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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리에주1 - 리에주로 가면서 옛일을 회상하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2.08.22|조회수86 목록 댓글 0

벨기에 리에주1 - 나뮈르에서 리에주로 가면서 옛날 일을 회상하다!

 

 

2022년 4월 26일 아일랜드 더불린 에서 비행기로 영국 맨체스터에서 환승해 벨기에 브뤼셀 남공항 에

내려 입국후 택시를 타고 나뮈르 에 도착해 호텔(아파트)에 배낭을 넣고는 곤돌라를 타고 시타델 

나뮈르 성 에 올랐는데....나뮈르의 시타델 Citadelle 은 유럽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진 성채라고 합니다.

 

 

나뮈르성 은 15세기인 1477년에 부르고뉴 에 양도된후 17세기까지 오스트리아, 프랑스, 네델란드로

소유권이 바뀌었으니 건축물은 17세기 것으로 1975년까지 군대가 주둔했다는데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건 “절대로 적을 미워하지 말라, 판단력이 흐려진다“ 영화 ‘대부’ 에 나온 마피아 마이클

콜레오네가 조카에게 후계자 교육중 한 말이니 적을 미워하면 현실을 냉철하게 볼수 없다는 말이라!

 

 

오늘 4월 27일에는 북쪽 리에주 로 가야할 시간인데 여행계획서 를 작성하면서 고민한게 여기 나뮈르에서

남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면 1시간후 1차 세계대전의 최대 격전지인 프랑스 상파뉴지방의 베르됭 에

도착하는데 동아일보 임용한의 전쟁사 칼럼에 보면 베르됭 전투에 대해 쓴 “성스러운 길” 이란게 있습니다.

 

 

페탱 은 2차세계대전시 프랑스 패전후 나치에 부역한 비시 정권의 수반 을 지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를 구한 전쟁영웅 으로 베르됭 전투 에 구원자로 투입됐는데 1차대전을 지옥으로 만든 돌격전술을

혐오했으니... 대안은 포병을 이용한 화력전 으로 전투 초기 독일군은 정밀한 포격으로 프랑스군 진영을

초토화 했으니 페탱은 포병을 다잡고 화력을 증원해 체계적 집중포격으로 독일군에 악몽을 되돌려 줍니다.

 

 

화력전이 되자 포탄 조달 이 문제니 페탱은 전국에서 3,500대 차량을 마련했지만 도로  없었다.

베르됭으로 오는 철도와 도로는 전투시작후 독일군의 포격 으로 절단되었고 단 하나의 도로

만 남아 있었으니 폭이 6.5m로 트럭 두대가 간신히 비켜갈 수 있었다. 더 심각한 문제가 부드러운

프랑스의 대지 위에 설치된 비포장 도로는  엄청난 물량의 수송을 감당할 만큼 튼튼하지 않았습니다.

 

 

페탱은 공병감을 시켜 도로 관리계획을 세웠으니 트럭들이 기차 처럼 길게 줄지어 이동하는 동안 길가

 공병들은 삽으로 겨울에는 모래 를, 비가 오면 자갈 을 도로에 부었다. 이 도로는 성스러운 길

(부아사크레) 이라 불렸으니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이라 죽음의 길 이란

의미인데 덕분에 거의 패배했던 베르됭 전투에서 승리할수 있었으니 성스러운 길이 틀린 말도 아닙니다.

 

 

베르됭 전투 는 1916년 2월 21일에서 12월 18일까지 프랑스와 독일제국 육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로 제1차 세계대전 서부 전선 에서 최고 전투 중 하나였으니... 전투가 벌어진 곳은 프랑스

북동부에 소재한 베르됭쉬르뫼즈 고지의 북쪽으로 독일군 제5군은 프랑스군 베르됭

군단을 공격하는 한편  포격전상의 요충지 뫼즈 고지 를 접수하기 위해 뫼즈강 우안 을 공격합니다.

