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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트 4 - 성에서 1,2,3차 십자군에 나간 백작을 생각하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2.11.18|조회수95 목록 댓글 4

 

 

겐트 여행 4 - 플랑드르백작성을 보며 1,2,3차 십자군에 참가한 백작을 생각하다!

 

 

2022년 4월 29일 벨기에 플랑드르의 브뤼헤 Brugge 에서 기차를 타고 오스탕드 Ostende 를

보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동쪽에 겐트 에 도착해 성채공원 Citade park 과 겐트대학

식물원을 보고 버스로 중앙광장 코렌 마르크트 에 도착해 시청사며 성당에 광장을 구경합니다.

 

 

모퉁이를 돌아서 운하 옆에 자리하고 있는 플랑드르백작 성 Het Gravensteen 을 찾아가니

리베강에 떠있듯 서 있는 견고한 성 으로 플랑드르 백작인 알자스가의 필리프 가 군사적

거점으로 1180년에 세웠는데 성채에서 바라보는 겐트의 조망 이 참으로 훌륭하다고 합니다.

 

 

벨기에 절반으로 북부 지방인 플랑드르 Flandre 는 프랑스어 이니 네덜란드어로는 플란데런

Vlaanderen 이고 독일어로는 플란데른 Flandern 이며.... 또 영어로는

플랜더스 Flanders 라고 하는데 옛날부터 플랑드르 백작령 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플랑드르는 벨기에 북부에 위치하며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3개 지역중 하나로 지역과는 다른 네덜란드어

언어 공동체 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과거 벨기에 지역에 있었던 브라반트 공국(브뤼셀 백국), 림뷔르흐

공국, 룩셈부르크 공국, 플란데런 백국 등 여러 국가 중 많은 수가 있던 네덜란드어권 에 속한 지역입니다.

 

 

오늘날 벨기에의 행정수도는 브뤼셀 인데 이는 역사적으로 플란데런인(플랑드르인)들의 최대

도시였던 곳이라 행정수도로 지정되어 있으며 불어권인 왈롱의 행정 수도가 동남부

도시 나뮈르 인 것과 대조되며..... 브뤼셀, 안트베르펜, 겐트, 브뤼헤 및 오스탕드 가 속합니다.

 

 

플란데런 지역의 공동체 축제일은 7월 11일이니 1302년 플란데런 백국이 황금 박차 전투

(코르트레이크 전투) 에서 프랑스왕국을 상대로 승리 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하며

플랑드르  이름은  '홍수가 잦은 땅'  이란 고대 프리지아어  'flamdra' 에서 유래했습니다.

 

 

땅이 질퍽거려서 2차대전 때 전차가 지나가기가  힘들었다는데 플란데런의 현지 발음은 v 를 f 로

발음하지 않기 때문에 '블란더른' 에 더 가까운데플란데런 은 벨기에에 위치해 있다보니

암스테르담식 발음을 적용한 외래어 표기법 보다는.... 네덜란드어 IPA 표기에 더 가깝게 발음합니다.

 

 

원래 플란데런 이라는 이름은 플란데런 백국에 있던 지역 혹은 베스트플란데런과

오스트플란데런 지역을 의미했으나, 벨기에 건국과 플란데런 운동을

거쳐 벨기에 북부의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과 공동체 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플랑드르의 비공식 깃발은 스포츠 경기에서 플란데런 출신의 선수를 응원할 때 말고는 주로

독립파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플란데런 독립운동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깃발

속 사자의 형상 은 개인마다 혹은 독립파 정당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붉은색이 없고

노란색 배경에 검은 사자만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지역공식기와 구분하기 쉽습니다.

 

 

역사학자 브뤼노 더 베버르는, 공식 깃발의 플람스 사자 는 베스트플란데런과 오스트플란데런 주의

문장에서 왔고 19세기 플람스 운동의 상징 으로 쓰였으며.... 1차 세계대전부터 떠오른 반벨기에

플람스 운동으로  붉은색과 흰색이 배제된 검은사자만 있는 플란데런 전투깃발이 등장했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네덜란드 서남부와 벨기에 플란데런 지역의 네덜란드어 방언 혹은 플란데런 지역의 표준

네덜란드어 이니 플란데런에서 쓰이는 모든 방언을 지칭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 의미로

쓰인 경우 동서 플람스어, 브라반트어 및 브뤼셀 방언, 림뷔르흐어 까지 모두 포함하는데

표준 벨기에 네덜란드어의 발음은 네덜란드에서 표준으로 여기는 발음과 상당한 차이 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플란데런의 공용어는 플라망어라고 한다거나 플란데런어 라고 하는데 공식적으로는

