 보자니 십자군 이 떠오릅니다!

 

 

역사상 툴루즈 백작 하면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한 툴루즈의 레몽 4세 (1052년 ~ 1105년)

프로방스 지방의 제후로써 제1차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명으로 레반트

(레바논)에 기독교 트리폴리 백국 을 창설했으니 일명 생질의 레몽 (Saint-Gilles)

 이라고 불리는데.... 레몽은 툴루즈 백작 기욤 4세의 동생 이었으나 형이

딸 필리파를 후계자 로 지명하고 죽자, 지위를 찬탈하여 툴루즈 백작 이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필리파와 결혼한 보르도의 아키텐 공작 기욤 9세 는 여러 차례 툴루즈 백작 

지위를 주장하며 서쪽에서 툴루즈를 공격해 왔습니다. 레몽은 3번 결혼했으니...

처음 2번은 근친 결혼으로 무효가 되고 파문 을 당했으니 첫 아내의 아들이었던 장남

베르트랑은 서자로 보는데 십자군 이전에도 스페인에서 이슬람교도와 전투 를 벌였고

제1차 십자군 참가 권유를 받았을때도 제후 중에서 가장 먼저 참가를 맹세했다고 합니다.

 

 

서기 7세기에 이슬람 교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긴 비잔틴제국 은 1071년에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패하자 알렉시우스 황제는 서유럽의 병사를 빌려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욕심으로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하니 당시 교회는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로 동서 분열되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다 보니 견원지간 이었지만

고위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와 투쟁중 이던 로마 교황은

교회세력을 키우고자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 를 소집합니다.

 

 

청중에게 예루살렘 회복을 위한 제1차 십자군 을 호소하자 전 유럽에서 영주와 기사들이

호응하니 주요 인물은 아마데우스 주교 외에 프랑스 남부 툴루즈 백작 레몽 4세 니

교황 우르바노 2세와 가까웠다는데, 레몽은 십자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지

일부를 팔았으며 두번째 프랑스 국왕 필립 1세 동생으로 카페 왕조의 일원인 백작

위그 드 베르망두아 로 영지도 있었으나 형의 그늘 밑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세번째는 교황에 맞서 하인리히 황제에 충성한 하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부용 이니...

왕이라는 명칭은 쓰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통치자 가 되며, 네번째는

정복왕 윌리엄의 장남으로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이니 영국 왕위가 동생인 윌리엄

2세에게 주어지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십자군 참전으로 방향을 돌린 것입니다.

 

 

다섯번째는 풀리아 공작 보에몽 이니 5명의 기사와 30명의 병력으로 1047년 이탈리아 남부

상륙해 시칠리아 욍국 을 건국한 노르망디의 노르만족 로베르의 장남 인데 비잔틴제국을

정복하려는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 아버지가 죽으면서 왕위를 이복 동생인 로게르 에게

물려주자 보에몽은 아드리아해 작은 영지만 상속한지라 새 영지 획득을 위해 십자군

원정에 나섰는데... 침략에 나섰던 비잔틴 땅에 이젠 손님 이 되어 콘스탄티노플로 갑니다.

 

 

여섯번째는 볼로뉴 백수 보두앵 이니 3남이라 자기 영지도 없으니 십자군을 기회 로 생각해

아내와 자식 까지 데리고 떠나 결국 에데사 백작을 거쳐 예루살렘 왕위 에 올랐으며

일곱번째는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사위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 는 명성을 높이라는

드센 아내인 아델라의 등쌀에 견디지 못해 내키지 않는 원정 을 떠날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덟번째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 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서 예루살렘을 순행한

적이 있었는데 1093년 백작의 지위에 오르자 30대로 십자군에 참가했으며 아홉번째

노르만족 탕크레드 는 보에몽 여동생의 아들로 아주 교활하며 유능한 장수고 열번째

외스타슈 3세 는 고드프루아의 형으로 체면상 참가해 동생과는 달리 신속하게 귀국 합니다.