 

 

독일의 전략은 고지를 선점한 뒤 프랑스군이 고지 위의 독일군을 공격하도록 강제 함으로써

프랑스군의 출혈을 유도 하고자 함이었으니 전투 초반에는 독일군이 우세를 점했으나

프랑스군은 신속하게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고..... 베르됭 북쪽에서 솜 전투 가

벌어지는 와중에 1918년 연말이 될 때까지 베르됭에서 잃어버린 구역 대부분을 수복합니다.

 

 

독일 전략은 프랑스가 뫼즈강 동안 고지를 탈환하려 시도할 것이라 상정하고 고지를 탈환 하려

시도하면 포병의 포격으로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 를 미치는 한편 유리한 고지를 접수한

독일 보병의 피해는 프랑스군 보다 적으리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니 이러한 계획은

1915년 9월에서 10월 사이에 벌어진 제2차 샹파뉴 전투 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샹파뉴에서 독일군은 프랑스군 공세를 물리치면서 프랑스군에게 훨씬 큰 피해를 입힌바 있었지만 악천후

로 인해 독일의 베르됭 공세는 2월 21일이 되어서야 시작될수 있었고, 그 사이 프랑스는 방어선 

구축하고 증원 까지 이루어졌으니 프랑스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습니다.

 

 

3월 6일까지 프랑스군 20개 사단이 베르됭에 배치 되었으며 양적이나 질적으로도 광범위한 수비

가 준비되었으니 프랑스의 페탱 장군은 후퇴는 없다는 명령 을 내리고 독일 포병에게 프랑스

보병이 노출되는 한이 있어도 반격할 수 있도록 지시했는데..... 3월 29일이 되자 뫼즈 강

서안 프랑스 포병이 동안의 독일군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고 독일 보병은 많은 사상자 가 발생합니다.

 

 

강 너머를 통해 독일군 보병의 측면을 포격하는 프랑스 포병을 잡기 위해 독일군은 뫼즈 서안에

대한 공세 를 계획했으니 독일군은 상당한 전진을 이루어냈지만 프랑스군의 증원으로 인해

본래의 목표는 이루어내지 못했고 5월 초가 되자 독일군은 전술을 바꾸어 국지적인

공격 및 반격을 시도했으니..... 그 결과 프랑스군은 두오몽 요새에 대한 공격 기회를 얻습니다.

 

 

요새를 일시적으로 점령한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반격해 요새를 재탈환할때 까지 무수한 포로를 잡으니

독일군은 전술을 바꾸어 이번에는 뫼즈강 양안을 번갈아 공격, 6월에 보 요새를 함락 시켰고

독일군은 보 요새 너머로 공세를 지속하여 본래의 지리적 목표 플뢰리와 소빌 요새로 진격했으니

독일군은 프랑스군에게 타격을 입혀 플뢰리를 함락시키고 베르됭 성채 밖 4킬로미터 까지 육박합니다.

 

 

솜 전투 에 포병 지원 및 보병 증원을 돌리느라 베르됭의 독일공세는 주춤했고, 그 틈을 타 프랑스군은

7월 1일 공세를 개시했으니 6월 23일에서 8월 17일 사이 플뢰리 점령군은 열여섯번이나 바뀌는데

7월초 독일군은 소빌 요새를 함락시키려 했으나 프랑스군의 포격 및 소화기 세례 의 반격을 받았습니다.

 

 

솜 방면을 증원 하기 위해 베르됭의 독일군 공세는 지연 되었고 이에 따라 프랑스군이

솜 방면에  증원을 하지 못하도록 베르됭에서 실제보다 많은 공격이 이루어지는

것 처럼 기만전술 을 펼쳤으니.... 프랑스군은 8월에서 12월 사이에 역공을 펼쳐

그동안 잃었던 뫼즈강 동안 대부분을 탈환하고 두오몽 요새와 보 요새 를 되찾았습니다.