네덜란드어 를 쓴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이 지역의 표준 네덜란드어조차도 네덜란드의 표준과

차이 가 있으니 플랑드르 백국의 영역이었던 네덜란드 남부 사투리(제일란트-플람스어,

브라반트어)와 프랑스령인 됭케르크에서 사용되던 네덜란드어는 플람스어 쪽에 가깝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tussentaal 이라고 하여 구어로써는 방언을 자유롭게 쓰지만, 서술 시에는 표준어

를 사용하도록 교육 받는다는데, 일부 지방의 경우 아예 정규수업 시간에 방언이 있는

경우도 있으며..... 플란데런의 지역에서 프랑스어가 통하지만 오스트플란데런에서

겐트 혹은 일부 플람스 브라반트를 제외하면 정치적 성향 때문에 프랑스어를 반기지 않습니다.

 

 

룩셈부르크 공국이 브라반트 공국과 동군 연합을 형성하자 플란데런 백국 은 브라반트 공국

을 지배하려고 했고 결국 브라반트 공국과 플란데런 백국은 전쟁 을 일으켰는데 전쟁이

길어지자 브라반트 공국은 부르고뉴 공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오히려 부르고뉴 공국

의 공격을 받아 병합 되었으며..... 그후 부르고뉴 공국은 플란데런 백국 까지 차지해 버립니다.

 

 

플랑드르백국 역사를 보면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할때 벨기카족 땅 이었는데 8세기부터 게르만

프랑크족이 갈리아를 점령 하니 프랑크왕국 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862년 백작령 이 되었으며

이후 경건왕 루이 1세 사후 사분오열되던 프랑크 왕국에서 이탈하여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합니다.

 

플랑드르백국은 봉건제도로 통치 되며 백작에게 통치되면서도 작센, 프리지아, 프랑크, 갈리아 계통이

어지럽게 섞여 통일적인 특징을 잡아내기 힘들었는데, 다만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일찍이

법치에 대한 개념 을 확립하고 봉건제도에 여러가지로 합치되지 않는 개념인 코뮌 을 형성하였습니다.

 

 

플랑드르 백작은 1,2,3차 십자군 에 모두 참가했으니.... 7세기에 이슬람인들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긴 비잔틴

제국 은 1071년 만지케르트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 에게 패하자 알렉시우스 황제는 서유럽의 병사를

빌려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려고 동서 교회 분열로 인해 견원지간 이던 로마 교황청에 도움 을 요청합니다.

 

 

당시 교회는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 로 동서분열 된데다가 고위 성직자 임명권 을 두고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와 투쟁중이던 교황 은 교회 세력을 키우고자 응하는데...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누스 2세 는 클레르몽 공의회 를 소집해 청중에게 예루살렘

회복을 위한 제1차 십자군 을 호소하니.... 전 유럽에서 영주와 기사들이 이에 호응 합니다.

 

 

아마데우스 주교 외 프랑스 남부 툴루즈 백작 레몽 4세 와 프랑스 국왕 필립 1세의 동생으로 카페왕조

 백작 위그 드 베르망두아, 교황에 맞서 하인리히 황제에 충성한 하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부용,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의 장남 으로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풀리아 공작 보에몽, 볼로뉴의 백수

보두앵, 정복왕 윌리엄 1세 사위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와 노르만족 탕크레드에 형 외스타슈 3세입니다.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 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서 예루살렘을 순행한 적이 있었는데

1093년 백작의 지위에 오르자 30대로 십자군에 참가했으니, 1차 십자군은 기병 8천명

에 보병 4만 2천 으로 1097년 6월 격전 끝에 니케아성 을 항복받은후 아나톨리아를

종단하다가 도릴라이온에 집결한 3만 투르크 연합군 을 1097년 7월 1일에 격파 합니다.

 

1차 십자군은 산맥을 넘어 안티오키아 에 도착하는데 이 도시는 한글 성경에 안디옥 이라

알려졌으니 베드로와 바울의 전도 근거지 로 원래 동로마 비잔틴의 땅이니 기독교도

들의 성 이었으나 불과 12년 전에 이슬람을 믿는 셀주크 투르크 에 점령당해 야기

시안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1097년 10월 20일에 3만 십자군이 안티오크를 포위 합니다.

