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샤프란볼루5 - 케르반사라이 진지하느에 실크로드 대상!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2.03.12|조회수109 목록 댓글 4

 

샤프란볼루 여행5 - 차르쉬의 케르반사라이 진지하느에서 실크로드 대상을 회상하다!

 

 

5월 15일 앙카라 에서 버스를 타고 샤프란볼루 Safranbolu 에 도착해 세르비스 로

신시가지 크란쿄이 Kirankoy 에 내려서 택시로 구시가지 차르쉬 Carsi 에 갑니다.

 

 

염색재 및 약재, 향신료 로 쓰였던 "샤프란 꽃" 에서 유래했다는 마을은 오래된

옛 주택 들이 많아 전세계에서 사시사철 수많은 관광객들 을 불러 모읍니다.

 

 

오래된 옛 골목길 을 걸어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 (Koprulu Mehmet Pasha) 자미를

보고 흐드를럭 언덕 Hidirlik Tepesi 에 올라 샤프란볼루 시가지를 조망 합니다.

 

 

그러고는 내려오다가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서서 18세기 무렵에 세워져서는

19세기 육군 중령이 살았다는 3층짜리 고풍스러운 카이마카믈라

저택 을 구경하는데 1979년에 국유화해서는 현재는 박물관 으로 3층 입니다.

 

 

다시 번화한 골목을 지나 17세기에 실크로드 의 케르반 사라이 진지하느 를 찾아가는

데.... 지금은 호텔에다가 레스토랑 에 Information center 까지 들어 서 있습니다.

 

 

낙타와 말 에다가 비단이며 진귀한 보물 을 싣고는 사막을 넘어 강을 건너고

험한 산을 지나 대상 들이 하룻밤 묵는 숙소 가 이런 케르반사라이 입니다.

 

 

그런데 대상 의 숙소였던 건물 캐르반사라이 를 둘러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중국에서 영화 로도 만들어졌던  “징기스칸”  입니다.

 

 

그 중에 1220년 호라즘 정벌 이 나오는데..... 호라즘 왕국 은 11~13세기에 카스피해 서쪽에

이란에서 우즈베키스탄에 걸친 이슬람 국가 로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 였다고 합니다.

 

 

당시 호라즘 왕국 은 신생국으로 실크로드의 중간 에 위치했는데 징기스칸이 보낸 대상 인

통상사절단을 모두 죽이고 이를 항의하러 보낸 사신을 다시 죽이는 일 이 발생합니다.

 

 

조선과 같은 농경국가 의 농촌 은 근본적으로 자급자족 체제 인지라 소금 장수와

건어물 장사에 방물 장수를 제외하고는 외부인이 마을로 들어올 일 이 없습니다.

 

따라서 낯선 사람 은 약탈을 하려는 오랑캐나 왜구 인지라 자연히 경계하지만........

유목사회 는 자급자족이 불가능 한지라 외부의 낯선 사람을 환영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목 사회의 불문율을 깨고 술탄의 외삼촌인 오트라르의 태수

가이르칸 이날축 은 재물에 눈이 멀었던지 사신과 대상 들을 죽이고

약탈했으니... 징기스칸과 몽골인들의 "노여움은 하늘을 찌를듯" 했습니다.

 

 

분노한 징기스칸 은 18만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해서 순식간에 호라즘 왕국 

멸망 시켰으며...... 이후 아시아의 "이슬람 국가 전체가 몽골" 에게 정복되었습니다.

 

 

이슬람권은 이집트와 아라비아 그리고 북아프리카 정도만 남았는데 몽골은 편협

하지 않았던지라... 피정복지의 종교와 문화 를 그대로 인정한게 특징 입니다.

