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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생 트로페2 - 18세기 프랑스 해군 장교를 만나다!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2.05.27|조회수86 목록 댓글 4

 

프랑스 생 트로페2 - 생 트로페 해양역사박물관에서 18세기 프랑스 해군장교를 만나다!

 

 

5월 21일 툴롱 Toulon 에서 버스를 타고 생트로페 St. Tropez 에 도착해 마스트가 숲을

이룬 요트들을 보고는 예쁜 부티끄샵들이 늘어선 골목을 구경한후 산 정상에 올라

생 트로페 요새 박물관 에는 스페인과 영국 , 오스만 투르크와 싸운 대포들이 보입니다.

 

 

서기 972년에 북아프리카 알제리와 튀니지 및 리비아 에 근거를 둔 이슬람 사라센

인과 무어인 해적 들이 이탈리아반도등 지중해안을 휩쓸다가 급기야

지중해를 건너 프랑스 남부 이 마을에 상륙해 해적기지 를 구축했던

생 트로페 는 이후 기독교도들이 탈환해 1589년에 생 트로페 요새 를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생 트로페 라는 도시 이름을 자기 성(性)으로 쓰는 가문 이 있으니....

1729년에 생 트로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생카나 (Saint-Cannat) 라는

마을에서 출생한 해군 장교 인 피에르 앙드레 드 쉬프랑 드 생 트로페

(Pierre André de Suffren de Saint Tropez) 바다 사나이의 생애 를 회상해 봅니다.

 

 

줄여서 쉬프랑 드 생 트로페 Suffren de Saint Tropez 인데 프로방스의 귀족 가문인

생 트로페 후작의 3남 으로 엑상프로방스 생카나에서 태어났으니, 18세기 후반

인도양에서 영국의 에드워드 휴스경 해군 중장과 해상 패권을 둘러싼 격렬한

전투를 우세한 방향으로 이끌어 영국 해군을 두려움에 떨게한 프랑스 해군 장교 입니다.

 

 

 프랑스 귀족은 부모의 전 재산과 지위를 장남이 혼자 물려받는지라 차남 이하는 빈 털터리

신세라! 성직 에 취임하는 것을 제외하면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몰타 기사단 에 가입

하는 것이 당연한 진로였으니 쉬프랑도 기사단 에서 Bailli de Suffren 칭호를 얻었습니다.

 

 

11세기 이슬람 통치하의 예루살렘에서 병원 기사단 으로 활약하던 귀족의 자제로 구성된

요한 기사단 은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에서 군인들이 상륙하자 기사로 변신해 전투에

참가했는데 기독교 세력은 예루살렘왕국 을 세워 위세를 떨쳤으나 결국 패하고 철수 합니다.

 

 

요한 기사단 은 키프로스 를 거쳐 그리스의 로도스섬 을 차지해서는 이슬람 오스만투르크

와 싸웠으나 수십년에 걸친 눈부신 투쟁도 투르크의 물량공세 앞에 무느져

철수해서는 다시 몰타에 둥지를 틀고 이슬람의 상선들을 노략질 하면서

오스만 투르크의 서진을 막는 기독교 세계의 보루 였으니 몰타 기사단 으로도 불립니다.

 

 

몰타 기사단과 프랑스 왕국 해군과의 관계는 긴밀해서 쉬프랑 생 트로페는 부모의 의향에

따라 양쪽에 속했는데...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이 발발하니 오스트리아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죽자 23세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 

오르니 프로이센 은 게르만족 전통에 여자는 왕이될수 없다는 살리카법을 들어 반대 합니다.

 

 

 1740년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에 침입 하자 유럽 각국이 참전하니 프로이센편에는 프랑스,

스페인, 시칠리아, 바이에른, 제노바 스웨덴이고 오스트리아편은 신성로마제국,

영국, 하노버, 네델란드, 사르데냐, 러시아, 폴란드이며 작센은 전쟁 도중에

오스트리아편으로 돌아서는데 결국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을 차지 합니다.

 

 

쉬프랑 드 생 트로페 는 8년간 계속될 전쟁중인 1743년 10월 해군 사관후보생 으로 들어가

1744년 영국 해군과의 툴롱해전에 참가 하여 전열함 소리드(Solide) 에 탑승했고

그후 마스네마라(Macnémara) 전대 포리느(Pauline) 함에 탑승해 서인도 제도 로 향합니다.