 

이때 포위된 안타키아(안티오키아)는 이슬람 셀주크투르크군과 십자군 간에 6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098년 6월 2일 마침내 도시는 배신자로 인해 십자군에 의해

점령을 당했으며.... 십자군이 쇠퇴한 이후에는 아랍측에 재점령 되었다가 16세기

전반에는 오스만투르크 가 장악했으며 1920∼1939년 까지는 시리아가 지배를 합니다.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의 원군 은 포위 2달후 12월 말에 도착했는데, 십자군은 식량이 모자라니 1097년

12월말 보에몽과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는 2만 병력으로 주변 약탈 에 나섰다가 다마스쿠스 군대와

마주치자 소심한 두카크는 후퇴하지만 십자군은 식량을 얻지 못했으며 지진과 비 가 수주간 이어집니다.

 

십자군은 기아로 1098년 초에 7명 중 1명이 사망 했으며 말도 700마리를 제외하고 다 죽었고 살기

해 죽은 말은 물론 무슬림의 시체 까지 먹었다니.... 일부 식인종으로 변모한 십자군 은 추운

비를 맞으며 진창으로 변한 진지 안에서 굶고있는 중에 신의 징벌로 생각되는 지진 까지 발생 합니다.

 

 

십자군은 참회의 기도 를 하고 진지안에서 매춘부를 내치며 금식기도 를 했으니 살기위해 도망치는 자도

나오는 중에 알레포의 리드완이 구원병 을 보내왔으나 2월 9일 하림에서 십자군에게 격파되었지만

티오크는 여전히 난공불락이라 보에몽은 안티오크성의 두자매의 탑을 지키던 아르메니아인인

피루즈와 접촉해 1098년 6월 3일 새벽 피루즈가 내려준 사다리 덕으로 도시에 침투해 성을 함락 합니다.

 

 

성을 점령했으나 식량이 없는 기운데 이슬람 모술태수 카르부카가 무슬림 대군 을 이끌고 나타나 도시를

포위했으니 공수가 뒤바뀝니다? 간발의 차이로 성벽 위에는 십자군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으니

이슬람군이 포위망을 조이자 십자군 수도승 피에르 가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성창을 발굴(?) 

기세가 오른 십자군은 굶주림에 지쳤지만 중무장에  훈련된 군대 였으며 지휘관은 역전의 용사들 입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투르크 기마 궁병은 화살로 십자군을 공격했으나.... 갑옷을 입은

십자군 기사들은 적의 화살 에도 강했으니 오랜 금식에다가 종교적 열정이

더해져 성 조지, 성 드메트리우스, 성 마리우스가 인도(?) 하는걸 보았다나 어쨌다나?

 

이에 이슬람 투르크군은 크게 흔들렸으니 다마스쿠스의 두카크가 퇴각하자 대세를

눈치챈 많은 에미르들이 후퇴하니 전투는 십자군의 대승리 였고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성을 함락해 예루살렘왕국등 5개 기독교 왕국 을 세웁니다.

 

 

이후 1144년에 모술의 이슬람 태수 장기가  5개 기독교 왕국중에 북쪽의 에데사백국 을 점령하자 유럽

에서는 교황 에우제니우스가 제창해 제2차 십자군 이 일어나니 이번에는 프랑스왕 루이7세 와 신성

로마제국 황제 가  군대를 이끄는데 이번에도 가장 용맹한 군대는 플랑드르 백작의 군사들 이었습니다.

 

 

147년 5월 19일 플랑드르, 노르만, 잉글랜드 에서 결성된 십자군이 이베리아 반도를 따라 남하하자

이슬람의 도시 리스본 을 공격하던 포르투갈 국왕 알폰소 1세의 구원 요청을 받았으니 왕은

"리스본을 점령하고 약탈할 권리를 주겠다" 고 제안했고 십자군이 찬성해 1147년 10월 24일

3개월 공방전 끝에 리스본을 점령해 막대한 재물을 얻은 십자군 은 1148년 봄에 항해를 재개합니다.

 

 

하지만 동쪽으로 진군한 프랑스 군대는 아나톨리아(터키) 의 라오디케아 에서 투르크

군대에게 패해 전멸 을 당했고 극소수만이 안티오키아에서 루이 7세

와 합류하는데.... 국왕이라 돈이 있으니 용병들을 고용해 레반트 에 도착하게 됩니다.

 

 

아코(아크레) 에 십자군은 독일황제 콘라트 기병 2천명, 프랑스왕 기병 7백명, 플랑드르 백작 기병 6백명

예루살렘왕 보두앵 3세와 제후들의 기병 5백명에 보병 6천명, 템플기사단 기병 130명, 성요한

기사단 기병 70명 합쳐 기병 4천명에 보병 6천명 인데 기병에는 따로 보병 3명과 하인 2명 이 따릅니다.