 

 

또 다른 전쟁 이유로 국서 를 드는데 외국이 중국에 국서를 보낼 때는 臣(신) 이라고 표기

한 것만 접수하니 고구려 장수왕이나 백제 개로왕 이 북위에 보낸 국서 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징기스칸의 국서 를 받은 호라즘 왕 은 몽골의 군신관계 표현 

대하여 분노했다고 하니...... 중원 문화에 대한 오해 일까요?

 

 

당시 호라즘 왕국 을 비롯한 이슬람권은 유럽 십자군의 침략을 격퇴한 후라서.... 사기가

충천했으며 이들은 5백년 전에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경험 도 있었습니다.

더욱 호라즘은 본토에서 전쟁한다는 잇점과 40만이 넘는 대병력 을 보유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13세기에 혜성 처럼 등장한 몽골 을 잘 몰랐기 때문에 과소평가했던 것이니... 양쪽

군대가 붙자마자 곧 승부 가 나는데.... 호라즘 왕국은 자신들이 몽골 기마병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니 이후 몽골군의 잔인무도한 대학살 이 이어집니다.

 

 

1219년에 시작된 몽골의 호라즘 정벌 은 1225년 귀환할 때 까지 6년이 소요되었는데....

몽골병은 10만 이나 투항한 거란족 까지 포함해 14만에다가 위구르에서 파병된 병력

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부족들에다가 중국 한족의 공병대 까지 합쳐 18만 정도였습니다.

 

 

훗날 1231년 오고타이가 살리타 를 보내 고려군 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은 1차 침입군이

2만여명, 2차가 1만 인걸 생각하면 대군 인데 행군속도는 사자왕 리차드가 하루 16km, 

알렉산드로스가 24km, 카이사르가 33km 인데 비해 몽골은 기병이라 130km 였다고 합니다.  

 

 

몽골군 은 기병 으로 초원 전투에서는 막강하지만 요새나 성벽 을 끼고 싸우는 전투에서는

약하니 금나라 성채를 공격하면서 뼈저린 경험을 한 징기스칸은 호라즘 정벌 때는

중국에서 공성무기 투석기와 사다리 차 를 다루는 중국인 기술자들로 공병대 를 편성합니다.

 

 

몽골군은 이미 중국에서는 보편화 되어 있었고 금나라 병사들이 무기로 사용하였던

화약무기 를 도입하여 호라즘 원정에 처음으로 사용 하는데.... 

  중동 전투에 도입한뒤 이곳 중동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가공할 무기 로 둔갑했습니다.

 

 

철통에다 화약 을 넣고 돌이나 쇠조각 을 넣어 발사하는 초기의 대포 를 개발한 사람들은

몽골인 이었는데 후에는 왠만한 성들은 투석기를 사용하지 않고 화약무기로 성벽을

파괴하는 단계로 발전했으며 이 화약무기 는 중동을 거쳐 그후 유럽 원정에서도 사용됩니다.

 

 

1220년 몽골군대는 오트라르 에 도착하자 호라즘의 술탄은 2만의 병력을 배치하니 장본인인

 오트라르의 태수 이날축 이 지휘하는데 따로 기병대장 카라차가 1만 기병 으로 돕습니다.

 

 

몽골군은 오트라르 전투 를 둘째와 세째 아들인 차가타이와 오고타이 에게

맡기고 첫째 주치와 알락등에게 별동대 를 준 다음에....

징기스칸 자신은 네째 아들 톨루이와 함께 부하라로 출정 했던 것입니다.

 

 

차가타이와 오고타이는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해 오트라르를 완전 포위 했고 장장

5개월 동안의 전투 가 벌어졌으며 성의 수비병들은 기진 했으니...

카라차 혼자 밤중에 성문을 열고 병사들을 이끌고 나와서 몽골군에게 항복 합니다.

 

 

두 왕자들 앞에 불려간 카라차 는 투항한 지휘관에 대한 대접을 받기는 커녕

“주군을 배신한 너같은 놈과 같이 한 마음이 될 생각이 없다”

말을 듣고 항복한 전 병력 과 함께 모조리 들판에서 몰살 당하였다고 하네요?