 

 

열한번째 목수 윌리엄 은 노르만족으로 민중십자군 에 참가했는데 위그 백작의 군대에 합류

했지만 안티오크 공방전때 보에몽의 군대에 합류해 명성을 떨치니... 게르만 프랑크족 

왕이 죽으면 아들들이 영토를 나누어 자기 왕국을 세우는데 이후 형제와 조카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 전쟁 을 거쳐 영토를 통일하곤 했으니 메로빙거왕조와

카롤링거 왕조가 망한후 987년 프랑스인들은 파리백작을 왕으로 추대하니 카페 왕조 입니다.

 

 

하지만 카페 왕조는 프랑스내 12개 공국의 명목상의 군주 로 카페왕조의 직할지는 파리와

인근지역으로 작은지라 아들들에게 나누어 줄수가 없었으며, 저 12개 공국도 자기

공국내 많은 백국과 후국이 포함된지라 직할지는 크지 않으니 아들들에게 나누었다가

다른 백국이나 공국의 침략 을 받을수 있으니 장남에게 전부 세습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후들의 십자군에 앞서 은자 피에르 등이 이끄는 민중 십자군 은 6만명에 달했는데 

 돈이 없다보니 도중에 헝가리와 세르비아, 비잔틴등 기독교 국가 도시들을

약탈하고 도둑질로 간신히 아시아로 넘어갔으나 보급이 안되니 여기서도

약탈에 열중 하던 중에 니케아 근교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의 기습으로 전멸 당합니다.

 

 

 

연장자로 병사 숫자도 많아 리더인 툴루즈 백작 레몽 에 아데마르 주교 고드프루아를 비롯

볼로뉴 3형제등은 1097년 5월 비잔티움 에 집결해 바다를 건너 셀주크 투르크의 수도

니케아를 포위 하는데 동쪽 다니슈멘드와 전쟁중이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이 니케아에

도착해 레몽 4세의 부대를 공격했으나 패하고 성은 함락되니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왕비를 버리고 후퇴해 터키 중부 콘야를 새 수도 로 정하고는 3만의 군대를 모아 6월

26일 남진하는 보에몽등 1만 십자군을 아나톨리아의 고원지대 도랄라이온에서 습격 합니다.

 

 

투르크군이 승기 를 잡아가던 중에 고드푸루아등의 후위부대가 도착하니 중무장 기마병 

깰수가 없는지라 다시 후퇴하는데 클르츠 아르슬란은 초토화 작전을 수행해 우물 하나,

곡식 한톨 남기기를 거부했으니 십자군은 병사와 말들이 기아와 갈증으로 인해 고통받고

사망했으며 고통스런 행군은 6주간이나 이어진후 콘야에 도달하여 식수와 식량을 보충해

남쪽 아르메니아인 영토를 통해 안티오키아를 거쳐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으로 진군합니다.

 

 

하지만 볼로뉴 출신 막내인 보두앵 은 장남에게 모든 영지가 상속되는 관습으로 인해 자기

영지가 없어 형에게 더부살이 하던 처지니 자신의 영지를 개척하려는 흑심 을 품고 

 가족까지 데리고 십자군 에 가담했던지라 십자군이 실리시안 관문을 통과하자

마자 2500명 별동대를 이끌고는 본대를 이탈해 토로스 산맥을 넘자.....

노르만 이탈리아 타란토 공작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 도 자기 영지가 없는지라

역시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는 토로스 산맥을 넘어서 타르수스 Tarsus 에 도착합니다.

 

 

탕크레드 는 병력이 적어 성공하지 못하던차에 보두앵 이 많은 군대를 가지고 도착함으로써

두 장수는 함께 도시를 함락했지만 도시를 점령한후 보두앵은 탕크레드를 쫓아냈으며 

 도시를 차지하려는 욕심 에 이후 도착한 다른 십자군을 성안으로 들이는 것을

거부했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십자군 부대가 전멸 되자 악화된 여론 에 어쩔수

없이 도시를 포기하고 출발했다가 탕크레드가 점령한 작은 성 에서 결국에는

두 십자군 군대는 충돌해 전투 를 치르고는 다른 지휘관들의 만류로 간신히 멈춥니다.

