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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나뮈르1 - 곤돌라를 타고는 나뮈르성에 오르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2.08.16|조회수114 목록 댓글 2

벨기에 나뮈르1 - 나뮈르에 도착해 호텔에 배낭을 넣고는 나뮈르성에 오르다!

 

 

2022년 4월 26일은 아일랜드 더불린 Doublin 에서 10시 35분에 출발하는 라이언에어 비행기를 타고

11시 30분에 영국의 맨체스터 에 내려 라이언 에어 부스에서 새로 보딩패스를 발급받아 오후

1시 50분에 다른 라이언 에어 비행기로 갈아타고 오후 4시 20분에 벨기에 브뤼셀 남공항 에 내립니다.

 

 

공항 출입국 직원이 여권 을 뒤적이더니 아무른 스탬프가 없자 너희들 도대체 어디로 해서 유럽에 들어

왔느냐고 의아해 하기에 런던 히드로공항에 내렸는데 비대면으로 자동 입국심사라 스탬프가 없다니

코로나 접종확인서 를 보자고 하기에 한국 병원에서 발급받은 확인서를 보여주니 스태프 를 찍어 줍니다.

 

 

이제 벨기에 남부 왈롱지역의 나뮈르 로 가야 하는데 원래 계획으로는 택시를 타고 샤를로이 남역

Charleroi Sud 으로 가서 16시 50분(17시 19분) 기차를 타면 17시 21분(17시 49분) 에 나무르

Namur 에 도착한다고 적어왔는데 택시 기사가 나뮈르 까지 80유로 에 갈수 있다고 하기에 

비싸지만 시간을 절약 하고 또 나뮈르 호텔(아파트) 을 찾는 수고도 덜겸 해서 택시를 타고 옵니다.

 

 

택시는 나뮈르시에 도착해서는 기차역을 지나 내려가더니 큰 성당 근처에 이르러

왼쪽에 멈추기로 내리는데.... 내려서 우리 호텔을 찾아 봅니다.

BED Namur ASBL : 12 Rue du Collège 5000 Namur ☎ +32 477 38 83 ( )( )

 

 

주소를 보니 아파트 인데... 아니 아파트라기 보다는 작은 연립주택 인데 입구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으니 핀 번호 를 모르면 문을 열수 없는데다가 또 들어간다손 치더래도 나중에 보니 4가구

가 있었으니 어느 방인지 모르며 또 그 방도 역시 비밀번호나 열쇠 가 있어야 들어갈수 있다는....

 

 

전화를 하니 받길래 도착했다고 말하고 어떻게 들어가느냐 물으니까 내 휴대폰에 문자 로 보냈으니 읽어

보랍니다. 내가 내 휴대폰은 한국에 두고 왔고 지금 휴대폰은 와이프의 것 이니 보냈다는 메시지를

모른다고 말해도 내 발음이 시원찮은지 계속 내 휴대폰에 메시지를 보냈다고 앵무새 처럼 되풀이 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주머니는 여기 아파트(연립주택) 에서 멀리 떨어진 곳 에 사는 분으로 손님을

맞으러 올 의사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호텔비는 사흘전 내가 부킹닷컴에 예약

때에 제출한 신용카드로 이미 결제 가 되었으니...... 자기는 아쉬울게 전혀 없다는 투 입니다.

 

 

크로아티아 경우는 아파트를 빌려 호텔업 을 하는 사람이 여러 아파트와 계약을 맺고 적당한 주소

하나 적어두고는 고객을 받는 경우가 많은지라 고객이 도착해 전화를 하면 그때 까지도 이 고객

이 어느 아파트에 묵을지는 호텔 업자도 모르니 고객을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 이르고는

그때 부터 전화를 해서 여러 아파트 중에 현재 비어있는 곳을 찾아 데려다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전에 중국 난징에서도 그랬고 스페인 마요르카섬에서도 그랬고 며칠 전 버밍엄이나 크로아티아

도시 가운데 몇 곳이며 오늘 벨기에 나뮈르는 평소에 아파트(연립주택)는 소유 하고

있으면서 휴대폰으로 비밀번호등 메시지 를 보내 주고 주인은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는 것 입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여주인은 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예약때 적은 휴대폰 을 가져오지 않았다며 이 휴대폰

으로 메시지를 보내 달라고 말하려는데 마침 서양인 부부가 도착해 비밀번호를 입력 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지라 얼른 따라 들어가서는 이 전화를 대신 좀 받아달라고 말했지만 전화가 끊겨 버립니다.