 

 

오트라르 성문 이 열리자 이날축은 시민들과 잔류 병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2만명의

병력으로 성주가 거처하는 성채 안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거 하였으니 전투는

다시 한달을 더 끌었고 결국 성채안의 호라즘 병사들은 전원 전사 하였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오트라르 시민들은 들판으로 끌려나갔고 도시는 몽골군에게 철저히 약탈 당했는데

몽골군들은 오트라르의 귀족과 지배계층을 학살 하고는 주민들은 성별로, 직업별로

분류해 젊은 여자들은 따로 데려가고 젊은이들은 징용대로 쓰기 위해 전쟁터로 끌고 갑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부하라나 사마르케트쪽으로 도주 하였는데 몽골군들은

그들을 쫓지않고 방치 했으니 적국 도시에 공포감 을 퍼트리려는 선전술 입니다.

 

공포감이 조성되도록 유도하는 이러한 전술 은... 상당히 효과를 보여 수많은 도시들이

스스로 항복 했고 공포감으로 치안유지가 되지 않는 도시는 스스로 무너집니다.

지배층을 모두 학살하고 나머지는 포로로 끌고가면서 도시 성벽을 허물어 평지 로 만듭니다.

 

 

 하지만 호레즘에도 인물이 있었으니 술탄 모함메드가 죽은후 아들 잘랄 웃딘 은 1221년

아프카니스탄 가즈니 에서 몽골군 분견대에게 승리 를 거두지만 추격을 받는데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 까지 퇴각했으나 뒤에는 인더스강이라 오도가도 못하게 됩니다.

 

 

 병사들은 물에 빠져 죽거나 몽골군에게 학살됐으며 나머지 절반은 몽골군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그는 항복을 거부 하고 말을 탄 채로 강물에 다이빙을 했으니....

징기스칸은 너무나 놀라서 손을 입으로 물었다는데 잘랄 웃딘을 추격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징기스칸 은  모든 애비는 저 같은 아들을 두기를 바랄 것” 이라는 격찬도 곁들였다는데...

그후  잘랄 웃딘 은 인도에서  이란을 거쳐 아나톨리아 고원을 떠돌면서 몽골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지만 1231년에 쿠르드족에게 살해 당하는데 몽고가 고려를 1차 침입한 해라!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징기스칸이 놓아보낸 잘랄 웃딘 을 쿠르드족은  몰라보았는데

그가 죽고 13년 후에는 다시 몽고족이 아나톨리아까지 쳐들어와 쾨세다으 에서

셀주트 투르크군을 대파 하니... 샤프란볼루 는 점령당하고 터키는 몽골의 속국 이 되네요!

 

 

이후 몽골이 세계를 통일 하자... 황폐해졌던 초원에도 몽골의 지배하에 평화를

되찾게 된지라 도시마다 다시 실크로드 의 대상 을 위한 케르반 사라이 

속속 건설되었으니..... 바로 여기 터키 샤프란볼루의 진지하느 같은 시설입니다.

 

 

그 후에 아나톨리아 에서는 셀주크 투르크의 한 분파인 오스만투르크 가 강성해져

서쪽 비잔틴제국 을 정복하는 중에 몽골의 후예 티무르 와의 전투에서 대패합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이 티무르군에게 포로 로 잡히니 앙카라 와 여기

샤프란볼루 는... 또다시 몽골인들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2.03.13 반가운 봄비 부슬부슬 내리는 휴일 아침...
    좀더 많은 비가 내려 봄 가뭄도 해소되고
    동해안 산불도 조기 진화되길 소망합니다
    행복한 휴일 되십시요.................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3.18 네!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 답댓글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2.03.18 바이칼3 즐거운 시간되세요
    꽃도피네요 하하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3.18 카페지기 그렇지요!
    꽃피는 춤3월 이라.....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