 

 

1098년초 시리아 안티오크 (현재는 터키 하타이) 전투에서 보두앵 은 포위전에 참가

하지 않고 동쪽을 방어하며 처자식이 죽어가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기회를 잡으니 아르메니아 군주 토로스(Thoros) 로 부터 원군 요청 을 받고는

 2월 6일 2천 오백 병력을 이끌고 에데사 에 도착해 양아들 이 된후 불과

한달후 3월 7일 배신해 양부 토로스를 죽이고는 에데사 백국의 주인 이 되는 것입니다.

 

 

하타이(안티오크) 는 원래 비잔틴 제국의 도시 였는데 무슬림 세력 에 넘어간 것은

 1085년 이었으니 십자군이 도착하기 불과 12년 전 으로 말리크 샤 1세 사후

셀주크 투르크 제국은 제후들에 의해 분열된 상태로 안티오크는 야기 시안 

1088년 이후 통치하고 있었는데 섬기는 군주는 말리크 샤 1세의 동생인

시리아의 군주 투투시 1세 였으니 알레포, 다마스쿠스, 안티오크등 시리아의 지배자

였지만 1095년에 사망하고 왕위를 이어 받은 것은 아들인 알레포의 리드완 이었습니다.

 

 

리드완 이 권력 독점을 위해 형제들을 죽이기 시작하자 동생 두카크는 다마스쿠스로 탈출

해서는 지역 군벌들에게 통치자로 옹립되어 알레포의 형과 대립 했는데 1097년 십자군

침략시 안티오크의 지배자 야기 시안은 리드완과 동맹 이었지만 사위가 자신의 영토를

노리는지라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와도 은밀히 연합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안티오크가 12년 전까지는 비잔틴 영토 였으며 기독교인들의 도시라 그리스 정교회

를 비롯해서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시리아 정교회 등 기독교인 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십자군의 침입을 당하자 본래 지배자 비잔틴 제국에 동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니

야기 시안은 안팍에 적을 가진 것이라, 1097년 10월 3만이 넘는 십자군 이 안티오크로

 접근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야기 시안 은 십자군에게 동조할 위험이 있는 그리스

및 아르메니안 정교회등 기독교 신자 성인 남자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하고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시리아 정교회도 들은 도시에 남겨서 성벽 보수등 필요한 전투 준비를 서두릅니다. 

 

 

십자군이 1097년 10월 20일 도착했을때 안티오크 성주 야기 시안의 이슬람 병사는 7천 에도

이르지 못하였고 도시 주민은 4만명 에 불과했으나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 시에

증축된 안티오크의 성벽은 난공불락의 요새 였으니 살푸스산과 오론테스강 성벽은 아주

튼튼했으며 지중해에서 물자를 보급받기 쉬웠기에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기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십자군의 식량은 충분하지 못했으니 포위전이 길어진다면 곤경에 빠질것이며 또

최고 사령관의 부재에 따른 지휘 체계의 혼선 이 문제인데, 선발대 중에 레몽 4세는

적이 응원군을 부르기 전에 공격에 들어갈 것을 제안했으나 고드프루아와 보에몽은

장기 포위전 을 주장했으니... 지휘관으로 생각하는 레몽과 보에몽의 갈등 은 심해집니다.

 

 

십자군은 북동쪽에는 보에몽의 부대가 성 바울문 밖에 진지를 구축했고 레몽의 진지 는

서쪽의 개의문, 고드프루아는 이보다 더 서쪽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성의

남동쪽은 실푸스산 이 있었으므로 포위가 완벽하지 않아 야기 시안은 식량을

들여올 수 있었으며 더욱 야기 시안은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에게 도움 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두카크 는 십자군 보다 알레포의 왕인 형 리드완이 더 두려웠으니 십자군을 공격할

때 형의 군대가 등뒤에서 공격을 가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이교도와의 성전을 벌일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 만일 형제가 힘을 합쳤다면 십자군은 큰 곤경에 빠져

패퇴했을 것이니 십자군 은 이번에도 무슬림들의 대립과 분열로 이득 을 보았던 것이네요?