 

 

1차 십자군은 먼저 예루살렘을 공격해 성을 함락한 다음에야 지도자들이 성지순례에 나섰는데

2차 십자군은 거꾸로 프랑스왕 루이 7세는 성지순례 부터 먼저했으니.... 따라서

싸우기 좋은 계절인 4~5월을 다 놓치고 열사의 나라 사막에서 가장 뜨거운 7월 24일

다마스쿠스 남쪽 4km  메제야발 에 도착해 진영을 세우니 다마스쿠스군의 야습이 격렬합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은 십자군 과 싸우기 보다는 자기들 끼리 싸우는데 더 열심 이었으니 다마스쿠스는

북쪽 모술에서 출진해 알레포를 손에 넣은 누레딘의 이슬람군 이 두려운지라 기독교측 예루살렘

왕국과 연합 했었는데 루이 7세는 알레포를 공격하자는 왕비 엘레에노르의 요청을 거부 하고

유럽에 그 명성이 잘 알려진 다마스쿠스를 함락 하는 것이 위신을 더 높일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마스커스성은 북쪽에서는 누레딘의 이슬람군 이 남진해 오고 남쪽에서는 동맹이라고

믿고  협력해온 기독교 군대가 공격해 오자 다마스쿠스는 멘붕 에 빠졌지만 어쨌든

다마스커스성은 높고 튼튼한 지라... 사력을 다해 방어에 나서 기습을 나오기도 하는

중에 7월 28일밤 누레딘이 알레포군을 이끌고다마스쿠스성에 닷새 거리까지 접근합니다.

 

 

이슬람군이 홈스까지 접근해 왔다는 급보를 받고 십자군은 철수 하는데 적과 싸우기 시작한지

나흘 만이라? 1차 십자군의 안티오키아성 공격과 함락은 무려 8개월간에 걸친 악천고투

전투와 인내 의 결과였고 예루살렘성 공략도 멀리 떨어진 강에서 식수 를 길어오고 먼 산

에서 나무  찍어와서 공성탑 을 만들었는데.... 2차 십자군은 사전에 아무 준비가 없었습니다.

 

 

명예롭지 못한 철수 를 거부하고 현지에 남은 제후는 "플랑드르 백작" 이 유일하며, 1148년

9월 8일 콘라트 3세는 살로니카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가서는 황제의 환대를 받았

으며 바로 프랑스로 돌아가기가 민망스러운 프랑스왕 루이 7세도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를 거쳐 돌아오지만 틀어진 가스코뉴 대 영주 왕비 엘레오노르에게 이혼 당합니다.

 

 

3차 십자군은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성을 함락해 왕국을 멸망시키자 유럽

에서 일어난 것으로 프랑스왕 필리프와 영국왕 사자심왕 리차드에 신성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등 왕을 중심으로 플랑드르 백작 과 북구 여러 나라들까지 참전했습니다.

 

 

망한 예루사렘왕 뤼지냥 은 오갈데 없는 몸이라 기사 7백명과 보병 9천명으로 1189년 8월말에 아코

(아크레)성을 공격 하는데 2년을 끌게 되는 이 처참한 공성전에 이후 유럽에서 도착한 십자군

들은 자연히 아코성 공격대열에 합세 하는데 1진은 덴마크와 네델란드, 스코틀랜드와

벨기에 1만으로 도중에 스페인에 상륙해 이슬람 무어인과 싸우다 오느라 5천으로 줄어들었습니다.

 

2진은 아벤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북부 병사들로 아코에서는 말레데타문 앞에 진을 쳤으니  총사령관

역할을 하게 되며 제3진은 보베 주교가 인솔하는 프랑스, 영국, 플랑드르 및 독일 기사들로

템플기사단 진영 옆에 진채를 세웠고 그후에 프랑스왕 필리프 는 1191년 4월 20일 아코에 도착합니다.

 

 

영국왕 리차드 는 1191년 6월 8일 이슬람 범선을 나포하면서 아코에 들어왔는데 십자군을 지휘하게된

리처드는 이슬람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군으로 뤼지냥의 동생과 요한기사단 및 아벤백작에게 맡기고

아코성 공격군으로는 맹공으로 유명한 템플기사단플랑드르 백작 을 비롯 전군을 투입해 맹공을 합니다.

