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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 5 - 1차대전 위령비를 보고 아세자 미술관에!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2.02.22|조회수129 목록 댓글 0

툴루즈 여행5 - 1차대전 전물자 위령비를 보고는 아세자 저택 미술관에 가다!

 

 

2018년 5월 19일 툴루즈 Toulouse 에서 버스로 알비 Albi 를 보고 돌아와 지하철로 에스퀴롤

역에 내려 오귀스탱 미술관 Les Augustins 에 가니 14세기에 지어진 수도원 건물에 초기

그리스도교 종교 예술품을 모아놓은 곳으로 들라크루아, 로트레크등 회화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오귀스탱 미술관을 구경하고는 밖으로 나와서는... 우리네 동구밖 정자 처럼 큰 나무

아래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지나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잠시 휴식한 다음에

다시 일어나서 동쪽 방향으로 걸으면서 오래된 도시의 예쁜 건축물들을 구경합니다.

 

 

프랑스 서남부 피레네 산맥 아래 도시 툴루즈  Toulouse 는 중국이나 베트남 처럼 거리에

오토바이를 타는 여성 들이 많이 보이는데.... 우리나라에 청년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쪽에 함께 타는 젊은 연인들과는 달리 처녀들 스스로 운전 하고 다니는게 인상적입니다?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는 생테티엔 대성당 Cathedrale St. Etienne 으로 들어가 구경

하는데.... 에티엔 Etienne 이라면 성녀 즈느비에브 를 기리는 이름인 듯 하니,  

파리 생트 즈느비에브 (Sainte Geneviève) 언덕에 자리한 생 에티엔 뒤 몽 교회

Church of Saint Etienne 가 생각 나니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를 촬영한 곳입니다.

 

 

 생트 즈느비에브 는 파리의 수호신 으로 여겨지는 성녀이니 과거 중세와 근대에 도시

질병이나 전쟁 같은 위험한 일이 있을 때마다 파리 시민들은 즈느비에브

에게 예배 를 드리거나 그녀의 유골함을 들고 시내를 행진 하였으니.....

생 테티엔 뒤 몽 교회는 이러한 성녀 즈느비에브의 성소로 알려져 있다고 하네요!

 

 

 에티엔 Etienne 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가 있으니 프랑스 남부 론알프주 루아르현

주도 이며 그 외에도 에티엔 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성당이 부르주 라는

도시에 있으니... 거긴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에 속한다고 합니다.

 

 

부르주의 생테티엔 대성당 Cathedrale St. Etienne 은 대주교 앙리 드 쉴리가 프랑스

북부에 있는 성당(랭스?) 과 겨룰 만한 새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모델 로 해서 1195년에 세웠으니 고딕 양식이 완숙함에

이르렀을 때 건설된지라.... 프랑스에서는 가장 뛰어난 고딕 양식 성당 이라고 합니다.

 

 

생테티엔 대성당 을 나와서 저만치 큰 도로 한복판에 멋진 기념비적인 건축물 이 보이기로

발걸음을 빨리해 건너가서는 살펴보니 비에 글귀와 사람 이름이 적힌 명문에다가...

 최근에 가져다 놓은 듯한 꽃들이 많이 놓여 있는데 보니 1차대전 전몰자 위령비 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독일과 러시아등 양측이 전쟁할 생각도 없으면서

상대방의 양보만을 요구하다가 자존심과 국민감정 때문에 거짓말 처럼 전면전으로 빠져

들어가 1천만명 이상 살상 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으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전쟁 입니다.

 

 

1914년 6월 발칸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쏘아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유럽은 제국주의 로 더 많은 식민지 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니... 식민지 쟁탈전은 선진 제국주의 국가 영국을 중심으로 프랑스·

러시아가 손잡았고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한편이 되었습니다.

 

 

 두 세력이 북아프리카에 이어 날카롭게 부딪친 곳이 발칸반도 였는데 이 지역을 지배하던

오스만 투르크 가 쇠약해지면서 19세기에 이르러 민족 독립운동 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사라예보 사건은 '유럽의 화약고' 에 불을 붙인 셈이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했으며 동맹관계에 따라 유럽은 전쟁터 가 됩니다.

 

 

세르비아 인들은 발칸 반도에 흩어져 있던 동족들을 모아 대국 을 이루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는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하였으나

현상 유지 정책을 펴던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견제하였으니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포스터를 만들어 애국심을 부추기면서 성인 남자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각 나라는 '국가의 영광' 을 내세우며 국민들을 전쟁으로 내몰았

는데 그 전까지 '전쟁 반대' 를 외치던 사회주의 정당 들 조차도 '애국' 

구호를 외치며 저마다 전쟁에 참여하였으니,  "위대한 조국을 위하여!"

라는 구호 속에...... '식민지 쟁탈전' 이라는 전쟁의 본질은 가려져 버렸습니다.

