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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트 1 - 오스탕드에서 브뤼헤를 지나 겐트에 도착하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2.10.24|조회수81 목록 댓글 4

겐트 여행 1 - 오스탕드에서 기차로 브뤼헤를 지나 고도 겐트에 도착하다!

 

 

2022년 4월 29일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 브뤼게(브뤼헤) Brugge 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달려서

20분만에 북해에 자리한 항구도시 오스탕드 Ostende (네델란드어로는 오스텐데) 에 도착합니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오스탕데역사 를 나와 부두를 걸어서 항구에 가득한 보트와 요트 를

보고 북해 바다를 구경한 다음 돌아오다가 성 페트루스 & 파울루스 성당 을 봅니다.

 

 

그러고는 오스탕드역 으로 돌아와서는 기차를 타고 동쪽으로 달려서 어제 보았던

브뤼헤 를 지나 플랑드르 지방의 아름다운 옛 도시인 겐트 에 도착합니다.

 

 

구시가지를 보자면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담포르트역 에 내려야 하지만 우리 부부는 성채공원과

겐트대학 식물원에 겐트 미술관 을 보기 위해 한 정거장 전인 생 피테르스역 에 내린 것입니다.

 

 

역사는 고풍스럽지만 유럽의 역에는 코인라커 가 없는지라 배낭을 메고 역을 나와 공원 을

찾는데 얼핏 보이지 않기로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친절하게도 방향을 일러줍니다.

 

 

그러고는 5분여를 걸어서 성채공원 으로 들어서는데...... Citade park

라는 말에서도 알수 있듯이 여긴 옛날에 성 이 있었나 봅니다?

 

 

이 도시 겐트(헨트) 는 오스트플란데런 주의 주도 로 브뤼셀에서 서북쪽 50km 이며 인구는 30만명,

주변 도시권을 모두 포함하면 60만명으로 벨기에 플란데런(플랑드르) 도시 지대 에 있습니다.

 

 

도시지대 란 많은 인구가 몰려있는 안트베르펜, 겐트, 브뤼셀, 브뤼헤 와 그 안의 도시들을 일컫는

인데 플람스어로 겐트는 합류점 이라는 뜻으로 브뤼헤와 함께 플란데런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로 1180년까지 플란데런 백국 의 수도가 브뤼헤였고  이후 부터는 수도가 겐트 였다고 합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이 잠시 끝난 1609년에 인구는 30,000명 이었고

스페인에서 왕위계승 전쟁 시대인 1700년에는 인구가 50,000명 이었습니다.

 

바다에서 20km 떨어진 내륙 도시 이지만 운하 를 통해 네덜란드 국경을 지나 바다로

연결된 구 도시 이기도 하며..... 서북쪽의 브뤼헤와도 운하로 연결 되어 있으나

현재는 항구 업무가 거의 대부분  제브뤼헤(Zeebrugge) 로 옮겨진 상태라고 합니다.

 

 

9세기 후반 바이킹 의 침공을 받아 파괴되었으며 플란데런 백국 에 의해서 재건되었고 도시인근 양 목장의

양모를 바탕으로 모직물 산업 을 발전시켰는데 14세기에 들어서는 직물 산업의 확장으로 양모가 부족해

지자 잉글랜드에서 수입 해야 해서 친교를 맺었으며 겐트는 중세 영어로는 Gaunt(곤트) 로 불렸다고 합니다.

 

 

백년전쟁 을 겪으며 플란데런(프로방스) 은 프랑스 왕실 발루아 가문의 방계가 다스리는 프랑스

동부에 자리한 부르고뉴국에 편입 되었는데..... 프랑스인들은 플란데런(프로방스 :

벨기에) 에 높은 세금을 매기자  플란데런의 대표 도시였던  겐트는 반란 을 일으키게 됩니다.

 

 

프랑스 샤를 6세 는 1차 백년전쟁(1337년 ~1360년) 이후 소강기인 1380년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니 숙부 베리 공작 장과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섭정으로 국정을 관할했는데 전임

샤를 5세와 가까웠던 앙주 공작 루이 가 공동 섭정에 올라 국고를 전횡하는데다가 죽은

샤를 5세가 모든 세금을 철폐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소문리 퍼지면서 봉기 가 발생한 것이지요.

