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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툴롱3 - 고대 해전(살라미스,포에니,악티움)을 보다!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2.04.13|조회수65 목록 댓글 2

 

 

프랑스 툴롱3 -  해양 박물관에서 고대 해전(살라미스,포에니,악티움) 을 보다!

 

 

어제 툴루즈 에서 기차로 지중해 도시 툴롱 Toulon 에 도착해 걸어서 항구로 가서는 빽빽이

늘어선 요트의 마스트 돛대가 숲을 이룬 항구를 보았는데 13일째인 오늘 5월 21일

툴롱 기차역 옆에 버스 터미널 Gare Routiere 로 갔더니 생트로페 St. Tropez 

10시 50분 버스는 없고 첫 차가 12시 30분이라는데 불어를 못하니 이유를 알수가 없습니다?

 

 

 

 

생트로페 버스는 왕복 5유로라기에 표를 끊고 기차역으로 가서 유레일 패스를 제시하고

내일 마르세유를 거쳐 엑상 프로방스 로 가는 기차표를 끊을려니 바로 타라는데...

그럼 일반 기차 가 연결되나 봅니다? 버스 출발 시간이 늦으니 그 전에 툴롱

시내 해양박물관 을 보자 싶어 시내지도를 들고 남쪽으로 걸어서 항구 방향으로 향합니다.

 

 

 

작은 공원이 나오니 Place D'Armes 이라! 뭘까?“다름 광장”으로 발음되는데....

그보다는 “연병장”으로 읽어야 할까요? 그러고는 한 모퉁이를 돌아

고풍스러운 건물이 보이길래 다가가니 해군 본부 라.... 건물 앞에서

카메라를 꺼내니 정문에서 경비하는 군속 같은 나이 든 분이 사진 촬영은 안된다네요?

 

 

정면 촬영은 포기하고 해군 본부 (해양청) Prefecture Maritime 건물을 돌아가서는 측면

사진만 찍고는 그 옆에 자리한 로마 시대의 유적 같은 오래된 고풍스러운 건물은 바로 

해양박물관 Museo de la Marina 인데, 해군 박물관 Navy Museum 으로도 불리는 곳입니다.

 

 

10분 가량을 기다려야 하는지라 근처 바다로 가서는 빽빽이 늘어선 요트 들을 구경하는데

그 뒤로 회색의 군함 들도 보이기로 보고 돌아오는데 광장에는 버스가 서고 초등 학생

들이 단체로 타는 모습을 보이니 월요일 아침 부터 어디 현장실습 이라도 가는 것 일까요?

 

 

10시 정각에 해양박물관 으로 들어가니 대형 그림 부터 보이는데 18세기풍으로 툴롱 항구에

범선들이 보이고 줄지어 쌓인 대포와 포탄을 배에 싣는 듯한 광경이라..... 또 축소된

모형 범선이 7~ 8척 이나 전시되고 배에서 사용되는 물품들이며 그외 항구 주위에 병영

풍경에다가 바다를 메운 범선들이 그려져 있으니 그럼 옛날 툴롱항 을 그린 것인가 봅니다.

 

 

 

한참 구경을 하는 중에 아이들 소리 가 나서 보니 그새 박물관에는 견학 온 프랑스

학생 들인가 본데, 조금전에 밖에서도 단체로 버스에 타는 프랑스 학생들을

보았으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하비에르 국제학교 교사인 임정원 씨의

칼럼‘봉주르 에콜’에 나오는 “한국 역사 가르치는 프랑스 교실” 이 생각납니다.

 

 

“새로 지은 베르사유 궁전에 왕의 시종장 으로 입궁한 귀족이 되어 파리에 있는 친구

에게 편지 를 써라. 단, 베르사유궁의 특징과 그곳에서 지내는 귀족들의

생활상과 풍습에 대한 묘사가 포함돼야 한다.“아이가 중학교

1학년 때 프랑스 루이 14세의 절대 왕권 에 대해 배우고 나서 본 역사 시험 문제 였다.

 

 

"아이는 시험 문제가 “재미있었다”며 신나게 이야기 했다. 아직 프랑스어가 서투른

상태에서 역사를 배우는 거라 겁을 먹고 있었고, 결국 좋은 점수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첫 시험 덕분에 역사를‘재미있는 이야기’

라고 여기고 흥미 를 가지게 돼 이후에 역사를 좋아하고 잘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프랑스 고등학교 에서는 역사 시간에 식민지-제국주의, 1, 2차 세계 대전,

냉전 시대 등 근현대사 를 중점적으로 배운다.

다양한 교과서들이 있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이 교육과정에 따르고 있다.”

 

 

“이 중에 냉전 시대 부분에서는‘사례 연구’로 “베트남전”과 “한국 전쟁”이 서너쪽

 정도 다뤄진다. 교사가 둘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모두 베트남전을 가르쳐 왔다.