 

 

베르됭에서 총 714,000명의 전몰자 가 발생했고, 이 중 프랑스군이 377,000명, 독일군이 337,000명

이었으며 한달에 평균 7만명이 전사 했으니 1914년에서 1918년 사이에 베르됭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는 1,250,000명 에 이르고 이 중 사망자는 976,000명 이라고 추산하는데 베르됭

전투는 총 303일간 계속되었으며 인류사상 가장 길고 가장 끔찍한 소모전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20년후 벌어진 2차대전 에서 벨기에는 프랑스군이 벨기에 영토에 방어선을 만들때 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벨기에 - 독일 국경에서 독일군을 1차적으로 막아낼 목적으로 에반-에마엘 요새 를 만들었고

프랑스도 벨기에를 신뢰하지 않아서 마지노 선 서쪽 끝에서 도버 해협까지 벙커와 지뢰 및 철조망

과 참호를 혼합한 야전용 임시 방어선을 프랑스 국경 근처에 일렬로 깔아놓았지만 허무하게 무느집니다.

 

 

2차대전 2번째 전투는 아라스 전투 이니 독일군이 프랑스 침공시 벨기에 남부를 지나 프랑스 북부의 아라스

(Arras) 일대에서 벌어진 전차전 으로 프랑스 전역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연합군과 독일군이 벌인

전차전이지만, 정작 공격당한 부대는 독일 기갑부대에서도 전차가 별로 없는 후방지원 부대 였다고 합니다.

 

 

나뮈르 남쪽에 벨기에 숲을 통과해 온 독일군의 기습 으로  벨기에-프랑스 방면의 영프 연합군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대부분의 부대가 패닉 상태에 빠져 전선이 걷잡을수 없이 붕괴 되고 있었지만 영국

원정군 직할 1전차여단은 임무 특성상 거의 전투를 치르지 않아 온전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군은 잔존한 프랑스군의 샤르 B1 bis 를 주축으로 하는 전차부대와 협동으로 아라스에서 독일군에게

역공을 계획했지만 프랑스군 전차들이 약속한 작전시간까지 제대로 전개되지 않자 영국군은 예하

2개전차연대 단독으로 공격을 개시해 시골 마을인 아라스에서 독일군의 보급부대를 급습해 유린 합니다.

 

 

독일군의 대전차포 로는 프랑스군의 주력인 샤르 B1 bis 전차 와 맞먹는 괴물같은 중장갑을 자랑하는

마틸다 1,2 보병 전차 에 흠집도 낼 수 없었으니 결국 88mm 대공포 를 부랴부랴 끌어와서 전차

들을 겨우 겨우 파괴 할 수 있었는데 훗날 독일군은 독소전에서 이와 비슷한 KV 쇼크를 겪게 됩니다.

 

 

독일군 제1전차여단은 88mm 대공포와 포병 이 집중된 방어선에 돌격하다가 전차의 1/3을 잃고 패퇴

했으며, 이어서 뒤늦게 날아온 총 300회에 달하는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의 맹폭 을 1시간 동안

당한 끝에 최종적으로는 전 차량의 2/3 를 상실하는 심각한 피해 를 입어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과감한 반격 은 쾌속으로 진격하던 에르빈 롬멜의 제7기갑사단 에게 충격을 주었으니

보급선이 끊기고 적진에 고립된 전차 부대 가 어떻게 되는지는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인데 롬멜은 충격에서 금세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때의 위기감이 상급부대로 전파

되면서 결국 영국군 및 프랑스군의 전면 반격 가능성 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돌아보게 됩니다.

 

 

지나친 성공에 뒤늦게 긴장하고 있던 아돌프 히틀러 에게도 역습에 대한 공포 를 불러일으켰으며,

훗날 됭케르크 철수작전 에서 연합군을 섬멸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는데.....

당시 독일 국방군 육군의 전력이 연합군 보다 열세이기는 했으니 냉철한 판단이 필요한 때 였습니다?