 

 

1382년 파리등 북부 도시들은 소강기라 전쟁이 없기 때문에 세금을 납부할 이유 가 없다며 과세

철폐를 요구하는 봉기 가 확산되니, 두 섭정들은 도시대표들과의 협상과 주동자 처벌을 동시

에 진행하면서 가까스로 봉기들을 잠재울수 있었는데... 같은 해에 섭정들은 또한 필리프

반 아르테벨데 가 겐트(Gent) 시를 중심으로 이끄는 플랑드르 반란군 을 진압 해야만 했습니다.

 

 

프랑스 왕에 충성 하는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는 반란군에 의해 쫓겨난 상황이었고 반란군이 친

잉글랜드적인 성향 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위험의 싹을 제거해야만

했으니.... 1382년 11월 27일 플랑드르 백작군과 연합한 프랑스군 은 겐트(헨트) 반란군 

대승을 거두는데 이로써 샤를 6세 정부는 초기에 일어난 반란들을 모두 평정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플랑드르는 모직물 의 주요 제조지역이니 그 원료인 양모 수입과 수출 로 얽힌

우방인 잉글랜드는 플랑드르 편에 서서 참전하지만 카스티용 전투 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고, 플랑드르의 겐트도 가베르 전투 에서 선량공 필립에게 패배하였습니다.

 

 

이후 저지대의 상업 중심지는 플란데런 백국(겐트, 브뤼헤)에서 브뤼셀 백국이 림부르크

공국과 룩셈부르크 공국을 합쳤던 브라반트 공국(안트베르펜, 브뤼셀) 으로

옮겨가기 시작했으며 부르고뉴국에 속한 플랑드르는 프랑스 속국 이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러자 부르고뉴 상속녀인 마리 드 부르고뉴 는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프랑스 대신에 플란데런을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마리가 바로 사망하자 합스부르크의 혼인

관계가 사라졌고, 겐트와 브뤼헤는 2차례에 걸쳐 프랑스 도움을 받아 반란 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습니다.

 

 

겐트에서 태어난 합스부르크 제국의 카를 5세 가 이탈리아 전쟁을 치르면서 도시에 과중한

세금을 요구하자 다시 반합스부르크 봉기 가 일어났는데, 이번에도 가혹하게 진압

되었고 이후 겐트지역 유지들은 목에 올가미  를 메고 카를 5세 앞을 지나가야 했다고 합니다.

 

 

스페인 으로 부터의 네덜란드 독립전쟁 이후 바다로 가는 운하에 통행세 가 부과

되었으며 상업이 타격을 받았고 전쟁터 가 되어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카를 5세 가 가톨릭에 반대하는 개신교들과 30년 종교전쟁 내란 에 시달리다 보니 지긋지긋해 져서 은퇴

하면서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동생 에게 주고 스페인과 부르고뉴에 저지대 및 이탈리아

나폴리등과 신대륙은 아들 펠리페 5세 에게 주었으니 저지대인 네데란드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겐트 평화 조약으로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충성하는 대가로 종교의 자유 가 주어졌는데 스페인의

변심으로 전쟁이 재개 되었으며,  대공세를 펼친 오렌지 공 빌럼의 군대는 겐트에 입성 하였지만

스페인 도 바로 반격에 나섰고 파르마공이 이끄는 플란데런 민병대는 이프르, 겐트를 점령 했습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 북부는 독립 을 했으나 남부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가톨릭 지역 으로 남았으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스페인 왕실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부르봉 왕조로 교체되자,  플란데런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은 30년 종교전쟁 의 결과이니 1617년 합스부르크왕가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국왕으로 즉위한후 가톨릭 신앙을 강요 하자 개신교 신자가 대부분이었던 보헤미아

귀족들이 반발해 일어난 전쟁으로 한쪽이 상대방을 마귀라고 부르면 상대는 사탄 이라고 맞받아 칩니다.