베트남 이 프랑스의 식민지 였고 프랑스에 정착한 베트남 사람 들이 많기 때문이다. ”

 

 

“게다가 얼마 전까지 프랑스 역사 교사들 조차 한국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교포 학생들은 불만이 많았고 속상하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그런데 프랑스 학교에서 일하던 지난 6년 동안 분위기가 변하는 것 을 체감할 수 있었다.”

 

 

한국어가 대학입시 정규 과목(선택) 으로 채택되고, 언론을 통해 촛불 혁명과 대선

소식이 전해지자, 동료 교사들의 인식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 교사들은 나에 대한 관심과 친절이 늘었고 한국 역사에 대한 질문도 많아졌다."

 

 

"케이팝이나 드라마 뿐 아니라 한국 역사 에도 관심을 가지는 프랑스 중· 고등학생들도

 늘기 시작했다. 한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 와 함께, 역사 교육을 중시하고

프랑스 아니라 세계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는 프랑스 학교의 분위기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 지인들에게 오는 메일 이 지난달 부터 부쩍 많아졌다."

 

 

"남북 회담에 이어 북-미 회담 이 프랑스 언론에서도 크게 자주 다루어지자, 파리 학교의

 옛 동료들과 제자들은 생생한 소식과 정보 를 내게 직접 듣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또, 한국어를 제2 외국어 로 선택한 학생들은 월드컵에서 우리가 독일에 멋진 승리 

거둔 것을 프랑스의 16강 진출 못지않게 기뻐하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를 보내왔다.”

 

 

“프랑스 학교의 옛 동료 카트린 은 작년 9월 내가 한국에 다시 돌아간다고 했을 때,

북-미 갈등과 전쟁 위험성 을 이야기하며 걱정스러운 표정 을 지었는데, 최근

연이은 한반도 정세 변화에 흥분하여 얼마전에는‘축하’한다는 메시지까지 보내왔다."

 

 

"카트린은 자신은 곧 한국전쟁에 대해 가르치는 몇 안 되는 프랑스 고등학교

역사 교사 중 하나가 될 거라며 자랑(?) 했다. “역사 시간에

가르칠게 늘겠는걸. 한국은 이제 세계사에 중요한 획을 그을 테니까 말이야.”

 

 

여기 해양박물관 에 전시된 것들은 아주 다양한데 그 중에서 세계 최대 스케일 이라는

24분지 1 모형 범선 을 볼수 있으니.... 배의 각 부분 디테일 을 볼수 있는

데다가  마스트의 밧줄이나 매듭은 실물 크기 라고 하니 한참동안 자세히 둘러 봅니다.

 

 

“바다를 지배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이니 옛날 부터 해전

으로 국가의 운명이 판가름난 경우는 부지기수입니다. 해전(海戰) 은 선박 위에

탑승하여 치러야 하니 육상전 보다는 늦게 출현했으니 최초의 해전 은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해군과 페르시아 해군이 격돌한 “살라미스 해전”일 것입니다.

 

 

그리스 부터 로마 시대 까지 벌어진 고대 해전 의 경우에는 원거리 전투가 근본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대부분 "근접하여 갑판전" 을 벌이는 형태가 주류였으니 충각

전술 인데.... 함선들의 다량의 노 를 가지고 흘수가 얕고 길이가 긴 갤리선 계열

이라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으니 속도나 조향을 비교적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상대편 함선에 올라타기 전에 충각을 이용한 충격으로 적 함선에 피해를 입히는 것만으로

상대 함선에 큰 피해 를 줄수 있었고 충격시 요동으로 탑승 전투원을 줄이는 부수

과도 얻을수 있었으니 대표적 해전은 기원전 480년 9월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입니다.

 

 

다리우스가 죽고 페르시아 왕위에 오른 아들 크세르크세 는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제3차

그리스 원정을 준비했으니 BC 480년 봄 크세르크세스는 16만명의 병력과 1,200척

함선을 끌고 그리스 북부로 진격했는데 그 전에 4년에 걸쳐 노예들을 동원해

헬레스폰토스 ( 다르다넬스) 해협에 선박을 연결시켜 만들었던 다리 를 건넜습니다.

 

 

아후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온의 방위선을 돌파하게 되는데....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1세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했으나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테르모필레에서 7일 동안 페르시아 군을 막아내며 그리스 해군의 퇴각 시간 

벌어준 덕분에 아테네인들은 아티카를 포기 하고는 살라미스 섬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는 점령했으나 살라미스섬에 대한 공격 이 여의치 않으니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 는 거짓 정보를 보내 페르시아

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만으로 유인 하니 BC 480년 9월 23일 아테네 함대를 주력

으로 한 그리스 연합해군은 살라미스 해협에서 우세한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 하게 됩니다.

