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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롱 4 - 생트로페에서 툴롱에 도착해 시가지를 거닐다!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2.07.11|조회수111 목록 댓글 2

프랑스 툴롱4 - 생 트로페에서 버스로 예르를 지나 툴롱에 도착해 시가지를 거닐다!

  

 

5월 21일 툴롱 Toulon 에서 버스로 생트로페 St. Tropez 에 도착해 요트 와 예쁜 부띠크

가 숨어있는 골목을 구경하고 산 정상에 생 트로페 요새 에 올라 해양 역사박물관 

 Musée de la Citadelle 을 보고는 다시 4시 30분 버스를 타고는 툴롱 으로 돌아 옵니다.

 

 

버스는 생트로페 시가지를 벗어난후 왼쪽으로 지중해 바다를 끼고 서쪽으로 달려 몇 마을을

지나고 드디어 예르 Hyeres 에 도착하는데.... 원래 계획으로는 여기 내려서 마을과

성이며 해변 을 구경하는 것이었는데 이게 막차 버스 이니 교통편이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물론 예르에는 기차역이 있으니 기차를 타면 되지만 지금은 프랑스 국영철도 SNCF 가 파업

중인지라 자칫 기차 마저 없으면 며칠전에 툴루즈에서 알비 에 갔다가 파업으로 기차와

버스가 없어 130유로나 내고 택시를 탄 악몽을 재현해야 할른지 모르는지라 내리지 못합니다.

 

 

만약에 여기 예르 Hyeres 마을에 내린다면.... 먼저 관광 안내소 Office de Tourisme

에 들러 지도 를 받고 교통편을 확인 한후 택시를 잡아 예르성 Chateau Saint-

Bernard 에 오르면 거긴 고지대인지라 맑은 날에는 황금섬 들이 잘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내려와 버스가 없으면 역시 임대 자전거나 택시 를 타고는 남쪽으로

달려서 남프르크롤 해안 South Coast Porquerolles ( Giens ) 에

가면  원시의 바닷가에다가 저 앞에 3개의 황금 섬 을 볼 수가 있다고 합니다.

 

 

예르 Hyeres 는 툴롱 동쪽 19km, 지중해안에서 4km 들어간 지점에 위치하며 구(舊)시가는

언덕 중턱에 그리스 식민지 오르비아 였다는데 17세기까지 항구와 성채가 있었으며

현재 장미 재배와 과일 산지로 알려져 있으니 기후가 좋아 피한· 휴양객 이 많이 찾습니다.

 

 

산 위 고지대에 우뚝 서 있는 예르성 Chateau d' Hyeres 에서는 맑은날

 황금섬 예르 제도 를 볼수 있으며 야자 나무 거리는

빅토리아 여왕과 톨스토이 에게서 사랑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예르의 남쪽 알마나르 해안 Almanarre Beach(Hyeres Plage) 은 매년 10월

윈드서핑 세계대회 가 열리며 카이트 서핑 

해양 스포츠가 활발하다는데... 장비를 현지에서 빌릴 수가 있다고 합니다.

 

 

황금섬 예르제도 Les Iles Hyeres 의 포르크롤 섬 Porquerolles 은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포르크로 섬 Port-Coros 은 뤽 베송의 그랑블루 가 촬영 되었다는데....

 사이클을 즐길수 있고 노트르담해안, 아르장해안, 등대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좋으며

1944년 8월 15일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상륙작전 이 이 제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예르에 내리지 못한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언제 다시 올날이 있으려나... 아쉬움을 달래는

데... 버스는 이윽고 오후 6시가 되어 툴롱 에 접어드니 포드등 자동차 전시관을 지나

대학교가 있는 마을을 거쳐서 6시 10분경에 툴롱역 옆에 자리한 버스 터미널 에 도착합니다.

 

 

버스에서 내리니 울 마눌은 대형 마트 까르푸 에 가자는데.... 지도를 보니 종점인

툴롱역 까지 올게 아니라 한정거장 전 에 내렸어야 하는데 망설이다가

보니 버스가 중간에 정류소가 없는 바람에 부득이 종점 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시내 지도를 들고 몇 블록을 걸어서 구부러져서는 Orchestra 라고 적힌 멋진

건물 앞에서 행인들에게 물어서 드디어 복합몰 상가 로 들어

가서는 대형슈퍼 까르푸 에 입장하니 여긴 참으로 많은 사람들로 붐빕니다.

 

 

까르푸에서 시장을 본 후에 나와서 다시 해변가 로 나가서는 부두에서 마스트가

숲을 이룬 요트 와 게성있게 날렵하게 샌긴 보트며 유람선 들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대로를 걸어 어제 우릭 찾았던 그 자유의 광장 에 도착해 내일 아침에

해변 마을로 가는 버스 번호와 시간표를 확인하고는.... 분수대의 벤치에

앉아 조각품이며 노니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구경하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합니다.