 

 

쉬프랑 드 생 트로페 는 1746년 케이프 브레튼섬의 탈환 을 목표로 한 당빌 공작의

침공 작전에 참가했으나 이 무모한 행동은 난파와 역병 때문에 실패하고

다음해인 1747년 비스케이만에서 프랑스 선단의 호송 중에 영국 해군의

호크 제독에게 포로 가 되었는데 그전에 호크와는 툴롱 해전에서 싸운바 있었습니다.

 

 

영국 서부전대 사령관 호크 소장은 프랑스 수송함대가 서인도제도에서 도버로 온다는 정보

를 입수하고 16척 함대를 지휘해서는 1747년 10월 제2차 피니스 테레곶 해전 에서

30척 수송선을 호위한 6척 프랑스 함대를 비스케이만에서 나포 했는데.....

이때 쉬프랑 생 트로페도 포로 가 되었으며 이 해전으로 영국은 도버만을 장악 합니다.

 

 

이후에도 전공을 세운 호크 는 1776년 5월 20일 토튼의 호크 남작 으로 임명되었으니

그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의 소설 "보물섬" 에도 등장하는데....

호크 휘하에서 근무 했던 것으로 설정된 존 실버 는 소설에서 자신의 잘린 다리 

대해서“불사신 호크 제독이 지휘하는 전쟁에서 녀석을 잃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은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을 차지한 가운데 1748년 강화가

이루어지자 영국 해군에서 석방된 쉬프랑 생 트로페  몰타 기사단 

갤리선 항해인 "캐러반" (caravans) 에 참가 하기 위해서 몰타섬 으로 건너 갑니다.

 

 

이것은 예전 기사단이 예루살렘 순례를 호위 하여 생 장 다크르에서 예루살렘 까지

여행하는 것을 재현한 것으로 쉬프랑의 시대에 항해는 그리스 섬들을

돌아다니는 평화적인 여행 에 불과했으나 알제리와 튀니지등 북아프리카의

교활한 이슬람 바르바리 제국의 해적 행위를 억제 하는 목적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1756년에 벌어지는 7년 전쟁 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프로이센에게 잃은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군비를 증강하고 200년간 적이었던 프랑스와 동맹 한후 러시아

·스웨덴 · 작센등 독일의 제국과도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포위할 체제를 갖추자

영국 과 결탁한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는 1756년 8월 작센에 침입함으로써 발발 합니다.

 

 

프로이센은 서전 승리를 거두었으나 반격받아 수세에 몰리던중 1759년 8월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에게 쿠네르스도르프 회전에서 대패 한후 일시 베를린도 점령당했고

영국도 소극적이라 프리드리히는 절망 끝에 자살 할려고 하던중 1762년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어 러시아군이 철군하니 화의가 성립되고 슐레지엔을 유지 합니다.

 

 

7년 전쟁중 쉬프랑은 군함 오르페에 승선해 영국 빙 제독과의 전투  참가했는데 양측에

피해가 발생했지만 프랑스 패배는 아니었고 미노르카섬의 영국군 요새의 항복 을 얻어

냈으나, 1759년 8월 19일 포르투칼 남부 라구스 해전 에서 15척 프랑스 함대 쉬프랑은

탑승함 오세앙 (Océan) 과 더불어 28척 영국 지중해 사령관 보스카웬 에게 포로 가 됩니다.

 

 

7년 전쟁시 프랑스 루이 15세는 영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으니 군대는 브르타뉴반도에

집결하고 수송선은 키브롱 만에 모이니, 프랑스는 브레스트에 있는 콩플랑 백작

위베르 드 브리엔이 지휘하는 21척의 전열함과 장 프랑수아 가 지휘하는 툴롱 에서

회항하는 12척을 소집할 계획을 세웠으니... 잉글랜드 해안을 공격할 예정 이었습니다.

 

 

툴롱의 장 프랑수아 함대 봉쇄는 보스카웬 제독 함대의 임무 였으니 그는 1759년 5월 16일

도착했지만 7월초 식량과 물 보급과 프랑스 포대에 의해 입은 손상을 수리 하기 위해

지브롤터로 회항 하자 장 프랑수아는 8월 5일 툴롱을 빠져 나와 8월 17일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니 보스카웬은 초계함 보고를 받고 추격해 라구스 해전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이때 아메리카 에서는, 프랑스군 몽칼름은 카리용전투에서 영국군에 승리 하기도 했으나

영국군의 울프 장군  퀘벡을 공격해 1759년 9월에 함락하고 11월에는

영국함대는 키브롱만에서 프랑스함대를 격파 하니 군수물자 보급이

끊어진 프랑스군은 1760년 9월 몬트리올에서 앰허스트의 영국군에게 항복 합니다.