 

 

남자는 2호 방문을 열고 들어가기에 뒤따라 가서 우리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을 하니 이번에는 자기 전화기

로 전화를 거는데 벨기에 사람인지 여주인과 통화를 하더니 우리에게 4호 방을 쓰라고 말하고는 자기는

방으로 들어가는데 1층은 1호실이고 3층에 올라가니 3호실인데 아무리 찾아도 4호실이 없으니 난감합니다.

 

 

다시 2호실 문을 두드리기도 미안해서 3층 3호실에 보니 마침 방문에 열쇠가 꼳혀 있기로 거기에

배낭을 넣고는 나오는데, 조금 전에 저 남자에게 대문 핀 번호를 물어 적어 둔지라 마눌은

대문 안에 있으라 하고 나만 밖으로 나와 닫힌 대문에 핀 번호를 누르니 문이 열리기로

안심하고는 관광에 나서는데 나중에 밤에 3호실이냐 4호실이냐를 두고 작은 소동 이 일어납니다.

 

 

아파트를 나와 남쪽으로 걸어서 강변에 도착해 주위 풍경을 구경하고는 시타델 Citadelle 에 올라가야

하는데 걸어서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지라 케이블카, 그러니까 곤돌라 를 타기로 합니다.

 

 

나무르는 나뮈르 (프랑스어: Namur, 네덜란드어: Namen 나먼) 라고 하는데 벨기에 왈롱 지역 의

중심 도시로 나뮈르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11만명으로 뫼즈강과 상브르강이 합류 하는 지점

언덕에 자리잡았으니 “뫼즈강의 진주” 로 불릴만큼 아름다운 성채와 계곡의 경관 을 자랑합니다.

 

 

강변을 따라 내려가서는 케이블카 정류소 를 찾아 들어가서는 왕복 요금으로 6.5 유로씩

을 주고는 올라 타니 바로 강을 건너 오르는데 하늘에서 바라보는 나뮈르 시내

풍경이...... 예전에 바르셀로나에서 몬주익 공원 에 오르면서 탔던 케이블카 생각이 납니다.

 

 

여기 나뮈르의 시타델 Citadelle 은 유럽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 큰 성채로... 15세기인

1477년에 부르고뉴에 양도 된후 17세기 까지 오스트리아, 프랑스, 네델란드로 소유권

이 여러번 바뀌었으니 현재 건축물은 17세기 것으로 1975년까지 군대가 주둔했다고 합니다.

 

벨기에는 로마 시대에 벨기카 속주 로 게르만과 접경한 변경 지역에 불과했고, 중세초 서로마가 붕괴하자

라인강으로 로마와의 국경을 접한 잘리 프랑크족 이 들어와 저지대 남부~라인강변~프랑코니아

지역을 점유하여 아우스트라시아 를 세웠으며 저지대 동북부인 프리슬란트에는 프리시족이 살았습니다.

 

 

이후 게르만족인 프랑크족이 융성하여 제국을 세우니 아우스트라시아는 프랑크족의 원래 출신지 

프랑크 제국의 중심지로 간주되었으며 아우스트라시아 일대는 로마 제국 시대에 세운 주교구

도시들이 보존되어 있었고 원래의 프랑크족의 전사, 즉 자유민 원주민들의 비중도 매우

높았으며 이 시기에는 저지대(네델란드) 보다는 남쪽 내지 동쪽의 라인강 일대가 더 중시되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궁정이 있는 아헨 은 라인강 일대이며 주교도시 이자 팔츠인 프랑크푸르트,

후일 주교후가 되는 트리어와 아헨도 라인강 일대인데 이 시기 라인강 일대 북부는 저지대와

 구분 지을 필요도 없으니 라인강 일대 북부인 율리히 지방은 저지대 지역과 바싹 붙어 있고

이 시기의 중심 도시가 내륙이었던  것은 아직 저지대의 퇴적과  간척이 덜 진행되었기 때문 입니다.