 

 

 

야기 시안이 아들을 보내 독촉하자 다마스쿠스의 지배자 두카크 가 무거운 몸을 일으킨

것은 포위가 2달 이나 계속된 12월 말에 이르러서였는데 십자군도 식량이 모자라니

제노바 함대를 통해 공급 받기는 했으나 도저히 겨울을 날수 없는지라... 1097년

12월말 보에몽과 플랑드르의 로베르는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주변 약탈 에 나서자

이에 안티오크의 무슬림군 은 12월 29일 야음을 틈타 성 바울문 쪽에서 총공격해

오론테스 강 너머의 탈란키 까지 공격했지만 레몽 4세의 포위를 뚫는데는 실패 합니다.

 

 

보에몽과 로베르가 이끄는 약탈 부대가 다마스쿠스 군대와 마주치자 소심한 두카크는 후퇴

하지만 십자군은 식량을 얻지 못했으며 지진과 비가 수주간 이어지니 십자군은

기아상태 로 내몰렸으니 1098년초 기아로 십자군 7명 중 1명이 사망했으며 말도

 700마리를 제외하고 다 죽었고 살기 위해 죽은 말 은 물론 무슬림의 시체 까지

먹었다니 일부 식인종으로 변모한 십자군 은 추운 비를 맞으며 진창으로 변한

진지 안에서 굶고 있는 중에 신의 징벌로 생각되는 지진 까지 발생합니다. 신의 진노???

 

 

십자군은 참회의 기도 를 하고 진지 안에서 매춘부를 내치며 금식 기도 를 했으니 살기

위해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으며 은자 피에르도 탈영중에 붙잡혀 탕크레드의 병영으로

끌려왔다고 하는데... 불신해 왔던 비잔틴 제국과 십자군 이 갈라진 것도 이 시기니

비잔틴 장군으로 군사 자문을 하던 타티키오스가 1098년 2월 갑자기 철수 한 것입니다.

 

 

1098년 알레포 리드완 이 구원 병력을 보내왔으나 2월 9일 하림에서 십자군에 격파되는데

3월이 되자 정복왕 윌리엄에게 밀려난후 비잔틴 까지 와서 경호대로 일하던 자칭

영국왕 에드가 가 함대를 이끌고 시메온항에 도착했는데 병력 외에 공성무기등 보급품

을 가지고 있었으니 3월 6일 탈취하려는 투르크 군대의 공격을 고드프루아 가 물리칩니다.

 

 

봄이 되자 식량 사정은 좀 나아지긴 했지만 안티오크는 난공불락 이었는데 십자군은 셀주크

투르크와 종교적, 정치적으로 대립중인 파티마 왕조 로 부터 동맹 제의를 받는데, 반면에

모술의 지배자 아타베그 카르부카 가 십자군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집결시키니 그들은

십자군이 비잔틴 제국 용병이라고 판단했으니 종교십자군 이란걸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집트 파티마왕국 투르크 라는 공통의 적 때문에 비잔틴 제국과 사이가 좋았으니 협상에

들어가나 십자군과 이집트가 예루살렘 을 자신들이 가지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협상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나고 모술의 아타베크 카르부카 가 대군을 소집했으나

2달 전인 1098년 3월 에데사의 백작이 된 보두앵 때문에 먼저 에데사 부터 공격 합니다.

 

 

보에몽 은 안티오크의 두자매의 탑을 지키던 아르메니아인인 피루즈 와 은밀히 접촉해서

1098년 6월 3일 새벽 피루즈가 내려준 사다리 덕으로 도시에 침투한 십자군은

무슬림은 물론 시리아 정교회등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학살 하고 전리품을 약탈했는데

보에몽은 성 함락에 주도적인 역활을 했으니 이 도시의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야기 시안은 죽고 아들 샴스 알다울라를 포함한 투르크군은 요새에 바리케이트 를 쌓고

저항하는중네 보에몽과 사이가 좋지않았던 레몽은 도시가 비잔틴 황제의 것 이라고

주장했지만 지휘관들은 보에몽의 요구 를 들어주었는데 승리의 기쁨은 잠시뿐 모술의

카르부카가 무슬림 대군  이끌고 나타나 도시를 다시 포위했으니 공수가 뒤바뀝니다!