 

 

나뮈르 서남부 에 위치한 프랑스의 아라스 지역은 1차대전 당시에 아라스 전투라고도 불리는 제 2차 솜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기도 한데, 한 전장에서 1차대전 참전용사들의 자식뻘인 사람들이 다시 목숨 

잃게된 셈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제2차 솜 전투에 앞서 아라스에서는 2번이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패배라는걸 모르고 전진하던 독일 육군은 아라스 전차전에서 역습을 당했지만, 격퇴하고 진격을 재개하니

독일군 선두부대는 사기가 드높았으며 하인츠 구데리안은 5월 22일 1기갑 사단에게 칼레 로, 2기갑

사단에게 불로뉴쉬르메르 로, 그리고 10기갑 사단에게 운명의 땅 됭케르크 로 각각 진격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들 3개 항구도시 는 포위망 안에 있던 연합군이 사용할수 있는 마지막 항구 였으며 독일 육군이

이들 항구도시를 진입, 점령하면 철수는 불가능 했는데 천만다행히도, 3개 도시에 대한 방어

준비는 그 직전에 간신히 끝났으니 여기에는 독일군이 연합군의 역습 정보를 듣고 5월 21일,

24시간 공격중지 명령 행운이 겹쳤기에 가능했으니  이후  덩케르크  철수작전 으로 이어집니다.

 

 

서유럽을 점령한 히틀러는 독소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으로 진격해 레닌그라드전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발목을 잡혀 전력을 소진한 탓에 결국 망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공산주의 에 대해

극도로 혐오해서 미워하는 마음 이 있었기 때문에 침공했고 스탈린그라드를 우회하거나 철수하지

못하고 집요하게 공격해 시가전의 덫 에 갇히게 되니.... 당시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한 탓 으로 봅니다.

 

 

영화 ‘대부’ 시리즈 3편에 마이클 콜레오네가 조카 빈센트를 데리고 다니며 후계자 교육을 시킬 때

젊고 과격한 빈센트는 경쟁 조직의 두목에 대해 잔뜩 화가 나서 라이벌에게 잔인하게 복수

방법을 떠들어대자 마이클은 “안 돼!” 하고 호통을 치며 이유를 설명해 주는데...  “절대로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력이 흐려져  (Never hate your enemies. It affects  your judgement).”

 

 

영화 대부는 영화 중에 영화니 저 대사 말고도 심장에 바로 박히는 말들이 많으니.....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하지.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둬라. 우정과 돈은 물과 기름 이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  해코지를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것 까지야 없겠지만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 게

현명 하니 나 자신을 위해서인데 누군가를 미워하면 내가 해야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헷갈리게 됩니다.

 

 

우리 숙소는 아파트라지만 우리 개념으로는 연립주택 인데 4월 27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어제 저녁 처럼 이탈리아산 리조또 쌀로 아침을 하고 베이컨을 구워 아침을

든후 어차피 주인은 오지 않을 테니..... 열쇠를 방문에 걸어 놓고는 배낭을 멘채 나옵니다.

 

 

그러고는 골목길을 지나 큰 도로를 걸어나와서는 성당을 지나서 오르막길을 걸어서

나뮈르역 에 가니 티켓 오피스 를 찾는게 고난도의 미로찾기 게임 을 연상

시키는데.... 역사가 재건축에 가까운 대수리중 이라 복잡하기 그지 없으니 난감합니다.

 

 

사람들에게 물어서 어찌어찌 티켓 오피스 를 찾아 1인당 4.7유로 싼 요금에 기차표를 끊은후 또

플랫폼을 찾아 헤메다가 아래로 내려와 플랫폼에 이르러 조금 기다려는 기차에 올라 탑니다.

 

 

우리 부부가 탄 기차는 붉은 지붕이 예쁜 오래된 나뮈르 시내 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린지

50분 만에 왈롱 에서 가장 큰 도시인 리에주 길맹 Liège-Guillemins 역에 도착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도시를 보고는 멀리 북쪽 플랑드르 의 오래된 유명 도시 안트베르펜 으로 가야

하니 그러자면 먼저 배낭을 맡겨야 하는데, 역사 내를 샅샅이 둘러 보아도 끝내 코인로카

를 발견하지  못한지라 할수 없이 배낭을 메고 나와 구시가지 로 가기 위해 광장을 둘러봅니다.

 

 

주변을 둘러 보아도 버스 가 보이지 않는지라 광장에서 택시를 타고 프랭스 에베크 궁전 이

자리한 생 랑베르 광장 Pl. St Lamberi 으로 갑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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