 

 

 자유의 광장 에서 프랑스 국기의 삼색이 자유 평등, 박애 라는게 떠오르는데 이토록

좋은 상징을 가진 사람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에서

조선에서의 일본인들 처럼 그토록 가혹한 식민지 지배 를 왜 했는지 의문이 드니...

동아일본 손효림 기자가 쓴 “아랍의 봄은 저절로 오지 않았다” 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 테러,  석유,  난민,  여성  억압‘아랍’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올리기 쉬운 말들이다.

아랍은 파편화된 이미지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으니 어떻게 탄생했고 왜 이렇게 복잡

다단한 정치지형 을 갖게 됐는지 찬찬히 들여다보길 원하는 이에게 딱 맞는 책이 나왔다.”

 

 

“레바논 베이루트와 이집트 카이로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하버드대에서 중동 역사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아랍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 를 받게된 1516년 부터 2011년

아랍 혁명 까지 다룬다. 서구 중심이 아니라 아랍인의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 하려 애썼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이어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지배를 받게 된 아랍인들은 강력 저항

하지만 신식 무기와 군대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힘없던 아랍인에게 새로운

무기로 떠오른 건 석유 였다. 아랍이 국제무대에서 주도권을 행사할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힘을 믿는 정치 세력이 강해지면서  이슬람주의 테러 세력이 형성 됐다.”

 

 

“영국, 프랑스가 물러났지만 독재에 신음하던 아랍인 들은 2011년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에서 억압에 맞서 일어났다. 오랜 기간 무력감에 젖어 있던 아랍인들이 인권과 안전,

경제 성장을 누리려면 스스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 하기 시작한 것이다. ”

 

 

“‘아랍의 봄’ 은 그렇게 왔다.  대규모 전투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매춘부가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던 18세기의 풍경 등이 풍성하게 펼쳐져

당시 시대상을 폭넓게 이해할수 있다.  영국에 맞서 독립운동 에 뛰어들었던

여성, 최초의 이집트 페미니스트 등 가려져 있던 여성들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이슬람이 출현한후  7세기 부터 다섯세기  동안 아랍인은 세계의 주역 이었다. 이슬람

신앙을 실천했을 때 아랍인이 최고 였다고 주장하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아랍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대목이다.”

 

 

그러고는 어제 갔던 길 과는 다르게 오늘은 왼쪽 대신에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가니 여긴 툴롱에서도 오래된 구시가지 인지라.....

무슨  유명한  인물들이  테어난 생가  를 표시하는  번호  들을  봅니다.

 

 

여기 툴롱 구시가지 골목에는 오래된 옛도시 답게 건물들이 비록 낡았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운치 가 있으니 벽화와 그림 들이 참 잘 어울립니다.

 

 

오늘 우리 부부는 생 트로페 를 보고 온데다가 운치있는 벽화 까지 구경하니 이런게

여행 이지 싶은데.... 옛날부터 유럽인들은 여행을 다니는걸 좋아했으니

지리학자 김이재 교수는 동아일보  ‘지도 읽어주는 여자’ 에서  프로이트 에

대해  “로마에 반한 심리학자,  여행비 모으려 性 삼담”  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 파리와 함께 19세기 유럽 문화· 경제의 중심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지크문트 프로이트 

76년을 살았다. 그에게 빈은 그리운 고향 이자 ‘구역질나는 감옥’ 이었다. 중학때

부터 수석을 도맡았고 파리 유학도 했지만 가난한 유대인이라 차별에 시달렸다.

교수직을 얻지 못해 의사  개업한 그는 여섯 자녀를 둔 가장으로 늘 생계를 걱정 했다.” 

 

 

이탈리아를 꿈꿨지만 여행  공포증으로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는  자기 심리 분석 을 통해

두려움의 원인 을 찾아낸다.  철도여행 전문가였던 남동생의 도움으로 마흔 무렵

도한 이탈리아 여행은 그를 구원했다. ‘세상을 눈으로  확인하려는 의무  가 나를

지탱시켜 준다’ 는 신념으로 1895년부터 1923년 까지 여름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여행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 를 자주 찾았고 특히 폼페이 유적지,

그리스 아테네 신전,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에 매혹됐다. 로마 에 대한

상사병 이 깊어져서는.... 늘 로마 지도 를 보고 현지 골동품 수집과 감상에 집착했다.”  

 

 

“‘매년  이탈리아  여행을 위해서라도  부자  가 돼야겠다’ 고 결심한 그는 빈의 상류층

여성들을 진료 했다.  상담실 파우치에 누운 귀부인들의 성적 욕망과 내밀한

고민을 들어준 대가 는 달콤했다.  환자 사례를 분석해 연구성과 를 낼수 있었고

하루 상담료가 이탈리아 2주 여행비를 충당 할 정도였기에 살림 살이도  확 펴졌다. ”

 

 

“이탈리아 유적지를 다니며 지적 자극을 받은 그는 ‘꿈의 해석’ (1899년),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 (1901년),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1905년)  등을 써 낸다.