 

 

1092년 말리크샤 1세 사망후 아나톨리아 고원 에서는 룸투르크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과 다니멘슈드가 대립 했고, 시리아를 지배하던 말리크샤 1세의 동생 투투시 1세

사후 아들인 형은 알레포동생은 다마스쿠스 를 지배하며 서로 다투었는데

이라크와 페르시아등의 영지는 말리크 샤 1세의 네 아들 들에게 분배 되었습니다.

 

 

따라서 안티오크 공방전 당시 십자군을 저지할수 있는 무슬림 지배자들은 모술 에....

서로 싸우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가 아니라면 이슬람 보다는 비잔틴과 우호적인

이집트의 시아파 파티마 왕조 정도였는데, 알레포와 다마스쿠스가 패한지라

이제 모술의 지배자 아타베그 카르부카 만이 십자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모술의 카르부카는 성전 을 벌인다는 명분을 내걸고 병력을 모았으니 다마스쿠스의 두카크

까지도 참가했는데 안티오크에 도착하니 간발의 차이로 성벽 위에는 십자군 깃발 

휘날리고 있었는데... 십자군도 도시를 점령해 보니 야기 시안의 보급품과 식량이

오랜 포위전으로 거의 다 떨어진 것이라 결국 포위된 십자군은 다시 굶주리게 됩니다.

 

 

그러나 카르부카는 부하들에게 신뢰를 얻지못하고 있었으니 휘하의 에미르 들과 두카크

마저도 그가 승리한다면 시라아의 새로운 지배자로 군림(?) 하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으니 모래알 처럼 쉽게 흩어질 군대 였는데.. 십자군도 문제가 많았으니

안티오크 함락 하루전날 블루아 백작 스테판이 패배를 직감하고 철군 했던 것입니다.

 

 

안티오크성 함락후 모술 군대가 진격해오자 탈영한 십자군들은 블루아 백작의 패잔병 

합류해 도망치다가 비잔틴 알렉시우스 1세의 원군을 만났으나 철수하고 무슬림

군대는 6월 7일의 기습이 효과가 없었으므로 포위를 유지하기로 했으니 십자군을

굶겨서 궁지에 몰 생각이었지만 십자군에 속해 있던 한 수도승이 술수(?) 를 부립니다.

 

 

수도승 피에르 바르톨로뮤 는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성창(롱기누스의 창) 을 발굴(?)해

기세가 오른 십자군 이 성문을 열고 나오자 카르부카는 한번 전투로 적을 괴멸시켜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십자군을 평원으로 끌어내는데 십자군은 굶주림에

지치기는 했으나 중무장에 잘 훈련된 군대 였으며 지휘관은 역전의 용사 들이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투르크 기마 궁병은 화살로 십자군을 공격했으나 갑옷을 입은 십자군

기사들은 적의 화살에도 강했으니 오랜 금식에다가 종교적 열정이 더해져 성 조지,

성 드메트리우스, 성 마리우스 가 인도(?) 하는걸 보았다나 어쨌다나???

이에 투르크군은 크게 흔들렸으니 적과 협상을 시도한 오만한 사령관을 배신 합니다.

 

다마스쿠스의 두카크 가 먼저 카르부카를 버리고 퇴각하니 대세를 눈치챈 많은 에미르들이

후퇴하는지라 마침내 카르부카가 퇴각할 때 쯤 그의 부대는 보잘 것 없는

수준으로 변해 몰락하고 말았으니 전투는 십자군의 대승리 였으나 다시 논쟁의 불이

붙었으니 이제 안티오크는 누구의 것인가? 보에몽은 자신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 합니다.