 

 

그러자 살라딘이 이슬람 군대 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해 아코성을 포위한 기독교 십자군을 다시

포위 했으니 얼핏 보면 십자군은 독안에 든 쥐 처럼 보이지만 기사들은 갑옷으로 중무장

을 한지라..... 이슬람군의 화살과 창이 뚫지 못했고 사자심왕 리차드 가 전투 지휘를

한지라 살라딘도 포위망을 뚫지 못하니 보급이 끊겨 굶주리던 아코성은 결국 항복 하게 됩니다.

 

프랑스왕 필리프 는 아크레 함락후 병을 이유로 돌아가겠다고 폭탄 선언을 하는데.... 그의 최대 관심사는

프랑스내 소규모 왕령을 확대 하는 것이니 플랑드르백작은 전사 했고 상파뉴백작은 리처드에게 심취

했으니 귀국할리 없고 리처드왕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기 전 까지는 귀국할수 없으며, 부르고뉴 공작

에게는 프랑스 병사들의 지휘를 맡김으로써 귀국할수 없게 만드니 혼자 귀국해 프랑스를 요리 하겠다는....

 

 

플랑드르 백국 은 전통적으로 이웃에 있는 강력한 공국인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부르고뉴와

프랑스의 영향력 을 받았으며, 과거에는 농업 을 중심으로 생활했지만 곧 길드 들이 통치

하는 각 자치 도시령들이 느슨한 연맹체를 구성함과 동시에 상업 쪽으로 갈아타게 됩니다.

 

위치상 플랑드르(플란데른) 의 상업 은 위로는 영국, 독일권은 라인란트, 프랑스권 파리

와 부르고뉴, 북유럽등의 많은 나라들을 연계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수익을 거둘수

있었으며 한자동맹과 경쟁하면서 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예술과 학문 이 발달하였습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 프랑스 왕권 이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플란데런(플랑드르) 을

복속 시키려는 시도가 이어졌으니 당시 저항운동의 구심점이던 아르투아 백작과

플란데런 도시들의 자치경찰, 길드 사병들이 주축이 되어 프랑스 침략자들 과 맞서 싸웠습니다.

 

고덴닥이라 불리우는 창과 클럽을 결합한 무기 를 사용하여 프랑스 기사대 를 효과적으로

저지해 내는데 성공했으며, 쿠르트레 전 와 같이 유의미한 성과를 냈는데 프랑스는

귀족기사대와 롬바르드 출신 용병대 들을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저항세력들을 압박해

나아갔고.... 14세기 초에 이르러 결정적인 전투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내기 시작합니다.

 

 

모직업이 번창했던 플란데런 도시 는 강대한 프랑스권 군주 손에서 벗어나 양털 사업이 발달한 잉글랜드

와 동맹하였으니 중세 잉글랜드와 프랑스 구도는 잉글랜드+ 플란데런 도시 vs 프랑스+ 스코틀랜드+

플란데런 백작이었고, 그중 최고 분수령은 에드워드 3세가 양모수출을 규제하며 시작한 백년 전쟁 입니다.

 

로베르 3세는 플랑드르의 사자 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1305년에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1299년 11월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전쟁 중에 플랑드르의 통치를 본질적

으로 그에게 양도했는데.... 아버지와 아들은 모두 1300년 5월에 프랑스군에 포로 로 잡혔습니다.

 

 

 “베툰의 로베르” 는 장인 시칠리아의 카를 1세와 함께  Hohenstaufens ,  Manfred 및 Conradin

과 싸웠을 때 이탈리아에서 군사적 명성을 얻어 붙여졌으니 그는 아버지와 함께 1270년에

세인트 루이스가 이끄는 제8차 십자군 에 참가했고 원정에서 돌아온후 플랑드르를 왕실령

으로 집어삼키려는..... 프랑스왕 필립 4세 의 시도에 맞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담피에르 의 기 는 프랑스 왕 (1297년 1월 20일) 과의 봉건적 유대관계를 끊었고 저항은

희망이 없어 보이는 가운데 로베르는 1300년 5월에 아버지와 동생 크레브쾨르

빌헬름과 함께 포로가 되어 프랑스 왕에게 끌려 갔는데 그 직전에 그는 플랑드르

의 사실상의 통치자가 되었고, 그는 시농성 Chinon 에 갇혔으며 1305년 7월,

아버지가 포로생활 중에 사망한 후에야, 그는 고향인 플랑드르 로 돌아올수 있었습니다.