 

 

프랑크왕 샤를마뉴 대제 사후 중프랑크 왕국이 이탈리아와 부르군트 및 아우스트라시아를

상속 받아서 황제 노릇을 했지만 프랑크족의 분할 상속 전통으로 인해 이 일대도

계속 찢어지며 동프랑크(독일) 에 속했다가 다시 서프랑크(프랑스) 에 속했다를 되풀이

했고 플랑드르,  홀란트, 브라반트 등으로 나뉘어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에 걸치게 됩니다.

 

 

11세기가 되어 저지대 지역 도시들에서 생산되는 대량의 포목 들이 마그레브, 레반트 등 이슬람 지역

 동로마 제국 지역과 북유럽으로 수출되어 북이탈리아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떠오르게 되며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동로마에서 들여온 수출품은 상파뉴 교역로를 거쳐 저지대에

도착해 다시 북유럽으로 수출되었고 북유럽산 목재와 모피가 다시 저지대에 모여 전 서유럽에 수출됩니다.

 

 

중세 후기에 네델란드(벨기에) 공주가 부르고뉴국에 시집 갔는데 친정에 후사가 없자 사위인 부르고뉴공작

이 네델란드(벨기에) 까지 다스리는 부르고뉴 공국의 동군연합 아래에 있었으며 부르고뉴 공주가

합스부르크가(오스트리아)에 시집 갔는데 친정에 후손이 없으니 15세기에 오스트리아 막시밀리안 1세

합스부르크 속령 으로 넘어갔고  손자 카를 5세 시대에는 카를의 직할령인 스페인의 속령 으로 넘어갑니다.

 

 

부르고뉴 왕국 은 4~5세기 게르만민족 대 이동기에 게르만 부르군트족이 프랑스 동부 를 점령하고

부르군트 왕국 을 세웠는데 534년 게르만 프랑크족의 침입 으로 망하고, 6세기 말경 부터는

프랑크 왕국의 지배 를 받았으나 561년 프랑크 왕 클로타르 1세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메로

빙거 왕가의 사람들에 의해 분할되었으며 클로타르의 아들인 군트람이 부르군트 왕국을 차지합니다.

 

 

왕국의 영토는 기존 부르군트 왕국의 영토를 그대로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프로방스에 있는 아를

주교관구, 알프스 동쪽의 발다오스타, 그리고 프랑스 중북부의 상당한 지역을 포함

했는데..... 부르군트 왕국은 독립된 메로빙거 왕국 으로 남아있다가 8세기에 들어와

샤를마뉴의 할아버지인 카를 마르텔에 의해 점령당해 프랑크 오스트라시아 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879년 비엔누아의 통치자인 보소 가 오툉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부르고뉴 전지역을 복속시키고 자신을

부르고뉴의 왕 으로 선포했는데 프랑스를 다스리던 카롤링거 왕족이 그뒤 손 강의 서쪽과 리옹의

북쪽 지역을 그로부터 돌려받았고 독일을 다스리던 카롤링거 왕족은 상부 부르고뉴를 돌려받지만

보소와 그의 후계자들은 933년까지 프로방스 왕국(하부 부르고뉴) 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부르고뉴 공국은 손 강 서쪽 프랑스를 지배하던 카롤링거 왕족이 보소로 부터 되찾은 지역으로 프랑스

왕국의 일부 가 되었는데 보소의 동생인 리샤르(오툉 공) 는 자신의 지도로 경영에 힘을 기울였고

그를 계승한 아들 라울은 923년에 프랑스 왕으로 선출 되었으나 936년 라울이 죽자 물거품이 됩니다.

 

부르고뉴 는 1032년에 독일왕이며 황제인 콘라트 2세 에게 넘어갔으며 13세기부터 아를 왕국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니 영토가 더욱 축소된 부르고뉴 공국 은 1361년까지 프랑스 카페 가문의

지배 아래  강성해지니 사촌인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 하는 것을 제일로 삼았고 공작령의

영토를 늘리고 가신들에 충성을 요구하니 부르고뉴는 프랑스 왕실의 제일가는 동맹 세력이 됩니다.