 

 

보에몽 은 비잔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게 언제냐는 듯 황제의 신의 없음을 비난 했으며

안티오크 함락에서 자신의 역활 을 강조하자, 툴루즈 백작 레몽 4세 는 물론이고

아데마르 주교도 반대했으니 혼자 안티오크를 점령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베르망두아 백작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는데 황제는 추가 파병을 하는걸 거부 합니다.

 

 

한편 보에몽과 레몽 4세의 대립은 위험한 수준 에 이르렀으니 궁전을 분할 점령 했으며

도시는 보에몽의 통제하에 있다지만 남부 프랑스인과 북부 프랑스인 그리고 이탈리아

노르만 족에 의해 분할되어 내분이 무력 충돌로 번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오랜 기아로 인한 영양 실조와 비위생적인 환경 이 겹쳐서 장티푸스가 돌기 시작합니다.

 

 

영적 지도자인 아데마르 주교 등 많은 군인들이 장티푸스로 죽자 십자군이 떠나니 도시

를 차지한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국 을 세우고는 아르메니아 실리시아의 일부를

노리는데... 고드프루아는 투르베셀을 차지하고 로베르 2세는 라타키아 항구를

점령하며 레몽 4세 는 안티오키아 시내 일부를 점령했으나 보에몽에게 쫓겨 납니다.

 

 

뿔이 난 레몽 4세 는 보에몽의 영토 확장을 방해하기 위해 자신의 영토로써 레반트

(레바논)의 트리폴리의 소유 를 원했으나 십자군 병사들은....

예루살렘 진격을 바랐기 때문에 일단 중단하고 부용의 고드프루아와 함께

예루살렘을 공략하는데 툴루즈 백작 레몽은 훗날 트리폴리 백국 을 창설합니다!

 

 

십자군은 우여곡절 어려운 전투 끝에 예루살렘 외성을 돌파한후 내성에서 농성중인 이슬람

교도들에게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속여 예루살렘성을 함락한후 무슬림은 물론이고 유대인

까지 남녀노소 심지어 동물 까지 살아있는 생명체는 몰살시켜 이교도가 더럽힌 예루살렘

성을 피로서 정화(?) 하는데... 이교도와의 맹서 는 어겨도 하느님이 벌하지 않는다 나요?

 

 

처음엔 레몽 4세가 예루살렘왕 에 추대되었으나, 그리스도가 죽은 땅에서 왕이라고 불리길

원하지 않았기에 거절하자 십자군은 로렌 공작 고대프루아 를 추대해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는데 고드프루아 역시 왕으로 불리길 싫어해서 성묘의 수호자 란 명칭을 썼는데

레몽 4세는 아스칼론 전투에 참가했으나 고드프루아와 다툼을 벌였기에 공략하지는 못합니다.

 

 

이후 레몽 4세 는 십자군과 결별하고는 귀국중에 콘스탄티노플 에서 지내다가 여기서

1101년에 다시 십자군과 합류했으나 아나톨리아에서 이슬람 셀주크군 에게

패배하고는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의

원조를 받아 리비아의 트리폴리 공략 을 목표로 삼았으나 원정 도중에 병사 합니다.

 

 

한편 툴루주백국의 사위로 백작 지위를 주장하는 보르도의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의 조카인

기욤 주르당이 툴루즈 포위를 계속했으나 레몽 4세의 아들인 베르트랑 

툴루즈를 지켜냈고.... 그후 1109년에는 십자군으로 지중해를 건너 트리폴리 를

함락시키고는 아버지가 소원했던 트리폴리 백국 을 세웠는데, 휘하에 있던

레이몽드 드 아길레스가 제1차 십자군의 활동을 레몽 4세의 관점으로 기술하였습니다.

 

 

1144년 모술 무슬림 태수 장기 에 의해 1차 십자군 보두앵이 창설한 기독교 에데사백국 

이 점령되자 교황 에우제니우스가 베르나르도를 보내 국왕들을 설득하니 1145년

에 프랑스왕 루이 7세 와 신성로마제국(독일)황제 콘라트 3세 에 영국 사자왕

윌리엄 이 이끄는 십자군이 일어나서레반트로 진군하니 제2차십자군 전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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