 

 

1763년 7년 전쟁이 종결되자 쉬프랑 생 트로페 는 다시 기사단의 캐러반 에 참가해 좀 더

높은 지위 로 올라 유리한 지위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카멜레온

(Caméléon) 이란 이름을 가진 큰 삼각형 돛을 가진 지중해 특유의 배의 지휘를

맡게되지만 바르바리 해적 (Barbary pirates) 에 대항하기 위한 순항을 하지는 못합니다.

 

 

쉬프랑 생 트로페 는 1767년부터 1771년에 걸쳐 캐러반을 실행해 기사단에서 지휘관의

지위 로 승진했는데, 이때 부터 아메리카 독립전쟁전 까지 새로 건조한

전대에서 함을 지휘했으니.... 배를 조종하는 그의 능력 은 상관들로 부터

극찬받았으니 점차 쉬프랑은 18세기 프랑스 해군의 최고 지휘관 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1778년 쉬프랑 드 생트로페 는 아시아 - 아메리카 방면 해군중장 데스탱 제독 휘하에서

전대의 일부로 북아메리카 연안 및 서인도 제도 작전에 종사해 영국의 존 바이런

제독과 그레나다 해안에서 교전 했는데 전투에서 쉬프랑의 함 팡타스크는 62명을

잃었으며 그는 데스탱 제독의 우유부단한 전투 방법 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780년 군함 제르(Zèle) 의 함장이 된 쉬프랑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의 일원으로

대서양에서 가장 큰 영국 수송선단을 나포 했으며 쉬프랑은 5척의 전열함으로

이루어진 전대 를 지휘 하면서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우방인 네덜란드를 도와

예측된 영국의 공격에서 희망봉 을 지키고 이후 동인도에 진출하는 임무 에 발탁됩니다.

 

 

1781년 3월 22일 쉬프랑 은 프랑스 서부 반도의 항구인 브레스트 에서 출범했는데 그는

유능하면서도 열혈한 이었으니 동료인 프랑스 해군 지관들이 영국의 배를

빼앗는 것 보다 자신들의 배를 보전하는 것이 제일 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참지

못했으니 성공을 계속 쌓는다면 조국이 명예스런 강화 를 실현시킬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4월16일 포르투갈령 카보베르데의 포르토 프라야 에서 희망봉을 향하던 조지 존스턴 준장

(총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를 발견하고 라구스 해전때 보스카웬이 포르투갈의 중립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 쉬프랑은 공격을 개시 했으니 영국 해군은 지금 까지

알고 있었던 프랑스 제독과는 전혀 다른 타입의 군인을 상대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쉬프랑 은 8월 16일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다시 영국함대를 공격 했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까지 추격해 존스턴을 저지하였고 프랑스가 보유하던 일 드 스(모리셔스섬) 진출에

성공하자 쉬프랑의 상관인 도르브가 지휘하는 11척의 전열함은 인도 벵갈만 으로 향합니다.

 

 

1784년 외교관 마테우스 레스테베논 등은 전공을 기려 해군 중장 쉬프랑 드 생 트로페

(Suffren de Saint Tropez) 에게 황금 검 (golden sword) 을 선물하는데 쉬프랑이

영국 총독 존스턴과 이후 영국해군 에드워드 휴스 경 제독 과 사이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전공을 기리는 것이니 1782년에 벌어진 4차례 해전은 격렬함 으로 유명합니다. 

 

 

1782년 2월 17일의 사드라스 해전 (Battle of Sadras) 은 마드라스의 남쪽, 4월 12일

프로비딘 해전 (Battle of Providien) 은 트링코말리 부근, 7월 6일의

네가파탐 해전 (Battle of Negapatam (1782)) 은 쿠달로르에서 그리고

9월 3일 트링코말리 항구 부근에서 벌어진 트링코말리 해전 이 마지막 이었습니다.

 

 

네가파탐 해전 후에는 트링코말리 정박지를 포위해 소규모 영국 주둔 부대를 항복 으로

몰아넣었으며, 쉬프랑은 에드워드 휴스 경과의 전투 에서 1척도 잃지 않았고 또한

나포도 되지 않았으니 쉬프랑은 모든 상황에서 왕성한 의욕을 갖고 공격 에 나섰고

원조없이 함대전력을 유지했고 또한 자력으로 트린코마리의 정박지를 확보 했던 것입니다.