 

 

조국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안고 전장에 나선 병사들은  끔찍한 전쟁의 참상에  경악

했는데 기관총, 대포, 전차 같은 현대식 무기는 무서운 파괴력 을 과시해 낭만적인

나폴레옹 전쟁과는 완전히 달랐으니, 군인들은 땅을 파서 참호 를 만들고 대치하자

전선은 고정되었고... 전쟁은 장기전으로 빠져들어 끝없는 살상전, 소모전 이 벌어집니다.

 

 

프랑스와 독일간에 참호전 을 통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은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장기전과 소모전 으로 나아갔고, 희생자도 그만큼 늘어났으니

전쟁의 결과, 전사자는 900만명 에 육박했고, 부상자도 2,200만명 

이르렀으며..... 민간인 희생자도 역시 1,000만명 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후방도 전쟁의 소용돌이 에서 벗어날수 없었으니 여성들도 군수물자 

생산하도록 강요당했는데 영국은 초등학교도 못나온 문맹인 남자도 투표권을 주면서

대학을 나온 박사 여성은 투표권이 없었으니 여자들이 목숨을 버리고 대거 감옥에

가면서 까지 투쟁해도 소용없었는데... 여성의 전쟁 참가로 전후에 투표권 을 얻게 됩니다.

 

 

독일 편에 가담하였던 오스트리아 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먼저 항복 하였고...

1918년 킬 군항에서 독일 해군들이 폭동 을 일으키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외국으로 도망갔고.... 독일은 새로이 공화국을 수립해

1918년 11월 무조건 항복하니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 를 발표합니다.

 

 

이에  일본의 식민지 조선  에서도 부푼 꿈을 안고  3.1 만세운동 을 벌이는데.... 이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일이니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에 이라크를 차지하고 프랑스는

레바논과 시리아를 차지했으며 터키를 탐내 그리스와 함께 아나톨리아를 침략했으니

민족 자결은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의 영토를 쪼개서 세력을 약화 시키는게 그 목적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파리 개선문의 윗층 으로 올라가면 거기 1차 대전에 승리한 연합국

군대가 개선문을 지나 상젤리제 거리를 행진하는 사진 이 있는데....

거기 연합군에 동양인 군대 가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는 사진이 있어 놀라는데,

바로 일본군 이니...... 산동성 청도에 주둔했던 독일군을 공격했던 그 일본군 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이고 미국과 우방 이었으며 1차 대전에서도 같은 연합국

이었으니 전쟁에 승리한 나라 로서 전리품으로 새로운 영토 를 더 얻어야 할 판에?

기존에 차지하고 있던 영토인 조선을 내놓다니? 동서고금 인류 5천년 역사에서 전쟁에

승리하고도 영토가 줄어든 사례가 단 하나라도 있었던가요? 새 영토를 추가로 더 얻어야...

 

 

그러고는 되돌아서서 도로를 건너 서쪽으로 걸어서 지하철 에스퀴롤 Esquirol 역을 지나 

걸어면서 아세자 저택 Hotel d'Assezat 을 찾아가서는 중정 으로 들어가는데 여기

까지는 무료이지만 내부로 들어가자면 입장료를 내야 하는지라 8유로 를 내고 입장합니다.

 

 

16세기 툴루즈는 염색재료 거래로 크게 번영 했으니 아세자 저택 Hotel d'Assezat 은 당시

거상의 저택 인데 이오니아, 도리아, 코린트식을 도입했으며 안뜰에서 바라보는 건물은

아름다우니.... 보나르, 로트레크등의 작품과 회화를 전시하는 미술관 으로 사용 중입니다.

 

  

건물 안에는 엣날 저택에 있었던 가구들은 최소한도로만 남겨놓고 미술 작품 전시를 위해

비웠는데..... 3개층에 이르는 미술품 은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기가 질릴 지경으로

파리 오르세 미술관 처럼 눈과 귀에 익은 화가들은 별로 없고 우리에겐 좀 낯선 편 입니다.

 

 

 4시 50분에 들어가서 3개층을 뛰다시피 돌아다녀 50분만인 5시 40분에 미술관을 나왔는데

서양인들은 우리와는 달리 하루에 미술관 하나만 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녹음기 를 들고

관심이 가는 그림 하나에만도 20여분씩 보는지라... 5~ 6시간 을 쓰며 자세하게 감상합니다.

 

 

나야 한국말로 된 녹음기를 공짜로 주어도 사양하는 것은 어떤 미술관도 1시간 이상은

투자할수 없기 때문인데, 그래도 오늘은 오귀스탱 미술관 을 대충 보았는지라

두번째인 아세자 미술관 에서는 마음에 드는 그림은 화가의 이름과 그림 제목 

두루 메모했으니.... 대표적 화가는 보나르 Pierre Bonnard 와 로트랙 을 들수 있습니다.