 

 

 

그 전에 테미스토클레스의 호소로 아테네는 3단 노함선 을 건조했는데 170명까지 노를 저을

수 있는 배는 1인당 하나의 노를 맡도록 했으며, 노는 3단으로 배열되어 있었으니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모두 총 380척의 함대 를 확보했는데.... 1,200척의 페르시아

함선과는 비교가 안되는 숫자지만 그리스 3단 노함선이 질적으로는 더 우수 했다고 합니다.

 

 

전술적 이점은 그리스 쪽에 있었으니 페르시아 함대는 명량 해전 처럼 좁은 살라미스해협

때문에 모든 배가 동시에 싸울수 없었는데다가 대형을 유지하지 못한채 무질서

하게 공격하는데 비해, 그리스군은 준비된 장소 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격 

취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또한 빠른 속도와 단단한 충각 을 이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일순간에 공격명령을 내림으로써 격전이 벌어지는데 그리스 3단노함선은

적선의 노를 부러뜨리고 적선 좌우 측면을 들이받는등 의 기술적 이점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니 7시간의 격전을 치른 결과 페르시아는 200척의 함선이 격침

당하고 200척이 그리스군에 포획 당했는데 그리스 함대는 40척을 잃었을 뿐 이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해전에 패해 보급마저 끊길 위험에 처하게 되자 서둘러 회군하고 말았으니

그리스 해군은 여세를 몰아 이듬해 여름 소아시아 지역으로 출동하여 페르시아

나머지 함대를 모조리 쳐부수었는데 이후 두번 다시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지

않았으며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아테네는 오랫동안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 고대 해전은 포에니전쟁 이니 시칠리아섬의 메시나 는 그리스인의 식민도시인데,

BC 265년 시칠리아 섬 중서부는 카르타고 가 지배하고 동부는 메시나와 시라쿠사로

 양분 되어 있었는데, 강국 시라쿠사가 메시나를 침략하자 메시나는 해협 건너편에

로마에 굴복한 자치 도시 레기움 을 생각해 내고는 자기들도 로마에 구원 을 청합니다.

 

 

 로마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디우스  2개군단 1만 7천명 을 이끌고 출전하여 레기움 에서

해협을 건너 메시나에 상륙해 동맹을 맺자 앙숙이었던 시라쿠사와 해운 강국 카르타고

역시 위협을 느껴 동맹을 맺어 대항 하니 제1차 포에니 전쟁 인데.... 육상전에서

로마군 승리후 카르타고 4만 대군이 상륙하자 BC 260년 메시나에서 1차 해전 이 벌어집니다.

 

 

지중해를 제패하고 있던 카르타고 해군은 5단층 갤리선 120척 을 소유하고 있었던데

비해 로마는 동맹도시인 나폴리와 타렌토의 3단층 갤리선 이 고작이니, 3단층

갤리선 이란 노잡이가 갑판 아래 3층으로 된 단 위에서 노를 젓는 것으로 대략

100명의 노잡이 를 필요로 하며 승무원과 전투원을 합쳐 80명을 승선 시킬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5단층 갤리선 은 5층의 단 위에서 노를 젓는데 노잡이가 무려 300명 이요, 선원

100명에 전투원 120명 에 달하며 갑판이 높아 3단층 배를 내려다 보며 활을 쏘니

전투에 유리했는데, 로마는 원래 해군이 없었으니 나폴리와 타렌토의 3단층 갤리선에

의존하다가 나포한 카르타고 5단층 갤리선을 해체해 복제하여 5단층 갤리선을 건조합니다.

 

 

로마 하층민들을 징집해 노잡이 훈련을 시킨후 선원은 나폴리등 동맹 도시 사람들을

소집하고 전투원은 로마 중산층이 승선하여 전투준비를 마치고 출진하는데

100척의 5단층 갤리선  200척의 3단층 갤리선 을 더한 300척 함대는

집정관 스키피오 가 맡고 육군은 두일리우스 가 지휘해 시칠리아 섬으로 파견됩니다.

 

 

집정관 스키피오 가 17척 소함대로 리파리섬을 점령하려다가 포로 가 되니 해군 까지

합동 지휘하게 된 두일리우스 는 해전에 대해서는 무지 한지라..... 머리를 써서

뱃머리 돛대에 "까마귀" 라고 불리는 잔교 를 설치하는데 해전으로는 도저히

카르타고 해군 을 당할수 없으니 함선을 근거리에 접근시켜 묶어 두고자 한 것입니다.