 

 

1361년에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낙마사고로 후사없이 죽자 프랑스 왕 장 2세는 부르고뉴 공국을

왕실 직영지 로 병합해 이 공국을 막내아들 필리프 2세 에게 주었으니 1356년에 있었던 영국과의

푸아티에 전투 에서 용감하게 싸운 공로를 치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왕자령으로 하사한 것이지만

이는 장 2세의 커다란 실책으로..... 훗날 왕실과 부르고뉴가 끝임없이 갈등하는 분란 의 원인이 됩니다.

 

 

1404년에 필리프 2세가 사망하면서 부르고뉴를 계승한 아들 장은 정적인 오를레앙 공 루이와 쟁투에

나섰는데 아르마냐크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루이의 일파는 1412~35년에 부르고뉴 남쪽 경계

지역을 초토화하니 장은 1419년에 암살 되고 아들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와의 백년전쟁 동안에는

프랑스 대신 잉글랜드 측을 지원 했으니 프랑스의 성녀 잔다르크 를 잡아 영국군에 넘기니 가톨릭교회

종교재판에서 마녀임이 밝혀져 화형 당했으며 이후 스위스 용병대가 1445년까지 부르고뉴를 약탈합니다.

 

 

1467년의 필리프 3세의 사망후 공작 샤를 1세 는 프랑스왕 루이 11세 와 끊임없이 충돌했으니

샤를 1세의 목표는 로렌지방을 합병해 공국의 남부와 북부를 결합 시키는 것이었으니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부르고뉴 왕이라는 칭호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루이 11세의 방해를 받아 좌절되었고 루이 11세는 샤를을 토벌하기 위해 여러번 침공 합니다.

 

 

1477년 부르고뉴 공작 샤를 1세가 죽자 프랑스왕 루이 11세는 부르고뉴의 유일한 상속녀인 마리 

자신의 아들인 도팽 샤를(훗날 샤를 8세) 과 혼인을 추진 했으나 실패했고 상속녀 부르고뉴의

마리는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과 결혼 합니다.

 

 

1482년 루이 11세는 막시밀리안과 아라스 조약 을 맺고  아들인 도팽 샤를과 마리의 딸인 마르가레트

와 약혼시키며 프랑슈콩테를 할양 받았는데 그러나 프랑스 왕에 즉위한 샤를 8세가 1491년에

브루타뉴의 유일한 상속녀 안과 결혼하며 마르가레트와 파혼 했으니 샤를 8세는 막시밀리안

1세와 1493년에 상리스 조약을 맺고 신부의 결혼 지참금인 이 땅을 다시 오스트리아에 돌려 줍니다.

 

 

16세기 부르고뉴 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전쟁에 의해 황폐해 졌으며 도시들은 성채화되었고 용병들

이 모여들었으니 공작령은 초토화되었으며 1650년에 콩데 대공이 주도한 2차 프롱드의 난 에도 

파괴되었고 1678년 프랑스가 부르고뉴를 합병 할 때까지 평화와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으니 그후

프랑스 혁명 이 벌어지면서 부르고뉴는 사라지고 코트도르· 손에루아르· 욘 등 3개 주로 재편성 됩니다.

 

 

한편 부르고뉴 다시말해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에서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에게 스페인 을 물려

주면서 끼워준 저지대(벨기에와 네델란드) 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폭압에

반발하여 북부인 네덜란드가 이탈해 1581년 독립을 선언 했으며 1648년에서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스페인으로 부터 완전 독립 을 달성하고 해외 식민지를 개척해 번영합니다.

 

 

한편 남부(벨기에) 는 카를 5세가 동생에게 넘겨준 오스트리아로 소속만 바뀌었을 뿐 계속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다가 잠깐 프랑스 지배를 거쳤고 프랑스가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망하자 이번엔 네덜란드에

합병되었지만 이미 장기간의 분단을 통해 둘은 민족적 정체성이 달라져 버렸고, 결국 벨기에 혁명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인해 남부 벨기에도 1831년 독립을 공인 받고 독일 귀족을 데려다 새 왕조 를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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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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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2.08.16 멋지십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2.08.17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을 원망하지 않고
    천명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복(福)은 자기에게서 싹트고 화(禍)도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准南子-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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