 

 

쉬프랑 생 트로페의 활동 은 영국 동인도 회사 와 싸운 이슬람 마이소르왕국의 하이데르

알리에게 용기 를 주었으니... 그는 에드워드 휴스의 함대를 무력화 시키기 위해

뷔시 지휘하에 출동한 군대 호송을 위해 일 드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 했고

수마트라 섬의 말레이 항구에서 보수를 한 후에 1783년 남서 몬순 때에야 귀환 합니다.

 

 

하이데르 알리는 죽었지만 그의 아들 티푸 술탄 (Tippoo Sultan)은 영국 동인도 회사와

전투 를 계속했는데 뷔시의 프랑스 군대가 상륙했으나 그후 작전 수행이

완만하게 이루어진 탓에 쉬프랑 의 행동에 큰 방해가 되는 결과가

되었지만.... 그는 이런 상황하에도 영국 해군의 휴스와 최후의 전투 를 벌입니다.

 

 

1783년 4월 20일에 벌어진 이 쿠달로르 해전 은 15척의 함선으로 영국해군 18척에게 맞서는

것인데, 영국 제독을 상대로 쿠달로르를 포위중인 영국 육군을 극히 위험한 상태 

놓이게 한 상태로 마드라스로 후퇴 하게 만들었는데 이런중 유럽에서 강화 가 이루어

졌다는 뉴스 가 도착하니 전투는 종료되었으며 이후 쉬프랑은 프랑스로 귀국 하게 됩니다.

 

 

쉬프랑 은 부하 함장들의 충성과 조력의 부족으로 인해 자주 방해를 받았으니 성질이

폭발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도 있었지만... 그런데도 활력과 풍부한 자질 거기에

해전에서 성공은 적을 격파해야만 얻는 것 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했으니 이것은

쉬프랑을 경시할 수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 있어 두려운 적 으로 여겨졌습니다.

 

 

쉬프랑의 성공 이 지속된 것은 당시 동료 프랑스 해군 지휘관이 벌이던 행동과는 정반대

의 행동(독종?) 에 의해서 였으니... 프랑스군에서 해군의 활동은 육군의 활동에

종속된 것이었지만, 쉬프랑 은 모국에서 멀리 떨어진 해외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바다를 제압하는 자 가 지상전의 지원에도 커다란 이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적극성과 초기 성공 은 영국 최고 사령부가 캐나다에서 편성중이던

육상부대를 태운 함대의 목적지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인도의 반란지역으로 변경시킨

원인이 되었고 프랑스해군이 영국해군을 격파한데 힘입은 아메리카 식민지군의 요크타운

전투 승리로“미국이 탄생”했으니.... 쉬프랑 항해는 세계사에 중요한 걸음 이 되었습니다.

 

 

인도양에서 쉬프랑 이 할약하던중인 1781년 9월 5일 미국 버지니아주 체사피크만에서 미국

독립전쟁중 대륙군을 지원하는 프랑스 해군과 독립을 막으려는 영국 해군간에 벌어진

해전이 체사피크 만 해전 (Battle of the Chesapeake) 로 프랑스 그라드 백작 이 지휘

하는 24척의 전열함이 영국 그레이브스 남작이 지휘하는 전열함 19척을 격파한 것 입니다.

 

 

쉬프랑 생트로페는 프랑스로 귀환중 보급을 위해 희망봉 에 들렀으니 다른 함장들의

칭찬이 즐거웠다고 적었는데, 프랑스에서도 열광적으로 그를 맞이했으니

1781년 모두가 찬성하여 드비니 백작 의 후임으로 프랑스 해군 중장 

되었으며 또한 부재 중에 몰타 기사단에서 지위도 바이이 까지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쉬프랑 은 브레스트에 집결한 프랑스 함대의 지휘 를 맡을 예정이었지만 죽었으니 

뇌졸중으로 비만인 남자였기 때문에 의문시되진 않았는데, 사후 몇년이 지난후

하인이 프랑스 해군 샤를 에게 이야기한 진상은 드 미르푸아 공 과 결투에서

죽은 것 이라는데.... 2명 친척을 복직시키려는 시도를 거절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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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OPEKY | 작성시간 22.05.27 자세한 내용에 감탄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5.28 고마운 말씀입니다.
    아름다운 항구인가 합니다.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2.05.28 여행을 하면서
    전쟁과 역사를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5.28 지중해 생 트로페는 오늘날
    프랑스 최고의 휴양지인데......
    예전에는 해적들의 소굴이었다니!
    그리고 프랑스 해군 제독의 성씨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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