 

 

BC 260년 메시나에서 서쪽 밀라초 앞바다에서 양쪽 해군이 조우하니 바다에 약한 로마군은

함대를 진열도 못할 정도로 항해술은 서투른지라 카르타고군이 비웃는 가운데

적선으로 돌격한 로마 함선에서 잔교 까마귀 가 내려지고 카르타고 배로 건너가

육박전 이 벌어지니... 용병인 카르타고군 은 로마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하게 됩니다!

 

 

카르타고 5단층 함대는 15척이 침몰되고 30척이 로마군에 노획되었으며 전사자 3천에 포로는

무려 7천명 에 달했으나, 로마군의 손실은 미미했으니.... 카르타고는 이 한 싸움에

전체 해군의 3분지1 을 잃고 해상 주도권을 로마에 내주는데 훗날 로마는 육지에서

한니발 을 당하지 못하자 함대로 바다를 건너 카르타고 본국에 상륙해 전쟁을 끝냅니다!

 

 

고대 3차해전은 BC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 인데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시저(카이사르) 암살 세력인 원로원파를 타도하는데는 힘을 합쳤지만 공동의 적을

진압 한 후에는 권력투쟁 에 들어가니 BC 31년에 옥타비아누스 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안토니우스 장군의 함대 가 운명을 걸고 악티움 해전 을 벌입니다.  

 

 

 

안토니우스 는 그리스 서쪽 악티움 언덕 위에 중무장 보병 6만 5천, 궁병등 경보병

2만명에 기마병 1만 2천등 전투병만 10만명 을 대기시켰으며 이집트의 도움으로

5단층 갤리선 520척 의 대함대 ( 선원과 노잡이에 전투원등 15만명 ) 를

편성하여 그리스 “파트라스” 에 본영 을 설치한후 “이고멘시아” 로 출전합니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 도 육군은 비슷한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해군은 5단층 군선 5척을

포함해 400척 이니 배의 크기도 안토니우스- 이집트 연합군 보다 작았거니와

숫자에서도 열세 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뒤엎고 옥타비아누스의

대승 으로 끝나게 되니..... 이는 총사령관의 역량의 차이 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저(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의 대리인“아그리파”장군은 해군의 열세 

만회하기 위해 먼저 배에다가“화기”를 장착 했으며.... 둘째로 뱃머리를

날카롭고 견고 하게 해서 적선을 들이받아 침몰 시키는 충각 작전 을 세운 것입니다.

 

 

반대편에서 보면은 “클레오파트라”는 패전의 경우를 대비 했으니 결국 이 한번의

전투 에 모든 것을 걸지 못한 “안토니우스의 미련” 이 승부를 갈랐을까요?

사사건건 해전에 무지한 클레오파트라의 주제넘은 간섭 으로 안토니우스

휘하의 오랜 보수적인 골수 로마 군인들이 탈영하는 와중 에서 해전이 시작됩니다.

 

 

안토니우스군은 해군력의 우세 에다가 북서풍 바람을 받아 서전에서 우위 를 지켰으나

전투가 시작되어 바다가 아수라장이 되는 불지옥 광경에서 클레오파트라는

그만 겁을 집어 먹었으니.... 졸지에 일개 아녀자로 전락 하고는 마침 북풍이

불자 전투 중임에도 돛을 달고 남쪽으로 내빼니 이집트 군함 60척 이 그 뒤를 따릅니다. 

 

 

이것을 본 총사령관 안토니우스 는 전투고 뭐고 부하들을 다 팽개치고 “사랑을 쫓아”

돛을 올리고 클레오파트라를 뒤따라 전선에서 이탈 하니.... 그다음은

말해서 무엇하랴?  아! 세기의 “위대한 사랑(?)” 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그런 나약하고 무책임한 사령관 의 부하들이 너무나도 불쌍하다고 해야 하나!

 

 

육지에서 해전을 내려다 보던 10만 안토니우스군 지상군 은 이후에도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을 거부하고 이제나 저제나 자기네 총사령관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무려 여드레 동안 이나 총사령관 “안토니우스”를 기다리며 분전 했으나,

이미 총사령관은 부하들을 버리고 세기의 연인을 쫓아 이집트로 도망쳐 버린 것을.....

 

 

안토니우스 는 여러차례 전쟁에서 승리한 유능한 장수이나 옥타비아누스는 젬병

이었지만 제국 을 창건하기 전에 묻자 왼팔인 마에케나스는 당위성을 펼치며

찬성 했으나... 유능한 무장인 아그리파는 단호히 반대 합니다. 더 놀라운건

옥타비아누스의 반응이니... 화가 날만 한데도 아그리파와 변치않는 우정

으로 딸 율리아와 결혼 까지 시킵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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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2.04.13 나이는 시간과 함께 달려 가고
    뜻은 세월과 더불어 사라져 간다
    드디어 말라 떨어진 뒤에 궁한 집 속에서
    슬피 탄식한들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
    -"小 學"에서-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4.13 다시..... 배낭을 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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