 

 

유럽에서 수백년간 이어진 마녀사냥과 재판 및 화형 의 절반 이상이 독일에서 30년 동안 일어

났으니... 사람들이 아노미상태 에 빠져있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개신교는 세력이 약하니

곧 진압 되는가 싶었으나 덴마크와 스웨덴군 이 들어와 개신교 편에 서니 전쟁이 오래갑니다. 

 

 

그래도 카를 5세 황제의 가톨릭 군대는 세력이 강하다 보니 기어이 진압되는 상황에서 영국은 개신교

군대에 자금 을 지원하고 프랑스군은 독일로 들어와 개신교 측에 서는데,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자국에서는 개신교도(위그노) 를 잡아 죽이니 내란이 일어났는데.... 독일로 가서는 가톨릭을 죽인다는?

 

 

프랑스는 국내에서 개신교도와 오랜 내전 끝에 승리해서 개신교도들을 핍박 하니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네델란드와 독일로 달아 나는데..... 프랑스는 100년전에 신성로마제국과 맞서니 빈을 2번이나

포위했던 기독교세계 적이자 철천지 원수인 이교도 오스만 투르크와 동맹 을 맺으니 유럽은 경악합니다.

 

 

 1543년에 해적 두목(터키해군 총사령관) 바르바로사 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의 초청 을 받아 1만4천명

이  150척의 함대 를 이끌고는 프랑스 대사를 태운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을 출발 합니다.

 

 

그런데 출신이 해적 인지라 곱게 프랑스 까지 가지 못하고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와 레조등

해안을 약탈한후 해적질 을 계속하면서 북상해 테베강 하구 오스티아항 에 이르니

동행한 프랑스 대사가 교황이 거주하는 로마를 약탈하는 것을 프랑스 왕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말려 약탈본능을 간신히 참고는 사르데냐로 해서 마르세유 에 입항합니다.

 

 

프랑스 프랑수아왕의 대신 들이 항구에 마중을 나왔는데 터키함대의 선창에는 기독교도

노예 노잡이 와 오는 도중에 해적질로 사로잡힌 기독교인 들이 갇혀있었으니.... 

  프랑스는 왜 교황청을 비롯한 유럽인들의 거센 비난과 경멸을 무시 하면서

기독교 세계의 철천지 원수인  이교도 이슬람 오스만 터키와 동맹국 이  되었을까요?

 

당시 오스트리아 카를 5세 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이자 결혼을 통해 네델란드와 스페인에

이탈리아 북부 및 남부와 신대륙을 지배하는등 유럽의 절반 을 장악했는데... 프랑스는

이탈리아 북부 를 차지하기 위해 1525년 프랑수아 2세 가 3만 대군 을 이끌고 밀라노를

점령했으나 파비아 전투에서 패해 스페인군에 포로가 되어 마드리드 감옥 에 갇히게 됩니다.

 

 

아들 둘을 자기 대신 인질로 마드리드 감옥에 보내고 풀려난 프랑수아 왕 은 이후

1536년 밀라노 영주 스포르차 공작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군대를 제노바로 진격 시키니 카를 5세도 독일군을 토리노 까지 남하시키게 됩니다.

 

 

신성로마제국군에 에스파냐군 까지 가세하면 승산이 희박하다고 본 프랑수아왕은 기독교

세계의 적인 이슬람 오스만 터키와 동맹 을 맺었던 것이니..... "적의 적은 우군" 

이라!!!  이후 벌어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중에 겐트는 프랑스군에 점령 

되기도 했지만 1756년에 동맹의 역전이 이루어지면서 이후 프랑스의 위협은 사라집니다.

 

 

이 전쟁은 여자의 왕위 계승을 금지 하는 게르만 프랑크족의 " 살리카 법" 에 따라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가 합스부르크 왕가를 계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프로이센 등이 개입했는데 결국 슐레지엔 을 차지합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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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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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2.10.24
    반드시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간다.
    지금 그대가 고민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하지만 매 순간 자신을 잃지않고 버티는 자는
    반드시 한송이 꽃을 피울 것이다.
    -머물지마라. 그 아픈 상처에-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0.24 오래된 유서깊은 도시
    겐트에 도착했습니다.
  • 작성자클놈인줄 | 작성시간 22.10.24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0.24 도심에 넓게 펼쳐진
    이런 공원은 참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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