 

 

피에르 보나르 Pierre Bonnard 는 1867년 파리 교외 퐁트네 오 로즈 태생으로 법률 

공부하였으나 그림에 흥미를 가져 틈틈이 아카데미 줄리앙이나 미술학교에

다니다가 1889년에 이르러 그림에 전념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는 고갱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과 함께 반인상파(反印象派) 인 나비파(派) 를 결성하였습니다.

 

 

초기에는 흑갈색을 기조로 한 차분한 색감으로 파리 시민의 일상 생활 을 상징적으로

그렸는데 40대에 접어들면서는 밝은 색조로 이행 하였으며 독특한 시각에서 잡는

기지적(機智的) 구도로, 풍경ㆍ 멱감는 나부(裸婦)ㆍ 정물이나 사람이 모인

부드러운 실내 정경 등을 소박하면서도 도시인 다운 감미로운 정감 으로 그렸습니다.

 

 

보나르 는 뷔야르와 함께 대표적인 앙티미스트(親密派) 로 높이 평가되었는데 색채에

대한 관심은 나이와 더불어 더욱 깊어졌으니 60세를 지나면서는 선명한

명색(明色)의 조화 를 추구하였으며 차차 대상의 설명에서 벗어나 현란한 색들이

교차하는 독자적인 색채의 세계 를 확립했으니.... "색채의 미술사" 라고 불리었습니다.

 

 

제2차 대전 중에는 남 프랑스의 르 카네에 틀어박혀 제작에 몰두하였다는데... 전후

에는 병을 얻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유화 이외의 과시

 (gouache)ㆍ수채화ㆍ석판화(石版畫) 에도 많은 가작(佳作) 을 남겼다고 합니다.

 

 

앙리 툴루즈 로트레크 Henri de Toulouse-Lautrec 는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술집· 매음굴

등을 소재로 작품을 그렸으니....... 그의 소묘 는 근대 소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데, 30대 이후 알코올 중독 으로 인한 정신착란으로 병원에 입원 하였으며

요양 중 37세에 죽었는데 1864년생으로 그의 고향인 알비시에 로트레크 미술관 이 있습니다. 

 

 

주요 작품은  “니스로 사두마차를  몰고 가는  로트레크 백작”,  “세레랑의 젊은 루터”,

“목욕하는 여인”등이 있으며 툴루즈 동북쪽 알비 출생인데.... 처음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화가 프랭스토에게 배웠고 1882년 부터는 파리에서 코르몽의

지도를 받으면서 개성있는 소묘화가 (素描畵家) 로서 독자적인 자질을 키워 나갔습니다.

 

 

이 무렵 로트레크 는 고흐, 고갱 등과 알게 되었고 드가의 예술 에 끌리기도 하였다는데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 를 차리고 그후 13년 동안 술집과 뮤직홀 

의 정경을 소재로 삼아 정력적으로 작품제작을 하였으니 처음에는 풍자적인 화풍

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유화와 더불어 석판화도 차차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로트레크 는 1889년 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고 최초의 개인전은 1893년에

파리에서 열었는데 그의 소묘는 날카롭고 박력있는 표현 으로 유명하니

그런 소묘의 힘에 바탕을 둔 유화는 어두우면서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조와 독자적인 작풍으로 인생에 대한 그의 통찰과 깊은 우수 를 공감하게 한다네요?

 

 

30대 이후 알코올 중독 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1899년에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하였는데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말로메의 별장에서

요양을 하던중 30대에 생애를 마쳤는데 어머니는 아틀리에에 남겨진 아들의 작품을

챙겨 고향인 알비시에 기증하였고 1922년 알비시에 로트레크 미술관 이 개관되었습니다.

 

 

그외 화가들을 보자면 배를 그린 Euggne Boudin, 소녀를 그린 Canille Pissarro, 해변과

다리를 그린 Stanislas Legine, Claude Manet, 파리의 다리를 그린 Albere Lebourg,

숲을 그린 Armond Guillaumin, 말을 그린 Paul Serusier, 강변을 그린 Raoul Pufy 에...

 

 

누드화를 그린 Andre Berain, 엄마와 아기 Elemis Upainting, 남자를 그린 Frans Floris,

큐피드와 비너스를 그린 Lucas Cranach, 베네치아의 다리를 그린 Antonio - Canal

the Rialto Bridge, 여자들을 그린 Francesco Zuccarelli - Country feast 들이 보입니다.

 

 

그러고는 비록 미술에 문외한 이건만 가슴 가득 포만감 을 안은채 아세자 저택 미술관을

나와서는 서쪽으로 걸어서 가론강 으로 가는데 도로변에서는 술을 마시며 축구

시합을 관전하는 술집 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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