 

 

로베르는 플랑드르 백작 으로서 프랑스왕과 맺은 Athis-sur-Orge 조약을 준수해야 하는 멍에를 짊어

졌는데, 1310년 4월 무렵에 신하들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에 저항하기 시작했으니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그는 프랑스 왕에 맞서는데 성공했고 1318년 12월, 영국왕 에드워드 2세는 무역

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귀족들을 보내 로버트 백작과 에노 백작 윌리엄 1세 사이를 중재하도록 합니다.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가 1319년 프랑스 서북부 릴로 진군했을 때 겐트에서 민병대들이 레이강

을 건너는 것을 거부하고 그의 손자인 느베르의 루이 1세도 그에게 그만두도록 압력을

가해오자... 로베르 백작은 전투를 포기하고 프랑스 왕과의 봉건적 유대 를 회복하기 위해

1320년에 파리로 갔으며.... 1322년에 사망하자 손자인 느베르 백작 루이 가 뒤를 이었습니다.

 

 

플랑드르 백국은 15세기초 부르고뉴 공국과 정략 결혼 으로 합쳐져 사위인 부르고뉴공작이 플랑드르

를 통치 했으며..... 이후 부르고뉴 공작의 외동딸 마리 드 부르고뉴 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정략결혼 함으로써 부르고뉴와 함께 플랑드르 백국은 합스부르크령 이 되었습니다.

 

 

마리의 아들 부르고뉴공국 통치자인 필리프 대공과 스페인 공주 후아나 사이에 1500년 플란데런(플랑드르)

 겐트(Ghent)에서 카를 이 태어났는데 네살때 외할머니 카스티야여왕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카를의

부모는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를 물려받기 위해 떠났고 후아나의 광기가 심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

은 카를과 누나 레오노르, 여동생 이사벨라 3남매를 플란데런에 남겨 고모 마르가레테가 양육하도록 합니다.

 

 

플란데런(플랑드르)의 겐트에서 태어나 자란 카를 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플랑드르와 부르고뉴

오스트리아와 스페인과 이탈리아 영토 및 아메리카식민지에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까지 물려받는데,

카를 5세 는 1618년부터 무려 30년간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피로 피를 씯는 더러운 종교전쟁에 넌더리

를 내고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동생에게, 플란데런은 스페인과 함께 아들인 펠리페 2세 에게 물려줍니다.

 

 

카를 5세를 이어 통치자가 된 펠리페 2세 는 플란데런(플랑드르)을 스페인의 속주 처럼 여겼고,

가혹한 세금으로 플란데런을 탄압 하며 현지 귀족들을 대놓고 무시하는데 결정적인 것은

신교도들에 대한 차별대우 이니 당시 플란데런도 다른 유럽 지방들 처럼 신교도의

수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나 신교도들에 대한 처우 문제로 펠리페 2세와 큰 마찰 을 빚습니다.

 

 

펠리페 2세는 강경진압 을 주장했으나 플란데런인들은 유화적으로 나서길 원했는데, 펠리페 2세

의 고압적인 태도가 플랑드르 귀족등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때문에 반발 이 일어났고,

종국에는 신교도 가 많았던 북부 항구도시 암스테르담 을 중심으로 플란데런 백국을

포함한 네덜란드어권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해서는 독립 을 선언합니다.

 

 

결국 치열한 항쟁 끝에 30년 가톨릭과 신교도간의 종교 전쟁 을 거쳐 1648년 위트레흐트

동맹은 네덜란드 공화국 으로 새 독립국가로 출범했지만..... 플란데런 지방은

스페인이 무력진압에 성공 하여 네덜란드와는 단절 되고 이 지역은 1830년

독립하는 벨기에 의 전신들 중에 하나가 됩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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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2.11.18
    탐욕스럽지 않은 사람은 세계를 모두 자기의 부로 삼지만,
    탐욕스럽고 인색한 사람은 아주 작은 것도 모두 가지려 한다.
    - 성 예로니모 -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1.19 십자군 전쟁에 1차, 2차, 3차....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가한 플랑드르 백작입니다.
    한번 가자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니
    재산을 처분해 자금을 마련해야 되는데다가
    사막에서 고생하며 목숨을 잃기도....
  • 작성자레고박사 | 작성시간 22.11.23 벨기에에서 브뤼셀 브뤼헤만 갔었지만 겐트 안트베르펜은 못갔었죠 그곳도 보면 중세시대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는걸 느끼죠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1.24 벨기에는 그외 리에주등
    모두 일곱 도시를 보았는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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