 

 

꿈과 무의식의 세계 에서 건진 퍼즐 조각을 맞춰 정신 지도 를 그리는 그에게 심리학 은

유적을 발굴해 과거를 복원하는 고고학과 유사 했다. 실제로 그는 신화 와

고고학  책을 비롯해  셜록 홈스  시리즈와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에  탐닉했다.” 

 

 

20세기는 프로이트의 시대 였다. 빈 대학 교수직 을 얻었고, 그의 명성은 유럽을 넘어

미국 까지 퍼진다. 세계 각지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고 부자들이 빈으로

찾아 왔다.  “내게 돈은 웃음을 유발하는  가스와도 같다” 던 그는  이재 에도 밝았다“

 

 

“1923년  구강암 진단후 33번의 수술 을 받았던  그는  죽음도 철저히 준비 했다. 총명한

막내 딸 안나를 일찌감치 영국 유학 을 보내 자신의 저서를 영어로 번역 하게 했다.

숨지기 1년전 가족과 런던으로 망명 한건 신의 한 수였다. 프로이트 심리학은 서구

학계를 장악한 유대인 네트워크 를 타고 런던을 거쳐 미국까지 건너가 전성기를 구가한다.”

 

 

욕망의 세계를 탐험  하고  심리학의  영토를 확장 한  영혼의 지리학자프로이트! 하지만

상담실만 맴돈 여성들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환자들에게 지도를

건네며 행복한 여행을 처방 했다면 수입은 좀 줄더라도 특별한 명의 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특히나 여기 옛날 골목길에는 오래된 사진 들이 많이 붙어 있는데.... 사람

사는 세상 이라는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 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고는  길거리에 내어놓은  레스토랑을 지나는데  제대로 된 테이블에 편안히 앉아

디너 를 즐기는 사람들도 좋지만, 다음 블록에 아리리쉬 펍 카페 에서 내 놓은

술통 테이블 앞에 서서 기네스 맥주 를 마시는 사람들도 운치 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된 사진들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게  동아일보 신문에 실림  김은지 기자의  글

“佛입양 37년만에... 마침내 부른 어머니”  장애로 낳자마자 입양됐던 모토씨,

국내 한국어 캠프 참가중 생모 만나 “한국말 열심히 배워 또 올거예요” 기사 입니다.

 

 

“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홀트아동복지회관. 한국계 프랑스인인 그자비에 모토

(한국명 신동은· 37) 씨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윤순예 씨(59) 는 잡고 있던 아들의 손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모토씨는 1981년 1월 대전에서 태어났지만 구순구개열 (입술 잇몸 입천장 갈라진 기형)

장애가 있었다. 젖을 빨지 못해 입안으로 모유를 흘려줘야 했다. 병원을 여러곳을

찾아갔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의료 기술로는 치료가 안된다 는 답변이 돌아왔다.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윤씨 부부는....  아들을  해외로 데려가 치료할 여력이 없었다.”

 

 

“주변에서는 ‘아이를 해외 선진국으로  보내는게 낫지 않겠느냐’ 고 권유했다.  결국 한달

만에 첫아들을 입양기관 으로 보냈다. 프랑스 가정에 입양 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도

 윤씨는 수시로 입양기관에 아들의 행적 을 물었다. 윤 씨는 ‘규정상 알려줄수 없다’

는  응답이 돌아왔지만  언젠가 연락이 닿으리라는 생각에  포기하지 않았다” 고 말했다.“

 

 

“모토 씨는 프랑스 중동부 디종의 의사 부부 에게 입양됐고 수술을 받아 장애를

잘 치료 했다. 그는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라면서도 항상 모국인

한국이 궁금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 재단에서 연

차세대동포 한국어 집중캠프’ 에 참가하기 위해 11일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부모를 찾으려고  입양기관 을 찾은 모토 씨는 깜짝

놀랐다. 장애 때문에 자신을 버린줄 알았던 어머니가 사실은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주기 위해 떠나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 젖먹이 때  떠나보낸 아들을  성인이  돼서야  다시  만난 윤 씨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며 눈시울을 붉혔다. 윤 씨는 남편과 2008년 사별 했다. 이날 두명의

남동생 과 첫 만남을 가진 모토씨는 “내가 형제들과도 많이 닮은 것 같다” 며 웃었다“

 

 

“모토  씨는  프랑스로  돌아간  후에도  한국의  가족과  연락하기  위해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겠다 고 말했다. “다섯 살 아들이 있어요. 어머니에게

보여드리러 또 한국에 올 거예요.” 모토 씨는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툴롱역  앞에 자리한  우리 호텔로 돌아와서는  까르푸에서 산 고기를 구워 맥주 를 마시면서

텔레비전을 트니 어느 해안가에서 벌어지는 풍경이 참 보기에 좋은데 내일은 해안의

한적한 어촌마을 을 찾아보고 기차를 타고 마르세유를 거쳐 엑상 프로방스 로 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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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클놈인줄 | 작성시간 22.07.11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7.13 아름다운 도시인가 합니다.
    항구 도시 툴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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